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 강의 교황 프란치스코의 사회적 가르침과 해방 영성의 시대적 맥락
- 성염 돈보스코 前 주 교황청 한국대사
Ⅰ.
(패션 어브 더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부분 장면 보여주심.)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를 유의해서 보시면 좋았는데,
예수님을 때리고 고문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두려워합니다. 기적도 했고, 죽은 사람도 살렸고, 빵을 수천 명을 먹였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칭했기 때문에 저 사람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해를 입을지 몰라 두려워합니다. 때리고 온갖 수모를 가해도 반응이 없거든? 천벌이 안 떨어져요. 그러니 차츰차츰 그 사람들이 용감해지는 모습이 그 영화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좀 유의해 보시면, 여기 어머니 되시는 분들은 느끼셨을 거예요. 수난 중에 끝임 없이 예수하고 어머니 사이에 눈 맞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깐 마치 “엄마가 지금이라도 그만 두라하면 내가 그만 둘게.”하는 식의 호소가 들어 있고 어머니는 그걸 용납 안 하죠. 저 영화가 촬영된 이탈리아 마테라 라는 곳을 가봤는데 십자가 처형 장소는 정말 살벌한 언덕이에요. 석회암으로 정말로 별세계 같은 곳인데, 우물자리가 하나 있어요. 이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예수가 어렸을 때 넘어집니다. 그러니깐 엄마가 달려가서 끌어안아요. 바로 그 우물자리였어요. 저도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말릴 수가 없죠. 그리고 말릴 마음도 없지요. 예. 그걸, 어머니의 강인한 인상을 멜깁슨이 아주 역력하게 그렸어요... 물론 “엘로이 엘로이 레마사박타니”라고는 했지만. 원타이틀은 The Passion of the Christ죠. 그리스도의 수난. 그렇지만 서브타이틀은 그리스도의 열정입니다. 당신 사명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저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서 뜬 눈 기억나시죠? 오래 새겨지죠? 거기까지 하신 그분의 열정. 우리 주변의 많은 분들이 그 열정을 간직하고 살고 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죠.
예수역할을 했던 제임스 카비젤이 유투브에서 대담하는 것을 잠깐 봤어요. 이 사람 배우였는데도 청중에게 호소했어요. 이 사람은 “각자 자기가 한 역할을 하느님 앞에서 좀 새겨보세요. 자기가 어느 편에 서 있었는가를.” 누구나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하고, 누구나 사도 요한 역할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각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세겨보라.” 그런 호소를 하는 것을 듣고 ‘마침 제대로 연기를 했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아들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릅니다.”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한 귀로 들어요. 그리고 다른 귀로는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그러면 우리가 믿어 줄게.” 그래서 문학사적으로 이 대목을 예수 최후의 유혹이라고 합니다. 내려 올수 있었어요. 그리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한 줄로 서.” 할 수 있었죠? 그렇죠? 당신은 우리 중에 유일하게 어떤 고통을 당할 때 그 말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어도 못 하죠. 그러나 끝까지 죽어요. 끝까지 죽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이 마지막에 “참으로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는 고백을 합니다. 내려와서 복수할 수 있었죠. 그러면 아마 지구상의 인류가 10번 쯤, 100번 쯤 전멸해야 그 피 값을 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안했습니다.
나눠드린 자료는 우리가 오늘 강좌를 위해서 새겨들을 부분들만 뽑았습니다.
육화의 영성 이해: 예수 모자의 ‘육화(肉化)’이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됐어요. 그 사명을 가지고 나자렛 처녀의 뱃속에 임신이 됩니다. 그러니깐 그 어머니가 아기를 임신하면서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 태중에 들어오는 그 의미를 파악한 것이 마니피캇이예요. 그리고 예수가 사회생활에 등장합니다. 등장하면서 루카복음서에 의하면 4장 16절의 나자렛 설교가 첫 설교예요. 그러니깐 메시아로서 데뷔하는 설교입니다. 망치면 평생 망치는 거예요. 메시아 사명 끝장납니다. 교향에, 금의환향해서, 첫 설교를 하는 대목이죠. 왜 우리가 이 구절을 다시 읽느냐 하면, 저런 수난사를 보더라도, 성경에서 읽더라도 우리가 메시아 사명을 참 많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에 단원들은 주회마다 바치는 까떼나 이니깐 모를 수가 없어요. 모를 수가 없는데 레지오 단원 그 누가 교황이 사회교리를 귀담아 듣습니까? 매주 이 까떼나를 염하면서. 같이 읽읍시다.
◇ 마리아의 노래 (루카 1,46~55)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사촌언니인 엘리사벳에게 사촌 동생이 배가 불러서 엄마에게 쫓겨 왔어요. “남세스럽다. 네 언니 산달까지 수발이나 들어라.”고 쫓아 보냈죠. 그동안 요셉과 얘기를 해서 설득을 시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여튼 동네에서 보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날마다 사립문을 쳐다봤겠죠? 혹시라도 ‘나자렛에서 심부름꾼이라도 오나?’ 하고. 혹은 ‘요셉이 직접 찾아오나?’ 그동안 이분이 지은 노래예요. 자기가 지금 임신해서 무슨 사건에 말려들었는가를 여기에 딱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깐 언니가 이걸 봤으면 얼른 뺐어서 장롱 밑에 감췄겠죠. 요셉이 보거나 주위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어디 감히,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고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고. 그래서 근대 신학에서는 ‘마리아 선언서’라고 해요. 공산당 선언서라는 유명한 선언서가 있듯이 마리아 선언서라고 부릅니다. 이런 강단 아니면요 아까 십자가 밑에서 “나 죽네.” 하고 매달렸지 끝까지 저렇게 버티고, 어떤 엄마가 버티고 있어요? 그 매 맞을 때 눈이 퉁퉁 부어서 누굴 쳐다봐요? 어머니를 쳐다보잖아요. 그래서 “맞을까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가 누군데 하고 등장할까요?” 그런 눈 아니었겠어요? 그렇게 보시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들이라면. 어떤 어머니였던가 보세요. 그 어머니에게서 교육받은, 성 요셉은 일찍 돌아가신 걸로 아니깐, 홀어머니에게서 교육 받은 이 데뷔 설교에, 서품 받고 첫 강론에 나자렛에서, 교향에서 “아이고 저놈 잘 컸네. 저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한 번 보자.”고 다 지켜보는 가운데. 아마도 성모님께서 제일 앞쪽에 앉으셨겠지요? 자기 아들 서품 미사 강론인데. 다시 이어서 봅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루카 4,16~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마니피캇하고 비교하면 정확하게 그 어머니의 그 아들입니다. 첫 설교예요, 첫 설교. 내 사명이 무엇인가를 어머니는 마니피캇으로 노래하셨고 아들은 이사야에서 둘둘둘 두루마리를 말아가면서 찾아서 이 구절을 항상 머릿속에서 내가 데뷔 설교를 하면, 첫 강론을 하면 바로 이걸 하겠다고 찾아내신 겁니다.
글쎄요... 우리가 아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하고 수석 사제의 조롱하는 말. 엄마들은 같죠? 엄마들은 나자렛 예수의 엄마나 세월호의 엄마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똑같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죠. 찾아가서 천막에다 오줌을 싸버리고 “시체장사 하지마라. 박근혜가 죽였나? 그 여자가 선주가? 죽여라 했나? 그만 좀 해라.” 그 여자들이 엄마부대랍니다. 천주교 신자가 그 안에 있습니다. 엄마부대에. 엄마라는 말을 어떻게 쓸 수 있어요? 어버이연합이 가서 엄마들 머리끄댕이를 잡고. 어버이라는 말을 어떻게 쓸 수 있습니까? 자식들이 죽었는데, 그걸 호소하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아주 착한 신자들입니다. 주일미사 오죠. 판공성사 보죠. 헌금하죠. 본당에서 활동도 하죠. 그죠? 날개만 안 달렸지 천사지요. 그런데 저런 사건이 뻥 터지면 우리가 어떤 신앙인인가 드러나요. 교황님 오셔서 낮은 사람들은 말 못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서부터 시작해서 교황 방문은 전 인류가 보기에는 세월호에서 시작하고 세월호로 끝났습니다. 가시는 비행기 안에서 “교황님, 그 노란 리본 떼세요. 남세스럽지 않아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셔야죠.”라는 말씀에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리아나라는 천주교 신자 대통령은 못 한다. 스테파노라는 청와대 비서실장은 못 한다. 국회에서 이 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위원의 위원장이 심지어 베드로입니다. 율리아나, 스테파노, 베드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절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월호 사건은 하나에서 열까지 엉켜있어요. 천주교 탓입니다. 어떻게 신부님, 수녀님들이 교리를 가르쳐서 어떻게 교육시켜 놓으셨으면 이렇게 이런 일들이 예사로 일어납니까? “수학여행 갔다가 죽은 놈들에게 무슨 특별법이냐?” 라는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교황님의 태도와 우리 태도를 볼 때 이 사건을 간접적으로 볼 수가 있죠. 이분들 분명히 어머니도 그랬고 아들도 그랬고 당신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 전하고 잡혀간 사람들 해방시키고 억압받는 사람들 내보내고. 문규현 신부가 이북 가서 임수경을 데리고 내려왔어요. 그리고 달칵 감옥에 갔어요. 신부님들이 면회를 갔습니다. 동료 사제니깐. 어떤 주교님이 부활교서에 이렇게 썼어요. “가지 마라. 성경 어느 대목에 예수님이 형무소 가서 죄수 만난 얘기가 나오냐?” 주교님의 부활 교서예요. 얼마나 성경을 우리가 알아듣기가 힘든가를 저는 그런 말씀에서 읽었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제가 하는 말이 여러분에게 충격적으로 왔는지 모르겠네요.
두 번째,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정말 이천년 교회사에서 이 구절만큼 악의적으로 오해로 불린 구절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옛날 깡패들은 어디에다 선을 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종로파하고 남대문파가 있었고 또 한 때는 동대문파하고 남대문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로3가에 선을 긋고 만약에 남대문파가 넘어오면 팔다리가 부러졌어요. 하느님 앞에 딱 갈라놓고 요거까지는 교회가 먹고 저기까지는 황제가 먹고. 정치는 알아서 하고 교회는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KBS에 목사들이 나와서 설교를 했어요. 지금도 예사로 이 성경구절이 그렇게 인용되고 있지요. 제가 읽을게요.
2. 정행(正行)의 영성 ; 시각적 이해. ( ⇄ ⇅ ✝+ )
◇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루카 20,20~26)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선량한 사람처럼 꾸민 앞잡이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씀을 빌미로 그분을 붙잡게 하였다. 예수님을 직권과 사법권을 가진 총독에게 넘기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올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가리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저희가 황제에게 조세를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살짝 띄우지요? 일제 강점기에 순사도 데리고 오고 독립운동가도 딱 데리고 옵니다. “선상님, 천황한테 세금을 낼까요? 말까요?” 내라하면 독립투사가 “허허, 내가 아닌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히 친일파구만.”하고 가죠, 내지 마시오. 하면 그 자리에서 수갑을 채워버리면 됩니다. 방법 좋지요. 군자금은 군자금대로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로. 뿜빠이. 딱 반 가르면 된다고 이해되어 왔어요. “왜 신부들이 광화문에서 미사를 하냐? 성당 안에서 지들끼리 싹싹 빌지 뭘 하느냐?” “왜 정치에 개입하느냐?” “강우일 주교를 파문하라. 왜 교황이 세월호를 다섯 번이나 만나게 해 놓고 왜 이북사람은 못 만나게 했느냐?” 엊그제 명동 성당 앞에 플랭카드 써 붙여 놓고 대한민국의 유명한 애국자들 다 모였어요. 정의구현사제단 40주년 미사 때 그 밑에서 그랬어요. 그분들 논리는 이겁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 것, 황제의 것은 황제의 것. 대통령 것은 대통령 것. 갈라먹긴데 왜 이쪽을 넘보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라. 누구의 초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게 세금을 내라는 말이야? 내지 말라는 말이야? 단정을 지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그냥 가버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빌미로 백성 앞에서 그분을 붙잡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답변에 경탄하며 입을 다물었다.
예수님의 핵심은 어느 대답을 해도 자기는 죽어요. 그러니깐 동전 달라고. 우리 100원짜리에 누가 새겨져있습니까? 누가 새겨져 있죠. 세종대왕이던.^^ 그 뒤에 예수님은 묻습니다. “누구의 초상이냐?” 이 초상이라는 정확한 말뜻은 모상입니다. “누구의 모상(模像)이냐?” 동전에 새겨진 것은 황제의 모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옭아매서 잡으러 왔는데 “인간이 누구의 초상이냐?”를 묻습니다. 누구의 초상입니까? 하느님의 초상이지요. 그 대답을 하신겁니다. 지금. 그런데 정치가들, 기득권자들은 언제나 하느님과 악마하고 땅따먹기로 나눕니다. 악마의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권력, 하느님의 것입니다. 악마의 것 없어요.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높은 산꼭대기에서 자 봐라. 남산 산꾝대기에 가서, “서울 크지? 청와대쪽 봐. 광화문 봐. 대단하잖아? 나한테 절해. 권력 나한테 주셨으니깐 내가 줄게.”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악마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황제의 것은, 하느님의 것은, 이렇게 나눌 때 우리 머릿속에는 이원론이라는 철학사상이 들어있어요. 선이고 악이고, 하느님은 악에 대해 손 못 대시고. 요쪽만 간섭하시고. “너희들 지금 하느님의 모상을 유린하고 있어. 짓밟고 죽이고 학살하고.” 그 얘기를 하시는 거죠?
◇ 예수사건의 정치적 성격 (라자로의 부활과 예수의 운명 [요한 11장])
그 다음에 예수 사건을 봅시다. 방금 화면에서 보셨던 것. 왜 그러냐면, 사회교리의 마지막에 가면 정치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치를 안 하면 우리는 크리스챤도 아니고 악마의 자식들이나 마찬가지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교황님께 받게 되요. “아이고, 정치는 진흙탕에 개판 싸움이에요. 어떻게 그 더러운 데로 내려갑니까?”라고 할 때 교황님께서는 “정치는 가장 고귀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진흙탕에 개판 아니고요, 가장 고귀한. 이 사건을 보시면 됩니다. 라자로를 살렸고, 과부의 아들도 살리고, 회당장의 딸도 살렸어요. 딸은 숨 딸깍 끊어졌을 때 살렸으니 기적인지 아닌지 모르죠. 과부의 아들은 장례식으로 상여를 붙잡고 가다가 살렸어요. 기적 같아요. 라자로는 죽은 지 사흘씩이나 돼서 돌무덤에서 벌써 송장 냄새가 날 때 살렸어요. 진짜 부활이에요. 썩은 시체를 살리면 부활이죠. 기적이죠. 그 소식이 전해지니깐 당정회의가 열렸어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해의 대사제인 가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이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자 기적을 해요. 죽은 사람도 살려 내요. 그대로 두면 다 사람들이 믿겠어요. 그죠? KBS도 나오고 MBC도 나오고 하니깐, 조중동에도 보도되고. 그를 믿을까, 싶죠? 그런데 그 믿게 된 결과가 어떻게 되나? 보세요. 갑자기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자, 라자로를 살리는 것과 국가 안보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즉시 연결시켜 버리잖아요. 국가보안법에 딱 걸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종교적으로 돌아가신 것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돌아 가셨어요. 정치적으로. 따라서 정치를 잘 하고 못 하는 게 인류와 우리 신앙인 각자의, 한반도의 안녕이 아니라 영원한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이 나와요. 저기 밑의 니코데모의 항의 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저 사람 죄가 없어도 하나가 죽어서 백성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는 것이 우리에게 더 낫소.
◇ 요한 7,50~52 :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좀 맥락이 다르지만, 밤에 찾아 왔던 니코데모가 항의를 하죠. “본인을 잡아다 놓고 심사를 해봅시다. 본인 대답을 들어봅시다. 그리고 죽일 놈인지 살릴 사람인지 정합시다.” 라는 질문에, 같이 읽어 봅시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래서, 그래서 성경에 우리 모두의 얼굴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임스 카비젤이 “저 영화를 보시고 당신의 얼굴을 찾아보세요.”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이 불쌍하다고 찔찔 울면서 콧등 시큰한 다음에 자기 삶으로 돌아가지 말고 ‘나는 저 영화에서 어떤 배역을 했는가?’라고 물어보라고. 예수가 구세주로 인정받지 못 한 유일한 이유가 그의 출신지입니다. 출신지. 예수님 낳으러 베들레헴까지 간 엄마가 방도 못 얻었어요. 왜? 이제 곧 낳는데. 갈릴래아 사람한데 방 안 줘요. 안 줘요
자, 다음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 “인간, 하느님의 모상” (창세기)
창세 1,26~28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우리 다 아는 구절입니다, 아는 구절. 하느님의 모상, 와~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가? 알아요. 아는데 어떤 점에서 귀중하고 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이렇게 얘기하는지를 많이들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어요. 왜? 2000년 동안 교회의 설교가들과 교회의 신학이 우리를 잘못 가르쳤어요.
그 다음 페이지 보면,
◇ 창세 5,1~3 :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던 날,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를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 아담은 백삼십 세 되었을 때, 자기와 비슷하게 제 모습으로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 창세 9,5~7 :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땅에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번성하여라,“
인간 존엄성, 하느님의 모상, 그 피를 흘린 사람은 자기 피를 흘려야 합니다. 거기에 있어요.
인간은 영혼이 있어서, 인간은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어서, 인간은 똑바로 서서 걸으니깐. 이런 사상 때문에 옛날에 이단자라고 해서 화형에 처하고. 마르틴 루터가 “아무리 이단자라고 해서 화형에 처합니까?” 하니깐 이단자라는 가위를 쳐서 마르틴 루터를 교회에서 쫓아버렸습니다. “왜 불쌍한 사람 죽입니까?”라고 하니깐 “육체는 태워버리더라도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이게 중세의 가톨릭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친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깐 우리가 교황님의 사회교리 알아들겠어요? 태워죽이고 영혼 구하겠다는데. 여기 쓰인 성서구절은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니깐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자기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상세한 말씀은 각 분야의 전문적인 다음 강사들이 계속 말씀하실 거니깐 충분할 거예요.
3. 동정(同情)의 영성
◇ “성찬은 사회교리의 학교” (모령성체冒領聖體[1코린토 11,17~34])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성찬의 교리. 천주교 신자 제일 무서워하는 교리가 무언지 아십니까? 수녀님, 무슨 죄예요? 모령성체라는 죄입니다. 모령성체. 이것은 죄 중에서 성체를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없다는 교리예요.
이건 제가 직접 겪은 일이예요. 본당에서 영성체를 한다고 나가는데 “들어 와.” 어떤 여교우가 줄선 남자한테. “왜?” “씁, 들어오라니깐.” 제 앞에 앞에 섰는데 들어가지도 못 하고 앞으로도 못 가고. 그러니깐 여교우가 나와서 팔쭉지를 잡아서 쿡 눌러서 의자에 앉히고 그 자리에 대신 서서 미사수건을 가지런히 하면서 우리 모두한테 들으라고 “그따위 짓 하고 와서 성사도 안 받고 영성체 할라고 그래.”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그레암 그릭이라는 분이 ‘사물의 핵심’이라는 소설을 썼어요. 가톨릭 신자들이 얼마나 성체를 잘 못 알고 있는지. 왜냐면 여러분, 우리 들었잖아요.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분별심 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 약한 사람 많고 병든 사람 많고 죽은 사람 많고.’ 아이고 무시라. 그래서 영성체 딱 할려고 해도 양심성찰 합니다. 첫째, 미사참례 했나 안했나. 두 번 째, 여교우들에게는 그런 일 없겠지만, 거래처한테 대접 받는데 가서 뭘 주무르고 왔나. 없으면 무사통과, 가서 영성체 하죠? 합니다, 우리. 판공도 신부님들이 그렇게 화를 내시는 까닭은 미사를 궐한 죄와 생각나지 않은 죄. 두 가지 외에는 성사 볼게 없죠, 그죠? 저 수녀님들, 불쌍하게 죄 지으라 해도 못 지을 분들이 매주 성사 봐. 우리 일 년에 한두 번 판공성사 나와도, “하이고, 무슨 성사를 볼까?” 죄가 있어야 보지요. 자, 모령성체가 뭔가 봅시다.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적혀 있어요. 이 엄포의 말씀을 한 바오로 사도가 같은 성경에서 하고 있습니다. 읽어 봅시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미리 먹어, 여러분의 모임이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미사 궐한 죄가 아니에요. 6계명, 9계명 죄가 아닙니다. 여기. 누구는 배가 터지게 먹고, 누구는 배가 골아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요 그 영성체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거룩한 영성체가 아니라, 이게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이죠.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잘못 했나요? “네, 영성체 시간입니다. 천주교에서 세례 받으신 분들만 영성체하러 나오세요.” 꼭 안내하죠. 그쵸? 그러니깐 세례 받은 자. 아까 그 아줌마처럼 죄인과 비 죄인. 당당하게 나가면, 저 사람 별일 없었어? 어제 밤에 술집에서? 이런 식의 판단이 오락가락해요.
여기서는 사회 불의 입니다.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하고 부당하게 해고한 사장이 장궤틀에 나란히 앉아 있으면 사도 눈에는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주여 임하소서, 내 안에. 하느님하고 내하고 직선으로다 통하고 싶어서 우리가 그렇게 안달이죠. 그죠? 옆의 사람 보입니까? 안 보이죠. 평화의 인사, 얼굴 쳐다보십니까? 특히 여교우들. 안 보죠? 상관없죠. 그 사람이 누리끼끼 한지, 고민에 차있는지. 병들었는지 안 보입니다. 우리 눈에는. 왜? 예수님하고 나하고 앉아 있는다고.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요한복음 6장에 합니다. 그리고 빵빵빵빵 빵에 대해서 긴~ 설교를 하세요. 그러니깐 요한복음 끝에 건립성체, 이것은 내 몸이다, 내 피다 하면은 아귀가 착 들어맞아요. 정확하게 들어맞아요. 그런데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건립성체라고 말하는 성체성사를 건립하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유일하게 안 나와요. 마태복음, 마르코 복음, 루카복음 다 나오는데. 그리고 그 자리에 발을 씻어주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우리가 그 노오란 황금 잔에 있는 빠알간 포도주, 노오란 성반에 있는 하아얀 밀떡. 얼마나 거기에다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지. 그 영성체를 안하면 하루를 산 것 같지가 않아요. 그, 심리학에 보면 페티시즘이라고 해요. 어떤 물건, 총각들이 여자 팬티나 스타킹 가지고 냄새 맡기 좋아하는 이런 것 식으로. 크리스챤들이 2000년 동안 페티시즘으로 물들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건 내 피다.”하고 12시간 안에 이루어질 당신 운명을 알아요. 저기에서 흘릴 내 피. 내 몸. 그래서 너희들이 내 제자라 하면 저 코스를 따라 와야 하고. 안 따라 오면 아마 세례명 있고 성당 다녀도 내 제자 아니라는 이런 가르침인데, 우리는 보약 먹듯이 영혼의 양식 하면서 옆 사람이 굶어 죽던. 북한 삼팔선 너머에는 ‘이번에도 흉작이여서 12만 명이 아사한다.’고 조선일보에 대서특필됩니다. 년초에는 그리고 사설에는 ‘쌀 한 톨 주지 마라. 군량미로 쓰인다.’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이 성찬에서 교리를 얼마나 거꾸로 거꾸로 보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 페티시즘 fetishism
(1) [종교] 어떠한 사물에 초자연적인 힘이 서려 있다고 믿어 이를 숭배하는 일.
유의어 물신 숭배 (物神崇拜), 서물 숭배 (庶物崇拜) , 주물 숭배 (呪物崇拜)
(2) [심리] 이상 성욕의 하나. 이성(異性)의 몸의 일부, 옷가지, 소지품 따위에서 성적(性的) 만족을 얻는다.
◇ 최후의 심판은 경제적 정치적 재판 (최후심판 [마태 25,31~46])
25,40 : “너희가 내 형제들인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25,45 :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 저는 마태오복음 25장은 예수님의 우리 구원을 위한 족집게 과외라고 말합니다. 하도 많은 가르침이 있어서 우리가 어떤 걸 지켜야 할지 몰라요. 간단하게 한 페이지로 줄여서. 그 큰 책을 한 페이지로 줄여서 아니 한 문장으로 줄여서. 40절 해 준 것은 구원, 45절 해 주지 않은 멸망. 종교 가운데서 해주지 않은 것, ‘생각과 말과 행함과 뭐죠? 궐함’으로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걸 죄로 알아듣는 유일한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런데 “내가 저 사람 안 죽였어요. 내가 저 놈 밥그릇 뺐지도 않았어요. 저 놈 옷을 뺐지도 않았어요.” 라고 하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굶었을 때 안 줬고, 헐벗었을 때 안 입혔고, 감옥에 있을 때 안 찾아갔다고 해서 이걸 최후의 심판이고 이걸로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말씀이 나와 있어요. 전부 안 한 겁니다. 안 해서 멸망해요. 저도 이런 생각하면 소름이 쫙 끼치고 내가 구원받을 확률은 억만 분지 일이나 될까? 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세월호 안 되다 보니깐 ‘유가족들이 원하는 특별법 만드십시오. 주교님들이 정의평화위원회를 통해서 ’수사권, 기소권 가진 특별법을 만드십시오.‘ 라고 했죠? 그리고는 모든 본당에 서명용지를 보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이 하실지 안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들면 안 할 수도 있지요. 나는 누구 지지해서 찍었으니깐. 뭘 해도 되죠. 그런데 마태오복음 25장에 따르면요 우리가 마음에 부담 준다고 해서 외면하고 가버릴 때 그 상대는 죽어 예수님 앞에 가서 책임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십자가 판결에서 빌라도가 “나 이 사람 죄도 없는데 어떻게 판결해?”하고 소리 지릅니다. “걱정 마세요. 언도만 내려주세요. 그 피는 우리와 우리의 자손이 책임질게요.” 다음 시간에 하죠.
Ⅱ.
교회는 1894년 이래로 거의 10년마다 중요한 문서를 하나씩 냈어요. 우리가 거의 읽은 적 없지만. 대한민국 주교님들손에 가면 거의 첫 페이지 한 장 보셨을 거예요. 내용이 재미가 없어요. 그리고 아주 추상적이고. 그런데 쌓이고 쌓여서 여기 마지막 문서가 왔어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도 읽을 만 해요. ‘복음의 기쁨’. 왜냐면 교회는 좋은 게 그 다음 교황님은 앞의 것 전부에서 하나 보태서 말씀하시고 그 다음 분도 거기에서 하나 보태서 말씀하셔요. 우리가 마치 입시공부 하듯이, 이 한 권만 떼면 교회 사회 교리 다 뗍니다. 간추린 사회교리가 이만 해요. 다 읽을 수도 없고. 이 책만은 꽤 읽으실 만 해요. 그리고 아주 쉽습니다. 우리한테 어렵게 하지도 않고. 그리고 또 ‘차.카.게 살자’ 로 그치지 않고. 그 말은 양아치들 팔뚝에다 하고 다니는 거죠. 그러니깐 교황님의 가르침 ‘복음의 기쁨’이라는 것은 훨씬 셉니다. 여러분 얼굴 어디 기쁨이 있어요? 성당 나가면 얼굴에 내내 사순절 지키는 사람들 얼굴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신부님 표정은 장례미사 표정이고. 누가 이런 분위기에서 기쁜 소식을 봅니까? “자 여러분, 기쁩시다.”라고 하시면서 이 문서에서 첫 마디가, 지금까지는 ‘인권을 지킵시다, 자연을 지킵시다, 독재해서는 안 됩니다.’했는데 그런 얘기는 거의 온데 간데 없고요, 경제얘기가 나옵니다. 경제. 경제는 경제인들이 하는 거죠. 그런데 교황님께서 경제얘기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왜 경제일까? 그래서 교황님이 이 문서를 낸 다음부터, 작년 11월 24일에 이 문서를 내셨는데 제가 그때 28일날 로마에서 이분의 미사를 참석할 수 있었어요. 미사 끝나고 5분 동안 교황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 대단히 화나 있었어요. 나오자마자 “저 사람 막시스트다. 순수 진짜 막시스트 말이 교황 입에서 나왔다.” 이런 비판을 받았어요. 미국의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인 칼럼리스트로부터. 그래서 이걸 세계 언론에서는 교황님 충격이라 합니다. 프란치스코 임팩트.
교황님이 이번에 한국에 다녀가시면서 임팩트, 충격을 남기고 가셨어요. 아, 세월호 다 잊어버리고 싶은데 비행기에서 내려와서 만져, 대전에 와서 만져, 광화문에 들어가면서 차에서 내려서 만져. 전부 다섯 번쯤 되요. 그러니깐 KBS에서는 보도를 안 했어요. MBC 보도 안 했어요. 조선일보, ‘타인의 고통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 뺐어요. 교황님 충격, 임팩트를 못 받아들이죠. 싱긋 방긋 웃고 가셔요~ 그래서 교황님 오시기 전에 우리나라 언론에게 몇 번 호소를 했습니다. “교황의 이미지 가지고 장난하지 마세요. 교황의 가르침을, 메시지를 전하세요.” 그런데 제가 보니깐 채널A에서 교황께서 광화문에서 미사 드리는 한 시간 내내 김정은에 대해서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착한데 저렇게 나쁜 놈이 있다. 1,2,3,4,5,6, 이렇게 열거하면서. 교황님의 임팩트를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그래서 우리 국민이 그 임팩트를 받아서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꿀까봐 그렇게 무서워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리고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생각을 하라. 그 전환을 하라.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문서 다 좋지만, 이 책의 4장을 꼭 읽어 보세요. 오늘 그걸 가지고 좀 제가 핵심적으로 얘기를 했지요? 왜 경제 얘기를 하세요? 교황님이. 경제 얘기는 뭐 하러 하시냐? 는 식의 반문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이 분이 알았어요. 당신은 아르헨티나에 살았습니다. 그죠?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에서는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추악한 전쟁이라는 것을 했어요. 군인 쿠테타를 일으킨 다음에 대학생, 노조지도자, 교수, 모든 지도자를 3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때부터 기록에 의하면 그 장군들한테 쭉쭉빵빵하게 생긴 여자들이 배급이 되요. 노조지도자, 대학생에서. 그러면 그 여자를 마음대로 유린하고, 죽이고, 난자하고, 죽고 나면 다른 여자가 또 들어오게 되요. 그걸 그 장군의 딸이 목격하게 되었어요. 그 집에 거의 3일마다 여자가 바뀌어서 매달려 있는 걸. 그리고 그 장군은 텔레비에서 “나는 매일 미사를 안 하면 영성체를 안 하면 하루가 의미가 없어요.” 왜 미사를 드리는 로메로 주교를 천주교 신자인 장군의 명령에 따라서 천주교 신자인 군인들이 와서 기관총으로 쏴 버리고 가는지, 그걸 교황님께서 생각하신 거예요. 왜 엘살바도르에서 미국의 수녀들이 비행장에서 내리는데 천주교신자인 장군의 명령에 따라서 천주교 신자인 군인들이 그 수녀님들은 다 50대 60대 여자들이예요. 젊은 처녀들도 아니에요. 가서 온 몸을 총으로 때려서 갈비뼈가 하나도 안 남았어요. 그리고 윤간을 하고 현장에서 죽여서 그 자리에서 묻었어요. 그리고 10년 동안 가톨릭신자인 미국 국무 장관이 “이 수녀님 잘 못했다.” 군인들 10년 동안 변호해줬어요. 왜 이것이 가능하냐를 교황은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선거에 나오면 국민들이 찍어요. 그 사람들이 정권을 잡습니다. 왜 이게 가능한가? 가톨릭 국가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서, 가톨릭 장군들에 의해서.
여기는 돈이 있어요. 그 나라의 부를 누가 쥐느냐? 입니다. 잘살게 해주고, 돈 벌게 해주면 찍어요. 찍습니다. 그러니깐 교황께선 이 문서에서 말씀하세요. “우리는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니고요,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이렇게 가슴을 치라는 그 초대예요. 우상숭배를 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요. 우리 양심을 인두로 지져버리듯이..
여기서는 무관심의 세계화라고 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없어요. 이태석 신부가 ‘공인된 무관심’이라고 했어요. 전 인류가 다 공인해요. 무관심 좋은 거예요. 죽은 놈만 불쌍하고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어. 나는 먹고 살고, 번영하고, 우리 처자식 살아가는 여기에다 집중합니다. 그러니깐 교황께서 가장 정확하게 찍은 거예요. 다른 분들은 거기까지는 안 가고, “이렇게 인권을 유린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도 파업할 권리가 있지요. 정치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전부 그 얘기들이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차.카.게. 살자’이 선에서 그친 거예요. 그런데 이 분은 그런 건 안 합니다. 돌직구를 던져요. 이분은 “여러분, 웰빙종교가 좋으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처자식을 위해서, 남편의 승진을 위해서, 아들의 대학입시를 위해서 싹싹싹 빌지요? 그쵸? 나머지 세계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 보여요. 관심 없어요. 나는 이 사람을 찍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해요. 이것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왔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랬어요. 내가 찍은 사람의 모든 정치는 내가 하느님 앞에서 책임집니다. 교황께서 그걸 가르쳐요. 정치가는 내 성향에 따라 택하는 게 아니고요, 내 구원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분은 경제 독제라고 얘기 했어요. 지금 우리가 삼성 딱 하면요, 정부가 함부로 못 건드립니다. 전 세계 대기업이 우리나라에 와서 건드렸다하면 어찌 될지 몰라요. 주식시장 장악 한 번만 어떻게 하면 IMF 다시 와요.
이런 문제들이 제 4장에서 다루어집니다. 부탁드립니다. 그거는 꼭 읽어 보세요. 그리고 나야 교회가 왜 저런 가르침을 하고, 왜 사제단이 거리에 나가고, 왜 교황께서, 교황께서 막시스트라고, 빨갱이, 이건 종북도 아닙니다. 좌경도 아니에요. 빨갱이입니다, 라는 말을 세계 뉴스 언론에서 들으셨어요. “당신 목숨 아까운 줄 알아.” 협박도 들었어요. 그러니깐 교황께서 “나 살만큼 살았어. 막시스트라면 나에게 욕이 아니고 칭찬이에요. 아르헨티나에서 만나는 그 막시스트, 다 선량한 사람들이었어요.”
신자유주의 경제라고 합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죠. 그런 풍토를요. 세제 혜택 다 주고, 모든 혜택을 줘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삼성 재벌이 큰 케이크를 만듭니다. 이것을 낙수효과라고 그래요. 경제학에서. 이 무대만큼 큰 케이크가 만들어지면 제가 아무리 배꼴 있게 파도 다 못 먹어요. 이 만큼 떼먹고 나면 끽 소리 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일어나서 접시와 포크 들고 와서 한 조각씩 먹을 수 있어요. 그래서 대기업을 키워주면 국가, 국민들에게도 혜택이 온다는 것이 낙수효과입니다. 교황께서는 이 문서에서 낙수효과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를, 물론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안 쓰십니다만, ‘사람 죽이는 경제!’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수단이 신자유주의 경제인데 이 교황 정면으로 맞붙었어요. 그래서 프란치스코 임팩트라고 합니다. “PAPA”라고 적혔지요? 이태리에서는 주간지가 나와요. 지금 교황 한 분을 두고 주간지가 나와요. 한 분,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을 두고도 그 한 사람을 두고는 주간지가 못 나옵니다. 100페이지 가까운, 매 주, 불티나게 팔려요. 전 세계 지성인이 받아 보며, 맞다! 지금 지구호가, 세월호가 아닙니다, 대한민국호도 아니고, 지구호가 침몰하고 있는데 거기에 맞서서 얘기하시는 분이 교황이시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프란치스코 임팩트라고 하지요?
그 문제에 대해서 교황께서 케이크 이론을 얘기하니깐 다른 이론을 끄집어냈어요. 술잔의 비유라고 합니다. 술잔. 큼지막한 술잔이 있어요. 기분 좋게 술을 붓습니다. 콸콸콸콸 붓죠. 그럼 그득히 차오르죠. 그러면 넘치죠. 아까워요. 그 비싼 샴페인이 흐르면. 나라도 호로록 핥아 라도 먹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모금 먹을 수 있죠. 교황께서 말합니다. “술을 부으면 부을수록 술잔이 커집니다. 한 방울도 안 흐릅니다.” 이 이론으로 전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입을 꽉 다물었어요. 그 많은 극장들, CGV로 통일됐죠? 그 많은 빵집들, 빠리바게트하고 뚜레쥬르로 통일됐죠? 대기업이 싹쓸이 했죠?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해요? 골목골목에 뭐가 들어와요? 편의점. 큰 거 먹고 놔두지 않습니다. 싹쓸이. 싹쓸이. 읍에 대형백화점이 다 들어왔는데 이젠, 제가 함양에 있습니다. 아침에 강의 때문에 올라왔습니다. 읍에 구멍가게 하나 없는 곳에 꾸우가 생기고 세븐일레븐이 생기더라구요. 이게 신자유주의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도요, 여기 퇴직하신 분 같은데 안심하고, 아무 때라도 정기해고 될 수 있어요. 젊은이들은 비정규직 외에 취직자리 없어요. 여기서 말하는데 경제활동의 주역은 노동자입니다. 노동자들을 써먹다가 때가 되면 부품 뽑아 교체하듯이 폐기해 버립니다. 노동자가 여러분, 폐기물이 됐어요. 아주 사회문제 핵심을 꼽은 겁니다. 핵심을 꼽았어요. 그래서 교황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해요.
한국에서 이런 말씀, 거의 안 나왔어요. 거의 텔레비에 인터뷰도 있고 오만 거 다 있었는데 안 나왔습니다. 왜? 이 핵심적인 것은 빼고 얘기를 했지요. 그리고 이런 기업이 다 벌어서 국민들과 확 나누고, 부자가, 한 기업이 클수록 그만큼 나라가 국민이,.그것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순진한 믿음이라고 그런 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해요. 여러분은 귀에 거슬릴지라도. 보세요. 교황의 이런 가르침은, ‘저 사람은 저런 가르침을 하는가 보다, 나는 이쪽이니깐’ 라고 했으면 되는데 아까 마태오복음 25장은 예수님의 족집게 과외라고 했어요, 구원에서. 사회교리, 거기서 해방의 영성이 나오겠어요? 사회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윤리신학이 아닙니다. 윤리신학 아니에요. 영성신학이에요. 우리가 어떤 영을 갖고 사느냐? 입니다. 그래서 교황께서 이렇게 접근하고 가르치셔도, “저 양반 왜 저래? 뭐 하다 말겠지.“
한 가지 예를 들게요. 서기 2천년에 교황께서 무릎을 꿇었어요. 가톨릭교회의 과거사를 반성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죄, 종교 전쟁을 일으킨 죄, 마녀 사냥을 한 죄, 이단자들을 화형 시킨 죄, 유대인들을 학살한 죄, 여자들을 박해한 죄, 죄,죄,죄,죄... 이천년 사순절 첫날 성 베드로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과 전 세계 인류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전 세계 지성인들이 얼마나 감격했는지. “아, 가톨릭교회는 저렇게 할 수가 있겠구나!” 그 3년 전에 교황님께서 세계 추기경들을 모아 놓고 “3년 후에 우리가 교회의 과거사를 반성하자. 갈릴레오 사건도 우리가 잘못했고. 잘못한 것 많지 않나?” 그 때 50여 명의 추기경님들 중 찬성하는 분이 한 분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교회는 이렇게 갑니다. 교황은 절대 군주나 마찬가지니깐 교황이 하면 하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사회문제에 대해서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 발언할 권리가 있고 발언해야 합니다.” 여기 182,183장에 있어요.
182. 현세의 가변 상황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발전이 더 필요하고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것으로 들어가지 않더라고, 우리는 구체적인 가르침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일반론에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들이 “복잡한 현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실천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여러 학문의 기여를 받아들여, 교회의 사목자들은 인간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있습니다.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 존재의 전인적 진보를 포함하고 또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시지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가 “누리게 해 주시려고”(1티모 6,17), 곧 모든 사람이 누리게 해 주시려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 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183.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도록 이를 성당 안에 가두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분들은 그러한 주장을 용납하기 못하였을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해 주신 이 아름다운 행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슬픔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인함과 나약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류 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확실히 “국가와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가 정치의 핵심 임무”이지만,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무엇보다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제안을 하며 개혁적인 활동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성심에서 나오는 희망을 끊임없이 가리킵니다. 이와 동시에 그 사상은 “가톨릭교회는 교리의 성찰 단계든 사회 분야에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노력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교회는 정치문제에 대해서 말 좀 하지 말고 우리 신자 편하게 마음에 평화주기 위해서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여기 명기되어 있습니다. 교황의 가르침이에요. ‘종북 교황 물러가라’하면 이야기 끝나지만. 그러면 가톨릭 신앙은 접어두고 나가야죠. 누가 그 말 했어요? 사제는 정치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성직자는 예언자로서 발언하고 약자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내세요. 안 내고 있으면 여러분 직무유기입니다.” 라고 여기서 강조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상인 노릇을 하세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목청을 올리세요.” 그러니깐 저 신부들 거짓예언자다. 라는 소리를 합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가? 우리가 하느님 보다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웰빙 종교를 찾아요. 우리는 영화의 성모님처럼 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서처럼 계속 하라고, 죽으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 본 경험 있어요? 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하신 거예요. 저 영화를 보면. 우리는 웰빙 종교를 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고통이 불안이, 남편 승진이 잘 안 되고 아들 대학에 떨어지고 내가 병 걸리면 태도가 달라지요. 머릿속에서 계산을 쫙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없나? 그런데 없습니다. 판공성사 봤죠, 주일미사 봤죠, 교무금 냈죠, 성당활동 열심히 했죠, 신심활동 열심히 했죠. 뭐가 빠졌어요? 그러고는 묵주 칙 던지죠. “하느님,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돼요. 아니, 웃으시는데 솔직하게 짚어 봐요. 우리 신앙이 지금 그렇죠.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왜 이 불안이 와요?” 그러고는 성당 안 나가버리죠.
그와 같은 우리 반응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역사에 나오잖아요. “당신 구세주 되려면 내가 정책을 알려 주겠어.” 유다 사막은 모래로 된 사막 아닙니다. 돌로 된 사막, 그러니깐 빵 덩어리 비슷해요. 통으로 된 빵. 잘라 놓은 빵 아니고. “자, 저 돌을 기적으로 빵으로 둔갑시키면 당신은 다 끝나는 거야. 자, 성공.” 구세주께서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그 한 마디는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건 예수님 말씀이고 저는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기면 세상이 만사형통이에요. 예수님이 정말 모르셨어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돈을 섬기면 조금 있다가는 하나는 무시해요. 하느님 없어도 되요. 아무 상관없어도 되요. 이게 운명이에요. 돈을 쥐어주는 사람, 벌게 해주는 사람, 확보해 주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걸게 되죠. 이것에 대해 가차 없이 193이 말합니다.
193. 다른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라는 명령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자비에 대한 하느님 말씀의 가르침을 다시 읽고 그 말씀이 교회의 삶속에 힘차게 울려 퍼질 수 있게 합시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자비는 하느님의 심판 날에 이길 수 있게 해 준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여기에서, 야고보는 바빌론 유배 이후의 풍요로운 유다 영성 전통에 충실합니다. 이 유다 영성 전통은 다음과 같이 자비에 특별한 구원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다니 4,27) 이와 같은 전망에서, 지혜문학은 자선을 곤궁한 이들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9) 이러한 생각은 집회서에서 더욱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 이와 동일한 종합이 신약에도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 이 진리는 교부들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교의 자기중심적인 쾌락주의에 맞서 예언자적 저항을 하며 대안 문화를 일으키는 데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한 가지 실례만 들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화재의 위험에서 우리는 당연히 불을 끄러 물 있는 데로 달려갈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의 메마른 지푸라기에서 죄의 불길이 솟아올라 곤경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자비를 실천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을 끌 수 있는 샘이 있는 것처럼 마냥 기뻐할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입문자 교리교육)
194. 이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아주 단순 명료하여, 교회는 이를 상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본문에 대한 교회의 성찰은 그 힘을 줄이거나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용기를 가지고 그 권고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왜 그토록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까? 개념적인 도구는 설명하고자 하는 실재에 더 가까워지게 하려는 것이지 우리를 그 실재에서 더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형제애로, 겸손하고 너그러운 봉사로, 정의로, 가난한 이를 향한 자비로 그토록 힘차게 초대하는 성경의 권고들을 설명할 때에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이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 그토록 분명한 것을 구름으로 가립니까? 우리는 단순히 교리적 오류에 빠지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빛이 가득한 이 생명과 지혜의 길에 충실히 머무르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통교리의 옹호자들은 가끔 수동적이라거나 특권층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무참한 불의의 상황과 그 불의를 지속시키는 정치 체제와 관련하여 공모자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이건 아주 분명한 얘기에요. 절대 이걸 ‘꼭 그렇게 상대적으로 하라는 말씀은 아니고’, ‘말하자면’, ‘요컨대’ 이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개념적인 도구는 설명하는데 가까이 가는 것이지 구름에 가려서 멀리 감추어 놓는 연막전술 아닙니다. 성경에서 마태오복음 25장 같은 게 나오면 딴전을 부리지 마라. 왜 그렇게 분명한 말씀을 구름으로 가립니까? 그래서 제발 오르독스에서 교리, 교리, 이단, 이단 하지 말라. 정통교리 하는 사람일수록 수동적이고 특권층 편들고 정치체제에 공모자라는 말을 듣는다. 교황님 회칙에 나온 겁니다. 194항 문서에요. 그런데 그 말들 전부 우선 내 속에 거북하고, 내가 읽는 신문에 거북하고, 하루 종일 보는 종편 TV에 거북하고, 내가 찍은 사람에게 거북하니깐 듣고 쉽지 않지요. 요컨대 그런 말 하시는 것 보다, 자기가 오래 해봤자 10년 하겠죠...
53.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분명한 선을 그어 좋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배척입니다. ... 인간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리는’문화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단순히 착취와 억압 현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어떤 것입니다. ...
54.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 사람들은 자유 시장으로 부추겨진 경제 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낙수효과’이론을 여전히 옹호하고 있습니다. 사실로 전혀 확인되지 않은 이러한 견해는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 제도의 신성시된 운용 방식을 무턱대고 순진하게 믿는 것입니다. ...
자유경제 체제가 노동자를 뽑아 버려요. 북한을 뽑아 버려요. 호남이라는 곳은 잘라 내버려요. 젊은이들을 잘라 버려요. 이런 식으로 나머지 사람들을 폐기처분하는 문화는 하느님 눈에 인류라는 전 공동체가 침몰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교황의 가르침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우상숭배자인가 아니가 하는 것은 쉽게 뉴스에 뭐가 나오느냐? 라 했어요. 아니면 여러분이 채널에서 어떤 뉴스를 보시는가가 여러분이 우상숭배를 하시는지 하느님 숭배를 하는지가 정해집니다. 많은 분들 세월호 잊고 싶죠? 잊을 수 없어요. 왜? 전 세계 언론들이 교황님 따라서 왔어요. 서울에. 6·25 폐허에서 지금 광화문이 얼마나 위대하게 부흥했는가를 봤습니다. 100년 동안 천주교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고 죽이던 사악죄인들(반역도들)이 복자로, 성인으로 시복되는 것 봤어요. 그리고 교황이 다섯 번이나 세월호 사람들 손을 잡는 걸 전 인류가 봤습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전 인류가 지켜보고 있어요. 제가 무슨 부흥회 연설 같이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말씀 드리겠어요. ^^
55. 이러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를 우리와 돈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지배하도록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금융위기는 그 기원에 심각한 인간학적 위기가 있다는 것도 간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곧 인간이 최우선임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 인간을 인간 욕구의 하나로만, 곧 소비욕의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56. ... 그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고 때로는 가상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독재가 출현하여 일방적이고 무자비하게 자기 법과 규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 권력과 소유욕은 그 한계를 모릅니다. ...
57. 궁극적으로 윤리는 시작의 범주를 벗어나는 책임 있는 응답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를 이끕니다. 사람들이 이 시장의 범주들을 절대화해 버리면, 하느님께서는 통제할 수 없고, 다루기 힘들며, 위험하기까지 하신 분으로만 보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온전한 자아실현을 하고 온갖 예속에서 벗어나라고 인간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윤리, 특정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는 윤리는 균형과 더불어 더욱 인간다운 사회 질서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금융 전문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옛 현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기를 권고합니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라자로에 관한 강론」
그래서 55항은 우리와 돈의 관계는 돈이 우리를 지배하게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새로운 돈이라는 우상을 만들었고 그리고 경제가 우리를 독재하도록 허락했는데 문제는 경제는 무자비하기 때문에 끝까지 수탈하지 먹을 만큼 먹고 끽 소리를 내며 물러서지 않는다. 57항까지 쭉 이어집니다. 어떻게 타인들의 고통이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양심의 화인을 맞아버린, 집단적인 부마현상(付魔)입니다. 집단적인 부마현상. 그래서 기업에다 절대 자유를 주면서.
이 정치가 어느 정도냐 하면, 크리스챤들은 다 용서하고 다 잊어버린다며, 사람이 무죄한 것 알면서 군중 앞에 내 놓습니다. “자, 이 정도로 반쯤 죽여 놓았으니 됐지?” 모든 군중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죄도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느냐?” “그냥 죽여만 주십시오. 책임은 우리가 질 테니깐.” 그 총독의 이름, 가톨릭 신자 13억, 다른 크리스챤들 7억해서 20억이 주일마다 그 이름을 외웁니다.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그 이름이 암송됩니다, 기도에서.
인류사에서 가혹했던, 무자비했던, 학살을 저질렀던 모든 정치가가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반복됩니다. 그 사람이 그럴줄 몰랐다고 변명하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의 모든 정치에 대해서 하느님 앞에서 책임지는 것이 신앙인이지요. 절대 우리들은 냉소하는 것으로 세상을 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아랍세계에 대해서도.
자, 공산주의를 만들어서 실컷 싸웠습니다. 100년 동안 싸웠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없어져버렸네요. 지금 삼팔선 이북에 공산주의라고 흔적이 하나 남아 있는데. 미국이 뭘 찾았어요? 아랍세계를 찾았어요. 이라크 치고, 아프카니스탄 치고, 리비아 치고, 에집트 치고, 시리아 갈 때 이 교황님이 등장했네요. 기억나시죠? 우리에게 “단식하고 기도하라.” 그리고 유럽 모든 국가 원수들에게 교황께서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무기장사요, 전쟁 아닙니다. 십자군 아닙니다.”라고 썼어요. 유럽 사람들이 그 말에 따라서 미국의 공격에 동의를 안했습니다. 전쟁 하나 막았지요? 그만큼 그분의 말씀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랍세계 잘라 내버리고, 어느 지방을 잘라내고, 뭘 잘라내고, 깜둥이를 잘라내고... 이런 식으로 배척하는 우리경제는 마지막에 뭐가 남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교황께서 정말로 당신의 공격을 집중한 것이죠. 그다음에 이분의 말씀은 이렇게 갑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이런 얘기로 가지요?
우리는 인간입니다. 제가 함양에 내려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 라는 교부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의 라틴말로 됐는데 여기서 쩌기 만큼 썼어요. 제가 죽은 때까지 요만큼이라도 번역하기 위해서 그렇게 앉아 있는데, 그분이 그렇게 말해요.
사람이 뭐냐? 인간의 본질이 뭐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다 인정하시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다 인정하시죠? 성경에 나와 있어요.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삼단논법으로 정확하셔요. 인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대표적인 저서 ‘신국론’, 분도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이 만한 책이 세 권짜리예요. 인류 천사들부터 인류 맹꽁지로 태어난 놈까지 두 조각으로 쪼개놔요. 마태복음 25장처럼,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쪼개놔요. 딱 하느님의 나라가 옵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그 나라에 속하는지를 얘기해요. 인간의 본질이 사랑이니깐,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에 속하고 사랑으로 지상의 나라에 속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랑이냐에 따라서. 그래서 이분이 신국론에서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인 사랑”으로. 여러분은 하느님의 모상이니깐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사랑이 본질이에요. 그 사랑이 일로 끌고 가면 일로 가고, 절로 끌로 가면 절로 끌로 가게 되어 있어요. 사랑으로 구원 받고, 사랑으로 멸망해요. 이분의 얘기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사로운 사랑이고 무엇이 사회적인 사랑입니까? 전 쉽게 풀어서 이 양반의 이 폼이 (십자가를 가리킴) 사회적인 사랑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모든 사랑은 사사로운 사랑입니다. 절대 그리스도교도의 사랑 아니고 더구나 아우구스티노 위대한 성인의 말씀에 따르면 하늘나라에 속하지 못 합니다. 저렇게 되면 팔이 안으로 굽을 수가 없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을 극복해야지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신앙의 경지가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에 대한 의혹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지난 교황님, 베네딕토 16세가 사회적인 사랑은 ‘정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치하는 것은 투표밖에 없는데 하여튼 정치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회적인 사랑이 드러나거나 사사로운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런 면의 사건이 하나 잊을 수 없는 게 있어요. 우리 집안에 청담동에 살았던 분인데, 97년이에요. 선거 때, 거기에 노인이 계셔서 다 모였어요. 식사를 하다가 숙모 되시는 분이 한 마디 하시더군요. “내가 어제 잔치를 준비하려니 바빠 사람 하나를 불렀는데 파출부가 오더니 아주머니, 대통령이 바뀌면 우리도 아주머니처럼 살 수 있다 네요.” 그 사람이 사회적인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느냐, 아니면 있는 놈들 편드느냐를 가르치는데, 그 가르침대로라면, “아주머니 정말 고생하시며 사시는데 원하시는 대로 됐으면 좋겠네요.” 라는 대답이여야 하는데, 그분은 솔직하게 우리에게 털어 놓으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확 뒤집히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너무나 솔직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줌마, 지금 집에 가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 그 아줌마 쫓겨난 지도 모르고 슬리퍼를 신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 해.”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모습일 수 있습니다. 지금 낮 시간이기 때문에 주부들께서 많이 오셨는데, 뭐 있는 것 가지고 살지요.
그러나 어떤 경제학자가 보니 영남이 호남의 경제지수 보다 딱 세 배예요. 그리고 웬만큼 좋은 시설과 공장들은 추풍령 이남에 있어요. 그러나 인간이 가진 것이 그렇게 단단하지 않아요. 핵발전소 하나 사고로 우리 발밑이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맘몬을 섬기고 안심하고 있을 때.
그래서 그분이 정치라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 할까봐 지금 이 문서에서 교황님께서 “정치는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왜냐하면 그들의 결정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뿐 아니라 우리가 찍었으니 영혼의 문제까지 좌우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지요. 그래서 추기경님들이 교황 뽑을 때 투표지를 접어서 앞으로 나갈 때, 거기가 시스티나 성당인데 제단 앞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어요. “나를 영원한 심판을 내리실 주님 앞에서 나는 이 후보가 적당하다고 해서 뽑습니다.”하고 투표함에 표를 넣습니다.
교회의 가난한 사람의 우선적인 선택. 우리는 이러면서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우구스성인이 지적했잖아요. 여기에 여러분이 어느 나라 소속인지 결정하라.
해방의 영성과 관련해서 한 두 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초대 받아 이 자리에 선 사람이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 해방신학을 소개한 사람입니다. 죄가 큽니다. 왜냐면 80년대는 KBS 방송에서 연 사흘 동안 해방신학이 얼마나 나쁜가를 9시 뉴스 후에 한 시간씩 강좌가 있었어요. 베네딕토 16세도 해방신학이라는 것을 아주 막시스트에다 그쪽으로 나쁜 신학이라고 망치질 하는데 평생을 바쳤어요. 그리고나서 작년에 해방신학을 썼던 분 중 구티에레즈가 교황청에 갔어요. 교황님과 함께 미사를 드렸어요. 불손하게 교황청에서 강연을 했어요. 불손하게 교황청에서 책을 냈어요. 교황청 출판사에서. 공동저자가 누구냐 하면 그것을 때려잡는 검찰총장 추기경이 같이 썼어요. 그리고 지금 교황님이 추천 서문을 썼어요. 어떻게 되나?^^ 그리고 신학자들이 교황청에서 발표했어요. “해방신학은 더 이상 그늘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이분이 누구와 싸움을 붙었다고 했지요? 독재와도 아니고 인권 이런 거 아닙니다. 경제하고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니 경제문제를 다룬 유일한 신학이 해방신학이었어요. 분도출판사에서는 그 책 나오자마자 판금을 당했고, 제가 남산에 끌려가서 보니깐 세상에, 내 책을 페이지마다 줄 치고, 쪽지를 붙이고 해서 읽은 독자는 저는 뭐 중앙정보부 밖에 없었어요. ^^
교황님께서 왜? 경제가 사실 인간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몸과 영혼으로 살아요. 그런데 마치 영혼만 사니깐 이단자라고, 마녀라고 해서 태워 죽이니깐 왜 태워 죽이느냐 했더니 몸을 태워서 영혼을 구한다는 이런 형편없는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교회가.
구티에레즈 신학자가 90이 다 된 노인인데, 사마리아인 설교를 마지막으로 했어요. 교황청에서. 교황님과 모든 추기경들과 주교들 앞에서. 마치 어떤 분들에게는 김정은이가 와서 연설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 기분 나쁘기가. “누가 네 이웃이냐?”를 성직자들에게 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은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아니고, 여러분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요, 여러분이 찾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교황 된 첫날부터 밖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사고 칠 것 알아요. 자동차 쌩쌩 달리고. 압니다. 그러나 밖에 나가서 사고치는 교회가 곰팡이 냄새 쾌쾌하게 나는 곳에서 창문 다 걷어 닫고 싹싹 빌고 있는 웰빙 종교보다 나는 천 배나 좋습니다. 가서 가난한 사람들 만나세요. 가난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살덩이에요. 가난한 사람들 만지면요 그리스도의 살 만져져요. 그러고 나면요, 복음화는 저절로 되요.” 이번에 말씀 하셨죠? “누구 개종시키려 하지 마라.” 여러분의 얼굴에 즐거움이 있고 성당에서 나오는 얼굴에 밝음이 있고, 나누고요, 가난한 사람들과 바쁘게 살고 하면요, 우리 이태석 신부 보세요, 예수천당 불신지옥 그 말 했어요? 안 했는데 그분에 대해 감명 받으니깐 세계 사람들이 나중에는 믿으면 성당 가겠다고 하잖아요. 그게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 분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
질문
1. 세월호 특별법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제정하는 법입니까? 사고 발생의 원인과 대처 방안을 위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법이라면 성역없는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가해자가 수사범위를 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합니까?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교수님의 의견을 묻겠습니다.
세월호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약자들의 뜻이나 권리가 통하지 않고 있는데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간절해집니다. 저를 포함한 한 개인의 행동이 혹은 생각이 무력함과 지치는 것을 느낄 때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 네, 제가 대사로 있을 때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있었습니다. 교황청도 본당에서도 주일날은 연미사를 안 드려도. 아시죠? 그런데 교황께서 주일에 희생자들을 위해서 미사를 드리셨어요. 또 기억나는 것은 그때 성공회 윌리암스 라는 대주교가 “이렇게 수십만 명이 이렇게 죽는데 아직도 내가 그리스도교 신자고 성직자인 게 믿기지 않는다.” 그 고통 앞에서 아파하시는 거죠. 그런데 아랍대사들이 여러 명 나한테 몰려 왔어요. “어떻게 한국에서 어떤 목사가 하느님 안 믿어서 아랍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떼죽음 당했다고 욕을 했는데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그럴 수 있느냐?” 기억나세요? 어떤 목사가 그랬어요. 그러니깐 이번 세월호 사건을 두고 교황님 말없이 손을 잡아 주셨죠? 그 시선과 애정어린 분하고 매몰차게 그걸 거부하고 특별법을 만들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린다느니 어떻다느니, 심지어는 무슨 폭행을 했다고 보세요, 세월호 거의 한 달 동안 전혀 보도 안하던 언론들이 그걸로 9시 뉴스에 세 꼭지, 네 꼭지, 다섯 꼭지들로 풀어가요. 세월호 유가족들을 거의 폭도들로 만들어요. 저 십자가 밑에서 우리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안 끝났지요? ‘조상도 모르는 놈, 임금도 모르는 놈, 저 대역죄인, 삼족을 멸해야지.’ 하던 그 박해자들 지금 다 어디 갔어요? 우리가 가톨릭 신자니깐 우리 조상 족보 따져보니깐 의금부에 있었고, 포졸이고, 현감이고... ‘우리가 박해자다.’ 아무도 생각 안 하죠? 우리는 착한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순교자의 후손이죠? 예수님 말씀 있죠. “너희가 예언자들 무덤 장식하고 예언자들 시성, 시복하고, 성지를 개발하는데 그건 너희가 예언자들을 죽인자의 후손이라는 증거이다. 이 예언자부터 마저 죽이고 하느님 보낸 모든 예언자 죽여라. 그 대신 그 모든 사람들의 피, 이 세대에 모두에게 쏟아질거다.” 이 저주의 말씀 성경에 있습니다. 제 창작 아니죠? 그러니깐 우리 신앙인은 평소에는 정말 천사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질책해서는 안 됩니다.
성모님께서 아기를 낳아가지고 성전에 가신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든든하셨겠어요? 성전에 딱 가서 “하느님, 제가 낳은 당신 아들입니다.” 여기 있는 엄마들, 남편 앞에서 그런 말 해 보신 적 있죠? 그죠? 성모님 말씀 하실 수 있으셨어요.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앞에 인류의 자존심입니다. 하느님을 아홉 달 동안 배에다 품고, 젓 먹이고, 기저귀 갈고, 씻어주고, 먹이고. 얼마나 당당해요? 인류가 하느님 앞에. 시메온이 아기를 받은 다음에 한 말 기억하세요?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넘어지고 걸리게 합니다. 왜? 이 사람만 보면 사람이 자기 속마음을 숨기지 못 하고 까발려 버립니다.” 세월호 사건이 그래요. 우리 신앙을 드러내는, 우리 신앙을 까발리는 무서운 걸림돌이에요. 이 세월호가 머리에 떨어지면 우리 머리가 부서집니다. 걸려 넘어지면 무릎이 깨져요. 그 앞에 우리가 놓여 있어요.
정치만 해결할 수 있어요. 정치는 가장 고귀한 사랑이에요. 정치가 해결 안 하면 저거 해결이 안 됩니다. 꽉 막혀있지. 그래서 훌륭한 정치가들이 뽑혀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법으로 해야 하고, 특별검사가 나서서 철처하게 조사할 수 있어야여 하고, 그래서 ‘아, 이렇게 됐구나. 정말 우리 아들은 수학여행 가다가 죽었구나.’ 수긍할 수 있으면 되요. 전 세계가 돌아보고 있는 100년 박해를 이겨낸 한국 교회의 정체도 지금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답도 아니지만 대답으로 대신 합시다.
2. 선생님께서는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 제직하시면서 교황청의 분위기와 태도를 저희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교황청의 분위기와 움직임을 지켜보고 게실 것 같은데 당시의 교황청 분위기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출되신 이래로 지금의 교황청 분위기와 움직임에서 어떤 다른 점을 보고 계신지요?
- 제가 2003년에 부임했을 때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과 30분 앉아서 얘기를 했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에요? 그때도 그분은 침을 흘리면서 수건을 계속 닦으면서 그런데 머리는 아주 명석하셨어요. 그 병이 그렇죠? 몸은 근육이 불편한데 머리는 너무 멀쩡하신 거에요. 제가 한국에 대해 얘기하는 걸 몇 가지 바로 잡으셨어요. 그 교황님이 계실 때 2004년에 EU가 탄생했습니다. 전부 로마로 와서 유럽연합 탄생 조문에다 싸인을 했어요. 그런데 유럽연합의 탄생에 정말로 교황청에서 적극적으로 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헌법이 만들어질 때 첫 구절에다, 마치 대한민국은 삼일절 정신을 이어받아 ... 이렇게 되어 있죠? 그것처럼 ‘유럽은 그리스도교를 뿌리로 하는...’ 구절을 넣어달라 했습니다. 20년 동안 EU 탄생에 공을 들인, 그리고 30여명의 그 지도자들이 다 크리스찬이었고 2/3가 가톨릭 신자였어요. 그리고 안 넣어줬어요. 교황청이 얼마나 큰 굴욕을 맛 봤는지. 그리고 언론들이 보도했습니다. 왜 안 넣은 걸까? ‘자유, 박애, 평등, 민주’등 전부 성경에서 왔습니다. 인정합니다. 현대 유럽사회 건설에 나선 사람들은 다 크리스찬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그리스도교는 현대 유럽의 건설에 이바지한 바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여러분 삼총사 보시죠. 악당이 누구에요? 추기경이죠, 그죠?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평가 받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났을 때 주교들, 신부들, 수녀들 줄을 딱 세워 놓고 찰칵찰칵 모가지를 잘라버렸죠? 민중의 적이었습니다. 1894년부터 교회가 이 사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100년 됐으니깐 적어도 어떤 반응은 있으려니 했는데 유럽은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도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이바지 한 바가 없습니다.
지금 세월호를 두고 아주 다 막혀 있으니깐 마음 아픈 국민들은 주교회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발표가 나올 건지. 교황님을 따라서 걸음을 할 것인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할 것인지.
제가 대사로 부임하고 나서, 제가 성향이 뻔하죠? 그래서 교황청하고 시종 언쟁이 있었어요. 한국 천주교회의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 악당 단체를 그들이 얼마나 악당으로 알고 있냐면, 산더미처럼 문서가 쌓여있어요. 얼마나 나쁜가를 얘기한 투서와 보고서들. 그런데 정의구현 사제단을 ‘우리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는 문서가 단 한 장도 없었어요. 그러니깐 그분들은 저를 처음부터 만나자 마자 “그 못된 신부들 말이야.”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직 돌아가지 않은 한 교황대사가 사제단 신부님을 ‘알카이다’라고 했어요. 최근에 어떤 문서에 ‘좌익’이라고 했어요. 교황청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왜 욕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신부는 가르쳐야지 행동하면 안 된다.” 사회교리를 가르쳐라, 그러나 행동하는 것은 안 된다. 가르치는 것은 행동입니다. NLL하면 가르치는 겁니까? 행동입니까? 왜 검찰이 날 소환해요? 행동이니깐. “박근혜 물러가라”라고 하는 것, 그것은 행동입니다. 모든 언어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행동입니다. 말하는 것부터가 행동인데 왜 그것을 못 하게 해요. 그래서 교우들 보고 행동하라고 해요. 좋아요. 목자는 참호 속에 숨어서 양들이여, 돌격, 돌격하고, 양들이 목자대신 간절히 죽어주기를 바라셨습니까?”라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게 교황청의 분위기였어요. 이 교황님이 182,183에서 그 문제 딱 풀었어요. “사제는 해야 한다. 안 하면 직무유기다.” 그러니깐 얘기는 끝난 거예요. 그리고 이분이 스스로 말씀 다 하시고. 최고 장상이니까요. 다른 분들이 아까처럼 50:1 한 사람만 찬성하고 나머지 입을 꽉 다물고. 반대라고는 못 하죠. 교황 무류권 어떻게 합니까? 과거는 과거로 남겨놓읍시다. 우리가 무슨 체면에? 어쩌고 저쩌고, 한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전 교황님이 하셨듯이 지금도 교황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그걸 사회교도권이라고 해요. 그 사회교도권에 반대를 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 왜냐면 교황입니다. 물론 교종이라는 젊잖은 말은 쓰지만, 교황이에요. 황제의 말에 반대되는 말을 주교나 추기경인 하면 옛날식으로 말하면 좀 고약하지만 대역 죄인입니다. 삼족을 멸했어요, 삼족을. 좀 심하게 했으면 다 어른들이니깐 소화시키세요. 이정도 말 하면 조금 들리실 겁니다.
* 강의 참고 서적. 「홀리 에로스」, 제임스 D. 화이트헤드 · 에벌린 이튼 화이트헤드 글, 성염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
첫댓글 우리가 책에서만 뵈었던 분을 직접 뵙는 감동이 컸고,
70이 넘으신 노인의 강의 내용이 너무 임팩트가 있어 거의 100% 녹취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길지요...::
강의 듣고 올리는 글을 그 양반 책 올리듯 하는 사람 첨 이야.... 대단한 성직자과... 수경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