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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成人)이 되어 마주한 노을
2026년 10월 19일 월요일
선경 정해균의 독서 노트
◐ 노을은 밤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이다.
노을
기형도
하루종일 지친 몸으로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西行)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燒却場)으로 몰려 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 들어 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刑量)
단 한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時間)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象徵)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都市)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달아나
속도(速度)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권의 책(冊)이 되리라.
승부(勝負)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午後) 6시(時)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 나가는 일상(日常)의 공포(恐怖).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각자 어디로 가지?
♣독서노트 註.
기형도 시인의 짧은 생애와 작품에 대한 사후 평가.
시인 기형도씨는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여 났다.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에서 근무했다. 시인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 가 당선되면서 부터 문단에 공식 데뷰했다. 민중시, 노동시 등 투쟁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그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시 세계를 다지는 작품들을 줄곧 발표했다. 1989년 3월7일 새벽, 그는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증이었으며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 그해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살아 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일부 비평가에 의해만 내면적으로 비의적이고 우화적인, 독특한 색채의 시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입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한국 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10년동안 그의 작품들은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혀 왔으며, 많은 시인 비평가들로 부터 새로운 의미들이 끊임없이 추가되어 그 미학적 시대적의미가 놀랄 정도로 증폭되었다. 이제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새로운 고전으로 우리 문단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자료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발간한 《기형도 전집》에서 가져왔습니다.
【선경의 독서노트】
◐기형도시인의 시 《노을》에 대한 종교철학자의 해설.
노을은 어린이들의 시에도 많이 다뤄지는 소재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다뤄지고 있는 노을은 동시(童詩)에서 그려지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단한번의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시간’이 무서운 줄 모르고 보내왔던 우리 삶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승부를 알 수 없는데도 오직 이겨야 한다는 강박으로 몰아 치며 어느덧 폐휴지 신세로 전락한 우리 삶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밤은 그림자마저 빼앗아 간다. 시간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밤도 무섭다.
사실 그림자로 말하자면 햇빛이 쨍쨍할 때 가장 선명하지만 이때 우리는 그림자에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보이는 것들만 바쁘게 쫓아다니다 보니 그럴 겨를도 없다. 그러다가 해가 기울어 가장 근심스러운 색깔로 소각장을 향해 노을이 지면 그림자는 가장 길어 진다. 우리의 곁에 늘어진 그림자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이도 매우 짧은 순간이다. 그저 잠시일 뿐이다. 하루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그렇게 길지 않다는 말이다.
곧 밤이 온다. 그림자를 빼앗아가 버리는 밤 말이다. 그림자를 빼앗긴다는 것은 되돌아 볼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후회를 허락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은 드디어 되돌아볼 여지마저 빼앗아가는 공포로 들이 닥친다. 노을은 밤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이다. 가장 길어 졌던 그림자가 바로 없어 진다. 노을은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가장 무섭다. 그 무서움을 넘어서는 길은 시간의 소중함을 되 새기는것 뿐이다. 그러면 노을이 다시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정재현 지음 《인생의 마지막 질문》 중에서.
♣독서노트 註. 정재현 교수는 연세대하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종교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성공회 대학교를 거쳐 지금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종교 철학전공 주임교수 직분을 맡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 마주한 노을에 대한 선경(善慶)의 생각.
《탈무드》는 "좋은 항아리를 가지고 있다면 오늘 사용하라. 내일이면 깨져 버릴지 모른다"라고 가르칩니다. 서양에도 "(가진 것을 다 쓰고 죽어라) 즉 die broke" 라는 말이 있습니다. die broke의 개념은 살아있는 동안 재산을 상속을 위해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생전에 모은 재산을 가족이나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자신의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전부 사용하자는 취지입니다. 즉 우리의 재산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살아 생전에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할 자원으로 보는 시각이 die broke의 철학입니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생전에 내가 가진 자원을 자발적으로 희사하는 일은 매우 용기 있는 일입니다. 내가 죽은 후 쓰고 남은 돈이 있으면 좋은 일을 위해 희사하겠다는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가짐입니다. 후자는 “마지못해 베푸는 행위”의 일종으로 중세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1135-1204)가 규정한 “자선의 8등급”중 최하위 등급으로 분류됩니다. 최고의 등급은 “to dispense with charity altogether by enabling your fellow humans to have the wherewithal to earn their own living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의 자립을 도와 (궁극적으로) 자선의 필요성 자체를 없애는 고차원적인 자선행위입니다.
이생에서 다 쓰고죽자의 목적어는 흔히들 금전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고유한 재능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자원은 금전 못지 않게 유용한 개인소유의 무형자산입니다. 자원봉사가 필요한 곳에 무료 봉사 (노인 요양원의 도움이 봉사, 병원, 지하철, 공공기관 등의 안내봉사, 자선단체의 급식봉사, 종교단체의 주차 안내 봉사, 등)는 살아 있을 때 돈과 상관없이 공여자의 몸과 정성으로만도 수행할 수 있는 선행(善行)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을 때 좋은 일을 하는 가축(家畜) 중에는 젖소, 양, 닭 등이 있습니다. 젖소는 우유를, 양은 털을, 닭은 계란 등 인간의 식(食)과 의(衣)에 유용한 자원을 제공합니다. 반면에 돼지는 살아 있을 때는 사료를 축내며 사육을 당하다가 죽어서야 비로소 인간에게 식용으로 자신의 몸을 거래가치로 바치게 됩니다. 죽어서 사료값에 다 알파를 환원하는 돼지보다 살아 있을 때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소, 양, 닭, 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애정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살아있을 때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좋은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이기적인 삶을 산후 죽어서 쓰고 남은 돈을 불우한 이웃이나 자선 단체에 희사한다 해도 사후 기증은 생전 기증보다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부는 소액이라도 생전에 자기가 쓸 돈을 아껴서 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한달에 10,000원씩이라도 자기가 쓸 돈을 아껴서 여러 사회 단체에 오랫동안 기부하면 부자가 아닌 보통사람도 얼마든지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그리고 오래 동안 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살아 생전에 자기가 쓸 돈을 아껴서 불우 이웃을 돕거나 사회단체에 소액이라도 기부하는 것이 자선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는 명실상부한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에 의하면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如慶), 적불선가(積不善之家),필유여앙(必有如殃)”이라고 했습니다. 해석하면 “선을 쌓는 집은 반드시 경사로움이 넘치고, 선하지 않은 불선을 쌓는 집은 반드시 재앙이 넘쳐 난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필자의 필명 선경(善慶)은 “적선지가(積善之家)”에서 선(善)을 취하고 필유여경(必有如慶)에서 경(慶)을 취하여 만든 것입니다.
쓰고 남은 물질을 주는 것은 불선(不善)의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생전 또는 사후에 상관없이 자신이 쓰고 남은 것을 베푸려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선량함을 확인받고 싶은 계산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계산 없이 순수한 humanity의 발로가 주는 사람의 기본적인 품격입니다. 계산이 깔린 나눔은 베품이 아니고 일종의 거래적 선행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거래에는 반드시 등가의 반대급부가 수반해야 공정 거래가 성립됩니다. 베품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주는 사람의 순수한 선물입니다.
삶을 영위하는데 "태도는 큰 차이를 만드는 작은 것이다” 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도는 교육을 통해서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눈을 뜨고 터득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기부하는 데도 기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즉 태도가 중요합니다. 내 것을 주고도 받는 사람이 고마운 마음은 커녕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면 주는 사람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영어의 알파벳 스물 여섯 자를 에이(A)에 1의 값을 부여하고, 연이어 비(B)에 2, 씨(C)에 3 등 순차적으로 올라가는 일연의 값을 매기면 알파벳의 마지막 자 젯트(Z)는 26이 됩니다. 이렇게 부여한 알파벳의 값에 따라 일상에서 추구하는 전통적인 삶의 덕목을 상징하는 단어를 숫자로 환산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태도(attitude) 100점
열심히 일하기(hard work) 98점
지식(knowledge)96점
돈(money)72점
행운(luck) 47점입니다.
미국의 재정 설계사 스테판 M. 폴란(Stephen M. Pollan)과 마크 레빈(Mark Levine)이 공동 저술한 《다쓰고 죽어라(Die Broke)》에서 망자(亡者)가 남기는 유산의 개념을 색다르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마지막 날에 자신의 인생을 후회 없이 돌아보면서 이제까지 보냈던 시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를,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해준 일을,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함께 지낸 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아름다운 노을처럼 익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잘 익어간다는 말은 사랑의 품이 더욱 크고 넓어 지고 깊어 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잘 익은 사람이란 어떤 일이나 환경이 닥치든, 자기 다움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고요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잘 익은 삶이란 소유의 집착이 아니라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존재의 삶을 빛내는 삶의 일상적인 실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결실의 계절 가을에 내 삶의 열매는 지금 잘 익어 가고 있는가? 조용히 자문자답 해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단어 “commencement”는 다의어(多義語)로 “졸업식”이란 의미와 “시작”이라는 서로 상반된 두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생무대에서 한생명의 퇴장 또는 졸업은 결코 영원 한 사라짐이 아니고 이제 막 무대에 오른 다른 배우로의 환생을 통하여 또다른 나로 새롭게 태여 나는 인과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인생의 노을 무렵에 처한 노인들은 자기가 주연을 맡고 있는 무대에 어둠이 깔리고 막이 내릴 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글을 마치면서 황혼에 처한 주연 배우가 기억할 만한 성군 세종대왕의 아포리즘(Aphorism) 한 줄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천수수여차(天數雖如此), 인사불가부진(人事不可不盡)
직역. 하늘의 운수는 비록 이와 같더라도 사람의 일은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의역. 하늘 탓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만일 사람의 일이 혹시라도 미진함이 있다면 상과 벌이 없을 수 없다.)
-《세종실록》 재위 19년 1월22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