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후 지구촌 흐름의 추세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는 해방 전후 많은 지식인들이 매료되었고,
그로인해 월북을 단행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유일민의 부친 또한 그 중 한 사람였다고 한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념정치에 희생양이 되어 숱한 미행과 고문을 당하며 연좌제에 묶여 이 사회에 버림 받은 자식으로
낙인 찍혔던 1970년대 이야기를 '조정래'씨는 '한강'에서 서두로 꺼낸다.
마왕 신해철이 죽기 며칠 전 서태지 컴백과 소격동이 한참이나 시끌벅적했다.
순전히 호기심에서 서태지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조정래'씨의 '한강'에서 나왔던
유일민과 임채옥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벤처마킹한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물론 서태지 노래가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는 원인도 있었지만 소격동 뮤직비디오는 애들의 장난처럼 어설프기만했다.
소문난 잔치 먹을게 없다더니 서태지가 이 정도 가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하지만 작곡가로써 서태지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곽진언 불렀던 소격동 때문였다.
언제나 내 가슴을 울리는 첼로 선율의 소격동.
공명이 강한 곽진언의 음색과 통기타가 어울어진 노래는 잊고 지내던 중고등학교 내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던 10월 한 달 곽진언이 노래했던 소격동과 함께 고단한 일상을 추스르며 언젠가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참으로 많이 했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막연하기만 했던 언젠가의 기회가 쉽게 빨리 이 가을이 다가기전에 찾아 왔다.
가을이 저물어가던 11월 세 째주 일요일날 안국동 정독도서관을 시작으로 북촌과 삼청공원
그리고 성북동까지 둘레길 문화탐방이 있었다.
1970년도 종로통과 북촌 카페촌
물레를 돌렸다는 기억은 전혀 없지만 물레를 돌려 신설중학교에 들어갔던 세대이자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를 들어갔던 마지막 세대이다.
70년도 종로통. 종각 건너편에 화신백화점과 신신백화점이 있었지만 학생였기 때문에
종각 아래 종로서적이 만남의 장소였다.
집은 효창동 였는데 상도동 산꼭대기에 있던 중학교가 끝나면 조석으로 건너는 제 1한강교를 보며
종로에 입시학원으로갔다.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공부하는척 하느라 용산구와 영등포구 종로구를
하루동안 부지런히 순례했던 기억들이 아련하다. 조금더 집중해서 공부를 했더라면하는 평생의 후회와 함께.
지금의 과학고보다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이 많었던 경기고.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를 들어갔던 1976년 졸업생을 끝으로 종로의 경기고는 정독도서관으로 탈 바꿈한다.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둘레길 탐방 친구들을 만나 비교적 한산하고 조용한 안국동 뒷길을 따라가면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솟을대문 99칸 집도 담장너머로 슬쩍 건너다보며 조선왕가 종친부가 있는
경근당과 옥첩당으로 올라갔다.
가을앓이 없이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소격동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코앞에 자리하고 있다.
허연 엉덩이 삐쭉 내밀고 있는 인왕산은 아무리 보아도 동네 뒷산 같은데 어찌하여 겸재 정선은
신비스런 모습을 가득히 화폭에 담은 인왕제색도를 그릴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쉽사리 가시지가 않는다.
심성깊은 화가의 날카로운 눈설미는 타의 투종을 불허하고.
정독도서관을 들어가면서 우연히 안내문을 보았다.정독도서관이 성산문의 집터이자
조선말기 개화파의 거장 김옥균과 서재필, 박재순의 집터라는 걸.
후세교육과 나라 장래와의 상관관계는 고대 삼국시대부터 시작 되었다고 정독도서관에 있는
교육박물관 전시실은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교육박물관 답게 근대와 현대 각종 교과서와 청소년들이 즐겨 보던 잡지들도 진열되어 있었고,
난로가 있는 교실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특히 내 눈을 사로 잡았던 것은 연탄화덕불위에 얹어놓은 자그마한 국자 안에 설탕이 녹으면
소오다를 살짝 묻혀 휘휘저으면 부풀어오른 뽑기다.
초등학교 앞 노점상아줌마가 뽑기를 삼각형이나 네모 별 모양을 찍어주면 솜씨 좋은 친구들은
그 모양 그대로 모양을 내어 또 한번 뽑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할 줄아는게 별로 없는
나는 그것은 남에 떡에 불과했고, 자그마한 국자위에 수북하게 올라온 누우런뽑기를 나무젓가락으로 꼭꼭 찍어 먹었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웃음꽃을 피우던 꽃다운시절도 나에게는 분명있었는데...
박물관안에 들어가면 박물관 안내와 관리를 맡으신 남자분과 여자분이 계신다.
박물관 실내를 둘러보고 나오는 나를 붙잡고 수더분하게 생기신 여자분께서 말씀하신다.
"김자옥씨가 죽었어요" 암이란 이야기는 들었는데 예쁜공주님이 돌아가셨구나...남의 일 같지가 않다.
아직도 가을의 여운이 남아있는 정독도서관을 나서면 가장 한국적인 멋을 볼 수있는 북촌을 만날 수 있다.
옥인동에 몇 년 살었기 때문에 옛친구를 만난것처럼 정겹다.
기와 지붕이 나즈막히 연결되어 있는 북촌 4경.
골목길 양 쪽으로 솟을대문이 병정처럼 서서 사대부가의 위엄을 자랑하는 북촌 5경과 6경 골목길.
경복궁과 총리공관이 훤히 내다보이는 북촌 7경.
바위를 깍아 돌계단을 만들었던 북촌 8경을 돌아보면서 기와 담장너머로 어른 주먹보다도 큰 모과와
나뭇잎 몇 장 남아 있지않아 서슴없이 보이는 앙상한 나무가지에 대롱대롱 위태롭게 매달린 홍시를 만났다.
기특하게도 그들은 공해로 찌든 도심을 풍성한 가을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전동 한옥들과 자신만의 색깔로 옷을 입은 건물들이 어울어져 예술인 마을같은 북촌에는 카페들이 많아
우리는 흔히 북촌 카페촌이라고 한다.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웃음을 찻잔에 썩어 마신다면 행복의 나라로 떠 날 수 있다고"
예쁜 자태를 뽑내며 카페촌은 속닥거리는걸 모른척하며 언제고 한 번 오고 싶었던 삼청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삼청공원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갈길이 바뻐 스치듯지나치면서도
서울 도심 심장부에 있는 공원으로써 품격은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성북동 산동네에서 만났던 심우장과 성북동 비둘기
수시를 끝낸 입시생들이 논술을 보기위해 모여든 자가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성균관 대학교 후문길을 지나
성북동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을 찾아갔다.
방금 전 정독도서관 교육 박물관 전시실에서 보았던 1960년대 산동네와 흡사한 성북동 산동네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니 심우장이 나온다.
일자로 된 겹한옥집 마당에 만추의 햇살이 쏟아진다.
그 어느 웅장한 사찰에서의 만해 선생보다도 더 깊은 시심과 인간적 매력을 온몸으로 느낄수가 있어
오랫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참으로 많이 기다렸던 보람을 만해 선생 심우장에서 보상 받은 것 같아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 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만해 선생의 인연설을 굳게 믿어보면서 심우장을 나섰다.
성북동과 가장 친한 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김광섭이다.
산동네 심우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만날수가 있다.
시인이 이야기했던 산동네 건너편 채석장은 변하여 서울에서 내노라하는 부자들이 살던 성북동.
빈부의 격차가 성북동만큼 확실하게 드러내는 곳도 드물다.
상대적 빈곤감은 평화와 사랑의 상징 비둘기조차 갈길을 잃었다는 시인의 하소연을 피부로 실감하며
바닥에 떨어진 검은 비닐봉지에서 먹을 것을 찾느라 코와 입을 쳐막고 있는 검은 강아지가 심히 애처로워
뒤돌아보며 산동네길을 내려왔다.
에필로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절이 좋아져 월북작가 이태준 선생이 사셨던 수연산방도 찻 집으로 꾸며져
운치를 즐기는 이들에게 각광을 받은 장소라고 한다.
누마루 위에 풍경이 늦가을 정취를 물씬 풍긴다. 집이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하여 마치 동네 잔치집에
온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14.11.16
NaMu
첫댓글 요즘 사진으로 된 기행문만을 접하다가
글만 있는 기행문 신선하네요
성북동을 한바퀴 휘이 둘러본 느낌 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공존 하는 동네
흡사 대한민국의 축소판 같습니다^^
성북동...간송미술관이 있어서 몇 년전부터 10월에는 가 보곤 했는데요. 넘 재미 있는거는요.
산동네에 있던 심우장과 고급주택들속에 있던 길상사 모두 성북동에 있어요.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마음은 하늘만 한데요...그게 잘 안돼네요.
잘 봐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