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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산(Mountain) ]
1956년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이 연출한 이 산악영화는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부모와 같은 형 재커리(스펜서 트레이시)와 나이 든 형을 미워하는 탐욕스런 동생 크리스(로버트 와그너)의 형제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실제 리얼타임의 등반 장면을 연출하여 커다란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추락한 비행기에서 시체들의 재물을 훔치려는 동생 크리스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산을 오르게 된 재커리가 인도 여인(힌두 걸)을 구조한 모든 공로를 실족사한 동생에게 돌리는 라스트신에 가면 인생사 부질없음을 스펜서 트레이시의 노련한 연기에 힘입어 가슴을 울리게 합니다.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은 1954년에 연출한 <부러진 창>에 이어서 또다시 스펜서 트레이시와 로버트 와그너를 기용하여 탄력 있는 형제간의 갈등을 잘 그려내고 있으며, 나중에 비행기에서 구조되는 인도 여인 역을 맡은 여배우는 당시 말론 브랜도의 첫번째 아내인 안나 카쉬피였습니다.
이 영화는 제작한 그 이듬해인 1957년에 수입이 되어 그해 5월 29일 종로3가에 있던 단관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올드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20여 살의 차이가 나는 형제인 재커리와 크리스, 두 사람은 조상이 물려준 낡은 오두막집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뛰어난 등산가이드였던 재커리는 과거의 등반중 인명사고에 대한 피해 강박 때문에 산이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10년이나 등반을 안하고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생인 크리스는 이런 가난하고 지루한 삶을 증오하고 탐욕에 눈이 어두운 철부지 청년입니다.
두 사람이 뜻하지 않게 목숨을 건 등반을 하게 된 원인은 산에 비행기가 추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탐욕스런 크리스는 비행기에 탑승한 돈 많은 승객들의 재물을 훔쳐서 부자가 될 욕심으로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등산장비를 지고 나서며 보다 못한 형은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등반에 나서게 됩니다.
실베스타 스탤론의 <클리프 행어>의 원조격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산은 두 형제의 이러한 등반을 바탕으로 하여 욕망과 애증, 모험심 등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동생을 끔찍히 아끼는 부모와 다름없는 형과, 그런 외곬수적이고 소박한 형의 삶을 증오하고 탐욕을 꿈꾸는 동생을 등장시켜 서로 다른 목적에 의하여 위험한 등반을 하는 이야기이죠.
형제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베테랑과 신진이라는 두 배우의 조합과 호흡은 아주 잘 맞아 떨어졌고, 굉장히 흥미진진한 영화로 전개가 됩니다. 스펜서 트레이시와 로버트 와그너가 마의 절벽을 오르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할당하여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영화로 두 배우만이 이끌어가는 것으로 쏠쏠한 재미가 있으며, 적막하고 칼바람만 불어 닥치는 산의 등반장면에서 배경음악을 꽤 많이 사용하여 등반의 긴박감을 그때 그때 적절히 표현해 줍니다.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의 양면성이 이렇게 한 형제의 사이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프랑스 쪽 알프스에서 촬영한 그 장대한 산의 풍광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어느날 여객기 한대가 재커리, 크리스 형제가 살고 있는 산 정상부에 추락합니다. 이 산의 정상부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형뿐인데다가 날씨마저 안 좋은 상황이라서 근방의 주민들 누구도 구조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동생은 형을 부추겨서 가자고 하는데요. 사실은 다른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형은 그런 동생을 설마하면서도 길안내 겸 같이 산에 오릅니다.
중간 중간 어려운 암벽코스를 오르면서 형은 동생에게 꼼꼼하게 암벽 타는 요령같은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주로 젊은 동생이 리더를 합니다. 결국 최고의 난코스에서 더 이상은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좌절하는 동생 앞에서 보란 듯이 형은 나이를 잊고 오르게 됩니다.
꼭대기에는 비행기의 잔해가 있고 승객들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형은 생존자를 찾지만 딴 마음이 있었던 동생은 죽은 승객들의 물건을 훔치거나 합니다. 그러던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인도 여인을 발견하게 되는데 동생은 그녀를 죽이고 내려가자고 하지만 형은 끝까지 이를 제지합니다.
동생은 비행기에서 훔친 짐을 갖고 내려가고 형은 인도 여인을 데리고 내려갑니다. 올라왔던 코스와는 다른 코스로 내려가게 되는데 크레바스가 있어서 위험한 코스였습니다. 제일 위험한 곳은 거대한 크레바스에 마치 다리처럼 얼음과 눈이 살짝 덮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위험한 얼음다리를 동생은 그 견고함을 의심하여 건너지 않지만 형은 여인을 데리고 건너갑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무게에 다리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동생이 건너려하자 형은 짐을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해서 건너라고 하지만 돈에 눈이 먼 동생은 이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습니다. 단번에 건너려는지 빠르게 달려가면서 건너려다가 결국 얼음다리는 무너지면서 동생은 까마득한 크레바스 아래로 추락합니다. 여인을 안은 채 동생을 잃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형이 마을로 내려가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 등산의 효시-몽블랑 등정 ]
260년 전, 두 사나이가 몽블랑에 오르기 전까지는 '등산'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산꼭대기마다 무서운 악마가 산다고 믿었습니다. 산이란 나무를 베고 사냥을 하는 곳일 뿐,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이 목숨을 걸고 올라야 할 까닭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등산이 스포츠로서 자리잡은 것은 176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 몽블랑
이 해는 유럽 알프스 산맥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몽블랑(Mont Blance ·4,807m)에 올라가 보려는 생각을 사람이 처음 가졌던 때입니다. 1760년 어느 날, 알프스 기슭의 가난한 마을 샤모니에서 이탈리아 제네바 태생 광물학자인 스무 살의 소쉬르가 몽블랑을 가리키며 외쳤습니다. 그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아무도 올라가 보지 못한 신비의 산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때까지 알프스의 산마을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무서운 악마가 산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소쉬르는 과학의 힘을 빌어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죠.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지구위에 히말라야 산맥 같은 엄청난 산이 있다는 것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그 무렵,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은 그저 두렵고 존경스러울 뿐이었습니다.
* 영화에서...
소쉬르가 상금을 내건 지 26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없이 세월만 흘렀습니다. 1783년 마침내 부우리라는 사나이가 등산대를 짜서 몽블랑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첫 모험은 나쁜 날씨 탓에 실패했고, 1785년의 두번째 모험도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고 이 두번의 도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등산대원 중에 끼어있던 의사 파까르가 이때 겪은 일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뒷날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다졌기 때문입니다. 샤모니 마을에는 파까르 말고도 쟈끄 발마라는 사나이가 몽블랑에 오르는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험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면서 수정을 캐며 살았는데, 몽블랑에 올라 단번에 많은 돈을 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1786년 8월 7월 오후 3시. 의기 투합한 파까르와 발마는 샤모니 계곡을 벗어나 몽블랑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밤 9시쯤 2,392m 높이에 닿아 비박(bivauac;천막을 치지 않고 그냥 자는 것)했습니다. 다음 날은 새벽 4시 30분부터 등반을 시작해 다섯 시간 만에 보송 빙하와 타꼬나 빙하가 합치는 곳을 지났습니다.
자일도 없이 크레바스(Crevasse;빙하나 눈쌓인 벌판이 갈라진 큰 틈새)를 건너고, 8월의 뜨거운 햇빛에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눈덩이 위를 지났습니다. 뒤이어 눈쌓인 벌판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 곳을 두 시간 만에 빠져 나갔습니다. 요즘처럼 아이젠도 없이 어떻게 그 미끄러운 눈 언덕을 뚫고 지나갔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 영화에서...
언덕을 올라 거센 바람이 몸을 날려 버릴 듯이 몰아치는 눈벌판을 1km쯤 걸어갔습니다. 그곳의 높이는 3,900m였습니다. 무릎까지 눈에 푹푹 빠지는 곳을 럿셀(russell;앞선 사람이 눈을 파헤치고 단단히 다져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하며 한 발 한 발 떼어 놓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앞장섰던 발마가 지쳐 쓰러지자 파까르가 그의 짐을 받아 앞으로 나섰습니다.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그들은 눈벌판을 벗어났습니다. 그 다음은 산등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바위 마루터기사이로 몽블랑의 북동쪽으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이 길은 눈벌판에서 몽블랑 꼭대기에 이르는 루트가운데 가장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햇볕 들 틈이 없이 얼음에 덮인 이곳 역시 자일과 아이젠 없이 가까스로 넘어섰습니다.
* 샤모니의 등산인들
발마와 파까르가 4,807m의 몽블랑 꼭대기를 밟은 것은, 1786년 8월 8일 오후 6시 32분으로, 2.392m의 비박했던 곳을 떠난 지 14시간 30분만에 이룩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파까르가 지팡이로 쓰던 긴 막대기를 세우고 거기에 빨간 천을 매달았습니다.
아무런 지식이나 장비도 없이, 그렇다고 등산을 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바위와 얼음을 뚫고 몽블랑 꼭대기에 우뚝 선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꽤 좋았던 날씨도 한몫을 거들었지만...
두 사람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잠이 모자란 데다 동상과 고산병까지 겹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달빛 속을 4시간 30분이나 헤치고 별일없이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몽블랑 등정에 성공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자끄 발마가 파까르에 대하여 누명을 쒸우고 혼자 등정했다고 나발을 불고 다니는 바람에 몽블랑 등정은 오랫동안 자끄 발마의 단독 등정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 산악인들의 메카, 샤모니
* 발마의 중상 모략
하산 후 얼마 안지나 발마가 몽블랑 초등의 영예를 독차지하기 위해 "파까르는 한 일이 거의 없고, 모든 일은 내가 다 했다. 정상에도 내가 먼저 올랐다. 나중에 파까르를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산을 내려가 그를 데리고 와야했다."고 나발을 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 열정과 지적 호기심으로 몽블랑에 오르기를 꿈꾸었던 파까르는 짐꾼 겸 가이드로 고용했던 발마에게 소쉬르의 상금도 전액 양보하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착하디 착한 그에 대한 대가는 중상모략으로 돌아왔습니다. 배은망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탁월한 용기와 모험심에 비해 발마의 성품은 비열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산을 오른 동지의 발등을 내리 찍다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은 신의가 사라진 오늘의 세태만인줄 여겼는데 면면한 전통을 가진 터였습니다. 들끓는 논쟁에 기름을 들이부은 건 당대의 대문호 알렉산더 뒤마(몽테크리스토 백작,삼총사 작가)였습니다.
* 영화에서...
그는 이 모험담에 얽힌 온갖 추문을 발마의 이야기에 기반한 소설을 구상해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당연히 대중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발마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파까르는 많은 고통을 겪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후에도 이 사건은 등반사상 가장 큰 논쟁거리의 하나로 남았습니다.
샤모니 광장에 몽블랑 초등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될 당시까지만 해도 몽블랑 등정은 발마만의 성공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파까르는 제외된 채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만 세워졌습니다.
*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
* 밝혀진 진실
파까르의 등정 의혹을 둘러싼 150년의 논쟁이 끝나게 된 것은 영국의 산악인 프레시필드 덕분이었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은 그는 마침내 소쉬르의 증손자가 보관해 온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발마에 의해 기록된 일기에는 파까르가 발마의 도움없이 정산에 올랐음은 물론, 그가 발마보다 정상에 먼저 올랐음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기장이 공개됨으로써 마침내 등정 의혹에 대한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프레시필드는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 옆에 오랫동안 멸시를 받아온 진정한 몽블랑 초등자인 파까르의 동상을 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파까르의 동상이 샤모니 광장에 들어섰습니다.
* 파가르의 동상
[ 몽블랑 초등 이후 ]
이와같이 파까르와 발마에 의해 몽블랑이 초등된 이후에도 19세기 중반까지 몽블랑을 오르는 일은 대단한 고통과 위험이 따르는 등산이었습니다.
실제로 두 번째로 몽블랑을 오른 소쉬르는 무게가 68kg이나 나가는 이불(1.5kg의 거위털 침낭으로 8,000m급의 산에 오르는 오늘의 시대와 비교하면 엄청난 무게인 것이다)과 불을 피울 수 있는 장작더미, 전원이 잘 수 있는 대형천막, 크레바스를 건널 때 사용하는 사다리 등을 10명의 짐꾼들에게 지게하는 대규모의 원정대를 꾸려서야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 영화에서...
초등 이후 100여년간 여전히 몽블랑 등반은 죽음을 향한 행보로 불리웠습니다. 원정대가 떴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들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성공 가능성을 점치며 원정대의 귀환을 기다렸습니다. 등반이 성공하는 경우에는 계곡에서 축포를 쏘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서도 축포를 쏘아올리고 손님의 계산서에 기념으로 그들의 등정기록을 첨부하기도 했습니다.
등반가들이 마을로 돌아오면 꽃다발과 환영 인파에 묻혀 샴페인으로 축배를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1853년을 기점으로 끝났습니다. 몽블랑으로 향하는 길에 첫 산장이 들어서면서 등반대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고,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도 시들해져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 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초등정,1865년 7월 14일 ]
* 마테호른
체르마트(Zermatt)는 스위스 알프스의 다른 마을처럼 조그마한 산간 마을이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위의 밋밋하고 푸른 초지로 이루어진 산등성이 너머로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의 뾰족한 봉우리인 마터호른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는 것뿐. 영국의 산악인 에드워드 윔퍼는 이 봉우리를 등정하기 위해 여덟 번이나 이곳을 찾았습니다.
몬테 로자 호텔 앞에서 보이는 마터호른(4478m)은 수줍은 처녀처럼 정상 부근을 얇은 구름으로 덮고 있었습니다. 윔퍼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산악가이드 장 앙뜨안느 카렐에게 마터호른 등반을 제안하고 함께 등반하기 위해 발뚜르낭쉬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등반을 이유로 윔퍼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바로 전날 떠나고 없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산악인들이 이탈리아 피에드몽의 첨봉인 몬테 비소를 초등하자, 이탈리아 산악회는 마터호른 초등반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 카렐을 앞장 세워 마터호른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들의 출발을 알게 된 윔퍼는 초조해진 나머지 유능한 가이드를 고용하기 위해 떼오뒤르를 넘어 체르마트로 갔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가벨호른을 再登한 프란시스 더글라스 역시 카렐을 고용하기 위해 왔다가 허탕을 치고 윔퍼와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페터 타그발더가 마터호른 동벽을 조사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체르마트에서 그를 고용했습니다. 몬테 로자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 윔퍼는 호텔 벽에 기대앉아 있는 그의 옛 가이드 미쉘 크로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크로는 찰스 허드슨 목사에게 고용되어 마터호른을 등반하기 위해 방금 그곳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허드슨은 가이드 없이 새로운 루트를 통해 몽블랑을 등정한 당대의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산악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허드슨을 따라온 더글라스 해도우는 19살의 젊은이로 몽블랑을 최단시간에 등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력은 좋았지만 산악인으로서의 경험은 별로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습니다. 윔퍼와 더글라스, 그리고 허드슨은 우연하게도 이곳 체르마트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마터호른 초등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나게 된 것입니다. 1865년 7월 13일 새벽 5시 30분, 윔퍼와 허드슨, 더글라스, 해도우, 크로, 타그발더, 그리고 짐꾼으로 고용된 타그발더의 두 아들을 포함한 8명은 체르마트를 출발했습니다.
오전 11시 30분, 마터호른 산 밑에 도착한 그들은 등반을 시작하면서 푸르겐 빙하나 다른 쪽에서 바라볼 때 등반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곳들이 의외로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3355미터 지점에 텐트를 친 후 크로와 타그발더가 루트 정찰을 나갔습니다.
* 체르마트에서 올려다 보는 마테호른
세 시간 뒤에 돌아온 그들의 입에서 전해진 말은 등반하는데 전혀 장애가 없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타그발더의 막내아들은 다시 체르마트로 돌아가고 그들은 곧바로 출발했습니다. 등반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간혹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돌아가면 천국의 계단처럼 신기하게도 올라가는 길이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루트에는 로프가 필요 없었으며, 윔퍼가 앞서 가거나 허드슨이 앞서 갔을 뿐입니다. 그들은 오전 9시 55분에 4270미터 지점에 도달해 5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눈에 덮인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이 능선 끝의 가파른 벽에는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당시 윔퍼 등반대는 북벽쪽을 오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크로는 앞장서서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 영화에서...
실제로 상당히 조심스럽게 올라야 했으며, 몇 군데는 손잡을 만한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경사는 그리 가파르지 않았지만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틈에는 눈이 가득 차 있는데다 추위로 결빙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경험이 없는 해도우는 등반에 익숙치 않아 계속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한시간 반 동안 어려운 지점을 돌파하고 한참 걸으니 눈 덮인 평이한 능선이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등정에 대한 회의와 의심은 사라져 버렸지만 또 다른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보다 이틀 전에 출발한 이탈리아 등반대가 마터호른 정상에 도달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습니다.
* 샤모니
“우리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루트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정상에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갖가지 헛된 상상 때문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정상에 접근할수록 흥분은 더욱 심해졌다. 경사는 점점 쉬워졌으며, 마침내 우리는 서로 로프를 풀고 정상을 향해 돌진했다. 오후 1시 40분, 온 세상이 우리 발밑에 놓였다. 드디어 마터호른을 정복한 것이다. 정상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초등정의 보장은 없었습니다. 정상은 약 100미터 가량 길게 뻗은 평평한 능선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등반대가 다른 쪽 끝에 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윔퍼는 남쪽 끝으로 가서 열심히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의심과 기대감으로 절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순간 200미터 아래쪽으로 여러 개의 점들이 보였습니다. 그는 목이 쉴 정도로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으며, 크로는 가지고 온 텐트의 지주 한 개에 셔츠를 벗어 매달았습니다. 체르마트와 뚜르낭쉬, 브레이유에 있는 사람들은 마터호른 정상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등반대는 슬픔과 좌절 속에 침울한 마음으로 되돌아왔습니다.
* 에드워드 윔퍼
* 슬픔과 좌절 속의 하산 길
윔퍼 등반대는 한 시간 동안 정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에 도취했기 때문에 하산시의 안전에 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한 듯 했습니다. 윔퍼는 등반자들의 이름을 병속에 담아 정상에 남기고 타그발더와 로프를 연결한 다음 사람들의 뒤를 따라 내려갔습니다. 하강 지점에서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과 서로 로프를 연결했습니다.
“크로가 먼저 하강한 다음 해도우의 다리를 잡아 주기 위해 피켈을 옆에 놓았다. 그러나 해도우가 미끄러지면서 크로의 비명소리와 함께 둘이 밑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허드슨이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질질 끌려갔고, 곧 이어 더글라스가 허드슨의 뒤를 따라 끌려 내려갔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영화에서...
크로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은 타그발더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위에 몸을 끼웠다. 그들을 연결하는 로프가 팽팽해졌으며 근육의 긴장 속에서 바위를 꽉 잡고 버티었다. 그러나 타그발더와 다글라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의 한 가운데가 갑자기 툭 끊어졌다. 불과 몇 초 동안 우리는 친구들이 미끄러지면서 손을 뻗으며 살아나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절벽에서 절벽으로 굴러 내려가며, 1200여 미터나 아래의 마터호른 빙하에 떨어졌다. 로프가 끊어지는 순간 그들을 구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체르마트의 윔퍼 묘지
그들은 30분 동안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윔퍼가 끊어진 로프를 살펴보다가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다른 예비 로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그발더와 더글라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는 그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그들은 오후 6시 기진맥진한 상태로 겨우 산 밑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참담한 심경으로 밤을 지샜으며, 동틀 무렵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마터호른 초등과 더불어 알프스의 황금시대(아래에서 설명)가 끝나고 은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 후로도 정상 등정의 대가는 흔히 피로 얼룩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 체르마트의 산악인들의 묘지
[ 알프스 등반의 시대적 구분, 황금시대->은시대->철시대 ]
* 알프스 황금시대 - 초등시대
알프스 몽블랑 등정으로 시작된 근대 등반은 사람들의 정복 심리를 자극하여 알프스 미답봉들이 하나둘씩 등정되는데, 이 무렵의 등반방식은 비교적 등반이 쉬운 산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것이 주류였습니다.
이를 피크 헌팅 또는 등정주의 방식이라고 하며, 1865년 알프스 4000미터 급 마지막 산인 마터호른이 에드워드 윔퍼에 의해 초등정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이 시기를 편의상 등반사에서는 등반의 황금시대라고 합니다.
* 알프스의 은시대 - 보다 어려운 루트로, 가이드 없이 등정하는 시대
은시대는 1865년 마트호른 초등 이후부터 1882년 당 뒤 제앙(4013m)이 초등될 때까지 17년 동안을 말하며, 황금시대와 다음에 도래할 철시대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더 힘들고 어려운 길로 오르는 본격적인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으며 가이드의 안내 없는 가이드리스 등반이 성행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실천한 사람이 은시대의 주연 영국인 등반가 머메리였습니다.
* 알프스의 철시대 - 능선 등반이 아닌 직등시대, 북벽 등정의 시대가 열리다
철의 시대는 머메리즘 탄생 이후부터 1938년 알프스 3대 북벽의 하나인 아이거가 초등되는 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머메리즘(능선을 타고 등반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 암벽과 빙벽을 올라 목표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이 극대화되어 암벽에서 직등과 인공등반이 이루어지고 암벽등반 기술과 장비가 개발되어 암벽등반이 한층 더 활기를 띠며 발전했습니다.
* 아이거 북벽
1904년 구스타프 하슬러와 프리츠 아마터가 두 번의 비박을 감행한 끝에 핀스터아오호른(4275m) 북벽을 오름으로써 알프스에서 북벽시대가 개막되었고, 1931년 마터호른 북벽이 독일의 슈미트 형제에 의해 초등되자, 그랑드 조라스와 아이거 북벽은 줄기찬 도전을 받게 됩니다. 1938년 7월, 마침내 아이거 북벽이 프리츠 카스파레크, 하인리히 하러, 안데를 헤크마이어, 루트비히 푀르크 등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동대에 의해 초등정됩니다.
이로써 알프스 3대 북벽(마테호른, 아이거, 그랑드 조라스)이 등정되면서 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럽의 산악인들은 본격적으로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 그랑드 조라스 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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