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사 제지 및 종이 등 공납, 지통(紙桶, 구유-구시(방언)-조槽) 관련 사료
1.
<“寺之傍厥草藤厥木楮。居僧之業而資者也。 叔父與余。攤飯移時。俄而縣之學者金得鏡追而至。趙之命也。白飯靑蔬。山味甚佳。且以酒數行。老僧以芒鞋進曰自寺而西。雲門石逕。崎嶇斬絶。非此難涉。卽選一行人。談僧曰學衍。詩奚曰德龍。硯者曰洪源。酒者曰梅雲。衣且糧者曰億童。且令一白足度暮可至某庵爲宿處 (중략) 叔父指巖間綠叢曰莫此箭竹耶。學衍曰官司之所貢廂吏者也 (중략) 叔父云北數十步有普賢庵。東百許步有見祥庵。皆無僧。余詰其無。學衍曰佛之衰矣。官之役矣。 (중략) 至於棠使星臣。亦擁節而信宿焉。僧爲輿曳之卒。寺作廚傳之館。此山之有名。吾僧之甚害也。
절의 곁에 풀이라곤 등나무(-닥나무와 같이 종이의 원료)이고 나무라곤 닥나무인데 거주하는 승려들의 생업 밑천이었다.
......
노승이 짚신을 바치며 말하기를 ‘절에서 서쪽으로 구름문과 돌길이 험악하고 깎아지른듯하니 이 아니 어려운 걸음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동행할 사람들을 뽑았는데, 이야기를 나눌 승려(談僧)는 학연(學衍), 시문을 챙기는 시해(詩奚)는 덕룡(德龍), 벼루를 드는 사람(硯者)은 홍원(洪源), 술시중할 사람(酒者)은 매운(梅雲), 옷과 양식을 들고 갈 사람은 억동(億童)이었다. 또한 한 명의 백족(白足-淸淨僧)으로 하여금 날 저물 시간을 헤아리게 하여 아무 암자에 이르러 잠자리로 삼도록 하였다.
......
숙부가 바위 사이의 녹색 수풀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화살대가 아닌가?’하였다. 학연이 답하기를 ‘관아의 아전에게 공물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
내가 그 승려가 없음을 힐난하자. 학연이 말하기를 ‘불교가 쇠퇴한 것입니다. 관아의 부역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
스님들은 가마꾼이 되고 절은 밥을 지어 나르는 여관이 되었습니다. 이 산이 이름을 가지면 우리 스님들이 심하게 해를 입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여일, 유내영산록, 1587(임진왜란 발발 5년 전)
2.
<二十日小有雨徵。飮白粥酒一廵而發。余委見光胤于其家。親親之義厚矣。朝飯申光村。午過淸河縣。諧甫入見主倅。諸君幷歇馬于松羅驛溪邊。余入酌一盃而行。諧甫追到于寶鏡寺。寺乃鉅琳宮。幾至二百餘間。而但無所奇觀。此與村店相隣。左右楮田。瀰滿一洞。可知寺僧皆重利者也。法堂前有牧丹一叢。只爲野僧之賤看可惜
음력 (9월) 20일 조금 빗방울이 떨어졌다. 백죽주(-쌀로 누룩을 만들고 배꽃 필 무렵에 쌀가루로 술을 빚는데, 요구르트처럼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고, 물에 희석시키면 쌀 막걸리 탁주가 되는 이화주를 말하는 것 같다. 이화주는 고려시대부터 마시던 최고급 탁주로 소화력이 약한 어린이나 병약자, 여행객이 휴대하여 마셨다. )를 한 잔 마시고 출발하였다. 내가 광윤을 그 집에서 보았는데 친척을 친하게 여기는 의리가 두터웠다. 아침밥을 신광촌(神光)에서 먹고 정오 무렵에 청하현을 지났는데 해보가 읍성으로 들어가 원님을 만났다. 제군이 송라역 냇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고 나는 (주막으로) 들어가 술 한 잔을 마시고 갔다. 해보가 보경사로 뒤쫒아 왔다. 절은 거찰이라서 거의 200여 칸의 건물들이 있었다. 다만, 특별히 볼 만한 경관은 없었다. 이곳은 촌주막(송라역 아래쪽 '여인의 숲'이 있는 곳?)과 서로 이웃하였다. 절의 좌우에는 닥나무밭인데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절의 승려들이 모두 (제지 생산과 판매의) 이익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법당 앞에는 모란 한 떨기가 있었는데, 다만 야승의 천박을 보여주니 안타까웠다. >
-서사원, 동유일록, 1603(임진왜란 종료 5년 뒤)
3.
<山水之佳 美則美矣 班豹之皮 反自爲禍 水明之害 困於紙役 山佳之患 苦於賓客 然 天生山水 人如之何
산수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일 뿐이다. 표범 가죽의 아름다운 무늬가 오히려 목숨을 빼앗기는 화가 되고, 물이 밝은 것의 해로움은 (관아에 공물로 바치는) 종이를 만드는 공역을 부담하는 곤란을 준다. 산이 아름다운 것의 근심은 빈객을 (대접하고 가마 태우고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이 된다. 하늘(자연)이 산수를 낳았으니 사람이 어찌하겠는가.>
-동봉회관 스님, 보경사사적기, 1792.
***참고문헌
1. <<역사를 되살리는 힘-전통 기록문화유산의 세계>>(한국국학연구원, 2011).
-위의 책 사진에서 지통(紙桶)의 한자가 잘못되었다.
2. <<역사스페셜7>>(효형, 2004) 238-240쪽.
-이 책에서는 통도사 지통 사진을 제시하고 있는데, 지통을 절에서 전통적으로 불러오던 대로 ‘구유’라고 하였다.
***한지제작전문가 및 한지미술가
영담 스님, (영담한지미술관: 전화 054-373-3638 경북 청도군 운문면 방음리 747)
-영담 스님은 구시통의 기능을 다음 3가지를 들었다.
1. 닥풀(닥종이 펄프)를 물에 개어 두던 용도.
2. 닥풀 속의 불순물 선별 용도
3. 닥풀의 표백 용도
***비사리 구시- 뉴조(杻槽)
1.뉴조는 비사리구시의 한자 표기이다(송광사박물관 김일동).
2.뉴(杻)는 감탕나무, 싸리나무인데, 싸리나무는 관목이므로 지통을 만들 수가 없다. 산림과학원 정성호 박사의 설에 의하면 사리(Sarira)를 담는 통을 무늬가 좋은 느티나무로 만든 데서, 느티나무를 절에서는 사리나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한자로 느티나무를 괴목(槐木)이라고 하는데, 괴자에 귀신 귀자가 들어가 있어서 어감이 사기를 물리치는 신령스러움이 있다고 한다. ([전영우, 절집 숲에서 놀다 | 마지막회], 송광사 들머리 숲길, 불국토 앞 수양공간 온기에 몸과 마음은 깃털이 되고 신동아 통권 615호(p592~604))
3. 송광사 지통(구유통-구시통)은 전영우 박사의 분석에 의하면 느티나무라고 한다(전영우, 위의 글).
4.조(槽)는 구유인데, 물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수조(水槽), 석조(石槽). 구유는 ‘말구유’처럼, 소, 말 등의 짐승의 여물통을 말하기도 한다. 예)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여물통(경상도 방언). 구유를 전라도 방언으로 ‘구시’라고 하는 것 같다. 한지 만들 때, 구시통(지통)에 물을 담고, 닥풀(닥종이 펄프)을 개었다. 한지와 관련해서는 구시가 곧 지통을 말하는 것이다. 4천명의 밥을 퍼 담는 밥통이 아니다.
****지통(구유-구시)가 현전하는 사찰
-송광사, 범어사, 경남 고성 옥천사, 양산 통도사, 포항 내연산 보경사 등
지통은 문화사(공예, 기록, 인쇄), 사원경제사와 관련된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