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두분 인도하에 사찰순례를 갔었는데
돈 안내면 못 들어간다고 해서 할수없이
돈은 내고 들어갔지만 기분이 영 찝찝해서...
인솔해가신 스님은 열받고 흥분이 되어서
완전히 기분 잡쳤지요. 대판싸우고
해서는 않될일이지만 대웅전 참배는 하지
않았답니다. 스님을 비롯한 모두가~~~
스님이 들어가셔도 입장료 받습니다.
그런절이 있어요. 웃기지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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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신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거부당한 사찰이 있습니다.
지난번 강천사에 그런 적이 있어, 기분이 나빠서 절을 안 들어갔습니다.
순천 선암사는 이해는 좀 갑니다.
또 지난번 주왕산 대전사입구에서 그런적이 있지요.
뭐라 하더군요. 통과는 했지만 기분이 그랬었어요.
또 다른 사찰도 몇군데 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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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글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잘못 아시는것 같아 답글을 올립니다.
법우님이 말씀하신대로 일반적으로 사찰을 찾을때 입구에서 입장료를 징수하지만 조계종 종단의사찰은 원칙적으로 신도증을 지참한 신도에게는 입장료를 징수 할수 없습니다.
신도증은 소속사찰에서 발행해 주실것 입니다.
사찰은 우리의 집이거늘 주인이 집에 가는데 입장료 라니요?
법우님
이제 섭섭함이랑 방하착 하시고 자주 사찰을 다니심은 어떠실런지요?
항상 좋은날 되시기를....
일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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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단체내지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맞았던 도올의 글이긴
하지만, 인정할 건 하고 맞은 건 맞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습성상, 특정종교의 배타성등이 누가 앞에서면, 끌어 내릴려
혈안(?)이 되어 있죠. 일등, 최고만을 강조해 온 우리의 획일적인
교육의 문제이지는 않나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성격들과 다양한 가치관들을 퇴보시켜버리는, 일제내지는
군바리 사고방식의 특정인 편의위주였었죠.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모 칼럼에서 지나치게 `도올`을 깍아내리는
데에만 초점이 맞추어 지더군요. 대다수 스님들도 그러시구요.
물론 그게 정당화되고 맞을 수는 없겠죠. 그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하는 것이지, 이렇쿵 저렇쿵 할 필요까지가 있냐는 생각을 해 봤었습니다.그렇다고 도올 신봉자도 아닐 뿐더러, 그의 사상을 결코 따르지는
않습니다. 이미 찾았는데, 곁눈질을 왜 합니까?
` 아 그렇구나 그런 것도 있구나..그런데 좀 그런데..`하면 되지 않냐
싶어요.냄비에서 물끓는 것처럼의 모습들, 좀 그렇더라구요.
개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할 줄 모르는 여유들...
도올로 인해서 우리들이 더더욱 다져질 수 있는 근거를 마련 한 점은
없었는가?...
잔소리가 길었습니다.
요즘 관광사찰로 지정되어 있는 곳에 가면 어김없는 입장료!
요즘엔 짜증이 납니다.
`우리집을 내가 찾는데 돈을 내고 들어간다..참
재적사찰이 아니란 이유로...`
스님도 그랬다는데 할 말은 다 했지만요.
어떤 조치가 필요한 거 아닌가요?
전 앞으론 그런 사찰은 안 갑니다. 결심했어요. 그런 곳 아니어도
얼마든지 좋은 스님 친견 할 수 있는 곳 많습니다.
성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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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찰경제란 재래적으로 사찰에 소속된 토지에서 소출되는 재화로써
봉건적으로 유지 되는것이다.
그러나 요새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 유통구조에서 땅이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봐야 허울만 좋지 아무 쓸모가 없다.
즉 유통과 활용에 필요한 현금이 주어지지 않는것이다. 이것은 곧 사찰의 경제가 이미 소작과 지주관계에의 광범한 지역성에 기반한 봉건관계의 지역공동체적 성격을 완전히 이탈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대개 조요한 대찰들은 그 광대한 허울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 그 현금의 상당부분이 1600년의 역사적 무형민족자산의 축척에서 발생하는 관광수입에 의존할수
밖에 없게된다.
관광수입이란 바로 문화재관리법, 공원법등에 묶여있는 것으로써 문공부의 소관이다. 바로 이러한 구조에 기묘한 협잡이 쌍방에서 개재되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자본주의 논리로 본다면 가만히 앉아서 문깐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입장료만으로 편하게 먹고살수 있다는 것은 매우 부럽고 아름다운 삶의 형태같이 보인다.
그야말로 입장권 매표소에 하염없이 푹푹 쌓이는 돈으로 먹고살수 있는 스님들의 처지는 정말 부동산 소유주에 선인의 고매한 구색까지 갖춘 도화원의 이상형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원경제구조가 관광수입에 의존하는 퍼센티가 높으면 높을수록 다음의 두가지 결과가 초래된다. 하나는 승가의 무기력화며 또하나는 종교성의 파괴이다.
전자는 승가조직이 점점 대중조직의 기반을 상실해가면서 관권에 점점더 의존하게 되는 자립성으 상실과 그에따른 스님생활의 무자극적 (인센티브가 없는) 무기력, 그리고 케이쎄라주의의 무관심의 팽배등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세속화된(secularized) 교회조직이 자체적,독자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면서 발전해나간 선교 형태와 반비례되는 기현상 인것이다
후자는 곧 승가조직이나 사찰이 과거와 같이 대중들의 불법에 대한 신심,
즉 그들의 심성에 내재하는 종교성의 자발적 발로에 의한 자율적 종교조직으로써 유지되는 바로 그 종교성이 탈색,퇴화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대중들이 절을 신앙의 대상으로 찾아가는것이 아니라 동물원의 철책에 같힌 호랭이나 사자를 구경하러가는 것과 같은 주말관광 오락프로그램 의 소비적말단의 쓰레기통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종교적 경건성이 있을수 없으며 ,이들이 뿌리고 가는것으니 입장료와 쓰레기와 퇴폐뿐이다. 이러한 대규모 대중현상의 의식구조속에는 불교란 점점 종교적 진리의 그 무엇이 아니라, 울긋불긋 단청된 문화재의 형해로써 자리를 잡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