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세미나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
근대 한국선의 중흥조라 불리는 경허스님(1849~1912)에 대해 최근 일각에서 제기된 부정적 평가가 식민통치이념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계종 교육원과 덕숭총림 수덕사가 11월21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경허선사 열반10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박재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이같이 밝혔다.
‘현대 한국사회의 당면 문제와 경허의 사상’에서 박 교수는 “경허에 대한 부정적인 인물평에는 식민통치 이념이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경허에 대한 평가를 내린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친일성향을 강하게 보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권상로, 김태흡 스님 등은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을 일제의 정책에 순응케 해 황국신민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심전개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들에게 주색에 대한 경허스님의 일화들이 부정적으로 확대 재해석”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경허스님이 한국불교의 사표(師表)로 삼기 어렵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자기 검열을 통해 체제에 순응토록하는 것이 사표의 허구성”이라며 “사표에 대한 독재적 혹은 식민지적 허구성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봤다.
박 교수는 경허스님이 주색관련 행적과 관련해 반성의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반성이라기보다 자아수용의 태도에 가까웠다”며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정직하게 인정한 태도는 정서적으로 성숙되고 안정된 사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첫번째 발제는 경허의 문학을 주제로 진행됐다. |
이와 함께 박 교수는 경허스님의 북행(北行)과 역사의식에 대해서도 재조명했다. 경허스님은 특별한 이유없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몇 년 후 시골 서당의 훈장으로 나타났다. 이 북행사건은 보는 이에 따라 운둔, 환속, 소멸 등 여러 가지로 해석돼왔다.
박 교수는 “동학사 강사와 범어사 조실을 지내고 해인사 인경불사와 수선사 불사 법주 등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경허스님의 위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며 “그의 북행은 도피성 은둔이 아니라 의도적 자리비워주기”라고 평가했다.
경허스님은 한암스님에게 남긴 ‘경허화성전별사’에서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은데 세상은 위태로우니 어디에 몸을 감추어야할지 알 수 없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한 분야에서 이름이 높아지면 자신의 식견이 닿지 않는 분야에서조차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라며 “경허스님은 이런 문제점을 간파하고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식견과 안목을 지닌 수행자에게 자리를 비워준 것”으로 봤다.
박교수는 또 결제 때마다 선원에서 정진한 대중의 법명과 소임을 기록하는 방함록 작성에서도 경허스님의 역사의식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경허스님 이전 한국불교나 중국에서 방함록 존재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근대 방함록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경허스님이 조당의 위치에 있던 1899년 해인사 퇴설선원 동안거 방함록이다.
그는 “한국불교의 방함록 작성을 처음 시도한 인물이 바로 경허였을 것”이라며 “뒷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감계(鑑戒)로 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박 교수는 “경허스님의 유문을 보면 그는 어떤 수행자보다 엄격하고 방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중노릇하는 법’이나 ‘결동수정헤동생두솔동성불과계사문’에서 스님은 절제나 청빈을 미덕 차원에서 권장하고 있지 않는다.
생사대사의 해결이라는 수행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윤리성이 자연히 확보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는 “경허스님은 욕망과 권력에 경도되지 않는 수행자의 자유로운 의식을 통해 수행자의 윤리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밝혔다.
인사말을 하는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 |
이날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은 “경허선사는 불교가 쇠퇴했던 시기 혜성처럼 출현해 꺼져있던 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근현대 많은 스님들이 선사의 영향을 받아 공부했다”며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고 일체 중생을 위하겠다는 자비행은 오직 선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처절하게 정진하고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선사의 위대한 발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이상한 스님으로 묘사되는 것은 선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며 “오늘 세미나가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며 선원을 개원하고 전법하려 했던 진지한 모습을 비롯해 경허선사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가 ‘경허의 문학’에 대해, 전 전국비구니회 기획실장 효탄스님이 ‘경허의 법맥과 그 계승’에 대해 발표했다. 또 김방룡 충남대 교수가 ‘경허의 간화선과 수행관’에 대해, 신규탁 연세대 교수는 ‘<경허집> ’법어‘에 나타난 경허의 선사상 소고’를 주제로 살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