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왼쪽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죠토(지오토;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의 1306년작 〈절망(Desperacio; Desperation)〉이고, 위오른쪽그림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1892년작 〈절망(Despair)〉이다.
미래의 희망은 무시로 반복재생되는 과거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참조).
그래서 절망과 체념의 쾌락(☞ 참조)도 무시로 재발할 수 있으리라. (2023.12.24.22:19.) ☞ 절망론(切望論)과 새뮤얼 러빗 월도
절망론(切望論)
切望論(절망론)절망을 시름시름 앓는 자여, 그대는 아직 절망하지 않았나니,절망은 유쾌하다.절망감을 괴롭게 느껴 살기(殺己)하려는 자여,그대는 아직 절망하지 않았나니,절망은 명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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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間 配慮 利己心 理性 合理性 自覺 自己啓蒙;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의 절망
한국 인간 배려 이기심 이성 합리성 몽객 자아계몽; 자기계몽
그랬다.심원(深遠)한 인간족속은 애초부터 박근(薄近)한 인간족속을 애써 배려하잖아도 무방했다.왜냐면 바로 그런 “배려”야말로 여태껏 박근한 인간족속이 트집잡아버릇한 이른바 “이기심
자본주의는 이따금 절망하는 자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마저 필수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왜냐면 자본주의는 절망자(자선사업용 겸 자원봉사용 특별고객)들을 가끔 (그리하여 절대로 잊히지 않게) 생산하고 전시해야만 소외당한 자들의 소외감을 유지하고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소 면밀히 깜냥되면, 계몽은 필요된다(☞ 참조).☞ 甘味로운 切望질(Sweet Desperation); 벨기에 화가 앙소르의 그림
감미로운 절망질
1. 인간 “대다수”는 하나를 알면 적어도 3가지는 더 알 수 있으리라고 죡변은 억측해보았다.그러니까, 인간 대다수는, 적어도, “지구표면에서 보이는 북극성은 언제나 북쪽에 있다”는 사실
☞ 拐自問怪自答; 맹인을 맹종하는 맹인들처럼 절망을 재촉하는 한국 학문 학계 인문학 자본
괴자문괴자답 의혹 생활력 사랑 소통 희망 절망 한국 학문 지식인 학계 인문학 자본 정신 물질
1. 의심, 의혹, 의문, 물음, 질문 ㅡ 이런 “행위들”을 할 수 있는 힘은 생활력이 아니다. 2. 사랑은 소통과정도 소통방식도 아닐 가능성이 극극히 농후하다! ㅡ 죡변의 고질적이고 요령부득한
☞ 절대로 무반성하는 奴隸떼의 귓등에도 들리잖을 自由의 Elegy
노예떼를 반성하지 않는 노예떼에게 들리지 않을 노예식 자유의 엘레지
노예식 자유의 엘레지어떤 식의 고갈(枯渴)이든 생명집단타락의 원흉이라면어떤 식의 무기력이든 오히려 집단만화방창에서 흘러나왔다가 송환당하는 개체의 에테르였다!신념이라는 어리
☞ 절망하는 快感; 그렇다면 쓰라리게 유쾌한 절망도 가능하랴마랴
염인주의를 초과하는 혐인주의(티모니즘); 지하인간의 절망하는 쾌감
윗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뢰걸(브뤼겔; 브뢰헬; Pieter Breughel de Oude, 1526~1569)의 1565년작 〈염인주의자(미장트로프; The Misanthrope)〉이다. 그림의 하단에 네덜란드어로 글쓰인 문장은 “나는
아랫그림은 스위스 출신 덴마크 화가 베르타 베그만(Bertha Wegmann, 1847–1926)의 〈절망(Despai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