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눈
하루는 24시간이다.
이것은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또 내일도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그런데 왠일일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작은 바이러스가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다르게 느끼게 만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참 들어보지도 않은 용어가 일상화되면서 누구를 만나는 것이 생각하게 만들고 그 많던 설렘과 벅찬 감정들이 어느 한 순간 망설임으로 변화되어 굳이 감금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나다니는 것을 망설이게 되니 자꾸만 시간감이 더디게 느껴진다.
생활방식이 바뀌니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것도 많다.
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마시기 위해 커피를 갈고 내리는 일이 일상화되고 하루 종일 있어도 안 보던 텔레비전을 가끔씩 보면서 세상에 익숙해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간혹 크게 놀란다.
그 많은 소식들이 궁금하지 않다고 외면하고 싶었던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된 것은 순전히 코로나 때문이다.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고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으니 하루 동안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에 대한 생각에 확신이 없어 예전에 하던 방식이 아닌 이것저것 변화되는 환경에 자연스럽게 맞춰가고 있다.
아내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니 텔레비전과 등을 돌리고 싶지만 아내가 좋아서 앉으면 텔레비전을 켜고 있으니 자연히 보고 듣게 되어 이것이 정상적인가 하고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은 싫다.
잡다한 소리로 가득 찬 텔레비전속의 수많은 얘기에 관심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애당초 없었기에 잘 보지 않지만 나만 사는 공간이 아니니 하는 수 없이 텔레비전 광편의 끝없는 사랑땜에 나도 전염병처럼 옮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전혀 안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만 골라보는 성격인지라 하루종일 집안에 있어도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않는다면 전혀 텔레비전을 켜지 않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시청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간혹은 짜증스러울 때가 더러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아내가 그리도 좋아하는데.
어제는 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했다.
옛날 원곡자들이 부른 노래를 들려준다고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방청객 없이 녹화하여 편집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으니 아예 지난 방송들을 편집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반갑지가 않을까?
한때는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던 유명한 분들인데 감흥도 없고 느낌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왜 유명한 분들이 노래를 하는데 재미가 없지?”
“글쎄요 아마 몰라도 다 죽은 사람이기 때문인가 봐요” 라고 답한다.
생명이 끝난 사람의 노래.
그래서 일까 전혀 정겹지도 감동도 없고 자꾸만 눈길이 다른 곳에 향하는 것을 보면서 혹여 나만 느끼는 감정인가에 의문을 가졌지만 아내 또한 같은 감정인 것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느낌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엊그제 끝난 미스터트롯이라는 방송에서 난리 난 트롯가수의 노래에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가 바로 스타가 현재 살아있어 뭔가 느낌이 다른 감동과 감흥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 사람을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고 얘기도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의 노래에 감동받고 박수치고 행복했는지 모를 일이다.
죽은 사람의 노랫소리는 감동이 전달되는 않는 이유는 이미 나와 교감할 수 없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는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저 유명한 가수가 이미 운명을 달리했듯이 시간은 나로 하여금 늙어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는 인식 때문에 더더욱 감동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면 방송은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걸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추억이라는 것을 일깨울 수 있을까?
추억 그것은 본인의 경험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므로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고인이 된 인간이 부르는 노래는 멈춰야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그랬지라는 추억과는 상관없이 이미 죽은 자들이 나와 부르는 노래는 전혀 감동도 주지 못하고 왠지 모를 서글픔만 안겨주니 말이다.
사람은 자신의 나이를 셈하면서 살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몇 살인지도 잘 모르고 그저 어제처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착각에 살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행복하니까.
늙어 자꾸만 변하는 모습을 매일 생각하고 오늘 내가 몇 살이니 내일이면 또 죽음에 더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면서 산다면 사는 것도 고역이거나 부담스러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단지 생각을 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귀신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을 보면서 잊고 살았던 시간에 대한 생각이 확 떠올라 기분이 유쾌하지 못한 이유는 나 또한 상당한 세월을 이미 살아왔다는 인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래 살았다는 것은 갈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말하듯이 쓸데없는 구경거리로 불필요한 생각에 잠시나마 빠져들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끝난 시점에 즐겁고 유쾌한 생각이 없는 쓸쓸함이 존재해서 괜히 기분이 더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똑같을 것이라고 믿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또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나보다.
예전에 아무렇지 않게 보았던 것들도 새롭게 느껴지고 무심하게 흘려들었던 얘기에도 간혹 귀가 쫑끗하고 듣게 되니 말이다.
차를 타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자주 간다.
여행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조금은 우습지만 코로나 덕택에 집에 너무 오래 머물러 아내와 둘이서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장소를 택해 예전에 하지 않던 특별한 시간들을 만들고 있어 세삼스럽게 즐겁기도 하다.
무심하게 바라보았던 바다도 수많은 변화를 일구고 그 속에 떠있는 작은 고깃배의 몸짓에서 어부들의 고난의 몸짓을 일깨우듯이 새로운 것들을 알아간다.
오래 살았지만, 가까이 존재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장소에도 가보고 이곳이 이처럼 예쁘고 멋있는 곳이었냐며 감탄도 하고 벤취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삶이 주는 안락함에 웃는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는 재미도 알아간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체육공원을 걸으면서 굳이 사람이 많아 혼잡한데 꼭 찾아갔던 유명한 관광지 그곳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여유도 가지고 살포시 아내의 손을 잡고 청춘으로 회귀하는 연출도 괜찮은 재미다.
손은 늙어 쭈글 거리지만 온기는 그대이니 무슨 상관이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그냥 산 시간이 아닌 반드시 존재하는 순간에 대한 희열을 맛보는 방식으로 그리고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늘 충만해오는 벅참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욕심내어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어리석음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리는 작은 행복에 대한 고마움에 벅찬 희열을 느끼면서 이 순간 존재하고 있음에 안위하는 소박함으로 채워가는 눈을 가지게 된다.
수만 가지의 색감으로 채색된 세상을 보면서 살고 싶은 충동이 있다.
굳이 내가 느끼지 말아야 하는 분노를 내려놓고 그저 내게 주어진 작은 여유와 만족에 감사하는 눈으로 살아갈 수 있음에 웃는 순수한 눈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좋다. 누구를 바라보면서 눈부신 것이 아닌 내 속에 빛나는 광채를 느끼는 눈을 가질 수 있어 너무 좋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