[TOP > 보도·연재(報道·連載) > 세이쿄(聖敎)뉴스 > 기사(記事)]
청년부 주최 피폭증언회에서 (요지)
2022년 8월 11일
평화의 노랫소리를 세계로 미래로!
8월 9일 ‘나가사키(長崎) 원폭(原爆)의 날’을 앞두고, 청년부 주최인 피폭증언회(被爆證言會)가 지난 7일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무타 미치코〈牟田満子, 86세, 나가사키시, 지부부(部)여성부장〉 씨의 체험을 소개한다. (요지)
국민학교 초등과(初等科) 4학년으로 9살이었던 저는 폭심지(爆心地)에서 25km 떨어진 집회소(集會所)에 있었습니다.
보충수업을 듣고 뒷정리를 하던 그때입니다. 갑자기 눈앞에 샛노란 빛이 번졌어요. 그것이 보인 순간, 폭풍우가 몰아쳐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옆에 두었던 방공두건을 쓸 수조차 없었습니다. 창(窓)가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집회소에서 방공호로 정신없이 도망쳐 치료를 받았지만 지금도 그때 입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는 단지 신형 폭탄이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원자폭탄(原子爆彈)인 줄은 몰랐습니다.
상처의 통증이나 폭탄의 공포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어머니와 한 살 반밖에 안 된 여동생이었습니다. 척추 카리에스를 앓고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의 약을 받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 두 사람은 폭심지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에 갔던 것입니다.
그날 어머니와 동생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다음날부터 조부모님과 친척들이 함께 모여 어머니와 여동생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연일 계속해도 시신은커녕 유품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직 어려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습니다.
이듬해에는 투병 중이던 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남겨진 세 자매 중 장녀였기 때문에 조부모님의 밭일을 돕는 날들에 쫓겨 학교에는 만족스럽게 다닐 수 없었습니다. 또래 여학생들의 교복차림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 빛나는 모습과 흙투성이인 제 자신을 비교하면 왠지 너무 불쌍하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허망함만이 더해졌습니다. 몇 번이나 울면서 밭일을 했습니다.
매일 밤 어머니의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나오는 어머니에게 “엄마 어딨어요?”라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라며 자신의 인생을 저주했습니다. 제 인생을 비참한 것으로 손상시켜버린 원폭(原爆)을 마음속 깊이 미워했습니다.
나가사키의 원폭자료관(原爆資料館)에는 원폭이 투하된 시각인 ‘(오전) 11시 2분’에 멈춰버린 시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폭이 멈추게 만든 것은 시계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인생의 행보도 잔혹(殘酷)하게 멈춰버린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원폭만 없었다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피폭자(被爆者)에게는 이유 없는 차별과 후유증이 언제 발병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핵무기(核武器)는 비인도적(非人道的)인 무기입니다. 당시의 저는 제 자신이 피폭자라고 말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연(緣)이 닿아서 16살에 결혼. 불법(佛法)과 만난 것은 1957년의 일이었습니다. 친척은 크게 반대했지만, “절대로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한마디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창가학회(創價學會)에 입회(入會)했습니다. 종전(終戰) 후, 12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 부흥(復興)의 길은 멀었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학회원(學會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입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세계평화(世界平和)라는 이상(理想)을 향해 학회활동(學會活動)에 힘쓰는 날들은 정말 즐겁고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해인 1958년에는 나가사키(長崎)를 처음으로 방문하신 이케다(池田) 선생님이 참석한 나가사키지부 결성대회에도 참석했습니다.
“이 신심(信心)으로 행복해지기 바랍니다.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는 불법(佛法)입니다!”라고 힘차게 말씀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싸 안듯이 자애로운 눈빛을 보내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저에게 동지 분들께서 정중하게 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명존엄(生命尊嚴)의 철학(哲學)을 배우면 배울수록 제가 살아남은 의미의 크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되느니라.”(어서신판1696·전집1253) 하신 어서(御書)의 일절(一節)은, 생애(生涯)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입회 4년 후, 남편이 창가가족(創價家族)의 일원이 되었고, 반대하던 친척들도 10년 뒤 입회하여 그 이후부터는 함께 광포(廣布)에 달려왔습니다.
70세가 넘었을 무렵, 우인으로부터, 피폭자만으로 구성된 합창단 ‘피폭자 노래하는 모임·해바라기’의 존재를 듣고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그 우인과는 30년이 되가는 교제가 있었지만, 그때까지 서로의 피폭체험(被爆體驗)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원폭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바라기’에 들어가서는 자신의 반생(半生)을 돌아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015년 피폭 70년 때, ‘해바라기’의 일원으로 미국 뉴욕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사랑을 담아’라는 제목의 콘서트에서 원폭 투하의 명령을 내린 트루먼 전 대통령의 손자가 사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평화운동에 공헌하시는 그 모습에 깊은 감회가 솟구쳤습니다.
콘서트에서 합창한 것은 ‘다시는’〈작사·작곡 : 테라이 카즈미치(寺井一通)〉라는 노래입니다.
노래를 마치자 참석자들이 전부 일어서서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것은 좀처럼 고리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뉴욕에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자 듣던 사람들이 달려와 포옹을 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미국 분들에게도 충분히 전해진 대감동이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세계 공통이라고 확신합니다.
복수의 마음과 증오에서는 비참함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저의 청춘시절은 꿈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단 한 발의 원폭이 7만4000명이나 되는 목숨을 앗아갔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 몸도 마음도 좀먹고 있습니다.
현재, 국제 정세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우리 피폭자들은 다시는 이런 생각을 누구에게도 시키고 싶지 않다고 강력히 바라고 있습니다.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전쟁을 없애야만 합니다.
제가 입회한 1957년 9월, 제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께서 학회 평화운동의 원점이 되는 「원수폭금지선언(原水爆禁止宣言)」을 발표하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때 도다(戶田) 선생님께서 “핵무기는 절대악(絶對惡)”이라는 사상을 전 세계에 넓혀갈 것을 청년들에게 맡기셨던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요.
올해는, 그 선언으로부터 65년의 마디가 새겨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점점 제 자신의 사명의 크기를 실감하게 됩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8·9’ 이후, 시련에 직면할 때마다 타고난 지기 싫어하는 기질을 발휘하며 신심근본(信心根本)을 타고 넘어왔습니다. 산도 있고 계곡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변독위약(變毒爲藥)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 이케다(池田) 선생님의 말씀대로 저는 지금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스승 이케다 선생님께서 전 세계에 평화의 씨앗을 계속 뿌려오셨듯이 저도 있는 힘껏 평화의 존귀함을 호소해 갈 것을 결의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정말
승리의 인생으로
만들어네신 분~
존경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