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샘추위에 바닷바람까지 가세해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지난 3월 3일 부경대 대연캠퍼스(부산 남구 대연3동)를 찾았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시작되는 ‘생선회 이야기’ 첫 강의를 청강(聽講)하기 위해서였다. ‘생선회 이야기’는 국내 대학 중에선 처음으로 생선회를 주제로 개설된 정규 교과다. 이수단위(1학점)가 크지 않은 교양과목이긴 하지만 독특한 주제와 희소성 덕분에 개강도 하기 전인 올 2월 초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입소문으로 유명세를 타왔다. 대연·용강캠퍼스에 각각 50명 규모로 개설된 2개반은 수강신청 시작과 동시에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3시50분, 강의실인 6호관 114호로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과목이었지만 한눈에 둘러봐도 고학년생이 많았다. 남학생이 압도적인 점도 특이했다. 남학생 대 여학생 비율은 2 대 1 정도. 강의 시각이 임박하자 빈자리가 눈에 띄게 줄었다. 수업조교가 책상과 책상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출석 확인용지를 나눠줬다. 순식간에 50개 좌석이 꽉 찼다. 하는 수 없이 한 학생의 도움으로 옆 교실에서 ‘청강생용(用)’ 책상 하나를 얻어와 비집고 앉았다.
“여러분, 잘 왔습니다. ‘생선회 이야기’는 일주일에 한 시간씩 투자해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수업입니다.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 대학에 처음 개설됐다고 취재도 오셨네요. 부경대의 전신이 수산대였던 것 알지요? 수산대 출신이 생선회 잘 모른다고 하면 면박 당하기 딱 좋습니다.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언제 어디서나 돋보이는 ‘생선회 전문가’가 돼봅시다.” 조영제(58) 식품공학과 교수의 말은 느릿했지만 유머가 있었다. 강의 간간이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시작은 뜻밖에도 일본이었다. “많은 외국인이 생선회 하면 일본을 떠올립니다. 초밥(스시) 영향이 크지요. 여러분, LA에 있는 2000여개 초밥집 사장의 상당수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아나요? 그런데 요즘 손님 중엔 ‘Are you Korean or Japanese?’라고 묻곤 한국인이라고 하면 나가버리는 이들이 적지않다고 합니다. 처음 그 얘길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화도 났어요. ‘왜 훌륭한 우리식 생선회를 두고 국적까지 숨겨가며 초밥집을 해야 하나’ 싶어서요.”
그는 “살아서 펄떡이는 생선을 바로 손질해 내놓는 한국식 활어회는 일본식 선어회(鮮魚膾·잡은 후 일정 시간 냉장 상태로 숙성시켜 먹는 회)와 확실하게 차별화된다”고 말했다. “요즘 여기저기서 한식의 세계화를 외치지요. 그런데 정작 우리 고유 요리인 활어회는 목록에서 아예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 활어회 시장규모는 5조원대로 추산됩니다. 횟집 수는 7만~8만개에 이르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막 썰고 막 먹는’ 문화를 못 벗어나고 있어요. 이번 강의에선 그 문제도 차근차근 짚어볼 생각입니다.”
강의는 대부분 그가 준비해온 슬라이드 자료를 토대로 이뤄졌다.
대부분 △조피볼락(일명 ‘우럭’)은 껍질 부위가 검은색을 띠고 △농어는 살 속에 검은색의 가는 선이 많으며
△시중 횟집에선 값싼 홍민어(일명 ‘점성어’)가 참돔으로 둔갑해 판매되곤 한다는 식의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 정보였다.
사이사이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조영제식(式) 부연설명’이 곁들여졌다.
특히 생선회를 둘러싼 일반인의 잘못된 상식을 꼬집는 내용이 많았다.
오후 5시, 60분을 꽉 채우고 첫날 강의가 끝났다. 박은영씨(패션디자인과 3년)는 “듣고 싶은 강의였는데 수강신청을 못해 현장에 가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다”며 “1학점이라 부담도 크지 않고 주제가 흥미로워서 가능하다면 꼭 수강할 생각”이라고 했다. 추재훈씨(국어국문학과 4년)는 “국내 최초로 개설된 강좌란 데 끌려 신청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부산 출신이면서도 생선회에 대한 상식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조영제 교수, 자타공인 ‘생선회 박사’
강의가 끝난 후 1호관 4층 연구실 겸 대학 부설 생선회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조영제 교수와 마주앉았다. 연구실 문 옆엔 ‘사단법인 한국생선회협회’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한국생선회협회는 2003년 1월 해양수산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은 국내 최초 생선회 관련 비영리단체. 그가 만들고 7년째 이사장을 맡아 꾸려오고 있다. 그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협회 홈페이지를 소개하며 “활동하다 돈이 궁해지면 내 주머니를 탈탈 털어 쏟아붓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생선회전문가과정 수료생으로 구성된 회원들이 꾸준히 연회비(10만원)를 내주고 있어 명맥이 유지되고 있어요. 그마저 없었다면 아마 일찌감치 문 닫았을 겁니다.” 그가 책임교수로 있는 생선회전문가과정은 지난 2000년 부경대 평생교육원 내 교육과정의 하나로 개설된 이후 이제까지 총 23기에 걸쳐 10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부산시내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횟집 주인들이 그로부터 알토란 같은 생선회 정보를 배워갔다. ‘생선회 박사’란 애칭도 그 과정에서 붙여졌다.
“이젠 제법 자리를 잡았지만 초창기엔 어려움이 많았어요. 도제식으로 알음알음 생선회 다루는 법을 익힌 횟집 주인들은 하나같이 ‘당신이 뭔데 날 가르치냐’는 반응이었지요.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민락동 회타운 등지를 돌며 팸플릿을 나눠주고 학생을 모았습니다.” 강의실까지 와서도 일부는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응대했다. “30년간 고급 횟집을 운영해온 분이 계셨는데 수업 내내 시험하듯 꼬치꼬치 묻곤 매번 ‘틀렸다’ ‘아니다’를 반복하시더군요. 지금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지요.”(웃음)
경남 김해시 진영읍 출신인 그는 마산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고 부경대의 전신인 수산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했다.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머물렀던 일본(홋카이도대) 유학시절을 빼놓곤 거의 평생을 부경대와 함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교육원 내에 생선회전문가과정을 만든 것도, 이번 학기 ‘생선회 이야기’를 학부 정식교과로 개설하자고 학교 측에 건의한 것도 모교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변변한 연구비도 책정되지 않는 생선회 연구에 매진하며 5건의 특허와 40여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나 박사 4명, 석사 13명 등 ‘수제자’를 배출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부산 횟집주인이 나 모르면 간첩”
20여년간 생선회 외길을 걸어온 그의 자부심은 연구실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게 한쪽 벽에 붙어 있는 비브리오패혈증 관련 포스터. 조 교수는 국내 비브리오패혈증 발병률을 극적으로 낮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적극적으로 예방캠페인을 펼치고 횟집을 상대로 철저한 위생관리를 당부해온 덕분이다. 비브리오패혈증은 비브리오균에 오염된 어패류를 섭취할 때 발병하는 질환. 흔히 생선회가 원인으로 지목돼왔다. 특히 한국인의 발병률이 일본인의 최대 9배에 이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때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는 일본어 일색이던 생선회 명칭을 우리말로 순화해 홍보하는 일에도 한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인터뷰 당일 연구실 책상 위엔 그가 최종 교정 작업을 막 마친 검인정 교과서 ‘생선회실무’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부산시교육청이 인증, 올해부터 관내 전문계 고교 교육과정에 정식으로 도입되는 ‘국내 최초 생선회 교과서’다.
그가 만든 생선회전문가과정은 조만간 부산을 벗어나 ‘중앙’으로의 진출을 앞두고 있다. 올해 중 숙명여대 평생교육원에 생선회전문가과정이 개설될 예정이기 때문. “한영실 숙명여대 총장님이 부경대에 오래 계셨어요. 전공이 비슷했던 덕분에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지요. 부경대 생선회전문가과정의 성공담을 들으신 한 총장님이 ‘숙명여대에도 유사한 과정을 개설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셨고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그는 요즘 한국식 활어회의 해외 수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 1차 목적지는 미국 뉴욕. 현재 부경대와 협약을 맺고 있는 현지 재단이 주도해 국내에서와 유사한 교육과정으로 미국 현지에서 생선회 전문가를 육성하겠다는 복안이다. 그는 “당초엔 작년 겨울방학에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약간 미뤄져 올 여름방학 개강이 목표”라며 “미국에서도 한국산 활어회를 취급하는 횟집이 상당한 만큼 전문성을 얼마나 키우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숙원은 한식 세계화 목록에 올리는 것”
생선회의 메카로 불리는 부산, 그곳에서도 ‘생선회 박사’로 불리는 그가 즐겨 먹는 생선회는 뭘까. “비싼 것, 구하기 힘든 것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저렴하면서도 최고의 맛을 지닌 붕장어회나 숭어회에 끌리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전 웬만하면 고급횟집에 안 갑니다. 대신 단골 활어 유통업자가 있어요. 업자를 통해 먹고 싶은 어종을 주문해 놓았다가 횟감을 받아 ‘초장집’(손질해간 생선회를 양념값과 자릿세만 받고 차려주는 업소)에 가서 먹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횟감을 배터지게 먹어도 예산은 1인당 3만원을 안 넘기지요.” (그는 조만간 기자와 예의 그 ‘환상적 생선회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퇴임 전 그가 꼭 이뤄야겠다고 다짐한 숙원은 두말할 필요없이 ‘활어회의 세계화’다. “육질이 살아있는 쫄깃한 맛, 펄떡거리는 활어의 포획과정을 눈앞에서 관찰하는 체험은 오직 한국식 활어회에서만 접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2007년 부산관광고에 국내 최초로 생선회과가 개설된 건 그런 의미에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첫 졸업생이 배출되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무엇보다 주간조선 기사를 통해 좀 더 많은 국민이 ‘한식 세계화 대상에 활어회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생선회에 대해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
조영제 교수는 이번 강의를 위해 올 2월 ‘생선회 진실 or 거짓’(도서출판 한글)이란 교재를 집필했다.
교양과목 교재답게 딱딱한 이론은 되도록 배제하고 생선회 제철·식문화·횟감·위생 등 항목별 필수상식을
‘진실’과 ‘거짓’으로 구분,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다.
교재 중 첫 강의 때 언급된 상식 몇 가지를 발췌, 요약한다.
숭어회는 저급(低級) 생선회다? (X)
우리나라에서 숭어회는 종종 싸구려로 취급된다.
해수와 담수가 만나 수질이 좋지 않은 기수역(汽水域) 서식 어종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가을철 대표 횟감으로 사랑 받는 전어 역시 기수역 서식 어종이다.
숭어회는 최고급 횟감으로 꼽히는 넙치보다 육질이 단단하고 오메가3지방산(DHA+EPA)도 풍부하며 값도 저렴해
명실상부한 최고의 생선횟감이다.
붕장어(일명 ‘아나고’) 회는 물에 씻고 탈수시켜 보송보송하게 만들어야 제맛이다? (X)
붕장어회 조리법이 일반 어종과 다른 이유는 붕장어의 피나 껍질의 점액질에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식중독 발병을 피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한 조리법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회를 내면 육질의 단단함이 떨어진다.
물에 씻겨나가는 과정에서 지방까지 씻겨나가 고소하고 진한 맛도 잃게 된다.
따라서 붕장어회도 일반 생선회처럼 피를 제거하고 껍질을 얇게 벗겨낸 후 포를 떠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자연산 생선회와 양식산 생선회 맛, 일반인도 구별할 수 있다? (X)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활어 중 자연산은 10% 미만에 불과하다.
활어 상태에서 자연산은 색깔이나 외관에서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지만
생선회로 조리해 접시에 담아놓으면 사실상 구별이 어렵다.
자연산 회와 양식산 회의 가장 큰 차이는 육질과 맛인데 이는 오랫동안 생선회를 취급한 조리사나 미식가가 아니면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하다.
생선회는 야채에 싸서 먹어야 맛있다?(X)
생선회 몇 점을 상추나 깻잎에 올리고 마늘·풋고추·초고추장 등과 함께 싸서 먹는 방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특한 식문화인 ‘쌈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생선회는 산성식품이고 야채는 알칼리성식품이다.
따로따로 먹으면서 산성과 알칼리성 간 균형을 맞추고 생선회 고유의 독특한 맛을 음미하는 게 올바른 식습관이다.
생선 크기에 상관없이 제철엔 맛이 좋다?(X)
동일한 어종이라도 성장단계에 따라 맛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성어(成魚)는 어종 본래의 맛을 갖고 있으면서 제철과 비제철 간 맛의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유어(幼魚)는 어종 자체의 독특한 맛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연중 거의 비슷한 맛을 내는 종류가 많다.
게다가 대부분의 횟감이 양식산인 요즘 제철과 비제철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