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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살인죄로 기소되지만, 사회적 관행을 거부하는 태도가 더욱 중대하게 다뤄져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특히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관(棺)을 옆에 두고 밤을 새워야 하는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잠을 잤다는 것이 법정 증언으로 나오자 검사는 이 행위를 인간 실격의 증거로 제시한다. 여기에서 졸음은 생리 현상이 아니라 도덕적 결핍의 징표가 된 것이다. 잠이 충성과 영성의 실패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성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함께 깨어 기도해 달라”는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이 잠들어 버리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꾸짖는 장면이 그것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는 반드시 채워져야 하지만, 때와 장소를 살펴서 해소해야 한다. 아기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은 배변 훈련이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변을 가리지 못하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배변만이 아니다. 아무 데서나 먹고 마시거나 코를 풀고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고 침을 뱉는다면 모자란 사람으로 여겨진다. (예외가 있다. 재채기나 기침은 조절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으로 입을 가리는 정도로만 문화의 규제를 받고, 하품은 자리에 따라서 약간의 자제가 요청된다) 하다못해 우리는 세면이나 양치질하는 모습조차 감추려 한다. 잠옷 바람으로 있다가도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빨리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외출할 때는 헝클어진 머리를 빗고 화장도 한다.
이렇듯 인간의 몸은 다른 동물과 달리 시공간의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똑똑하고 돈이 많아도 <처신(處身)>을 잘하지 못하면 손가락질을 받는다. 매너, 에티켓, 예절은 기본적으로 몸의 문법이다. 세상과 타인에 대해서 가지는 몸가짐은 그 자체로 마음과 태도로 여겨진다. 거기에서의 몸은 ‘사회적 신체(social body)’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단순한 생물학적 ‘몸뚱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마땅한가는 지금의 처지,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제도, 문화적 관습 등에 좌우된다. 공동체의 상징을 수용하고 구성원들과의 유대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규범에 순응하는 몸이 사회적 신체다.
수면도 신체 행위인 만큼 사회적 구속을 받는다. 아무리 졸려도 아무 데서나 눈을 붙여서는 안 된다. 수업 시간이나 교회 예배에서 조는 모습을 들키면 창피해한다. 가볍게 꾸벅이는 것은 티가 안 날 수 있지만, 고개를 심하게 떨군다거나 코를 곤다면 보기 민망해진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이마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으면 감추려 한다. 그리고 밤에 잠자는 동안 ‘까치머리’가 생기면 외출하기 전에 반드시 손질한다. 생물학적 신체를 빨리 지우고 ‘사회적 신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체의 규율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더 엄격하게 요구된다. 예전에 몇몇 국회의원들이 회의장에서 단잠을 자는 모습이 생중계된 적이 있다. 격무에 시달리는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의자에 머리를 눕혀 입까지 벌리고 자는 것은 심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렇듯 공적인 장(場)에서 졸음은 무례함이나 무책임의 징후로 읽힌다.
당신은 이곳에 마음이 없군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공공성을 무시하네요.
직무 유기입니다.
사람은 왜 낮잠을 잘까?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보자. 개나 고양이를 보면 하루에 여러 번 짧게 잠자고, 말이나 소 같은 초식동물들도 경계 상태를 유지하며 짧은 수면을 반복한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밤에 ‘통잠’을 자는 몸이 아니다. 이를 ‘다상성(多相性 : polyphasic) 수면’이라고 한다. 인간은 어떤가? 우리도 원래는 밤에 길게 자는 단상성 (monophasic) 동물이 아니었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전통사회에서는 밤에 두 번 자는 분할 수면(segmented sleep)이 많았고, 거기에 맞물려 낮 동안의 짧은 휴식이 흔했다. 근대 이전까지 서유럽 사람들은 거의 매일 밤 깨어나서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취침했는데, 1시간 이상 고요하게 깨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로저 에커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교유서가. 2016) 12장) <돈키호테>에서도 그러한 습관이 묘사되는 대목이 있다. “돈키호테는 자연을 따랐고 첫 번째 수면에 만족해 더 이상 잠을 청하지 않았다. 산초의 경우에는 첫 번째 잠이 밤부터 아침까지 쭉 이어졌기 때문에 두 번째 잠을 청하는 일이 아예 없었다.” 지중해 국가와 중남미에서처럼 정오에서 3시까지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는 최근까지도 널리 행해졌다. 지금 당연시되는 ‘7~8시간 연속 수면’은 산업화 이후에 정착된 규범으로 보아야 한다.
Mediterranean. Siesta (by Vlodarchik Andjei)
이렇듯 인간은 원래 밤에만 자고 낮에는 온전히 깨어 있는 동물이 아니라서 각성 수준이 종일 일정하지 않다. 생리학적으로 밤중에 강한 수면 압력이 일어나지만, 점심 식사 후에도 몸이 나른해지는 식곤증이 찾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낮잠은 밤 수면이 충분하다 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생체리듬의 작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30분 이내의 쪽잠(power nap)은 작업 기억 회복, 주의력 재충전, 감정 조절, 창의성 증진 등 뇌의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살바도르 달리, 에디슨, 윈스턴 처칠, 케네디 대통령 등은 낮잠을 일상의 루틴으로 유지한 인물들로 유명하다.
동아시아에는 낮잠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회화의 전통이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송희경 관장과의 대화에서 알게 된 것인데, 몇 가지 그림을 소개받았다. <진단고사도(陳摶故事圖)>를 보자. 진단은 북송(北宋) 시기의 역학자(易學者)이자 도사(道士)이며 관상학자이자 수상학자였는데, 여러 도술에 능통해 당시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여러 왕과 황제가 그를 기용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은거하며 110살이 넘도록 살아 도술이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이 그림은 정사(政事)를 도와달라는 부름을 회피하기 위해 수십 일 동안 잠을 자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낮잠은 휴식이면서 동시에 세속적 욕망을 잠재우는 수행적 행위로 묘사되어 있고, 신선의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진단고사도(陳摶故事圖)
윤두서의 <하일오수>(夏日午睡 : 여름날의 낮잠)는 어떤가. 한낮의 더위가 몸을 처지게 할 때 억지로 깨어 있는 대신 편안하게 쉬면서 생체의 리듬을 따라가는 모습이다. 늘 깨어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사대부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탈속의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에게 낮잠은 세상의 소음을 잠시 접어두고 주의를 내면으로 돌리는 성찰의 시간이요 일종의 수양이 아닐까 싶다. 이 그림에 대해 이인숙 선생은 이렇게 평한다. ‘눈을 감았으나 기개 있어 보이는 얼굴, 우아한 손가락, 버선을 벗은 맨발은 격조 있는 섬세한 필선이고..' 문인의 고아하면서 절제된 은거의 품격이 잘 묘사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정돈되는 듯하다.
윤두서 ‘하일오수(夏日午睡)’
낮잠을 묘사한 그림 가운데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아래에 있는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이다. 중국 오대후촉(五代後蜀)의 화가 석각(石恪)이 그린 대표적인 선종화(禪宗畵)로서, 현재 일본의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심(調心)’이란 ‘마음을 조절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이고 이는 참선의 기본을 이룬다. 작품은 원래 두 폭으로 이루어진 연작인데, 제2조 혜가(慧可)가 턱을 괴고 명상에 잠긴 모습과, 선승 풍간(豊干)이 호랑이에게 기댄 채 졸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득도의 경지에 이른 고승의 품에서는 맹수조차 그 고요함에 길들여지는 것인가. 분노와 원망이 평정되는 돈오의 순간에 잠시 머물고 싶어진다.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
근면과 성실이 지고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낮잠은 게으름의 표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한창 일해야 할 시간에 누워 있는 사람은 마치 ‘휴면(休眠) 계좌’처럼 사회의 흐름에서 밀려나 정지된 듯 보인다. 하지만 기계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문명 속에서 몸의 리듬에 순응하는 시간의 틈을 내지 않으면, 건강한 삶이 유지되기 어렵다. 교실이나 예배당에서도 피곤하면 살짝 눈을 감아도 된다. 졸음은 따분한 강의나 고리타분한 설교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일 수도 있으니까.
낮잠은 가파른 경쟁에 지친 몸과 마음에게 선사하는 산뜻한 쉼표다. 자신에게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도 내려놓게 해준다. 고등학교 때 영어공부를 하면서 배운 문구가 떠오른다. Even Homer sometimes nods. 그리스의 대문호인 호메로스도 가끔 졸아서 엉터리 문장을 쓴다는 의미다. 쉽게 번역하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다. ‘넘사벽’의 수준에 있는 사람도 어이없이 헛디디고 넘어질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뜻밖의 오류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운전을 하거나 위험한 기계를 다루거나 중요한 업무를 처리할 때가 아니라면 가끔 졸아도 괜찮다. 분주한 일상을 멈춰 세우고 잠시 눈을 붙여도 좋다. 그 한가로움은 존재를 온전히 용납하면서 더 나은 심신을 양생하는 여백이 될 수 있다.
김찬호/ 사회학자, 문화인류학자, 성공회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 사회학을 전공하고 일본에서 마을 만들기 현장 연구로 박사논문을 썼다. 대학에서 문화사회학과 교육학을 가르치며, 자녀 양육, 평생학습, 교사의 정체성, 다문화 사회, 노년의 삶, 마을공동체 등 다양한 주제로 강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모멸감》《대면 비대면 외면》《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유머니즘》《돈의 인문학》《문화의 발견》《사회를 보는 논리》《생애의 발견》《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 등 다수의 책을 썼고,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완벽한 부모가 놓친 것들》《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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