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1)아일랜드(Ireland,에이레-Eire) BC 6000년경 동해안에 사냥꾼과 어부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아일랜드에 정착지가 생기게 되었다. 켈트족은 BC 300년경 철기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켈트족이 살던 때에는 다수의 소왕국들이 느슨하게 결합하여 5개의 큰 왕국이 크리스토가 탄생할 때부터 존재하였다. 5세기에 성 파트리키우스가 도착하여 이 나라 전역을 크리스토교화하였다. 아일랜드 교회를 형성시킨 수도 생활이 대대적으로 발달하여 선교사들이 유럽 전역에 파견되었다.
795년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침입하여 지배하였으나 1014년 아일랜드의 왕 '브라이언 보루와'가 스칸디나비아인들과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의 통치가 종식되었다. 1171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침략하여 지배함으로 독립적이던 켈트족 아일랜드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150년 동안이나 군인과 성직자를 대륙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로 수출하였으며 동시에 가톨릭인이 빠져나가 빈땅에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이주자들이 들어왔다.
1534년 헨리 8세가 침략하여 신교 15만 명을 이주시키고 성공회를 강요하며 카톨릭을 탄압하였다. 1691년 퇴위한 왕 제임스 2세가 보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신교도가 완전히 우세해졌다. 인구의 약 1/10에 불과한 영국성공회의 신도들이 지배권을 가졌으며 가톨릭교도, 장로파, 비국교도 등에게는 기본적 시민권도 부여되지 않았다.
1798년에 반란이 일어났고 1801년 1월 1일에 대영제국과 아일랜드의 연합왕국이 탄생되었나 인기를 얻지 못하였고 가톨릭교도와 신교도간의 불화만 심화시켰다. 1846-51년에 엄청난 기근이 발생하여 당시 200만 명 이상이 아일랜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기근 후에 혁명운동이 일어나 의회 개혁이 약간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폭동이 일어났으며 아일랜드 1916년에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 영국이 무자비하게 탄압하므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는 게릴라전과 요인 암살로 투쟁하였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이 채택되어 남, 북 아일랜드가 성립되었다. 1921년 남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다. 1937년 비준된 신 헌법에 의해 왕권정치가 막을 내리고 국가명도 에이레로 변경되었다.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북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어 섬 전체의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카톨릭국가로 북 아일랜드에서 영국에게 투쟁하고 있는 다수(2/3)를 영국 때문에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북 아일랜드는 대다수의 카톨릭은 빈곤한 생활을 하며, 소수(1/3)의 성공회가 모두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어 서로 원수같이 지내고 있다. 1973년 1월 30일은 성공회(신교)가 카톨릭을 점령 한날을 축제일로 지킨다. 이날 신교와 구교가 패싸움으로 영국군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나와 '피의 화요일'이 되었다. 영국은 3만 군대의 주둔으로 많은 비용 때문에 철군하려고 하여도 성공회교도들이 몰살당하는 것이 두려워 발을 뺄 수 없어 진퇴양난에 쳐하고 있다. | |
(2)아이슬란드('얼음 땅'의 뜻) 9세기 노르웨이 태생(바이킹)의 새 정착민이 증가하였다. 930년경에 아이슬란드 연방이 형성되었다. 10세기에 크리스토교가 전파되었고 1000년에 이르러서 전체가 크리스토교화되었다. 13세기 아이슬란드 내전이 일어나자 귀족들은 노르웨이의 통치(1262-64)를 받아들였다. 138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통합으로 아이슬란드 지배권이 덴마크로 이양되었다. 19세기 독립운동이 일어나 양원제 국회(알싱)가 다시 수립되었고 부분적으로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1874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9세는 아이슬란드에 자체의 헌법을 허용했으나 긴장이 계속되다. 1904년 자체의 국민정부를 갖게 되었고 1918년 연합법에 따라 군주제와 공동의 외교정책에서만 덴마크와 연합하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1940년대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한 동안 영국, 이어 미국 군대가 아이슬란드를 점령하여 전략적인 공군기지로 이용하였다. 1944년 알싱은 덴마크와의 모든 공식적 관계를 끊고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아이슬란드 해역에서 영국을 비롯한 이웃 국가들과의 잦은 충돌은 마침내 320km 어업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1980년 아이슬란드에서는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선거로 선출된 세계 최초의 여성 국가 수반이다.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 4개가 있다. 그것은 나무와 뱀 그리고 철도와 군대이다. 이 나라는 간헐 온천(geyser)이 세계에서 가장 많고 이것을 이용하여 비닐하우스에서 식물을 가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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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스웨덴 BC 12000년경에 초기 수렵인들이 유럽으로부터 스웨덴으로 이주해왔다. BC 3500-AD500년경 농경목축인들이 이 지역에 살았다. 스웨덴에 거주한 인종은 북부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었으나, 대부분은 유동적이었다. 그 후 500년경에 북부 게르만 일파인 고트인의 정착과 600년의 스비아인이 정착하여 이 두 민족이 후일 융합하여 스웨덴인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소규모의 부족국가로 조선과 항해에 뛰어나 9-11세기 발트해상에서 활약하였는데 이들을 바이킹이라 부른다. 바이킹은 상인과 해적으로서 활동하여 라인강과 엘베강을 따라 약탈하였으며 프랑크를 위협하였다. 또 일부는 발트해 동부에서 러시아로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하천을 따라 멀리 콘스탄티노플까지 도달하여 교역하였으며, 또 일부는 지중해의 남프랑스와 남이탈리아에 정착하였다.
바이킹의 활동은 11세기 중엽에 막을 내렸다.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에서 부족연합으로 바뀌고 통일국왕이 출현하였으며, 1060년에는 스탠킬 왕가가 일어났다. 스웨덴 왕이 최초로 세례를 받으면서 크리스토교가 많이 진행되어 1164년에는 스웨덴인 출신의 대주교를 배출하게 되었다.
1397년 포메른의 에리크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왕이 되어 1439년까지 스웨덴에서 통치하였다. 15세기말과 16세기초에 스웨덴과 덴마크의 왕들은 3왕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서로 겨루었다. 1523년 구스타프 1세 바사(바사는 영지의 이름)는 독립국가 스웨덴의 통치자로서 왕위에 올라 1720년까지 지속되었던 바사왕조의 계보를 확립하였다.
이 때 종교개혁이 스웨덴에도 들어와 1529년에 의회는 루터파(派)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17세기에 스웨덴은 발트 지역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바사 계보의 군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아돌퍼스)는 독일 프로테스탄트교도들과 연대해 오스트리아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전쟁을 벌였다.
1632년 여왕 크리스티나는 구스타브 아돌프의 외동딸로 아버지가 죽자 6세로 왕위에 올랐다. 섭정시대를 거쳐 1644년 친정(親政)에 들어가자 부왕의 정책을 답습하는 동시에 뻗어나가던 국내 귀족의 세력을 누르고 30년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녀는 이색적인 군주로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여 사교계에서 활약하며 루이 14세를 비롯한 유럽의 군주들과 그리고 데카르트 등과 교류하였다. 알카디아 아카데미를 창설하여 수도 스톡홀름에 문화적인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고 남장(男裝)을 즐겼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1654년 사촌오빠인 카를 10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한 후에는 로마에 살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이 여왕의 퇴위로 바사 왕국은 단절되었다. 1697년에 군사의 재능을 타고난 칼 12세가 출현하자 스웨덴은 다시 국제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709년 카를 12세가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침략에 무참히 패배하면서 강대국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대(大)북유럽 전쟁(1700-21)에서 카를 12세의 죽음(1718)은 유럽 열강으로서의 스웨덴의 위상에 종말을 고하게 하였다. 구스타프 3세 통치기간(1771-92)중에 절대왕정으로 복귀되었다.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했으나, 구스타프 4세는 1808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게 핀란드를 내어주고 말았다.
1809년 구스타프 4세를 혁명으로 퇴위시키고 카를 13세를 왕으로 옹립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왕위 승계를 둘러싼 위기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프랑스 육군원수 존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병든 카를 13세의 황태자로 임명되었고 1809년 그는 칼 요한이라 부르며 1810년 섭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반 나폴레옹의 태도를 취하여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대파한 후 덴마크군을 쳐부수고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6세로 하여금 킬 조약(1814)에 서명하도록 하여 노르웨이를 얻었다. 카를 13세가 죽고 1818년에 카를 요한은 카를 14세로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며 그가 현재의 스웨덴 왕조의 시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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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14세는 재위(1818-44)시에 보수주의 성향을 띠었으나, 그의 아들 오스카르 1세(1844-59 재위)와 손자 카를 15세(1859-72 재위)는 진보적인 개혁을 도입하였다. 1905년 노르웨이는 국민감정이 덴마크에 가까워 스웨덴과 완전 분리하기를 강력히 요구하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무력저지론도 있었으나 결국은 분리를 승인하여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권 동맹은 오스카르 2세의 통치기간 중 해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무역이 큰 타격을 입어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웨덴은 자국의 중립을 공포하였다. 전쟁 후 스웨덴은 UN에 가입하였으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경제공동체(EEC)의 회원국이 되는 것은 포기하여 중립정책을 지켰다. 또한 사회개혁을 실시해 복지국가로 변신하였다. 1991년 7월 1일 유럽공동체(EC) 회원국 가입을 공식 신청하여 200년에 걸친 유럽 대륙에서 분리정책을 포기하였다. 1992년 반세기만에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아 1994년 사회민주당이 권좌에 복귀하는 요인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한국과 스웨덴의 인연은 1926년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경주 노서리고분군 발굴에 참여하여 세 마리의 새(鳳)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된 것으로 이 금관의 이름은 스웨덴(瑞典)의 서(瑞)자와 봉(鳳)자를 합하여 서봉총(瑞鳳塚)이라고 하여 인연을 맺었다. (4)노르웨이 BC 7000-6000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기원후 첫 4세기 동안 노르웨이인들은 로마에 정복당한 골족들과 접촉하였다. 400-600년 로마 제국이 몰락하던 시기에 웅장한 무기와 금으로 만든 물건을 함께 매장한 족장들의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800-1050년은 바이킹 시대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수 없이 많은 약탈원정을 떠났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그린란드에 정착하였다. 900-1035년의 노르웨이 여러 국가는 무사들을 이끄는 족장이 지배하였다. 1015-30년에 오라프 2세 하알손이 노르웨이 최초의 왕이 되었다. 오라프는 잉글랜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 드리고 돌아온 후 많은 노르웨이인들을 개종시켰다. 1130-1240년 노르웨이 왕위를 둘러싸고 여러 세력간에 내란이 벌어졌다. 1389년 포머른의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고 후에(1397)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왕이 되었다. 1442년 에리크 왕의 폐위 후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하며 새로운 헌법을 갖기는 하였다. 1814년까지 스웨덴과 합병된 덴마크 왕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905년까지 스웨덴 왕이 지배를 하였다. 그 해에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하였으며, 노르웨이인들은 투표로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덴마크의 카를 공이 호콘 7세로 선출되었다. 1905-14년 노르웨이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하였고, 1913년에는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중립을 지켰고 전쟁 후에 경제정책은 자유주의 진로를 추구하였다. 1930년대에 시작된 많은 사회복지 제도들이 지금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중에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40년 독일군이 점령하여 왕과 정부는 영국으로 피신하였고, 점령은 대전의 종결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5-65년까지는 노르웨이 노동당이 거의 계속 집권하였다. 1965-71년 우익 연합세력이 노동당 정부를 축출한 뒤 집권하였다. 1981년까지 노동당은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았고 기간 중 얼마 동안 최초의 여(女) 수상인 '그로 하를렘 브룬트란'이 노동당을 이끌었다. 1981-86년 50년만에 처음으로 보수당 행정부가 집권하였다. 1986년 브룬트란이 이끄는 노동당이 다시 집권하였다. | |
(5)덴마크 10만 년 전에 인간이 살았으며 BC 10000-BC 1500 석기시대에 사냥이나 고기잡이로 정착생활을 하였다. 샤를마뉴 제국에 속하게 되어 유럽의 다른 지역과 관계를 갖게되었다. 7세기 바이킹의 세력확대는 시작되었고 크리스토교는 10세기에 들어왔다. 크누트(재위 1016-35)왕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을 합친 제국은 크누트 왕이 죽을 때까지 존속하였다. 중세시대는 귀족들과 자칭 왕들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14, 15세기의 교역은 독일이 주축이 된 *한자 동맹 때문에 쇠퇴하였다. 1387-1448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과 동맹관계는 세 나라 왕족간의 결혼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가 스웨덴이 탈퇴하여 끝났다. 16-17세기에 내란으로 루터파가 자리를 잡고 귀족들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발트 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코펜하겐 평화조약(1660)으로 현재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국경이 정하여졌다. 1800년 초기 나폴레옹 전쟁으로 경제의 어려움을 겪었고 1814년에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주었다. 1864년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다. 1849-1915년에 3차례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1920년 국민투표에 의해 슐레스비히 북부를 되찾았다가 1940-45년에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였다. 1945년 아이슬란드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린란드는 1953년에 정식으로 덴마크에 편입되었다가 1979년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립 회원국 중 하나였고, 1973년 유럽 경제공동체(EEC)의 회원국이 되었다.
*한자 동맹(Hansa Bund: 무리의 뜻) 독일 북부의 도시들과 외국에 있는 독일의 상업집단이 상호교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조직이다. 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세력으로 길드나 조합을 의미한다. 한자 동맹의 전신은 독일 상인들이 북해 연안, 브리튼(영국) 섬, 라인란트, 유럽 북동부, 서유럽, 지중해 지역에서 중개상 노릇을 한 발트 해 연안지역에 있던 상인단체들이었다. 1280년대에 상인 집단들은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력하였고, 발트 해 무역을 지배한 뤼베크와 독일 북부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목적은 해적, 산적을 진압하고, 등대를 세워 항해의 안전을 촉진하며, 수로 안내인 등을 훈련시키고, 무역기지와 독점권을 확립함으로써 교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르웨이의 베르겐, 러시아의 노브고로트, 영국의 런던에 상업 지역(kontore)을 세우고 공격적인 보호무역정책은 현지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1368-70년에 한자 동맹은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쳤다. 한자 동맹이 장악한 경제적 지배력을 없애려하였다. 한자 동맹은 군대를 모집하여 덴마크군을 무찌르고 잠시 덴마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14세기에 한자 동맹은 대부분 독일 도시인 100여 개의 도시가 회원이 되었다. 한자 동맹에는 정관도 없었고 상비군도 없었으며 정기 집회인 의회를 제외하고는 관리기구도 없었다. 1478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노브고로트를 점령하여 그곳의 독일 상인들을 추방하였다. 독일에서도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같은 군주국 통합체가 동맹을 약화시켜, 한자 동맹은 신대륙 발견 시대에 사라지기 시작하여 마지막 집회가 열린 것은 1669년이었다.
그룬트비(1783-1872)와 달가스(1828-1894) 덴마크는 안델센의 나라, 햄릿의 나라, 그리고 달가스와 그룬트비 나라이다. 본토 면적이 우리 나라의 1/5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이다. 덴마크를 낙농업이 발달한 육축 농업 국가로 만든 사람들이 달가스와 그룬트비이다. 1864년에 덴마크가 프리이센과의 전쟁에서 지고 기름진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잃어 국민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지금의 덴마크를 만들었다. 그룬트비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국민고등학교(Folk High School)를 창설하여 성인들을 농업근대화와 농업기술 등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고 국민을 전인교육을 하였다. 현재는 10%정도의 외국인도 참가하여 연간 수강생은 약 8,500명 정도이다. 그는 지성, 자유, 용기, 독창의 4대 정신으로 삼고 교육과 실천을 통하여 지금의 덴마크를 건설하여 국부로 불러지게 되었다. 달가스는 그룬트비의 정신적 후계자로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며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달가스는 국토 개발하여 독일에 빼앗긴 땅을 안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무기로 잃은 것을 농기구로 되찾고자 의지로 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리고 협동 조합 운동과 국민 체육 운동을 함께 하여 위대한 조국 덴마크를 건설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