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없음 올 해는 간송 전형필 선생 탄생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많은 분께서 알고 계시듯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받쳐 일본으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사들여 시들어 가는 민족 문화의 위대함을 지켜낸 분이십니다. 또 어렵게 모은 문화재를 널리 많은 사람들과 같이 연구하고 알리고자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전시실)을 설립하였습니다.
간송미술관은 그런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일년에 두 번(5월, 10월) 특별 무료 기획전시회의 개최하는데 이번 5월 전시회가 70회가 되니 기획전시를 시작한지도 벌써 35년이 되었습니다. 문화재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한번쯤을 들어보셨을 간송미술관 기획전은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언제나 무료관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옛 그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바로 간송미술관 기획전을 통해서입니다.
특히 올 해는 간송 탄생 100주년 특별전으로 소장품 중 지정 문화재(국보와 보물)와 간송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어 전시회 첫날 개장시간 10시부터 50m 이상 입장을 위해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간송미술관 입구 –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첫날> 미술관은 성북 초등학교 정문과 맞데고 있는데(오른쪽 방향에 성북초교 정문이 있다) 그 이유는 원래 북단장 땅의 일부를 간송이 성북초등학교 부지로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간송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거나 전시회가 열리는 보화각 건물을 다니면서 전형필 선생님과 간송미술관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 분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지금 이러한 모습이 가능한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왜 작품만 감상하면 되었지 설립자의 삶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묻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쩌면 문화재를 이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간송미술관과 전형필 선생님의 훌륭함은 이곳에 위대한 작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형필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위대함이 밝혀졌고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삶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민족 문화에 대한 사랑과 소장 작품들의 이해의 깊이를 더 할 것이며 앞으로 우리는 우리 문화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사람을 태어나게 할 때는 그 사람이 해 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안의 부귀나 능력의 고저에 상관없이 삶은 그 사람만의 몫이 있으며 그 몫을 다하면 하늘로 다시 불려드린다 합니다.
간송 선생님의 삶을 살펴보면 정말 이러한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문화재 수집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일제시대와 6.25 전쟁 속에서 주요 미술품을 어떻게 지켜냈는지를 알게 되면 한마디로 기적이고 하늘의 뜻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어떻게 간송에게 그 많은 재산이 생기게 되었는가 입니다. 간송 전형필은 1906년 7월 26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종로4가 일대는 ‘배우개’라는 이름으로 부렸는데 전형필이 태어난 배우개 양반댁은 종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송의 선대는 장사를 천하게 여기던 시절 양반으로서 상업에 일찍 눈을 떠 배우개의 상권을 하나씩 넓혀나가면서 모은 재력으로 전국 각지의 농지를 계속 구입하여 간송의 증조부인 계훈 시절에 수만 석을 추수하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계훈에게는 전창렬, 전창엽 두 아들이 있었는데 간송이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내외는 70대 중반이었고 작은 할아버지는 69세 동갑, 부모의 나이도 40세를 넘겼으니 손위 형과 14살 터울이 있었고 작은 할아버지 양자인 명기공이 자식이 없어 절손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에 간송의 탄생이 얼마나 집안의 큰 경사였겠습니까.
간송은 탄생과 더불어 종숙부 양자로 입후되었으니 큰댁은 생가로 작은댁은 양가로 각기 그 조부모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온갖 복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간송에게 신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송은 열 살 때까지 집에서 스승을 모시고 한문과 경서를 공부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열 두 살이 되어서야 어의보통학교(현재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집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시작으로 다음해에 양가의 할머니가 그 다음해에 양가 조부가, 두 달 뒤에 생가 조모가 돌아가시면서 3년간 곡성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부들의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또 양부가 돌아가시고, 그 후 보름도 지나기 전에 간송의 유일한 친형이요 본생가의 계승자인 형설이 불과 28세의 나이로 후사를 두지 못하고 급서하니 양부의 장례를 치르고 양조부의 대상을 막 끝낸 뒤 닷새 만에 당하는 날벼락이었습니다. 남달리 총명하고 감성이 예민했으며 거부집안의 막내손자로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랐던 간송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추사 김정희가 9세 때부터 16세까지 연속적인 근친의 죽음을 당하거나, 공재 윤두서가 3,4년간 근친들의 연이은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큰 인물들에게는 시련을 주어 더 큰 그릇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하늘의 안배인지 모릅니다.
<1925 을축년 간송생부 옥포공 회갑연시> 1925년은 여름에 을축년 홍수라고 불리우는 대규모 물난리가 났으며 이로 인해 대흉년으로 간송가도 추수를 받기는 커녕 소작인들의 기근을 구제하여야 했던 해이다. 그래서 회갑연도 가족끼리 모여 조촐하게 치루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이성과 감성이 둘 다 잘 발달되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어린 간송은 슬픔이 사람을 키우듯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이 많은 소년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후 간송은 휘문보고를 입학하였고 집안의 대를 위해 18살에 결혼도 합니다. 당시 미술교사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을 만난 것도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간송에게 남모르게 서적을 구입하는 취미를 갖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그냥 취미 수준이었습니다.
어째든 간송은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양가 집안 도합 10만석의 추수가 가능한 땅과 재산을 상속받을수 있는 유일한 집안 종손이 되어버린 간송은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조선에 들어와 민족문화의 말살을 안타까워 동양화로 전환한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면서 그 운명적 인생의 장이 시작되었습니다.
1926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간송은 곧바로 도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 유학생활은 깊은 갈등과 절망감을 맛보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종로 모퉁이에서 3.1 만세 운동을 가슴 뛰며 지켜보았던 간송으로서는 항쟁의 의식이 남달랐기에 나라를 빼앗기 처지에서 대학생활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고뇌가 언제나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간송은 일본학생에게 식민지인 조선인에게도 그런 게 의미가 있느냐는 식의 조롱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망국노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 일이 얼마나 분했으면 나중에 그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회고 할 만큼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온 간송은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 울분을 토하며 서로를 위안하던 중 춘곡 선생의 소개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니 그가 바로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위창 오세창 입니다.
아..위창 오세창, 추사 김정희 학문의 적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서예의 대가. 간송으로서 그 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근역서화징]을 보며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올바른 관점을 배우며 위창에게 직접 글씨와 서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간송은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기에 우리 문화재란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화재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은 민족혼의 말살이며 민족에게 미래가 점점 없어지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송은 위창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깨우쳐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당대 최고 노학자인 위창은 20대 초반의 간송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너무 많은 책임을 지워 미안하다고 말하며 스승과 제자를 뛰어넘는 인간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당대 민족문화의 정점에 서계신 노학자와 당대 조선 최고 갑부의 아들의 만남. 어찌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고자 하는 하늘의 안배가 아니라면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 간송은 위창을 통해 그를 도와 집사의 역할을 하면서 평생 문화재 수집에 앞장서는 도움을 주는 이순황을 소개 받았으며 우현 고유섭과 교우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우현을 통해 이제는 너무나 알려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저자이자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신 혜곡 최순우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위창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창은 간송뿐 아니라 몇몇 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 고고미술의 대부인 우현 고유섭입니다. –고고미술계의 교본인 [조선 탑파의 연구]의 저자 우현 고유섭.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현재 우리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학문적 계보의 정점에 서 계신 위창 오세창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야기 입니다)
<보화각 상량 기념사진> 왼쪽부터 청천 이상범,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석정 안종원, 위창 오세창, 간송, 박종목, 심산 노수현, 이순황
간송이 위창을 만나 문화재 수호의 뜻을 세울 무렵 간송의 가정에는 또 한번의 슬픔이 찾아옵니다. 홀로된 형수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렇게 해서 어른이라고는 어머니 한 분만 남아 십만 석의 재산을 상속 받은 청년가장이 됩니다. 간송집안은 부유하다고 해서 돈을 함부로 쓰는 집안이 아니 였으며 어려서부터 허튼 곳에서는 한 푼도 쓰지 않도록 교육 받아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간송은 본격적으로 문화재 공부와 수집에 몰두하는데 당대 최고의 감식안인 위창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34년 7월 간송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에 있는 양옥과 그 주변 땅을 사들였고 그 집을 ‘북단장’ 이라 이름 붙이고 1938년 윤 7월 5일에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을 건립하여 상량식을 치룹니다.
<보화각 전경> 건물 분위기나 주변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이 보화각을 설계했습니다
바로 북단장과 보화각이 지금 간송미술관 입니다. 1938년은 일제의 폭압정치와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할 때였고 동시에 대동아전쟁의 와중이었습니다. 양권(糧券)이 없는 사람은 밥을 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보화각을 짓는 공사는 조선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간송이 보화각을 세운 것은 일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표시였습니다.
간송미술관에 와보신 분들 중 잘 모르시는 분들은 미술관이 좀 낡고 어수선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자재와 기술로도 아파트가 30년이 되면 부시고 다시 지어져야 하는데 80년이 다 되가며 전쟁을 겪었음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대리석이며 전시실 바닥은 당시는 구하기 힘든 단단한 합판으로 깔았고 유물을 볼 수 있게 만든 전시함은 이태리에서 직접 수입된 것입니다. 수입가구를 사용한 이유는 당시 우리의 가구들은 이렇게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가구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것 같습니다.
<간송 전형필 생전모습> 어렵게 수집한 문화재를 보면서 어떤 감회를 가지셨을까?
간송은 이곳 북단장에서 본격적인 일본과 해외로 반출될 기로에 처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운명적으로 하늘이 보살피지 않았다면 간송의 품으로 올 수가 없었던 가슴 졸이는 이야기입니다. 그 흥미 진지한 문화재 수집 이야기는 블러그 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다음 편으로 미루겠습니다.
참고문헌 :[간송문화] 41호- 간송선생 평전 [간송문화] 51호- 간송이 문화재 수집하던 이야기 [간송문화] 55호- 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 [간송문화] 70호- 간송 전형필 [간송선생님이 다시찾은 우리문화유산이야기] 한상남 도서출판 샘터 [위창 오세창] 이승연 도서출판 이회
2006 . 6 . 1
전편에서 간송 전형필 선생의 탄생부터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건립까지 과정과 문화재를 수집하기 결심하게 된 과정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 드라마틱한 과정과 일화를 중심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간송이 위창과 함께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할 계획을 세울 무렵 아주 소중한 두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한 명은 의학도 김승현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위창의 소개로 알게 된 이순황이었습니다.
집안이 어려워 간송이 학비를 대었던 김승현은 간송보다 세 살 아래여고 이순황은 간송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평생 간송이 형제처럼 의지했던 사람들인데 특히 이순황은 평생 간송 곁에서 집사처럼 움직여준 사람입니다.
간송은 북단장과 보화각을 세운 후 이순황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앞에 내세워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는데 간송은 문화재를 구입할 때 절대 값을 깍지 않아 고서화 수장가들 사이에서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간송이 문화재를 구입할 때 값을 깍지 않은 이유는 문화재를 값어치 있게 보는 따뜻한 시선뿐 아니라 문화재를 보는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주인이 제대로 가치를 몰라 값을 싸게 불러도 말없이 서너 배를 돈을 지불하곤 했기에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구하면 먼저 간송에게 보이려 했습니다. 간송이 수많은 일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이런 면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간송은 관훈동의 유명하고 조선 말기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고서점 중 하나인 한남서림이 새 주인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이순황을 통해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이곳을 창구로 문화재를 수집합니다.
간송 선생님이 수집한 문화재의 양의 비해 구입경로가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인이 문화재를 구입 후 남들처럼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입에 관여한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비밀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러한 작업은 사전정보가 중요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준비 그리고 문화재 구입 후 손상된 부분의 보수 및 표구 등 깔끔한 사후 처리까지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재 구입동기와 전해지는 몇 가지 일화는 간송이 직접 생전에 지인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기에 100% 진실입니다.
[청화백자철사진국화문병](국보 294호)-경성미술구락부에서의 한판승
1936년 11월 어느 날 자주 거래하던 일본인 골동상점 온고당의 주인 심보는 급하게 간송에게 당시 조선저축은행장(제일은행의 옛이름)이면서 경성 최고의 고미술품 수장가인 모리고이치의 유품들이 경성미술구락부 특별전시경매에서 처분한다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명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출품 사진들을 보며 구입할 목록을 선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미리 사진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심보가 출품자들에게만 전해지는 정보를 얻기 위해 자기 물품을 몇 점 출품했기 때문입니다. 심보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그 동안 간송의 사람됨에 감복하여 간송의 거간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본 간송은 한 장의 사진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른 사진들은 옆으로 밀어놓고 그 사진만 묵묵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것은 청화백자에 난초와 국화, 그리고 곤충이 그려져 있는 목이 긴 병의 사진이었습니다.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294호) 높이 42.3 . 목이 길지만 풍만한 몸체가 눈부시게 하얀색이고 그 흰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진사(붉은 색 광석에서 빼낸 안료)와 철사(장석을 주성분으로 산화철을 섞어 만든 흑갈색 물감)로 들국화가 그려져 있으며 푸른 청화 안료로 금방 날아 가버릴 듯한 나비가 새겨진 보기 드문 명품은 그렇게 우리 민족의 품에 안식을 찾은 것입니다.
“ 전선생. 제 뜻과 같습니다 그려” 심보는 자기의 뜻과 같다는 생각에 흥이 나서 말하면서 단연 그 백자가 경매 물품 중 최고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드디어 경매일 11월 22일 경성미술구락부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간송과 심보가 들어서자 제법 많이 알려진 심보와 함께 들어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희고 둥근 얼굴, 머리칼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젊은이가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보는 경매장에서 일본에서 거물이 왔다는 소문이 누굴 말하는 건지 확인하던 중 소스라치게 놀라며 간송에게 야마나카가 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야마나키는 당시 교토에서 골동점을 운영하며 베이징,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게 각 곳에 지점을 두고 있는 세계적인 골동 거상이었습니다.
드디어 경매는 시작되었고 물건이 소개될 때 마다 탄성과 수군거림이 일었고 몇 사람의 경합자가 나서서 값을 점점 올려 가고 있었습니다. 보통 백자가 오백 원에서 천원 안팎에서 거래가 되었으니 당시 군수의 월급이 칠십 원 정도이고, 천원이면 웬만한 기와집 한 채를 살수 있던 시절이었기에 조그마한 그릇 하나가 천 원 안팎에서 거래되었으니 그 열기가 가희 어댔을지 짐작 가고 남습니다. 아직까지 간송과 야마나카는 단 한번의 경매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경매가 거의 종착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경매대 위에 눈처럼 흰 바탕에 국화와 난초, 풀과 곤충이 양각된 병이 올라왔을 때 실내는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드디어 경매는 시작되었고 오백 원부터 시작된 가격은 단숨에 오천 원을 넘어섰습니다.
“ 칠천 원 또 없습니까? “ 를 외친 후 사회를 보던 고하라가 경락봉을 집어 드는 순간 지금까지 침묵하던 심보가 소리쳤습니다. “ 팔천 원” 실내는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백 원 단위로 오르던 값을 단숨에 천 원을 올린 것입니다.
팔천 원을 두 번 더 외친 고하라가 경락봉을 집으려는 순간 한쪽 구석에서 “구천 원” 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바로 야마나카 였습니다. 그 후 심보가 다시 “일만 원” 하고 외쳤습니다. 이제 경매는 단순히 경매를 넘어서서 일본과 조선의 자존심 싸움을 상징하는 분위기로 넘어갔습니다. 그 뒤로 오백 원씩 오르던 금액은 경매 사상 최고가를 넘어섰고 일만 사천 원부터는 오십 원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아먀나키가 지친 듯 눈을 감고 외쳤습니다 “일만 사천오백오십 원 “ 심보가 다시 외쳤습니다 “일만 사천 오백육십 원” “ 일만 사천 오백칠십 원” 야마나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불렀으나 이미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일만 사천 오백팔십 원” 심보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고하라의 경락봉이 힘껏 내리치는 순간 경매장은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상감청자운학문매병](국보68호)
이 이야기는 블러그에서(시간창고로 가는 길: 간송에서 단원을 만나다)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조그마한 주둥이 바로 밑에서부터 풍만하게 부풀어다가 좁아들면서 흘러내리는 어깨 선이 유난히 아름다운 높이 42 cm 의 매병. 일명 천학매병은 천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모습이 새겨진 고려시대 최고의 청자로서 신창재라는 수집가가 도굴꾼에게 4천원에 구입 후 소장하고 있다가 일본인 수집상인 마에다에 고가에 넘긴 물건 이였습니다.
매병은 서서히 입소문이 났습니다. 실물을 본 골동상인 누구나가 가히 대적할 물건이 없는 명품이라는 것을 인정했기에 일본 골동상인은 물론 조선 총독부박물관까지 1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했으나 마에다가 거절했습니다. 더 값을 올리려고 마에다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보가 이러한 이야기를 간송에게 들려주자 “물건을 봅시다”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바로 마에다 집을 향했습니다. 간송 선생님은 심보라는 일본 골동품업자를 통해 천학매병의 이야기를 듣고 마에다를 직접 찾아갑니다. 그 집에서 작품을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간송 선생님은 이 물건을 절대 일본인에게 소장하게 할 수 없겠다고 결심합니다.
천학매병을 구입하기 위해 판 대구지역 5천석 지기 땅이 지금의 시가로 4천억 정도 한다니 가격산정이 불가능 할만도 합니다. [훈민정음]과 더불어 영원히 해외반출이 불가한 문화유산입니다. 한가지 안타까운것은 뒷쪽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금 깨져있다는 점입니다. 도굴꾼들이 쇠꼬챙이로 땅을 찍어보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마에다상, 그래 어느 정도 쳐주면 되겠어요? ” 마에다는 머리를 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불러야 하나. 이 청년은 절대로 값을 깍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흥정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가!’
“2만원.” “뭐요! 2만원?” 마에다의 말에 놀라 소리친 사람은 간송이 아니라 심보였습니다. 쓸만한 기와집이 2천원 이였으니 10채 값을 부른 마에다를 어찌 놀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간송은 처음 그대로의 목소리로 “심보상,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현금이 덜 준비되었으니, 오늘은 5천원을 드리고, 나머지는 열흘 안으로 치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어음을 써드리지요.” 바로 말하고 현금을 갖다 주었다 합니다. 물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선친이 물려주신 땅 수백 마지기를 급매물로 팔아야 했습니다.
아무튼 물건을 판 마에다는 그 다음날 일본 최대의 골동품 대가인 무라카미가 그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했지만 이미 물건은 간송에게 넘어간 후였습니다.
무라카미는 한국에 오자마자 간송을 방문하였습니다. 한참 동안 천학매병을 감상하더니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묵묵부답인 간송에게 가격이라면 부르는 데로 주겠다며 산 가격의 두 배인 4만원을 제시 했습니다. 간송에게 며칠 만에 엄청난 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간송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넘겨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무라카미상이 이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저한테 가져다 주시고 이 매병은 원금에 가져 가시지요. 저도 대가를 남만큼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하하하...이것보다 더 좋은 물건이 있으면 너보다 돈 더 많이 주고 사겠다. 그리고 이건 원금으로 주겠다는 응수. 조센징이라면 일단 깔보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일본인에게 이렇게 호쾌한 응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괴산외사리 석조부도](보물579호) – 돌도 우리 것이다
간송은 언제나 인천항을 통해 외국으로 반출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보망을 갖추어 놓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문화재 반출은 특별한 일 아니라면 조용히, 비밀리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기에 사전정보를 입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대부분 이순황이 맡았을 것입니다. 하루는 이순황이 급히 간송을 찾아와 급히 인천을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오? “ “충청도에 있던 고려시대 부도 하나가 일본인에게 팔려서 인천항으로 갔다고 합니다. “어서 다녀오세요. 서둘러 주시지요” 간송은 두말 않고 선뜻 현금을 주었습니다.
이순황은 아름다운 부도가 배에 실리기 직전 부두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엄청난 액수를 물어주고 부도를 붙잡았습니다. 이 부도가 바로 간송미술관 야외에 서있는 괴산외사리석조부도(보물579호) 입니다. 팔각당형의 아름답고 깨끗한 형태로 연꽃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걸작입니다.
<괴산외사리부도> 6.25 사변 때 파손되어 또다시 각 부재가 흩어진 것을 1964년 2월 3일 간송의 대기일을 맞는 날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화강암재의 8각 원당형 부도로서 4장의 장방형 판석으로 짜여진 지대석위에 놓여졌다.
간송은 1935년에 이미 경북 문경의 한 절터에 서있던 오층석탑이 헐값에 팔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운반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달려가서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워 안정감이 뛰어난 전문경오층석탑(보물580호)도 지금 간송미술관에 서 있습니다.
간송은 반출되기 직전의 석조유물만 구입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유물도 다시 되사온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는 이순황이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이미 일본으로 팔려 나가 오사카 경매장에 나온다는 정보를 간송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간송은 두말 않고 “이번에도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수고라니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가격에 구애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낙찰을 받도록 하시지요”
이순황은 경매에서 어렵게 석탑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조국에 돌아온 삼층석탑(서울시 유형문화재 28호)도 보화각 뒤뜰에 안식처를 얻었음은 당연지사입니다.
<삼층석탑> 앙련이 꼭 촛불같다.
3층의 옥개석 중 반전되는 일부분이 훼손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 구성된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것은 소실된 상태이다. 이 삼층석탑은 탑신의 초층 옥신이 2층과 3층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옥개받침이 3단인 점 등 양식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느 날 가까운 친구가 간송과 함께 보화각 뜰을 산책하다가 물었습니다. “저 삼층석탑이 일본에서 돌아온 것인가?” “그렇다네 일본의 재력가와 붙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이 많이 들었지.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실어다 놓고 보니 아주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네. 하지만 우리 석탑 하나를 되 싣고 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지 “
한번도 보지 않은 석탑을 무조건 되 사오게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대해 깊게 사랑했는지 말해주는 일화입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무심한 눈빛으로 한번씩 힐끔 쳐다보았던, 아무 설명도 치장도 없이 나무들 사이에 서있는 부도와 탑, 석불들은 그렇게 하나씩 일본인의 손에서 되찾아온 유산들인 것 입니다.
[훈민정음](국보 70호) – 하늘이 보우하사
1942년 늦여름 간송은 오랜만에 한남서림에 들렀습니다. 언제나 이순황이 수시로 찾아와 정보를 전해주는 터라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그날따라 어떤 힘에 이끌리듯 한남서림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한남서림에서 창 밖을 보던 간송은 평소에 옛 서적을 거간하기로 유명한 골동상인 하나가 하얀 모시 두루마기의 나들이 옷을 입고 서둘러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순황을 시켜 무조건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일렀습니다.
잠시 후 이순황을 따라 들어온 골동상인에게 “ 그리 부지런히 어디를 가는 길이오? 더위나 좀 식히고 가시구려 ” 간송이 웃으며 말하자 그 사람은 조금 머믓거렸지만 “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 라고 묻는 간송의 탐문에 그만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실은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 기막힌 물건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기막힌 물건이라… 물론 서적이겠지요? “예 아주 큰 물건입니다” “어서 이야기하시지요” 이순황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습니다.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 합니다”
갑자기 간송은 숨이 멎는 듯 했고 머리가 갑자기 하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찍어낸 훈민정음 원본. 존재했다는 것 만 전설처럼 내려온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니..
<훈민정음 원본>
국보 지정 논란 때마다 국보 1호로 재지정 되어야 한다는 논란을 일으키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신록과 더불어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고 국내 유일본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의 발견으로 그 사실이 증명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구강 원리를 기초로 창제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당시 1942년도는 전황이 나날이 고조되어 일본이 극도로 예민한 시기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일제가 우리말을 금지하자 조선어학회는 서둘러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 하다가 한글학자 33인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 모임인 진단학회가 강제 해산되었던 해입니다. 그런 시절에 훈민정음이 나타나다니.. 일본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떨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돈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간송은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나와 여러 번 거래해봐서 아시겠지만 물건은 제 값을 주고 사야지요”
그리고 선뜻 일만 일천 원을 전해주면서 “책 주인에게 일만 원을 전하세요. 그리고 일 천원은 수고 비로 받으세요”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국보70호)은 일제 치하에서 무사히 보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간송이 아니었으면 그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내어 투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후 간송은 세종 때 발간한 동국정운(국보 71호)과 거문고 악보인 금보(보물283호)등을 구입하는데 하늘이 보우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유물들이 일제 치하에 살아 남았겠습니까…
이밖에도 아궁이 속에서 건져낸 혜원 신윤복의 [해악전신첩]등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 길어져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종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음편에는 6.25 전란을 이겨낸 기적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 제가 간송의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저의 속마음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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