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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두권의 책을 소개할까 한다. 저자가 달라서 따로 소개할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한 포스트에 소개해도 상관없을 듯 싶다.
일단 제목부터가 비슷하다. 저자들도 왠만큼 근대전쟁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름 한번쯤은 들어본 유명한 전사학자들이다. 나 역시 이 두명은 로저 파킨슨과 데이빗 챈들러와 함께 제일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저자들의 성향이 비슷하고 제목과 내용이 비슷하다고 해도 퀄리티까지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Dupuy는 내가 예전에도 언급했듯 자기가 진지하게 연구해서 쓰는 글이 아니면 그냥 이차사료같은 것들만 인용해서 간단하고 얇은 책을 펴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그에 반해 더피는 자기가 직접 사료를 찾고(이 사람이 쓰는 책들을 보면 아마 독일어와 러시아어는 할줄 아는 것 같다) 진지하게 연구해서 펴내는 책이기 때문에 디테일적인 면에 있어서는 Dupuy의 책을 능가한다. 물론 그렇다고 Dupuy를 폄훼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만약 책을 읽는 순서가 있다면 먼저 Dupuy의 책을 읽고 기본을 쌓은 뒤, 더피의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일단 책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제목대로 스웨덴의 구스타프2세 아돌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함께 근대의 삼대명장으로 일컬어지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적인 면을 다루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Dupuy의 책을 조금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있는데 더피의 책은 거의 밀리터리쪽에 올인하다시피 하여 글을 썼기 때문에 그외의 프리드리히와 관련된 여러가지 에피소드라던지 어릴적의 시련들에 대해 거의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읽다보면 생뚱맞는 내용이 나올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더피의 책에 "언제까지 그런 모욕들을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뭐 대충 이런 말이 나오는데 그전에 더피는 프리드리히가 아버지에게 많은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일체 언급안하고 있다! 그 유명한 탈출하려다 붙잡혀서 죽을뻔한 이야기도 언급이 거의 없는데 다른 부분들은 말해서 무엇하랴?;; Dupuy는 비록 전사서술의 디테일에서는 더피에게 밀릴지도 모르지만 프리드리히의 일생을 알아보기 쉽게 여러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다루면서 쉽고 간편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더피의 책은 거의 마니아적인데 전쟁사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맞을거다.
프리드리히 카를 호엔촐레른 왕자는 포츠담에서 프로이센의 초대국왕 프리드리히1세의 손자이자 그의 후계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프리드리히1세는 신흥왕국 프로이센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의 베르사유를 본따 여러가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들을 도입했는데 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왕국의 위엄을 세우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아버지의 이런 것들이 쓸데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라 여겨 많은 것들을 폐지하고 엄격한 행정과 군대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들의 교육도 군대에서 뽑은 군인들로 하여금 책임지도록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커갈수록 문학과 음악 등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싫어하는 것들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처음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었던 왕은 프리드리히를 계속 학대하고 모욕을 주기 시작했다.
아들에게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과 일반백성들에게까지 점점 괴팍해지고 변덕스럽게 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프리드리히는 열일곱살 때 잉글랜드로의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왕은 군사재판을 준비해서 프리드리히에게 사형을 언도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강제로 프리드리히가 보는 중에 같이 탈출하려고 했던 친구를 참수했다. 하지만 수많은 간청과 청원으로 왕은 그를 마침내 용서하고 원래의 직위와 책무에 복귀시켰다. 프리드리히는 별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황제의 조카와 결혼했고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때 오이겐 휘하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기도 했다. 17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죽자 프리드리히는 마침내 왕위를 계승했고 여러가지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것들을 개혁하고 선대부터 있어왔던 헤르스탈에 대한 분쟁을 마무리지었다.
프리드리히가 등극한지 얼마 안되어 황제가 죽었는데 그는 아들이 없었고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문을 계승했지만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프랑스가 이를 편드는 상황에서 프리드리히는 이를 이용해 옛부터 오스트리아와 분쟁이 있어왔던 슐레지엔을 노렸다. 그는 전격적으로 슐레지엔을 침공했고 오스트리아군이 나이페르크의 지휘하에 반격해와 몰비츠 전투에서 양측은 맞부딪혔다. 이런 전투는 처음이었던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실수로 전선이 혼잡스럽게 되자 슈베린의 권유로 피신했고 자신이 자신이 패한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슈베린의 지휘하에 보병만으로 승리했고 프리드리히는 나중에 이것을 듣고서야 기뻐하며 다시는 승패가 결정나지 않은 전투에서 혼자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몰비츠 전투의 승리로 프리드리히의 명성은 높아졌고 전세는 점점 오스트리아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손을 잡았고 프랑스와 바이에른 연합군은 비엔나를 향해 진군해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클라인슈넬렌도르프 밀약을 통해 프로이센과 거짓으로 싸우는 척 하며 프리드리히에게 하슐레지엔을 넘겨주는 대신 그곳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프랑스와 바이에른을 상대하도록 했다. 이 밀약을 모르는 프랑스와 바이에른은 뵈멘을 침공하여 프라하를 점령하고 카를 알브레히트는 황제로 등극했지만 오스트리아는 반격을 개시하여 이들을 몰아내고 바이에른을 침공하여 뮌헨을 점령했다. 프리드리히가 타이밍을 잘못 맞춰 밀약을 깨고 다시 참전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동생인 로렌의 카를이 이끄는 군대는 프랑스와 바이에른군이 물러갔기 때문에 그들 걱정을 안하고 프리드리히와 맞섰고 몇차례의 기동 끝에 호투지츠 부근에 머물고있는 프로이센군을 야습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날이 밝자 전면전이 벌어졌고 카를은 우세한 숫자로 프로이센군을 밀어붙였지만 프리드리히는 숨겨놓은 예비대를 사용해 오스트리아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결국 카를은 후퇴했다. 이 전투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국 협상을 벌였고 슐레지엔의 대부분을 프로이센에 넘겨주기로 하는 평화협정이 브레슬라우에서 맺어졌다.
평화기간 동안 프리드리히는 내정에 집중하고 나중에 예카테리나2세가 되는 사촌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의 조카와 결혼시키는 등의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프랑스와 바이에른은 점점 오스트리아에게 밀리고 있었고 보름스 조약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전쟁전으로 되돌린다는 내용이 나와 브레슬라우 조약이 위협받자 다시 전쟁에 참전하기로 했다. 프리드리히는 파리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의 협조를 약속했지만 그보다 먼저 카를이 프랑스 영토인 알자스와 로렌을 공격했다. 프리드리히는 팔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뵈멘을 침공했는데 군의 삼분의 이는 작센을 허락도 없이 통과했다. 프라하는 일주일만에 항복했고 카를은 서둘러 뵈멘으로 진군해왔다. 프랑스군이 카를을 추격해올 것이라 생각한 프리드리히는 비엔나 근처까지 진군하여 카를을 협공할 계획이었지만 프랑스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협공당할 위험에 빠진 것은 프리드리히였다. 주민의 대부분이 개신교를 믿는 프로이센에게 적대적인 상태에서 프리드리히는 수성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못한채로 슐레지엔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오스트리아, 영국, 홀란드, 작센은 프리드리히에 반대하는 사각동맹을 맺어 슐레지엔을 오스트리아에게 돌려준다는 선언을 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지체없이 슐레지엔을 공격했지만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 공(늙은 데사우어)에 의해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는 다시 색슨과 함께 협공을 하려고 했지만 당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군이 계속 승리하고 있었기에 유능한 사령관인 트라운을 이탈리아로 보내고 카를로 하여금 대신 작전을 맡게 했다. 카를이 진군을 안하고 계속 지체하자 프리드리히는 먼저 뵈멘을 침공할까도 생각했지만 조급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에게 진군명령을 내렸고 슐레지엔 침공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는 계략을 펴 프로이센군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채로 서둘러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카를은 여기에 넘어가 퇴각하는 척하는 분견대를 추격했고 밤에 야영을 하는 틈에 프로이센 전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앞에 모여들었다. 야습이 시작되자 놀란 작센군은 금방 무너졌고 오스트리아군은 잠시 저항했지만 치텐이 슈트리가우강을 건너 오스트리아의 좌익을 패주시키고 그로인해 생긴 틈을 폰 게슬러가 파고들자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가 직접 기병돌격으로 후퇴를 엄호하던 포병들을 공격하자 이들의 후퇴는 패주로 변했고 뵈멘까지 프로이센군의 추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뵈멘의 민심은 프로이센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상당한 병력을 병참선 보호를 위해 때어내야 했고 결국 카를과 프리드리히는 각각 쾨니그레츠와 클룸네츠에서 각각 대치하게 되었다.
세달 동안의 대치중 프로이센군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증원을 받아 점점 늘어났지만 당시 프랑스의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퐁트누아 전투에서 승리하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상당수를 짓밟았다. 영국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화해시키고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시키도록 하려고 했지만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동안 황제는 죽고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은 황위를 잇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곧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대공이 황제로 선출되었고 프리드리히는 결국 후퇴하기로 했다. 프로이센군이 조르에 머물고 있을 때 이를 추격하던 카를은 예전에 자신이 당한대로 되돌려주기 위해 야습을 위한 기동을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이미 정찰병을 통해 그것을 알고 군을 오른쪽으로 돌려 오스트리아군을 사선으로 공격했다. 부덴브록은 오스트리아군 좌익으로 기병돌격을 하여 적기병들의 전열을 깨고 패주시켰고 그대로 다시 아군기병을 모아 이번에는 아군보병의 뒤를 돌아 우익의 적기병들을 공격했다. 이들도 패주해버리자 오스트리아 보병들의 우측이 훤히 드러났고 결국 이들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카를이 야습이 성공했을 경우 프로이센군이 남쪽으로 후퇴할 것을 대비해서 매복시켜둔 복병들은 전투소리가 들리자 프로이센군의 진지로 가서 짐들을 약탈하다가 승리한 프로이센군이 돌아와 그들을 몰아냈다. 그뒤 오일간 프로이센군은 식량을 채집하다 천천히 슐레지엔으로 돌아갔다.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리그니츠에 동영시킨채 베를린으로 돌아가 사태를 주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전히 협상할 생각은 안한채 겨울전역을 준비했다. 작센과 오스트리아는 카를과 루토브스키의 지휘하에 두길로 나눠 각각 뵈멘과 작센에서부터 베를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프리드리히는 늙은 데사우어에게 작센으로의 진격을 명하고 자신은 사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헤네르스도르프와 괴를리츠에서 이틀동안 싸워 카를을 다시 뵈멘으로 몰아내 오천명의 포로를 잡았고 늙은 데사우어는 케셀스도르프에서 숫적으로 우세하고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작센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프로이센군은 작센을 거의 점령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연패소식에 결국 드레스덴 조약을 통해 브레슬라우와 베를린 조약에서 약속했던 것을 확정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로서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프리드리히는 많은 명성을 쌓았으며 대왕이라고 불렸다.
그뒤 십년간 그는 내정에 힘을 쏟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동생을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의 무덤을 만들게 했다. 상 수시를 지은 그는 그곳에서 철학자와 예술가들과 함께 문학과 음악을 즐겼고 아버지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따라 농업을 지원함과 동시에 베를린의 공업화를 장려했으며 이민자들이 저개발지역에 정착하도록 힘썼다. 그는 금과 은 등의 보석들을 궁에서 쓰는 가구나 건물의 장식 등에 쓰도록 했는데 이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나중에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세심한 지도와 감사 때문에 프로이센은 부정부패가 나른 나라에 비해서 훨씬 적었고 또한 백성들을 위해 애쓰는 계몽군주로의 모습을 보였다. 군사분야에 대해서 그는 아버지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지만 기병의 효율성을 높이고 또한 군사재정을 크게 확보하고 늘리는 일에 많이 노력했다.
한편 해외식민지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는데 이는 각국 군주들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유럽에 전운이 감돌도록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강탈한 것으로 인해 프리드리히를 미워하고 있었고 게다가 그는 프랑스의 마담 퐁파두르와 러시아의 엘리자베타를 적으로 돌려버렸다. 프리드리히가 곳곳에 뿌려놓은 첩자들은 곧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스웨덴, 작센이 비밀협정을 맺고 프로이센을 공격하여 영토를 분할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왔고 강력한 동맹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는 프랑스를 제쳐놓고 영국과 손을 잡았다. 그는 프랑스가 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손잡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깨고 그둘은 손을 잡았고 프로이센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꼴이 되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아직 적들의 협상과 준비가 끝나기전 선제공격을 하기로 하고 군을 셋으로 나눠 작센을 침공함으로서 칠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작센군은 드레스덴에서 퇴각하여 뵈멘 근처의 피르나에서 농성했고 프리드리히는 이를 포위하고 작센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같이 오스트리아와 싸우자는 제안을 했다. 그때 막시밀리안 폰 브라운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작센을 구하기 위해 다가오자 프리드리히는 로보지츠에서 그와 전투를 벌였지만 안개 때문에 부대간 제대로 협조가 안되는 상태에서 지역적인 전투들로 인해 승패는 불확실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물러갔다. 이를 들은 작센군은 결국 항복했고 이들은 프로이센군으로 편입되었지만 이미 프리드리히가 원래 계획했던 재빠른 전쟁은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동영기간 동안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17만5천명으로 증강하면서 각국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전쟁준비가 된 나라는 오스트리아가 유일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일단 오스트리아와 먼저 상대하기로 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눠 프라하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뵈멘을 침공했다. 도시의 동쪽에서 사령관인 카를은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이 행군 때문에 너무 지쳐서 쉬어야 한다는 슈베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다운이 이끄는 군대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즉각 공격했다. 프리드리히는 슈베린이 "목초지"를 건너 오스트리아 우익을 공격하게 했지만 그가 생각했던 목초지는 사실 늪지대였고 첫 공격이 실패한 뒤 슈베린은 직접 공격을 이끌다 포도탄을 맞아 죽고말았다. 우익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카를은 예비대를 지원하고 우익의 방향을 돌려 맞서려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 전열에 틈이 생겼고 프리드리히는 예비병들을 동원하고 틈을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은 혼란이 빠지고 말았다. 브라운은 혼란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다가 치명상을 입었고 오스트리아군은 패주하여 도시로 후퇴하거나 다운에게 합류했다.
다운은 전투 이후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종용을 받고 나서야 프라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공성병력만을 남겨놓은 프리드리히는 콜린 서쪽의 언덕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다운과 상대하기 위해 진군했고 프라하 전투때와 같이 적의 우익에 전력을 집중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예상보다 용감히 싸워 모든 프로이센군이 싸우게 되었다. 모든 예비대를 동원한 끝에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군이 차지했던 위치의 상당수를 점령했고 이에 다운은 후퇴하기로 하고 명령을 내렸지만 우익예비대에 속해있던 작센 기병들은 지친 프로이센 보병들의 좌측을 공격하여 그들이 물러가게 만들었다. 예상치못한 상황에 용기를 얻은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전투를 재개했고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모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부하들의 설득으로 군대를 프라하로 퇴각시켜야 했고 그곳에서 전군을 작센으로 퇴각시켰다. 이제 적들은 사방에 있었고 후계자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치타우로 퇴각하다 카를의 추격 때문에 반이 넘는 병력을 잃어 프리드리히의 비난을 받고 얼마 뒤 죽었다. 컴벌랜드 공작은 하스텐벡 전투에 패배하고 영국으로 돌아갔고 동프로이센을 지키던 레발트는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에게 패배 동프로이센은 러시아에 완전히 점령되었다.
프로이센이 네 방향에서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프리드리히는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을 슐레지엔에 남겨두고 라이프치히로 행군했다. 제일 큰 위협은 서쪽에서 다가오는 프랑스와 제국군(Reich Army)이었는데 이미 샤를 드 수비즈 공작과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요제프 공의 연합군은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했고 프리드리히는 그들과 싸우기 위해 행군해갔지만 이들은 전투를 거부한 채 아이제나흐로 후퇴했다. 한편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은 모이스 전투에서 카를과 다운에게 패배해 슐레지엔으로 후퇴했고 브란덴부르크가 위협받자 프리드리히는 다시 이 위협에 맞서기 위해 진군해갔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리드리히가 다가오자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멈췄지만 이번에는 수비즈와 힐트부르크하우젠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다가갔고 연합군은 로스바흐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숫적으로 세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연합군은 이번에는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프로이센군의 좌측을 치기위해 우익에 상당한 병력을 배치하여 기동을 시작했다. 로스바흐에서 이를 지켜보던 프리드리히는 마치 아군이 도망가는 것처럼 동쪽으로 이동하도록 하고 비밀리에 적의 시야를 가리는 언덕들 뒷편에서 기동시켰다. 프로이센군이 후퇴한다고 생각하고 자만한채 그대로 공격에 나선 연합군은 포병과 보병, 기병에 의해 삼면으로 공격을 받고 무질서하게 패주해버렸고 다음날 추격에서 한 고성에서 저항하는 프랑스군 후위대를 하마시킨 기병으로 하여금 공격하게해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육백명의 사상자로 적에게 팔천이 넘는 사상자를 내게 만들었고 프랑스군의 약탈에 질러하던 오스트리아편의 독일국가들도 프리드리히를 찬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로스바흐에서 승리했어도 상황은 전반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은 브레슬라우에서 카를에게 패배한 뒤 포로로 잡혔고 슐레지엔을 지키던 치텐은 브란덴부르크로 후퇴해갔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으로 행군하여 치텐과 합류한 뒤 브레슬라우로 진격해갔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를은 니페른과 자게슐츠 사이에 병력을 배치해놨는데 좌측은 늪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가 우측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곳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프리드리히가 좌측을 공격할 듯 보이자 예비대를 좌측으로 옮겼지만 이것은 위장이었고 우측이 주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전선이 밀려나가자 우익을 지휘하던 루케시는 예비대의 도움을 받아 기병돌격에 나섰지만 드리센에게 측면을 공격당해 전사했고 결국 자라 근처에서 잠시의 저항 뒤 오스트리아군은 패주를 시작했다. 프로이센군의 계속되는 추격에 카를은 계속 병력을 잃어 뵈멘의 쾨니그레츠에 도착했을 때 삼만칠천명만이 남아있있고 그중 만오천명만이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
로스바흐와 로이텐 전투로 인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장군들은 프리드리히와 싸우기를 꺼려했고 페르모르가 이끄는 러시아군과 스웨덴군도 동프로이센과 포메른에서 도로사정 때문에 제대로 진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동생 하인리히에게 퀴니그레츠에 다운을 묶어두도록 하고 자신은 메렌을 침공했다. 그는 올뮈츠를 포위했지만 라우돈에 의해 계속 병참선을 위협받았고 러시아군이 브란덴부르크로 진격할 준비를 하자 올뮈츠를 포기하고 뵈멘 중부로 행군해갔다. 놀란 다운이 그를 막기위해 나오자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우회하여 빈 적군진지를 점령하고 물자를 강탈한 뒤 슐레지엔으로 갔다. 키스 원수에게 슐레지엔을 맞긴 그는 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 퀴스트린을 공성 중인 러시아군에게 다가갔고 페르모르가 프로이센군이 오더강을 도하하는 것을 막기위해 나오자 프리드리히는 비밀리에 더 북쪽에서 도하하여 러시아군의 병참선을 막았다. 페르모르는 초른도르프 근처에서 방어진형을 차렸지만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빙 돌아오자 서둘러 전선을 남쪽으로 수정했다. 프리드리히는 러시아군의 남서쪽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고 자이들리츠가 기병돌격을 하는 사이 보병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남동쪽을 공격했다. 이 공격이 격퇴된 뒤 다시 자이들리츠가 우측에서 기병돌격을 하고 보병들이 한번 더 공격하자 러시아군은 무너져 병력의 반을 잃었다. 페르모르는 130문의 대포를 버린 채 쾨니히스베르크로 후퇴하였다.
그동안 다운은 뵈멘에서 작센으로 진격하며 하인리히를 위협했지만 프리드리히가 다가가자 호흐키르히로 철수하여 작센에서 슐레지엔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동생과 합류한 프리드리히는 용감하게도 오스트리아군 앞의 노출된 위치에 진지를 차렸고 라우돈은 다운을 설득하여 프로이센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새벽안개를 뚫고 오스트리아군이 공격해오자 프로이센군은 첫 공격을 격퇴시켰고 치열한 전투가 불붙었다. 숫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이 점점 프로이센군을 포위해오자 치텐이 기병돌격으로 완성되려는 포위망을 뚫었고 프리드리히는 이 틈으로 군대를 질서정연하게 후퇴시켰다. 그는 다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지를 차리며 다시 전투를 제의했지만 다운은 응하지 않았고 드레스덴에서 원군을 받은 그는 다운의 우측을 돌아 슐레지엔으로 행군해갔다. 다운은 망설이다 작센으로 퇴각했고 드레스덴을 공격했지만 프리드리히가 다시 다가오자 공성을 포기하고 뵈멘으로 후퇴했다. 프리드리히는 동프로이센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지켜냈고 작센을 다시 손에 넣었지만 상당한 수의 고참병들을 잃었기 때문에 그해 겨울 동안 신병들을 열심히 훈련시켰다.
러시아군의 사령관은 다시 솔티코프로 교체되었는데 그는 칠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해왔고 카를 하인리히 폰 베델 장군은 카이에서 그를 공격했다가 패배해버렸다. 다운은 라우돈에게 이만명의 병력을 맡겨 살\솔티코프와 합류하여 브란덴부르크 침공을 돕게했는데 프리드리히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결국 합류를 막지 못했다. 베델의 병력과 합류한 프리드리히는 연합군에게 다가갔고 이에 연합군은 쿠너스도르프 근처에서 방어진을 차린채 기다렸다. 적의 숫적우세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는 이중포위를 시도했지만 신병들이 많은 프로이센군은 이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고 공격은 제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적의 위치 일부를 빼았는데 성공했다. 장군들이 공격을 멈추기를 제의했음에도 프리드리히는 계속 공격했고 몇시간의 행군과 전투에 지친 병사들은 계속 격퇴당하는 상태에서 라우돈의 기병들이 공격해오자 프로이센 보병들의 전열은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도 간신히 탈출했다. 절망한 프리드리히는 퇴위할 생각도 했지만 패잔병들이 다시 모이고 민덴 전투에서 승리한 브라운슈바이크의 페르디난트가 지원병을 보내주자 다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연합군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이를 활용하지 못했고 다운은 러시아군과 합류하려고 했지만 프리드리히와 하인리히의 방해로 실패하고 모든 물자가 떨어진 솔티코프는 폴란드로 후퇴해버렸다. 다운은 드레스덴 근처의 진지로 후퇴했지만 그를 작센에서 쫓아낼 생각이었던 프리드리히는 모든 장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핑크에게 만이천명의 병력을 주고 드레스덴 남쪽의 막센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다운은 즉시 그를 공격했고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핑크는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결정이었지만 분노한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패전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불명예스럽게 예편시켰다.
다음해 연합군은 새로운 전략을 짜서 다운, 라우돈, 솔티코프가 각각 작센, 슐레지엔, 동프로이센에서 진격해오고 프랑스군은 하노버로 처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러시아군은 하인리히의 기동으로 멈춰버렸고 프리드리히 자신은 다운을 작센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라우돈은 란츠후트 전투에서 에른스트 푸케 장군을 처부수고 브레슬라우를 포위했고 프리드리히는 계속 라우돈과 다운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기동을 폈다. 다운이 라우돈을 돕기위해 움직이자 프리드리히는 그의 옆을 지나 드레스덴을 공격했고 다운이 서둘러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오자 그는 다시 빠져나갔다. 글라츠가 라우돈에게 점령되자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를 불렀지만 아직 그가 오기전 삼면으로 세배가 넘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둘러싸인 상태였고 여기에 더해 체르니체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돕기위해 오고있었다. 적이 야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프리드리히는 밤에 몰래 진지에서 빠져나와 리그니츠 뒷쪽의 언덕에 전투대형을 완성하고 기다렸고 라우돈도 야간기동으로 프로이센군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프리드리히가 기다리고 있는 언덕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숫적 우세를 믿은 오스트리아군은 계속 공격해왔지만 결국 격퇴당했고 라우돈과 함께 합동작전을 펼 생각이었던 다운은 이 소식을 듣고 즉각 후퇴했다. 브레슬라우에 입성한 프리드리히는 거짓정보를 담은 편지를 써서 한 농민에게 준다음 일부러 러시아군에게 잡히도록 한 뒤 그들의 폴란드로의 후퇴를 유도해 성공시켰다. 그는 작센으로 다가가고 있는 다운에게로 향했지만 곧 베를린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프리드리히가 베를린으로 행군하자 점령 사흘만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은 폴란드와 작센으로 후퇴했다.
다운은 토르가우 서쪽의 언덕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차려놓고 있었는데 프리드리히는 이와 상대하기로 하고 치텐이 종면을 공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시선을 끄는 사이 자신은 우회하여 북쪽의 적군배후를 치는 작전을 세웠다. 프리드리히의 공격은 치텐의 대포소리와 함께 시작하기로 했는데 독립지휘에 익숙치 않던 치텐은 경장병력과 전초전을 벌이면서 대포를 쐈고 이 소리를 들은 프리드리히는 아직 훌젠과 홀슈타인의 부대가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병력만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은 격퇴되었고 훌젠이 나타나자 프리드리히는 이들을 공격에 투입시켜 몇군데 위치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다운은 병력을 더욱 증파하여 이들을 다시 밀어냈다. 홀슈타인이 나타나자 그는 이들 또한 공격에 투입시켜 방어선을 돌파했고 날이 지는 가운데 일어나는 혼전 속에서 다운은 부상당하고 그의 뒤를 이은 폰 부코프 역시 다쳐서 실려나가 오도넬이 지휘권을 잡았다. 승부가 명확치 않자 프리드리히는 새벽에 공격을 재개할 생각으로 야영을 명했는데 이때 치텐이 다른 쪽에서 공격해왔고 오스트리아군이 이 예상치못한 공격에 놀라자 프리드리히도 다시 보병들에게 공격을 명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은 패주했고 이들을 섬멸하길 원했던 프리드리히는 추격을 명했지만 너무 어두운 밤이라 대부분의 오스트리아군은 엘베강 너머로 도망치게 되었다.
토르가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가 보충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 없었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다시 공격을 재개할 예정이었다. 더욱이 영국에서는 조지2세가 죽고 새로운 수상이 된 로드 부트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로이센에 지원하던 돈을 끈을 생각을 하고있었다. 봄이 되자 폴란드와 뵈멘에 있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은 슐레지엔에서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프리드리히는 계속되는 기동으로 이들의 합류를 막았고 소규모의 전투들은 이어졌지만 큰 전투는 없는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불첼비츠에 요새화된 진지를 차리고 적들을 기다렸는데 라우돈은 러시아군 사령관 부투를린에게 합류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망설이다 결국 거절하고 후퇴해버렸다. 프리드리히가 분첼비츠에서 나오자 라우ㅠ돈은 슈바이트니츠를 점령하고 책략을 써서 왕을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미리 정보를 얻은 프리드리히는 잡히는 것을 모면했다. 양측은 다시 동영에 들어갔지만 프리드리히는 작센과 대부분의 슐레지엔을 잃은 상태였고 거기다 마침내 부트는 지원금을 끈어버렸다. 이제 군대를 제대로 유지할 수 조차 없게된 프리드리히는 투르크와 타타르에 외교협상을 벌여 그들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프로이센의 패배는 명백했다.
그때 러시아에서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었는데 그녀의 뒤를 이어 황제보다 프로이센의 장군이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프리드리히 숭배자 표트르3세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즉시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전쟁에 나가있던 러시아군을 불러들인 뒤 오히려 이만명의 병력을 프리드리히에게 보내주었다. 곧 스웨덴이 함부르크 조약을 맺어 전쟁에서 빠졌고 페르디난트는 빌헬름스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했으며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으로 진격해갔다. 그때 러시아에서는 황후 예카테리나가 남편을 내쫓고 여제가 되었는데 그녀는 프로이센군에 배속된 러시아 군단을 소환했다. 프리드리히는 러시아 사령관 체르니체프에게 사흘만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려달라고 한 뒤 부르커스도르프 전투에서 다운을 무찔렀다. 다음날 프리드리히가 준 성대한 선물들을 들고 떠났으며 곧 프리드리히는 슈바이트니츠를 되찾고 슐레지엔을 점차 회복해나갔다. 작센에서는 자이들리츠의 도움을 받은 하인리히가 오스트리아와 제국군을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무찔러 작센에서 몰아냈고 페르디난트는 라인강 너머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투르크가 헝가리를 공격해오자 더이상 견딜 수 없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후버투스부르크 성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슐레지엔이 프로이센 영토임을 확정했다.
칠년전쟁이 끝나자 프리드리히는 많이 지쳐있었지만 곧 전쟁으로 황폐화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는 각 지방으로의 순정을 실시하여 상태를 알아보았는데 1756년 사백오십만명 정도이던 프로이센의 인구는 1763년에는 사백만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전쟁 중 죽은 이십만명의 병사들 외에 민간인들도 병과 기아로 인해 많은 수가 희생되었으며 만삼천채의 집들이 파괴되었고 농사를 지을 말이 없어 농지는 버려져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농사지을 씨앗들을 농부들에게 나눠줬고 군마들을 농업용으로 빌려줬으며 프로이센과 슐레지엔 지방의 세금을 면제했다. 다른 나라들이 곡물의 가격폭등으로 고생할때 프리드리히는 군사비용으로 예비해뒀던 재정으로 가격이 떨어지면 사들이고 오르면 파는 식으로 곡물가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인구를 복구하기 위해 이민이 장려되었고 땅이 개간되어 구백개의 마을들이 세워졌고 종전 삼년 뒤 슐레지엔에만 팔천채의 집들이 있게 되었다. "석공들에게 일자리를 주기위해" 상 수시에 새 궁전을 지은 것 외에 쓸데없는 재정지출을 줄이는 등의 사려깊고 현명한 프리드리히의 통치로 인해 프랑스나 오스트리아가 재정부담으로 곤란을 겪을 때 프로이센은 그런 문제를 겪지 않았다.
대외정책에서 그는 점점 강대해지는 러시아와의 친선을 추구했는데 1772년, 프리드리히와 예카테리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인 새 황제 요제프는 폴란드에 대한 지배권분쟁을 폴란드를 분할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에 동의했다. 프로이센은 서프로이센 지역을 얻었는데 크기로 보면 러시아나 오스트리아가 얻은 땅보다 더 적었지만 이 지역에는 육십만의 인구가 살고 있을뿐만 아니라 비옥한 농지였다. 게다가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과 따로 떨어져있던 동프로이센을 육로로 연결시켜주는 통로였기 때문에 프로이센에게는 슐레지엔보다 더욱 중요한 땅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즉시 이 새로운 영토를 답사하여 농노제를 폐지하고 유능한 관리를 골랐으며 프로이센 농부들을 데려오고 학교를 짓는 등 영토를 안정시켰다.
1778년이 되자 유럽에는 새로운 전운이 감돌았는데 새로운 바이에른 선제후는 오스트리아에서 현금지원을 받는 대가로 하바이에른의 일부를 내주기로 했고 요제프의 오스트리아군은 이곳을 점령했다. 프리드리히는 작은 독일제후를 희생시켜 세력과 영토를 늘리려고 하는 오스트리아를 비난하며 십만명의 병력을 모르고 항의서신을 요제프에게 보냈다. 7월 3일, 그는 선전포고를 하고 뵈멘으로 처들어갔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이에 맞섰지만 전투는 피했다. 양측은 싸우지 않은채 마초와 감자를 모으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고 9월이 되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이들은 뵈멘에서 철수했다. 요제프는 결국 바이에른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테셴 조약으로 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 소위 "감자전쟁"으로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의 강대함에 맞서는 소독일제후들의 옹호자로 떠올랐으며 1785년열내개의 독일국가들이 모여 이뤄진 프리드리히가 주도하는 제후동맹은 바이에른을 다시 차지하려는 오스트리아의 시도를 막아냈다.
프리드리히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고집이 세졌고 병 때문에 눕지 않으려 했다. 그는 프로이센인들은 하고싶은 말들을 할 수 있다며 자신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한다고 말했는데 이 때문인지 그는 의사들이 권하는 식단조절에 응하지 않고 먹고싶은 것을 마음껏 먹었다. 행정업무와 군대를 살펴보는 것은 계속했는데 1785년 8월 군대를 순시하는 중 비가 오는 날씨에서 그는 여섯시간 동안 말위에 앉아있다가 다음날 심한 열병을 앓았고 몸이 나은 뒤에는 더이상 말을 탈 수 없었다. 상 수시로 거처를 옮긴 그는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업무를 보며 지냈고 천식 때문에 잘때는 앉아서 자야만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의사들의 식단조절을 거부한채 먹고싶은 것을 먹었는데 86년 8월 16일, 그는 오후까지 일어나지 못했고 다음날 새벽 2시 20분, 평소 총애하던 간호병의 팔에 안겨 붕어했다.
이상이 책들에 담긴 프리드리히의 일생이다. 두책 다 군사쪽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프리드리히의 다른 업적들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소흘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이 책들만으로도 프리드리히의 대략적인 업적들은 알수 있으며 그의 군사외의 업적들을 알고싶으면 다른 책들을 읽기를 권유한다. 앞서 말했듯 더피의 책은 군사적인 면에 올인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채로 이책을 읽었다간 프리드리히의 생애를 "대략적으로라도" 제대로 아는 것이 어려우니 정 이 책을 읽어야겠다면 프리드리히를 다룬 다른 책들을 먼저 읽고 읽는 것이 내용을 파악하기에 쉬울 것이다. 그런점에서 나는 다행히 Dupuy의 책을 먼저 접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원래 Dupuy의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고 더피의 책은 이모께서 혹시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 갖고싶은게 없냐고 물어보시길래 부탁해서 선물받은 것이다(중고다). 원래 다른 책들도 몇권 더 부탁했지만 이 책 자체가 워낙에 비싸고 다른 책들은 구하기가 어려워(아마존 등 인터넷 서점을 신뢰하지 않으시는 이모님;;;) 결국 저책만 받았지만 읽고나니 Dupuy의 상대적으로 간략한 내용에 더 자세한 것을 알고싶은 나의 지적욕구를 채워줘서 대만족이다.
두책 모두 이제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구해서 읽으면 정말 유익한 책들이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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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책 모두 이제 절판되어... 에서 살짝 좌절하게 되네요.; 뒤져봐야겠군요.
아니 이게 사실 인가요? 이런 말도 안되는 왕이 근대 유럽에 존재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