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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25
#.1 씬. 스키장 전경. (낮)
삼월, 단아, 지켜보고 있는, 조만, 동동 눈썰매 타고 있는.
단아 : 동동아 조심해.
삼월 : 조만이 저게 더 신났네.
#.2 씬. 스키장 내 장소.(낮)
만기, 석호, 영인, 수영, 태영, 천갑, 영자, 강석,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천갑 : 다들 고생 하셨습니다. 내가 오픈 파티 많이 다녀봤지만, 우리처럼 폼 나게 치러내는 데는 본 적이 없어요.
역시 명문 종가의 후예들끼리 손을 잡고 일을 벌이니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눈치들이더라구요.
영자 : 전 행주하고 차 선물이 너무 초라한 건 아닐까 했는데,
다들 이런 선물은 처음이라고 칭찬들이 자자 하드라구요. 그 많은 행주에 어떻게 다 수를 놓으셨어요?
영인 : 제 딸아이하고 집에서 일하는 할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천갑 : 그것도 그렇습니다. 하회장님 인품이야 워낙 훌륭하시다는 거 알았지만,
댁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까지 그랜드 오픈에 참석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만기 : 그 분이 제 식구기도 하지만, 회사 큰 행사엔 꼭 참석을 해야 하는 자격도 있으신 분입니다.
천갑 : 자격이시라면?
석호 : 저희 회사 주주 중에 한 분이십니다.
천갑 : (놀라서) 그, 그 양반이요?
강석 :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보는)
#.3 씬. 스키장 일각.(낮)
천갑, 영자, 강석 서있는.
영자 : 눈치가 이상해.
천갑 : 뭔 눈치가?
영자 : 혹시 그 할머니, 하회장님 (새끼손가락 들어 보이며) 이거 아니야?
천갑 : 설마?
영자 : 아니, 집에서 부엌일이나 하는 할머니가 주주라는 게 이상하지 않냐구?
명문 종가라 어디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고, 그런 식으로라도 대우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데, 나는.
천갑 : 좀 이상하긴 하지만, 에이, 그 꼿꼿한 양반이 첩살림을, 그것도 한 집에 살면서. 말도 안 된다.
영자 : 그 양반 옛날 사람이야. 옛날에야 돈 있는 남자가 첩살림 하는 거 흉도 아니었잖아?
강석 :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천갑 : 넌 좀 뭐 아는 거 있냐? 그 일하는 할머니가 왜 주주가 됐는지?
강석 : 아직 정확한 건 모르지만,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영자 : 내가 보기엔 딱 그건데.
#.4 씬. 스키장 내 커피숍.(낮)
영인, 석호 차 마시고 있는.
영인 : (입 벌어지고) 4.8퍼센트?
석호 : 응.
영인 : 말도 안돼. 선배보다 겨우 1퍼센트 작단 말이야?
석호 : 그게 왜?
영인 : 왜라니? 그럼, 하실장하고 하과장은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 거야?
석호 : 아직 걔들은 아버님께서 넘겨주신 적이 없는데.
영인 : 진짜 말도 안돼, 우리 애들은 아직 한 주도 물려받지 못한 상황에서
삼월 할머니한테 그 큰 지분이 넘어가 있다는 거잖아?
석호 : 우리 집안에서 평생을 보내신 분이야. 아버님께서 삼월 할머니한테 지분을 넘기겠다고 말씀 하셨을 때,
우리 애들 아무도 딴 소리 한 적 없었구.
영인 : 그 할머니 그렇게 안 봤는데, 욕심 사나우시네. 그걸 넘겨준다고 덥석 받으시구.
석호 : 덥석 받으시긴, 얼마나 간곡하게 사양을 하셨는데.
아버님께서 강제나 다름없이 넘겨주신 거야.
영인 : 순진한 거야? 어리석은 거야?
석호 : (의아하게 보면)
영인 : 삼월 할머니가 딴 생각이라도 하면 어쩌려구?
석호 : 무슨 딴 생각?
영인 :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
석호 : (웃으며) 삼월 할머니 겪어보고도 모르겠어? 딴 생각 같은 건 하실 줄 모르는 어른이야.
영인 : 그래서 그런 거였어.
석호 : 뭐가?
영인 : 이상하게 시어머니 노릇 하는 거 같은 분위기, 뭔가 자신 있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였다구.
석호 : 괜히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5 씬. 스키장 일각.(낮)
조금 높은 장소에서 내려다보이는.
만기, 삼월 서있는.
삼월 : 큰 일 해내셨어요, 회장님. 이런 장관이 없네요.
만기 : 내가 한 게 뭐 있겠소만, 그래도 내 태 나온 땅에 뭐라도 남겨놓고 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구려.
삼월 : 우리 애기씨가 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기 : 보고 있겠지, 그 사람도.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나같은 사람한테 와서
떠나는 그날까지 고생만 하다 간 그 사람 없었으면, 오늘 내가 여기에 서있기나 하겠소.
삼월 : 고생 많이 하다 가셨지만, 그래도 여한은 없으실 거예요, 우리 애기씨.
만기 :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한 거 같은데.
삼월 : (보면) 걱정마세요, 회장님. 하사장이나, 하실장, 하과장이 잘 지켜낼 겁니다.
만기 : (조금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6 씬. 스키장 일각. (낮)
태영,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커피를 마시며 서있는 수영.
태영 : (수영 앞에서 멈추며) 뭐해? 형? 할아버지가 수고들 했으니 맘껏 놀고 올라가라시는데.
수영 : 난 됐다.
태영 : 그러지 말고 형도 타봐, 내가 가르쳐준다니까.
수영 : 난 직원들 애로 사항이나 없나 체크 할게. (돌아서는)
태영 : (입 삐쭉이며) 저러니까 나만 맨날 땡땡이치는 거 같지. 동동이 이 자식은 어디 있는 거야?
#.7 씬. 눈썰매장.(낮)
눈썰매로 내려오는 동동, 조만.
단아 지켜보고 서있는.
단아 : 좀 쉬었다 타.
동동 : 아니에요. 얼마나 재밌는데요, 고모도 타세요.
단아 : (동동이 옷에 눈 털어주면서) 춥지 않아?
조만 : 아, 난 뜨거운 것 좀 먹고 와야겠다. (손 호호 불면서 뛰어가는)
단아 : 동동이 혼자 타라구? 같이 올라가야지. (하는데 서있는 강석이 눈에 들어오고)
강석 :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스키는 못 탑니까?
단아 : 네.
강석 : 내심 긴장했는데.
단아 : (보면)
강석 : 스키 타고 공중 3회전 같은 거 하면서 내려올까 봐서요.
내가 정체가 뭡니까 그럼, 스키 부대 출신이에요 할까봐.
단아 : 웃어드려야 해요?
강석 : 가끔 사람 자존심 긁는 취미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동동 : 고모 저 올라갈게요.
단아 : 안돼, 동동아, 조만 누나 오면 같이 올라가, 혼자 올라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해?
동동 : 혼자 올라갈 수 있어요.
강석 : (단아 팔 잡으며) 그렇게 걱정 되면 같이 올라가던가요.
단아 : 저 못 타요.
강석 : 그러다 공중 3회전 하려구 그러죠?
#.8 씬. 눈썰매장.(낮)
단아, 망설이는데, 강석 뒤에서 확 밀어버리는.
단아 : (놀라서 내려오고)
동동, 단아 옆에서 눈썰매 타고 내려오면서.
동동 : 고모 진짜 빠르죠?
단아 : 응? 응.
강석, 눈썰매 타고 내려오는데.
단아 :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지는)
강석 : (놀라서 내려오다가 힘겹게 눈썰매 멈추고, 달려가는)
단아 : (쓰러져 있는데)
강석 : (어깨 잡으며) 괜찮아요?
단아 : 네.
강석 : (단아 일으켜 세우는, 눈을 털어주면서) 노래만 못하는 줄 알았더니 균형 감각도 형편없네요.
단아 : 그래서 못 탄다고 했잖아요?
강석 : 못타는 게 자랑입니까? 다리 괜찮아요? 어깨 다친 거 아니에요?
단아 : .....
강석 : 괜찮냐구요?
단아 : 괜찮아요.
강석 : 다쳤으면 말해요. 괜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동동, 뛰어오는.
동동 : 고모 다치셨어요?
단아 : 아니야. 안 다쳤어.
동동 : 와, 아저씨 무지 빠르시더라. 눈썰매 스톱 하는 거, 멋있었어요.
강석 : (웃으며) 내가 좀 멋이 있는 편이다. 네 고모가 몰라줘서 그렇지.
(동동, 안아 올리면서) 네 고모는 운동 신경 꽝이니까 여기서 구경이나 하라고 하고 우리끼리 타자.
아저씨랑 같이 타면 스피드 죽일 걸.
동동 : 아저씨, 진짜 짱 멋있으세요.
강석 : 큰 소리로 해. 네 고모 듣게.
동동 : (단아에게) 고모, 이 아저씨, 진짜 짱 멋있으세요.
강석 : (동동에게) 네 고모, 지금 표정 어떠냐?
동동 :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강석 : 것 봐라, 내가 그랬지, 네 고모만 몰라준다구.
강석, 동동을 앞에 태우고 눈썰매 타고 내려오는.
지켜보고 있는 단아.
태영E : 이강석, 저 자식 뭐하는 거냐?
단아 : (돌아보며)
태영 : (동동과 눈썰매 타고 있는 강석을 보면서) 저 자식이 저런 것도 할 줄 아냐?
단아 : 아나 봐.
태영 : 저 자식, 애들 무지 싫어할 거 같은데, 웬일이래?
동동, 강석, 다가오는.
동동 : 아빠? 아빠? 봤어? 나 무지 빠르지?
태영 : (강석에게) 스키 안타십니까?
강석 : 이것도 재밌네요.
동동 : 이 아저씨, 눈썰매 운전 짱이야, 아빠.
태영 : 그 정도 가지고 뭘, 아빠는 더 짱이야.
동동 : 뻥치시네.
태영 : 이 자식은 왜 아빠 말에 사사건건 시비지.
(동동 안아 올리면서) 보여주고야 말리, 진정한 아빠의 실력을. (동동 안고 걸어가는)
단아 : 동동아, 뭐 좀 먹고 타지.
동동 : 이따가요, 고모.
단아 : 그럼 한번만 더 타고 먹는 거야? 고모가 가서 핫도그 사올게.
강석 : (그런 단아를 보다가) 조카 끔찍하게 챙기는 거 보니, 자기 애 낳으면 무섭게 싸안고 키우시겠네요.
단아 : .....(돌아서는)
강석 : 물론 그것도 꿈 꿔 본 적 없겠죠?
단아 : 네. (걸어가는)
강석 : ......
#.9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천갑, 영자, 강석 들어오는. 아줌마 마중하는.
아줌마 : 다녀오셨어요?
천갑 : 아이고, 아이고, 되다.
영자 : 피곤하긴 해도, 그게 다 우리 꺼다 생각하니까 난 가슴이 부풀어서 오늘밤 잠도 안 올 거 같아.
천갑 : 그러냐? 하긴 나도 그렇다.
영자 : 아줌마, 우리 차 좀.
아줌마 : 네. (부엌으로 움직이고)
천갑, 영자, 강석 앉는.
영자 : 진짜 근사하드라. 그렇게 제대로 만들어놨는데, 우리한테 몽땅 진상하려면 그 사람들 배 아파서 어쩐대.
천갑 : 다 팔자지 뭐. 그리고 당신 입 조심 잘 해라. 괜히 하교수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해서 일 그르치지 말고?
영자 : 내가 바보야?
강석 : (일어서는)
영자 : 왜 차 한 잔 마시고 올라가지?
강석 : 좀 쉴게요.
#.10 씬. 강석의 방.(밤)
강석, 들어와 앉는. 어두운 표정으로.
#.11 씬. 단아의 방.(밤)
단아, 책상 앞에 앉아있는. 그 위로.
강석E : 물론 그것도 꿈 꿔 본 적 없겠죠?
단아 : (눈을 감는)
#.12 씬. 태영의 방.(밤)
태영, 핸드폰 버튼 누르는.
태영 : 뭐하냐?
말순E : 야, 끊어, 끊어.
태영 : 바쁘냐?
말순E : (묘한 콧소리로) 박형사님, 삶은 계란 드실래요?
태영 : (순간 긴장해서) 야, 너 어디야?
말순E : 끊자, 나중에 통화 하자. (뚝 끊기고)
태영 : 얘 뭐야?
#.13 씬. 찜질방.
태영, 두리번거리면서 걸어오는. 말순과 장기 앉아서 얘기 중이다.
장기 : 아, 왜 갑자기 비상이 걸리시냐? 오늘 기회 딱 좋았는데.
선배, 내 말이 맞죠? 박형사님, 선배한테 관심 있는 거 틀림없죠?
말순 : (배시시 웃으며)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장기 : 에이, 모르긴 뭘 몰라요?
태영 : (아니꼬운 눈초리로 말순을 보는)
말순 : 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태영 : 나 말순?
말순 : (돌아보고) 어, 웬일이야? 오늘 회사 일 때문에 지방 내려간다면서?
태영 : (앉으며) 너 여기서 뭐하냐?
말순 : 찜질방에서 하긴 뭘 해? 땀 뺐지.
장기 : 우리 나경장님 경사 나셨어요.
태영 : 경장 위가 경사요? 너 경사 되냐?
장기 : 그게 아니구요, 오늘 여기서 우리 나경장님 생전 처음 데이트라는 걸 해보셨다는 거 아니에요.
태영 : 별 짓을 다 한다, 너.
장기 : 두 분이 워낙 쑥스러워하셔서 제가 멍석을 깔아드렸는데, 나경장님 다시 봐야겠드라구요.
아, 그 콧소리 죽음이었어요. 박형사님 이마 수건으로 닦아주시면서
(콧소리 심하게 내면서) 어머, 이 땀 좀 봐, 죽였어요.
말순 : (쑥스러워 하면서) 내가 언제?
장기 : 그 몸 살짝 비트시는 교태, 진짜 끝내주셨다니까요.
말순 : (부끄러워하면서, 몸 살짝 비틀며 장기 주먹으로 콩콩 때리면서) 왜 그래, 창피하게.
태영 :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장기 : 진짜 죽였다니까 그러시네.
태영 : (버럭) 여기가 화장터야 죽이긴 뭘 자꾸 죽여?
#.14 씬. 마루.(밤)
태영, 들어오는. 단아, 찻잔 들고 부엌에서 나오는.
단아 : 나갔었어?
태영 : 넌 왜 아직까지 안자?
단아 : 공부 할 거 있어서.
태영 : 그럼 하고 자라.
단아 :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태영 : 왜?
단아 : 화난 사람 같아서?
태영 : 내가 무슨 화난 사람 같다구 그러냐? 넌? (홱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단아 : (왜 저러지 하는 표정으로 보는)
#.15 씬. 태영의 방.(밤)
태영, 들어와서 웃옷 벗어서 던지면서.
태영 : 지지배가 말이야, 아무한테 교태나 떨고.
교태도 떨만한 물건이 그러면 말도 안해요. 지가 교태가 어울리기나 하냐구?
#.16 씬. 찜질방.(밤)
말순, 영화 보고 있는데, 장기 걸어오는.
장기 : 어, 가셨어요? 저 자는 동안?
말순 : 응. 괜히 울뚝 불뚝 대다가 가드라.
장기 : (옆에 앉으며, 갸우뚱하는) 이상하네.
말순 : 이상하면 치과에 가든가?
장기 : 진짜, 쌍팔년도 유머를 아무 때나. 그 양반 좀 이상하지 않아요?
말순 : 누구? 내 웬수 친구 놈?
장기 : 우리가 박형사님 얘기하면서 히히거리니까 계속 울그락 불그락 하셨잖아요? 전 그게 좀.
말순 : 그게 왜?
장기 : 혹시, 선배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말순 : (놀라서 홱 돌아보는) 뭐?
장기 : 선배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사랑의 시작은요, 선배. 질투거든요.
말순 : (눈만 꿈뻑이는)
장기 : 난 그거 아닐까 싶은데.
말순 : 아이구, 됐다. 그 인간이 질투를. 그건 날 여자로 봐야 말이 되는 거잖냐?
근데 걘 나 여자로 안보거든. 그러니까 그건 질투가 아니라 지랄이라고 봐야지.
#.17 씬. 말순의 집 (밤)
말순, 침대에 누워있고, 진아, 아래서 자고 있는데.
장기E : 사랑의 시작은요, 선배, 질투거든요.
말순 : (벌떡 일어나 앉는) 아니야, 아니야. 말도 안돼.
진아 : (눈 뜨고 일어나 앉으며) 언니, 진짜 왜 그래요? 벌써 몇 번짼지 아세요?
말순 : 어, 미안, 미안. (눕는)
진아 : 무슨 꿈인데 자꾸 그렇게 벌떡벌떡 일어나면서 깨시는 거예요?
말순 : 아니야.
진아 : (눕는데)
말순 : (찜질방에서 태영의 표정이 떠오르고, 다시 벌떡 일어나는) 뭐지? 그건?
진아 : 언니, 진짜 왜 그러세요?
#.18 씬. 회사 전경.(낮)
#.19 씬. 회사 복도.(낮)
엘리베이터 앞. 영인, 전화 중인데, 다가와 인사하는 강석.
영인 : (인사하면서 통화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우리 딸 아무하고나 선보게 할 수 없잖아.
태영, 뒤에서 걸어오는.
영인 : 그래, 결혼하니까 우리 딸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우리 딸 요즘 젊은 아가씨들하곤 많이 다른 애니까 아무하고나 만나게 할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너한테 특별히 부탁한 거구. 공부하는 사람이라 마음에 들긴 하는데, 우리 애 마음이 문제지 뭐.
그래, 일봐,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자.
태영 : 어머님?
영인 : (돌아보고 흘겨보면서) 회사에서까지 이럴 거예요?
태영 : 누구 말씀 하시는 거세요?
영인 : 뭘요?
태영 : 지금 선 보게 하겠다는 사람이 누구냐구요?
영인 : 누구긴 누구예요? 우리 단아지.
엘리베이터 문 열리고. 영인, 태영 올라타는.
영인 : (강석에게) 안 타세요?
강석 : 아, 네. (올라타는)
#.20 씬. 엘리베이터 안.
영인, 태영, 강석 서있는.
태영 : 단아 선 보게 하시려구요?
영인 : 젊은 애 공부만 하면서 늙힐 수 없잖아요?
태영 : 단아, 그런 거 안 봐요, 어머니.
영인 : 그 어머니 소리 좀.
태영 : 단아에 대해서 잘 모르셔서 그런 거 같은데요.
영인 : 알만큼은 알아요. 그래서 신중하게 알아보는 중이구요.
태영 : (강석 눈치 보면서) 집안 얘긴 나중에 조용히 하죠.
영인 : 먼저 말 시킨 사람이 누군데.
#.21 씬. 강석의 사무실.(낮)
강석, 들어와 앉고, 핸드폰 꺼내 버튼 누르는.
단아E : 네.
강석 : 물론 박물관이겠죠?
단아E : 네.
강석 : 퇴근하면서 데리러 갈게요. 어, 왜 가만있습니까? 전철 타고 갈게요, 그게 습관이잖아요?
단아E : 그런다고 해도 오실 거잖아요?
강석 : 이젠 좀 길이 드는 거 같네. (끊고)
노크 소리.
강석 : 네.
진호, 들어오는.
강석 : (보면)
진호 : 명성 세 째 아들이 사장님에 대해서 알아보고 다닌다고 합니다.
강석 : (끄덕이고)
진호 :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석 : 할 수 없지 뭐. 그냥 둬.
진호 : 앞으론 제가 모시고 다니겠습니다.
강석 : 왜?
진호 : 폐인이나 다름없이 된 인간입니다. 혹시 무슨 짓이라도.
강석 : 내가 그런 거에 겁먹을 놈으로 보이냐?
진호 : .....
강석 : 나가봐라.
진호 : (인사하고 나가는)
강석 : ......
#.22 씬. 회사 내 장소.(낮)
수영, 진아 서서 커피 마시고 있는.
진아 : 좋으셨겠다. 스키도 타시고.
수영 : 어, 나 스키 못타는데.
진아 : 스키장 내려가신 거잖아요?
수영 : 내 그랜드 오픈이었으니까, 그치만 스키는 못 타요.
진아 : 말도 안돼.
수영 : 그럼 뭐 수영장 사장은 다 수영 선수여야 하는 거예요?
진아 : (웃고) 부자들은 스키도 다 탈 줄 알고 그런 거 아니에요?
수영 : 나 부자 아니라고 했죠. 그리고 요즘 세상에 부자만 스키 타고 그러나요?
진아 : 저 촌스럽죠?
수영 : 스키장 안 가봤어요?
진아 : 제가 그런 델 어떻게 가 봐요? 돈도 무지 많이 들 텐데.
수영 : (애잔하고)
진아 : 그렇게 보지 마세요. 존심 다치거든요.
수영 : 나중에 우리 같이 가볼래요?
진아 : 정말요?
수영 : 그것도 안 해본 일이니까 해봐야죠.
진아 : 약속 하신 거예요? 진짜 약속 하신 거예요? 자, 손가락 (새끼손가락 들어 보이며)
수영 : (쑥스러워 하며 보는)
진아 : (얼른 주위 의식하고) 아, 여기 회산데.
(얼른 손 내리는) 제가 좀 흥분했나 봐요. 저 일하러 갈게요. (돌아서서 걸어가면)
수영 : 손가락 안 걸어도 나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에요.
진아 : (돌아서서 보고, 웃고, 뛰어가는)
수영 : (다정한 느낌으로 바라보는)
#.23 씬. 만기의 방.(낮)
동동, 눈에 멍이 들어 앉아있고, 만기, 삼월 난감한.
삼월 : 아니, 현지 걔도 참 해도 너무 하는구나.
만기 : 오늘은 왜 또 맞은 게냐?
동동 : 식구들하고 스키장 놀러갔다 왔다구 자랑했거든요.
만기 : 자랑한다고 때리드냐?
삼월 : 아니, 그게 무슨 때릴 일이라고.
동동 : 현지 걔가 언젠 때릴 일로 때렸나요? 너만 식구 있어, 이 나쁜 놈아 그러면서. 퍽.
삼월 : 안되겠다, 태권도 학원을 옮기던지 해야지. 눈이 성할 날이 없으니.
만기 : 그래도 한동안은 잠잠하지 않았소.
동동 : 저요, 할아버지.
만기 : 그래?
동동 : 저 태권도 학원 그냥 다닐 거예요.
삼월 : 또 맞으면 어쩌려구?
동동 : 조금만 있으면 저 대련 붙인다고 하셨거든요, 사범님이.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요.
만기 : 현지하고 한판 붙으려구?
동동 : 네. 두구보세요, 할아버지, 기쁜 소식 들려드릴게요.
만기 : 어째 조마조마 하다만, 두고는 보마.
#.24 씬. 박물관.(낮)
단아, 전시품 정리하고 있으면, 남교수, 현규 서서 얘기하고 있는.
남교수 : 이민?
현규 : 네.
남교수 : 아버지, 음식점 꽤 잘 되시잖아?
현규 : 요즘은 예전 같지 않으셨대요. 다행히 형이 호주에서 하는 레스토랑이 꽤 잘 되나 봐요.
누나도 호주에 있고, 거기 가셔서 좀 더 확장해서 해보고 싶으시대요.
남교수 : 그럼 너만 남는 거야?
현규 : 전 공부도 해야 하고, 군대 문제도 있으니까 남아야죠.
(단아 슬쩍 보면서) 갈 수 있다고 해도 누구 감시해야 하는데 이 땅 뜰 수 있겠어요.
남교수 : (웃으며) 참, 끈기 하난 존경한다. 그럼 집은 그냥 지금 집에서 사는 거야?
현규 : 아니요. 집도 팔아 가셔야 사업 확장 하시죠. 집은 팔렸어요.
남교수 : 그럼 넌 어디서 살아?
현규 : 원룸 하나 알아 보려구요. (단아에게) 하교수님?
단아 : 왜?
현규 : 그 동네 원룸 있죠?
단아 : .....
남교수 : 원룸 없는 동네가 어딨어? 왜 하교수 동네로 가려구?
현규 : 감시 하려면 행동반경 안에서 해야죠.
남교수 : 하교수 겁 좀 먹겠다.
현규 : 그래주면 고맙구요.
강석, 들어오는.
강석 : (남교수에게 인사하는. 현규에게) 또 보는군.
현규 : .....(나가는)
남교수 : (현규 따라 나가고)
#.25 씬. 학교 복도.(낮)
현규, 걸어오면, 남교수 따라오면서.
남교수 : 정현규?
현규 : 네.
남교수 : 우리 얘기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현규 : .....
#.26 씬. 학교 내 장소.(낮)
현규, 남교수 앉아있는.
현규 : 쇼일 뿐이에요, 저 떼버리려구.
남교수 : 쇼가 아니면?
현규 : ......
남교수 : 나도 처음엔 너하고 같은 생각이었어. 진하랑 너무 많이 닮은 너, 물불 안 가리고 매달리는 너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나도 시침 뻑까고 너 밀어줬던 건데.....
현규 : 그 사람....뭐라고 해요?
남교수 :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다고 해.
현규 : (보면)
남교수 : 그 말이 마음에 걸려. 저 친구, 네가 감당하기엔 벅찬 상대라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러더라.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다구.
현규 : .....
남교수 : 근데 그 말을 하는 하교수, 왠지 쓸쓸해보였어.
대체 뭘까? 하교수한테 저 사람이 대체 뭘까?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드라.
현규 : 그렇게 말해요? 너무 멀리 와버린 거 같다구?
남교수 : (끄덕이는)
현규 : (일어서는)
남교수 : 어쩌면 현규야?
현규 : .....
남교수 : 너 아주 많이 아프게 될지도 모르겠다.
현규 : 아, 오늘 또 위에 빵구 나도록 마셔야겠네. (걸어가는)
남교수 : (애잔한 느낌으로 보는)
#.27 씬. 박물관.(낮)
단아, 일하고 있으면, 강석 그 옆에 서서.
강석 : 그 어린놈이 그러더군요. 그 사람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구.
단아 : (일하던 손 멈춰지는)
강석 : (그런 단아를 보면서)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라구.
너한테는 나랑 그 여자가 쇼를 하고 있는 거라야 너한테 기회가 생기는 걸 텐데,
네가 하는 말들은 우리가 진심이길 바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구.
그러니까 그 놈 그러더군요. 그 여자한테 미쳐있지만,
그 여자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보내줄 수 있다구.
그 여자가 죽어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구.
단아 : .....
강석 : 처음으로 그 자식한테 미안해지더군요. 처음으로 끼어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래졌어요.
혜주 놈 때문에 시작한 이 지저분한 게임이 없었다면,
어쩌면 당신 그 자식한테 마음을 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난 늘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하는 놈이니까,
그래서 사는 게 쉽지 않은 당신한테 또 하나 짐만 얹혀줄 게 분명한데, 그 자식은 다르지 않을까.
당신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 수만 있게 된다면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놈이,
정말 당신 옆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닐까.
단아 : 그쪽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이 게임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도, 현규는 아니었을 거예요.
강석 :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거라는 거 모르지 않을 텐데?
단아 : 그냥 알아요. 그 아이와 전, 아무 것도 변할 게 없다는 거.
강석 : 늘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습니까?
단아 : .....
강석 : 시간의 흐름 따윈 상관없이, 내 마음은 늘 이럴 거다, 그런 확신이 부럽군요.
단아 : (일을 정리하고 돌아서서 가방을 들면서) 가죠.
강석 : 제임스 딘이라는 배우 있죠?
단아 : (보면)
강석 : 젊은 시절에 죽어버려서 전설이 됐다는 그 친구?
단아 : ....
강석 :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라.
(단아 앞으로 다가와서) 당신하고 이 게임을 하는 동안, 그래볼까 하는데?
단아 : 무슨 뜻이죠?
강석 : 영원히 살 것처럼 꾸고 싶은 꿈은 원래 가져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보는 거나 해볼까, 그래지는데.
내일은 당신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만,
오늘은 당신의 연인으로, 딱 오늘 하루만 살 것처럼, 그래보겠다는 겁니다.
당신하고의 이 게임, 끝나기 전까진 당신의 연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겠다는 겁니다. (걸어가는)
단아 : ....
#.28 씬. 학교 교정.(낮)
단아, 강석 차에 올라타 있는.
강석 : (핸드폰 꺼내 버튼 누르고) 어머니? 하교수님한테 연락 왔는데요,
오늘 학교에 일이 있어서 못 오겠다구요.
단아 :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강석 : (조용히 하라는 시늉)
단아 : (어이없고)
#.29 씬. 강석의 집 거실.(낮)
영자, 전화중, 천갑, 들어오는.
천갑 : 남편이 오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잘한다.
영자 : (전화만) 왜 또? 나 정말 공부해야 하는데.
천갑 : (와서 앉으며) 오늘 하교수 못 온대?
영자 : 내일 엄마 모임 있단 말이야. 오늘 새로운 거 배워가야 하는데, 어쩐다니.
천갑 : 징징거리지 말고 끊어라, 일 있어서 못 온다는데, 징징거려봐야 뭐하냐?
영자 : 알았어, 할 수 없지 뭐. (끊고)
천갑 : 나 오늘 십 만원 땄다.
영자 : (화들짝) 정말? 정말?
천갑 : 오늘 버디 두 개 잡았다는 거 아니냐?
영자 : 어머, 어머. 잘했어, 잘했어. 자기 최고.
천갑 : 그 돈 당신한테 잃어줄까?
#.30 씬. 길.(낮)
운전하는 강석.
단아 : 왜 그러는데요?
강석 :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보겠다니까요.
그 아까운 시간 내 애인이 우리 어머니 앞에서 보내게 할 순 없잖아요.
단아 : .....
#.31 씬. 레스토랑.(낮)
단아, 강석 마주 앉아있는.
강석 : 말해 봐요. 그 사람하고 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버리는 바람에 못했던 거?
단아 : .....
강석 : 사랑이란 게 어차피 정신병이고, 환상 아닙니까?
이 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이 뭔지 그 실체도 파헤쳐 보자구요.
단아 : .....
강석 : 직설신공의 달인이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있어요?
단아 : 뭐에 쫓기는 거죠?
강석 : (흔들리는 표정으로 보는)
단아 : 그래보여서요. 꼭.....
강석 : 꼭 뭡니까?
단아 : 내일 어딘가로 떠날 사람처럼 서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강석 : (보다가,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알고 있잖아요. 그쪽도?
단아 : .....
강석 : 이 게임 오래 가지 못할 거란 거.
근데 우리 두 사람 다 이 게임에 알게 모르게 조금은 중독이 돼있고. 아닌가요?
단아 : ....
강석 : 그러니 게임이 끝나기 전에 우리 둘 다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그겁니다. 싫습니까?
단아 : ......
강석 : 중독이 돼있다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단아 : ....
강석 : 그런 겁니까?
단아 :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강석 : (보면)
단아 : 이 게임이 끝나기 전에 해 볼 수 있는 모든 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강석 : ......
#.32 씬. 회사 복도.(낮)
태영, 걸어오면서 핸드폰 중.
태영 : 할 말 있으니까 저번에 우리 같이 마셨던 그 호프집으로 와라.
말순E : 그냥 전화로 얘기하면 안돼?
태영 : 왜 박형사랑 또 찜질방 가냐?
말순E : 뭐?
태영 : (자기 입 쥐어뜯으면서) 오라면 와. 너 빚쟁이다. (툭 끊는) 아니, 거기서 박형사 얘긴 왜 하나.
#.33 씬. 길.(밤)
수영, 운전해서 오고 있는데,
길에서 진아, 민준에게 팔목이 잡혀 실랑이 중인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수영 : (차를 세우는)
#.34 씬. 길.(밤)
민준, 진아의 팔을 잡고.
민준 : 어디 가서 얘기 좀 하자니까.
진아 : 할 말 없다고 했잖아.
민준 : 마음 좀 가라앉히고 내 말 좀 들어주라, 진아야.
진아 : 네가 이렇게 미쳐 날 뛰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가라앉혀, 이 미친놈아.
민준 : 진아야. 딱 한번만, 딱 한번만 내 말 좀 들어주라.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라고 하면 내가 애원할게.
그 팔을 잡는 수영의 손.
민준 : (보고) 아저씨가 끼어드실 일 아니니까 그냥 가시죠.
수영 : 너무 지저분하게 군다는 생각 안 해요?
민준 : 아저씨가 끼어들 일 아니라니까요.
수영 : 진아씨 일에 끼어들 자격, 나 있는 사람입니다.
진아 : (굳어져서 보는)
민준 : 뭡니까? 얘랑 결혼이라도 하겠다 그겁니까?
수영 : 그럼 되는 겁니까?
민준 : (멍하니 보고)
진아 : (더 굳어져서 수영을 보고)
수영 : 내가 진아씨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다신 이런 짓 안 할 겁니까?
진아 : .....
민준 : 정말 결혼 할 겁니까?
수영 : 네.
진아 : (더욱 놀라서 보는)
수영 : 됐습니까?
민준 : .....
수영 : 이제 다시 보는 일은 없겠군요. (진아의 팔을 잡고, 차 옆으로 걸어가는. 차 앞문을 열어주는)
진아 : (멍하니 보는)
수영 : 타요.
진아 : (보다가, 앞좌석에 올라타는)
수영 : (운전석에 타고, 차 출발 시키는)
#.35 씬. 길.(밤)
운전하는 수영, 그 옆에 앉아있는 진아.
진아 : 세워주세요.
수영 : 왜요?
진아 : 뒤로 가려구요.
수영 : 그냥 앉아있어요.
진아 : 어색하시잖아요?
수영 : 괜찮아요.
진아 : (보다가, 시선 앞으로 돌리면서) 고마워요. 그런 말까지 해주신 거.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셨는데 또 나타나진 않을 거예요.
수영 : 진아씨도 싫었지만, 나도 그 친구 보는 거 싫었어요.
진아 : 차 좀 세워주세요.
수영 : 그냥 있으라니까요.
진아 : 차 좀.
수영, 차를 길옆에 세우면.
진아 : (차에서 내려 급하게 걸어가는)
수영 : (당황해서 차에서 내려 쫓아가서, 진아의 팔을 잡는) 왜 그래요? 진아씨?
진아 : 안되겠어요. 저 못하겠어요.
수영 : (멍하니 보는)
진아 :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저 못하겠어요. (주저앉으며, 얼굴 가리고 우는)
수영 : (당황해서 보고)
진아 : 아저씨한테 마음 주지 않으려고 이 악물었단 말이에요. 그래야 더 오래 아저씨 볼 수 있으니까.
다른 건 바라지 말자,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절 위해서 자꾸 뭔가를 하시는 아저씨 볼 때마다.... 볼 때마다....
그게 너무 힘이 들어요. 너무 힘이 들어서 죽을 거 같아요.
수영 : (안타깝게 보다가, 진아를 일으켜 세우는) 왜.....왜 나같은 사람 때문에 울어요? 내가 뭐라구?
진아 : (수영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수영 : (굳어지는)
진아 : (울기만 하는)
수영 : (굳어져 있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서 진아의 어깨를 감싸 안는)
#.36 씬. 방송국 사무실.(밤)
국장, 기지개 켜면서 다가오는.
주정, 뭔가 끄적이고 있고, 병도, 하품하는.
국장 : 기획안 하나 쓰믄서 날을 새삐라, 날을 새삐.
주정 : 알콜 부족 현상이라니까요.
병도 : 대충 좀 써라, 선배, 어차피 편성 주실 건데 뭐 하러 기운을 빼?
주정 : 대충 쓰는데도 이 모양이거든. (울리는 핸드폰) 여보세요? (굳어지는)
국장 : 자 표정 와 저런노?
병도 : 왜? 무슨 전화야? 안 좋은 일이야?
주정 : (핸드폰 끊어버리고 걸어 나가는)
국장 : 야, 하던 거는 마저 하고 가야지. 끝내고 밥 묵자믄서? 자 왜 저카노?
병도 : 글쎄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국장 : 하주정이 일을 니가 모리모 누가 아는데?
#.37 씬. 회사 화장실.
주정, 거칠게 세수하고 있는.
주정 : (거울을 보는) 다 끝났던 거야. 18년 전에 다 끝났던 거라구.
#.38 씬. 커피숍.(밤)
주정, 걸어오는. 경섭, 앉아있는.
주정 : (가방 놓으며 털썩 주저앉는)
경섭 : 안 오면 문 닫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고맙다. 두 시간 밖에 안 기다리게 해줘서.
주정 : 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지금에 와서 다시 나타나서 뭘 어쩌자구?
경섭 : 그때, 나 혼자 떠난 거, 그러지 않을 수 없었어.
주정 : 변명 듣고 싶지 않아.
경섭 : 네 아버지 애원하시드라. 내 귀하디 귀한 딸, 집에서 운전기사 노릇이나 하는 너한테는 줄 수 없다시면서.
널 진정으로 사랑하면 떠나달라고 애원하시는데, 내가 어쩔 수 있었겠냐?
주정 : ......
#.39 씬. 호프집.(밤)
태영, 앉아있으면, 말순 앞에 와서 앉으며.
말순 : 왜 바쁜 사람 오라 가라야?
태영 : 이젠 볼 일 다 봤다 그거지?
말순 : 왜 또 시비지?
태영 : 병원에 입원 해 있을 때는 만화책 심부름에 떡볶이 심부름까지 시켜 먹더니, 이젠 볼 일 없다 그거지?
말순 : 왜 이러는데?
태영 : 내가 생각해보니까 나만 너무 손해야.
말순 : 뭔 손해?
태영 : 네 사정 봐줘서 나중에 갚아도 된다고 했는데,
너 안면 싹 바꾸는 거 보니까 인간성이 글러먹어서 안되겠다.
말순 : 내가 무슨 안면을 바꿨다고 그래?
태영 : 친구가 만나자는데 왜 바쁜 사람 오라가라냐면서? 그게 안면 바꾼 거 아니면 뭐냐?
나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인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말순 : 그래서 뭘 어쩌겠다구? 그럼 절교 해.
태영 : 이봐, 이봐. 돈 떼먹겠다고 작정한 거야.
말순 : 진짜 치사하게 나올래?
태영 : 너 오늘부터 일수 찍어.
말순 : 뭐?
태영 : 오늘부터 천원이든 만원이든 매일 갚으라구.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하고 볼펜, 꺼내고, 도장도 꺼낸다)
말순 : 이게 다 뭐야?
태영 : 보면 모르냐? 일수 장부지.
말순 : 가지가지 한다.
태영 : 있는 거 다 내놔봐.
말순 : 나 돈 없는 거 모르냐?
태영 : 내놔보라니까.
말순 : 진짜 드럽고 치사해서, 준다, 줘. (가방에서 지갑 꺼내 여는데, 만 이천 삼백 원이 전부다) 있는 거 다다.
태영 : 이천 삼백 원은 차비 하고, 오늘은 만원 찍는다.
(만원 주머니에 넣고, 만원 이라고 쓰고, 도장 꾹 눌러 찍는)
말순 : 아, 다 가져, 다 가져. 경찰서까진 걸어 다니면 되니까 차비 필요 없어.
태영 : 나 악덕 사채업자 아니다.
말순 :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그거거든.
#.40 씬. 부엌.(밤)
삼월, 조만 설거지 하고 있으면, 영인 커피를 뽑아 마시고 서있는.
삼월 : 요즘은 왜들 그리 바쁜지 상식을 회장님하고 하사장만 올리게 되네.
영인 : 요즘 같은 세상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려야 한다는 게 비정상적인 거죠.
삼월 : 저기.
영인 : (보면) 네?
삼월 : 바깥사람들은 그렇게 말해도 되지만, 종부가 그런 말을 해서야 되겠어요?
영인 : 전 원래 하고 싶은 말 맘에 두고 사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나가는)
삼월 : (언짢고)
조만 : 아무래도 우리를 좀 무시하시는 거 같아요. 부엌일이나 하는 사람들이라구.
삼월 : 입 다물지 못해.
조만 : 저는 괜찮은데, 할머니까지 무시하는 거 같으니까 그렇죠.
#.41 씬. 석호의 방.(밤)
커피 들고 들어오는 영인, 책을 보고 있는 석호.
석호 : 왜 밤에 커피를 마셔?
영인 : 카페인 없는 거라서 괜찮다니까. 나 있지, (앉으면서) 아무래도 저 할머니 좀 껄끄러워.
석호 : 왜 또?
영인 : 내가 하는 일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든다는 투란 말이야.
석호 : 그런 분 아니라니까 그런다.
영인 : 내가 그렇게 느끼면 그런 거지 뭐. 그나저나 단아는 왜 이렇게 안 들어오지?
#.42 씬. 레스토랑. (밤)
단아, 강석 앉아있는.
강석 : 밥도 먹고, 차도 마셨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봅시다.
단아 : 또 취조 하시려구요?
강석 : 한번 치고 시작할까요?
단아 : 그냥 하세요.
강석 : (미소 지으며) 그 사람하고 하고 싶었는데 못해봤던 거 말해 봐요.
내가 가능한 범위에선 협조해볼 테니까.
단아 : (물끄러미 보는)
강석 : 왜요? 나하곤 감정이 안 잡혀서 못 하겠다 그겁니까?
단아 : 그쪽 먼저 얘기해보세요. 연애 하면서 하고 싶었던 일?
강석 : 사내놈이 연애 하면서 하고 싶었던 일이야. 간단한 거 아닌가? 여자 남자 만나서 뭐하겠어요?
단아 : 저 그냥 갈까요?
강석 : 가만 보면 나보다 더 까칠한 성격이라니까.
음. 뭐가 있을까. 그런 거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아, 이런 거 괜찮네.
단아 : (보면)
강석 : 큰 길에서요, 사람들 무지하게 많은 큰 길에서 어떤 여자가 소리를 치는 겁니다.
단아 : .....
강석 : 사랑해요, 강석씨.
단아 : (어이없어서 보는)
강석 : (미소 지으며) 협조 안 되겠죠?
단아 : 네.
강석 : 아, 난 생각 좀 하고 있을 테니까 그쪽부터 시작해 봐요.
단아 : 휴대폰이요.
강석 : 네?
단아 : 문자 보내는 거. 그 사람 있을 땐, 지금처럼 문자 보내는 게 없었어요.
강석 : .....
단아 : 가끔, 그런 생각해본 적 있어요. 그때 이런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강석 : 부끄러워서 사랑한다는 말도 못해봤으니, 문자로라도 그런 말 받아보고 싶다, 그겁니까?
단아 : 아니요.
강석 : 그럼, 받고 싶은 문자가 뭡니까?
단아 : 어디야?
강석 : .....
단아 : 그냥, 그런 말들이요. 어디야, 그렇게 묻고, 어디예요, 그러면 내가 갈게. 그런 거.
강석 : .....
단아 : 그냥 그런 일상적인 말들이요. 나 조금 늦을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줘.
강석 : 그런 말 전화로 해봤을 거 아닙니까? 그런 일상적인 말들?
단아 : .....
강석 : 설마 못해봤습니까?
단아 : 그땐 학생이라 휴대폰도 없었고, 가끔 집으로 전화가 오기도 했지만,
어른들이 계셔서 별 말 못하고 끊곤 했어요.
강석 : 대체 그 사람하고 한 게 뭡니까?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만난 거?
그런 거 말고, 진짜 연애처럼 해본 게 뭐냐구요?
단아 : .....
강석 : 억울하다는 생각 안합니까? 더듬을 추억도 많이 만들어주지 않고 간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게?
단아 : 많지 않아서 더 또렷한지도 모르겠어요.
강석 : .....
단아 : 여고 때 학교 시화전이 있었어요. 오겠다고 집으로 전화를 해서 학교 앞에서 기다렸는데,
아주 오래 기다려도 안 왔어요.
강석 : ......
단아 : 해도 지고, 애들은 집으로 가는데, 오겠다고 했으니까 집으로 갈 수도 없고, 그냥 기다렸어요.
강석 : .....
단아 : 10시가 넘었는데, 그 사람이 뛰어왔어요. 몸에서 아주 매운 냄새가 났어요.
왜 여기 있냐구? 집까지 갔다 왔다구.
데모를 해서 학교 정문이 막히는 바람에 나올 수가 없었다구. 그날 처음.....
강석 : .....
단아 : 그 사람 제 손을 잡았어요. 이제부턴 오겠다고 하고 못 오면 집에 가서 기다리라구 하면서.
싫다고 했어요, 오겠다고 하면 오잖아요.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한 데서 기다릴래요.
강석 :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단아 : (보는)
강석 : 꼼짝도 안하고?
단아 : 이젠 그쪽 차례예요.
강석 : (보다가 일어서서 단아의 팔을 잡는)
단아 : (올려다보는)
강석 : 나가서 해봅시다,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43 씬. 길.(밤)
번화가, 사람들로 벅적이는.
강석, 걷다가 단아의 손을 잡는.
단아 : (보는)
강석 : 이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 다 보는데서 이 여자가 내 여자다 보란 듯이 걸어보는 거.
놓으라고 안합니까?
단아 : 해보고 싶은 거 다하게 협조하려구요.
강석 : (웃으면서 걸어가는)
#.44 씬. 길.(밤)
악세사리를 파는 리어카 앞.
강석, 단아의 손을 잡고 다가서는.
강석 : 이런 것도 못해봤죠?
단아 : .....
강석 : (들여다보면서) 제일 유치한 게 뭘까? 아, 이게 딱이네. (꽃반지를 들어보는) 이거 어때요?
단아 : (보는)
강석 : 협조한다면서요?
단아 : 그건....안되겠어요.
강석 : (보다가, 반지 제자리에 내려놓고) 진짜 까칠해. (걸려 있는 목도리를 꺼내들면서) 이건 됩니까?
단아 : .....
강석 : (단아의 목에 걸어주는) 나 만나는 동안은 하고 나와요.
단아 : .....
강석 : 대답 안 해요?
단아 : 그래볼게요.
강석 : 갑시다. (손잡고 걸어가는)
#.45 씬. 길.(밤)
술에 취해 눈을 감고 있는 앉아있는 현규. 다가와 옆에 앉는 혜주.
현규 : (눈을 뜨고 보는) 나 집에 갈 거야.
혜주 : 네.
현규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혜주 : 네.
현규 : 추워. 집에 가.
혜주 : 네.
현규 : 왜 대답만 하고 안 가는데?
혜주 : 대답도 안하면 화낼 거잖아요?
현규 : 나도 너 같았으면 좋겠다.
혜주 : .....
현규 : 난 바라는 게 있어서 이렇게 괴로운 거겠지.
말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간다고 하면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그래도 미련이 있으니까, 이렇게 괴로운 걸 거야.
혜주 : 우리 오빤 그쪽처럼 그러지 못해요. 여자 때문에 괴로워 할 사람이 아니에요.
현규 : 오빨 다 안다고 생각하니?
혜주 : .....
현규 : 나도 네 말을 믿고 싶다. 네 말을 믿어야 기다리는 게 덜 힘들 거라는 거 아는데.
그런데, 아닌 거 같다.
혜주 : 우리 오빠 어쩌면 조금은 흔들리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하단아, 그 여잔 달라, 처음으로 어떤 여자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냥 나 때문에 그러는 것만은 아닌지도.
하지만, 그쪽이 하교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건 알아요.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뤄져야 하는 거잖아요?
현규 : (물끄러미 보는)
혜주 : .....
현규 : 정말 너 같았으면 좋겠다. 날 보고 숨도 못 쉴 만큼 괴로워했으면서도
나한테 그런 말 해주는 너 같았으면. (눈을 감는)
혜주 : (그런 현규를 바라보는)
#.46 씬. 커피숍.(밤)
수영, 진아 앉아있는.
진아 : (고개를 숙인 채) 저 이제 아저씨 못 만나는 거겠죠? 아저씨, 이런 저 부담스러우실 테니까.
수영 : 난 아주 느린 사람이에요.
진아 : (얼굴을 드는)
수영 : 그리고, 진아씨 같이 어린 사람한테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게 욕심 같아서 차마 못할 사람이구.
진아 : .....
수영 : 그런데, 나 그건 못하겠어요.
진아 : .....
수영 : 진아씨 안 만나는 거, 그건 하기 싫어요.
욕심이란 거 알면서도, 그럼 내가 정말 나쁜 인간이란 거 알면서도 그건 하고 싶지 않아요.
진아 : 아저씨?
수영 : 아무 것도 약속하지 못하면서, 난 언제까지고 이렇게 망설이고만 있을지 모른다는 거 잘 알면서도,
그건 정말 하고 싶지 않아요.
진아 : 저....그럼.....
수영 : (보면)
진아 : 아닌 척,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수영 : ......
진아 : 조금씩 들켜도 되는 거예요?
수영 : .....
진아 : 그래도 저 계속 보실 거예요? 그런 거예요?
수영 : 어쩌면, 나도 들킬지 몰라요, 진아씨한테.
진아 : .....
수영 : 아무 것도 약속하지 못하면서 들키면 안 되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들키게 될 거예요.
진아 : (보다가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리는)
수영 : 또 우는 거예요?
진아 : 아저씨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에 우는 거예요. 내 자신이 참 못났다 그러면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저씨한테 그런 말 듣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근사한 거 같아서,
아, 내가 이렇게 근사한 아이였구나 그래져서 눈물이 나요.
수영 : 그럼 나도 울어야 하는데.
진아 : (보면)
수영 : 나도 내가 참 못나고 답답하고 싫다는 생각 많이 하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진아씨처럼 착하고 예쁜 사람이 나한테 마음을 준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내가 혹시 괜찮은 놈 아닌가 그래지거든요.
진아 : (미소 짓고 바라보는)
#.47 씬. 호프집 앞.(밤)
태영, 지갑을 보면서 걸어 나오는, 말순, 술에 취해 걸어 나오고.
태영 : 이게 뭐냐? 일수 만원 받고, 술값은 6만 8천원 내구.
말순 : (태영의 어깨에 팔 걸치면서) 친구야? 나 내일도 일수 찍을게. 내일은 갈비 집에서 찍어도 되지?
태영 : 너 봉 잡았냐?
말순 : (얼굴 들이대면서) 응. 내일은 남아있는 이천 삼백 원으로 일수 찍을게.
아, 나말순 인생에 이런 횡재수가 있었다니. 부라보다. (두 팔 번쩍 들면서 외치는데, 윽하고 허리 잡는)
태영 : (놀라서) 왜? 왜? 아프냐?
말순 : (주저앉으며) 다 나을 때까지 술 먹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태영 : 많이 아파? 얼마나? 넌 아픈 애가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고 그러냐?
말순 : (버럭) 마시라며? (윽하고 허리 잡는)
#.48 씬. 말순의 집.(밤)
태영, 말순 부축해서 들어오는.
말순 : 됐어. (바닥에 주저앉는)
태영 : 물 줄까?
말순 : 응.
태영 : (얼른 냉장고에서 물 따라 가지고 와서 말순의 입에 대주는)
말순 : (히~하고 웃는)
태영 :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는데?
말순 : 네가 내 마누라였으면 좋겠다. 밥 사줘, 술 사줘, 아프다고 하면 부축해줘, 우렁 각시 같다, 너.
(와락 태영을 끌어안으며) 난 네가 너무 좋은 거 있지, 친구야.
태영 : (순간, 멈칫 하면서 굳어지는)
말순 : 내 구질한 인생에 너 같은 친구가 웬말이냐? 고맙다, 친구야.
태영 : (떼어내고 일어서며) 나 갈게.
말순 : 응. 잘 가라, 친구야.
태영 : (나가는)
말순 : (벌렁 드러누우면서) 아, 하태영.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나의 친구 하태영.
내 우렁 각시 하태영.
#.49 씬. 말순의 집 앞 길. (밤)
태영, 걸어오면서, 뒤를 돌아보고.
태영 : 뭐냐? 하태영. 너 설마 쟤가 여자로 보이는 거냐?
(머리 쥐어뜯으며) 정신 차리자, 술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50 씬. 길.(밤)
단아, 벤치에 앉아있으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하는 멘트.
단아 : (핸드폰을 들어보면)
기다려, 갈게. 하는 메시지.
앞으로 내밀어지는 자판기 커피.
단아 : (고개를 들면)
강석 : (커피 건네면서) 이런 거 해 보고 싶다면서요?
단아 : (어이없어서 미소 지으며 커피 받아 마시는)
강석 :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 뽑으면서 나도 해보고 싶은 거 생각해냈는데.
#.51 씬. 길.(밤)
강석, 단아 걸어오는데.
단아 : 또 어디 가야 하는 거예요?
강석 : .....
단아 : 해보고 싶은 게 뭔데 그래요?
강석 : .....
단아 설마 지금 인형 따러 가자는 건 아니죠? 인형 가게 문 닫았.....
강석 : (갑자기 입을 맞추는)
단아 : (놀라서 굳어지는)
지나가던 사람들 돌아보고, 히죽거리는 사람들도 있고.
강석 : (물러서며) 이거였어요.
단아 : (멍하니 보는)
강석 : 사랑은 정신병이잖아요. 미쳤는데 뭔 짓은 못하겠어요. (웃으며 걸어가는)
단아 : (그런 강석을 보고 있는)
#.52 씬. 천갑의 방.(밤)
천갑, 영자 고스톱 치고 있는.
천갑 : (노려보는)
영자 : (계산하면서) 광박에 피박에, 맞다 나 아까 흔들었다. 그럼 따따따불에. 어머, 멍따다 멍따.
(옆에 놓인 계산기 두들기면서) 이게 대체 얼마야?
천갑 : 아주 깝데기를 벗겨라, 벗겨.
영자 : 백만 원 넘는다.
천갑 : 빨리 적고 패 돌려.
영자 : 당신 내일 꼭 주는 거다.
천갑 : 준다니까.
영자 : 그만하자, 여보. 나 졸려.
천갑 : 난 안 졸려. 어서 돌려.
영자 : 근데 몇 시야? 어머, 12시 넘었네. 아니, 얘들이 왜 아직 안 들어와?
천갑 : 들어올 때 되면 들어오겠지, 어서 돌려.
영자 :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무섭게?
천갑 :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사람 성질 건드려가면서 치래?
영자 : 패가 와서 딱 딱 붙는 걸 어떡해?
근데, 강석인 그렇다 쳐도, 혜주 얜 여자애가 왜 아직 안 들어와.
#.53 씬. 길.(밤)
현규, 술에 취해 잠들어 있고, 혜주,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혜주 : 저기요, 저기요.
현규 : (꿈쩍도 안하는)
혜주 : (망설이다가 흔들면서) 저기요, 저기요.
현규 : (힘겹게 눈을 뜨는)
혜주 : 괜찮아요?
현규 : (흐릿한 시야로 혜주의 얼굴이 단아의 얼굴로 보이는. 혜주를 끌어안으면서)
조금만, 조금만 이러고 있어요.
혜주 : (굳어지는)
현규 : 됐어요, 이렇게 와주잖아요. 이렇게 달려와 주잖아요.
혜주 : ......(눈물이 흘러내리는)
#.54 씬. 종가 앞.(밤)
단아, 강석 차에서 내리는.
단아 : 가세요.
강석 : (다가서서 느슨한 단아의 목도리 여며 주면서) 기억해줄래요?
단아 : .....
강석 : 어쨌든 나도 한 때는 당신의 연인이었다는 거?
단아 : ....
강석 : 무리한 부탁이겠군요. (돌아서는데)
단아 : 기억하게 될 거예요. 전갈의 천성에 대해 얘기하던 어떤 남자가 슬퍼보여서 마음이 아팠다는 거.
강석 : (돌아서서 단아를 끌어안는)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이 바보 같은 여자야.
어쩌자고 나 같은 놈한테 그런 말을 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