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뿔났다.
10년만에 보수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화려하게 출발한 현 정부가 전혀 보수적이지 못하다는 비판과 질책이 쏟아졌다. 그것도 좌익진영이 아닌 우파 보수진영의 대표적 논객들로부터.
보수논객들의 자아비판은 사단법인 시대정신이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보수의 정체성 위기를 논한다’토론회에서 나왔다.
이 날 논객들은 하나같이 현정부의 반 보수성과 보수진영의 위기를 지적하며 정치, 경제, 교육, 시민사회의 네 부분에서 보수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안을 내놨다.
이 날 토론회에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집권보수의 반(反)보수성을 묻는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방향을 상실한 보수정부 경제정책’), 이성호 중앙대 교수(‘보수적 교육가치, 어떻게 살릴 것인가), 이재교 시대정신 상임이사(보수혁신 시민운동의 모색) 등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박효종 교수, "현 정부, 중국집에서 스파케티 파는 생뚱맞은 모습"
정치적 측면에서 보수의 위기를 진단한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현 정부에 대한 풍자는 신랄하다.
집권하면서부터 보수를 분명히 내세우며 보수진영에게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복원을 기대케했던 현 정부의 모습은 “중국집에서 스파케티를 파는 것과 같은 생뚱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보수를 드러내 놓고 표방했지만 反보수성이 현저하다며 이같은 모순은 ‘철학의 빈곤’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철학의 빈곤을 타개하기 위해 내놓은 ‘공동체적 자유주의’는 목표와 비전이 결여된 아노미 보수에 불과할 뿐, 보수의 바람직한 대안은 아니라고 밝혔다.
보수를 떠난 중도실용, 친서민주의 정책, 대기업에 대한 강경 입장 선회 등 공동체적 자유주의로부터 파생한 일련의 정책과 노선 역시 철학의 빈곤을 타개할만한 대안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보수정치세력은 경제적 평등이나 보편적 공공복지, 혹은 공동체주의가 아닌 자유의 개념으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며 보수의 근원인 자유민주주의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여기에 현재의 위기를 해소할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민심을 흔드는 포퓰리즘적 선동에 여당인 한나라당이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쓴소리도 나왔다.
심지어 여당 일각에서 보수의 색깔을 빼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으나, 이는 매우 잘못된 진단이자 해법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보수의 자산은 자유”라며 특히 “자유인들만이 외칠 수 있는 공화적 자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조동근 교수, "현정부엔 보수의 DNA가 없다""
조동근(명지대 경제학) 교수는 집권 4년차를 맞은 이명박 정부의 아이콘은 ‘포퓰리즘’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조교수는 “보수정권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며 500만표 압승이 이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내려놓고, 국민의 땀과 눈물을 주문하고, '스스로 돕는 개인'을 국가가 돕는 보수의 ‘자조정신’을 고무했어야 했다는 것이 조교수의 지적이다.
조 교수는 현 정부의 반 시장적 경제정책이 보수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보수를 자처한 정부가 방향성을 잃고 공정사회와 포퓰리즘에 매몰된 채 반시장적 경제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보수가 정체성과 방향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수의 DNA를 갖추지 못한 현 정부의 철학적 빈곤을 꼬집기도 했다. 조 교수는 "이 대통령이 친기업, 친서민, 중도, 실용, 공정사회론 등 모든 카드를 다 내보였지만 보수의 정치적 DNA가 없어 아직도 휘발유값 100원에 집착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어서 조 교수는 "한나라당은 재보선 선거 패배를 핑계삼아 '보수정당으로서 ‘정치적 DNA'를 갖지 못한 정파임을 스스로 커밍아웃했다"고 비난했다.
현 정부의 공정사회론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철학적 빈곤을 잠재우기 위한 반격카드였지만, 깊은 성찰은 동반하지 않은 채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놓는 통로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실패한 대표적 경제정책으로 ‘공기업 민영화 실패’, ‘반시장적 SSM(기업형 수퍼마켓) 규제’, ‘추가 감세 자진 철회’ 등을 거론했다.
조 교수는 "한나라당의 실패를 '보수의 실패'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보수를 부끄러워 한 보수 정권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이성호 교수, "보수위 위기는 교육에서 비롯돼, 보수적 가치 회복해야"
교육적 측면에서 현정부의 실정과 보수 위기를 진단한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 교수는 "대중은 물론 보수 진영에서조차 보수적 신념에 대한 회의와 우려가 확산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보수의 위기"라고 정의했다.
이 교수는 대안으로 "보수의 가치관을 현재 상황에 맞게 새로 규정하고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적 교육기조를 정립해 보수의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에는 보수적 교육을 억압의 교육, 가진 자를 위한 교육, 약육강식의 교육, 승자 독식 정당화 교육으로 보는 악의적 곡해가 존재한다"고 현실을 진단했다.
이 교수는 "교육계가 이에 맞서 보수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율성 교육’, ‘올바른 인간 교육을 위한 교권 확립’, ‘정의로운 복지’ 등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재교 상임이사, "보수가 앞장서 기즉권 세력 감시, 비판해야"
이재교 시대정신 상임이사는 보수 시민운동 측면에서 보수의 새출발을 촉구했다. 그는 보수시민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뉴라이트의 침체원인을 분석하면서 보수의 혁신을 요구했다.
이재교 이사는 2004년 발족한 뉴라이트가 2008년 정권 교체 이후 급격히 침체한 원인으로 ‘보수 집권이라는 단기 성과 만족’, ‘정권 교체 이후 운동변화 실패’, ‘상대 진영의 친일 딱지 전략 유효’ 등을 들었다.
이 이사는 "보수 혁신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보수 혁신 운동의 과제로 ▲보수의 원천인 자유주의 초심으로의 회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비판 ▲학문적 연구와 정치 운동의 분리 등을 거론하며 보수의 ‘전략적 투쟁’을 강조했다.
이어서 이 이사는 ▲반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반공주의’에서 벗어나는 등 올드라이트와의 차별화 ▲젊은 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보수 특유의 포용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