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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六
원만춘(元萬春) 묘갈명(墓碣銘) - 이여(李畬)
지난날 나의 선군자(先君子)께서 여강(驪江) 남쪽 언덕으로 귀로(歸老)하여 우윤(右尹) 원공(元公)과 함께 살면서 조석으로 종유(從遊)하였으니, 참으로 동지(同志) 동문(同門)의 정의(情誼)가 남달랐다. 불초한 내가 매양 장구(杖屨, 지팡이와 신발)를 받들면서 주선하였고,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공을 더욱 우러러 깊이 의지하였다.
이제 공께서 돌아가신 지 또 19년이나 되었는데 공의 아들 주부군(主簿君)이 울먹이며 나에게 말하기를, “아버님 묘의 나무가 장차 한아름이 되어 가는데 아직 묘비가 없네. 그대가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는 의리상 감히 글을 잘 못한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쓴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諱)는 만춘(萬春)이고, 자(字)는 군시(君始)인데 그 선대는 원주(原州) 사람이다. 고려 말기에 흥하여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방어사(防禦使)로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고 시호가 충장공(忠壯公)인 휘 호(豪)는 비록 무과(武科)에 급제했지만 실은 유행(儒行)이 독실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적을 막아 위용을 떨쳐 중국으로부터 포상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할아버지는 원계군(原溪君) 휘 유남(裕男)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휘 두표(斗杓)인데 모두 정사훈(靖社勳)에 책록되었으니 3세가 충의(忠義)를 대대로 전하였다.
원평공은 나라의 정간(楨幹)으로 백관의 의표(儀表)가 되는데 공은 막내아들이다. 외조(外祖) 집의(執義) 최동식(崔東式)공 역시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공은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 인조 4) 9월 18일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기도(氣度)가 침착하여 장자(長者)들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장가들어서는 외구(外舅, 장인) 교리(校理) 박종부(朴宗阜)공은 평소 간중(簡重)하여 누구나 잘한다고 허여함이 적었는데 공이 준발(俊拔)하다고 극구 칭찬하며 사위를 대함이 특별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이후 오랑캐가 공경의 자제를 인질(人質)로 보낼 것을 요구하자, 공은 두 형이 있지만 자청하여 가니, 당시 나이 17세였다. 심양(瀋陽)에 2년 동안 머물면서 항상 가슴 깊이 슬퍼하여 오랑캐의 물건은 하나라도 취해서 행낭(行囊)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여어(女御)가 아내 대신 따라갔으나 끝내 한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관중(館中)이 놀라 소란을 떨면서 천병(天兵)이 크게 이르렀다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공은 홀로 그대로 드러누워서 코를 골았는데, 조금 후에 알고 보니 극한(可汗)이 죽었기 때문이지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은 아니라고 하니 군중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귀국하여 할머니 상(喪)을 당해 1년 동안 최질(衰絰)을 입고 밖에서 거처하면서 과거(科擧)를 그만두었다. 그 후 연달아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공은 질자(質子)의 은례(恩例)로 마땅히 벼슬을 제수할 수 있었으나 나이가 어린 것을 혐의하여 오랜 후에야 빙고 별검(氷庫別檢)이 되었다.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와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거쳐 평강 현감(平康縣監)을 지내고 또 홍천 현감(洪川縣監)을 지냈다.
홍천은 백성은 적은데 역(役)이 번잡하여 공이 다시 읍규(邑規)를 정하니, 백성들이 길이길이 의지하는 바가 되었다. 어사(御史)가 치적을 포상(褒賞)하라고 보고하여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두 고을 모두 원평공(原平公)이 연경(燕京)에 가게 되자 따라가기 위해 글을 올려 체직(遞職)하니, 백성들이 모두 철비(鐵碑)를 세워 추사(追思)하였다.
또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지내고 안성 군수(安城郡守)가 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검전(檢田)을 만나서는 분등(分等)이 가장 공평하여 상공(相公)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공이 검전사(檢田使)가 되어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였다.
얼마 후 숙부(叔父) 부윤공(府尹公)의 상을 당해 상사(喪事)를 친히 검칙하기 위해 체직하고 돌아갔다.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제배해서는 치적이 최(最)여서 승서(陞敍)하라는 명이 있었다. 얼마 후 외간상(外艱喪)을 당해서 집례(執禮)가 매우 엄숙하였는데, 장례를 지내기 전부터 죽만 먹었고, 장례를 지내고 나서도 채과(菜果)를 먹지 않았다.
복(服)을 벗고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을 거쳐 금천 군수(金川郡守)가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하였다. 연안 현감(延安縣監)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서 친병(親病)으로 돌아왔으며 풍덕 부사(豊德府使)를 제배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거쳐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 충주는 땅이 넓고 백성이 많은데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큰 흉년을 만나 정성을 다해 구제하니, 살아난 자가 수만 명이었으며 겸하여 농사지을 소와 종자 양식을 마련하여 농민들을 도왔다.
진정(賑政)을 마치고 상(賞) 받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개인적으로 진곡(賑穀)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해를 넘겨 사직하고 돌아왔다. 한성 서윤(漢城庶尹)과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제배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체직하였다.
얼마 후 내간상(內艱喪)을 당했는데 공의 나이가 벌써 쇠하였지만 상제(喪制)를 지키는 것이 더욱 엄하였다. 장례를 마치고는 곧 여강(驪江) 가에다 집을 장만하여 종신(終身)할 계획을 하면서 ≪효경(孝經)≫의 말을 취해 재명(齋名)을 삼으니, 대개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자 한 것이다. 연달아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와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제배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 가을에 정사 공신(靖社功臣)의 아들로 회맹제(會盟祭)에 참석하였다.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공은 지자(支子)로서 은전(恩典)을 입는 것은 예(例)가 아니라 하여 받지 않으려고 하니, 연신(筵臣) 가운데 임금께 아뢴 자가 있어 그 명(命)이 중지되었다.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제배하였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 9)에 천거로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발탁되니, 조정의 의논이 장차 공을 크게 쓰려고 한 것이었다. 공이 고사(固辭)하고 부임하지 않으니, 유지(有旨)로 문비(問備)하여 부임하기를 재촉하였다. 힘써 부임하여 도착하자 곧 상소하여 군민(軍民)의 적폐(積弊)를 조목으로 진달해서 변통하고 새로 설치한 것이 많았다.
마별대(馬別隊)를 두어 급히 운반해야 할 짐을 운반하게 해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게 하고, 기계를 수선하여 융비(戎備)를 일신(一新)하니, 총융사(摠戎使)가 임금께 보고하여 전지를 내려 말을 하사하고 포유(褒諭)하였다. 임기가 차자 여주로 돌아왔다.
충청 병사(忠淸兵使)와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공이 점점 연로해지니 마땅히 빨리 탁용(擢用)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공의 나이를 묻고는 또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신채(神采)가 아직 왕성하다.” 하고는 인하여 선부(選部)로 하여금 2품 망(望)으로 올리게 하였는데, 그때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중지되어 시행되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696, 숙종 22)에야 비로소 전번의 명을 시행해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초수(超授)하였다. 공은 더욱 겸손하여 연달아 글을 올려 간절히 사직을 청하였으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숙명(肅命)하기 위해 서울로 와서 다시 곧 정고(呈告, 휴가를 청함)하니, 특명으로 도로 돌려주고 인하여 동의금(同義禁)ㆍ부총관(副摠管)을 겸하게 하니, 공은 황공하여 힘써 공직(供職)하였다.
이때에 서울의 법강(法綱)이 오랫동안 해이해졌는데 공이 법 집행에 엄격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도하(都下)가 숙연해졌다. 몇 달만에 휴가를 청해 돌아와 체직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97, 숙종 23)에 대신의 건의로 다시 우윤을 제배하자 힘껏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는데, 오래지 않아 질병에 걸려 이해 12월 26일에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부의(賻儀)를 내리고 치제(致祭)하는 것을 전례대로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 2월에 원주(原州) 장산리(長山里) 원평공(原平公) 묘 왼쪽 유향(酉向) 언덕에 장례하였다. 공은 충후(忠厚)하고 질직(質直)하였으며 절조(節操)를 확연히 지켰다.
원평공의 가정 교육이 매우 엄하였는데, 상제(喪祭)는 더욱 삼가서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지켰으니 공은 그대로 따라 행하고 감히 실추시키지 않았다. 원평공을 옆에서 모실 때에는 날마다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고 직접 쇄소(洒掃)를 하였다.
삼가고 조심하며 몸을 단속하여 일찍이 막좌배(幕佐輩)들과는 사사로이 은근한 적이 없었다. 만년에 대부인(大夫人)을 모시면서도 옆에서 부지런히 시중을 들어 그 뜻을 거스르지 않으며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였다. 군읍(郡邑)에 있을 때에는 별도로 동헌(東軒) 옆에다 주방을 설치해 조석으로 몸소 음식 맛이 좋은가를 보고 올렸다.
아버지 상을 겪은 뒤로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평소에는 추워도 비단 바지를 입지 않았으며 더워도 모시옷을 입지 않았다. 도포가 해어지면 항상 기워 입으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집안 법도이다.” 하였다.
두 형을 섬김에는 사랑하고 존경함이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중씨(仲氏)가 일찍이 돌림병에 걸리자 공이 부호(扶護)하며 떠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본디 돌림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얼마 후 중씨의 병이 낫고 공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종족을 매우 후대(厚待)하여 가난하고 굶주린 자를 거두어 구휼하기를 오직 있는 힘을 다하였다. 외씨(外氏)가 매우 가난하여 대부인이 일찍이 시절 따라 제수(祭需)를 마련해 보냈는데, 공도 종신토록 폐하지 않았다.
항상 엄숙하게 단정히 앉아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규문(閨門) 안에서는 서로 공경하고 대소(大小)가 화복(化服)하여 삼가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품이 성색(聲色)과 분화(紛華)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일체 세속에서 좋아하는 바에 욕심이 없었으며, 세리(勢利)를 보면 혹시라도 더러워질까 멀리하였다.
몇몇 권간(權奸)과 전에 서로 알고 지냈으나 그들의 용사(用事)가 심해지자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피하고 만나지 않아 사람들이 혹 위태롭게 여겨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후에 과연 그 사람이 국법으로 처단되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법도를 삼가 지켜서 고식적(姑息的)이고 구차스러운 뜻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마음이 공정하면 비록 적중하지는 않더라도 멀지는 않으며, 조금이라도 훼예(毁譽)의 마음을 두면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하고는 일의 처단을 확실히 하고 청탁을 행하지 않았다. 더욱이 청렴결백함에 힘써서 공물(公物)은 털끝만큼이라도 가까이하지 않아서 매양 돌아오는 행탁(行槖)이 텅 비어 쓸쓸하였다.
문을 닫고 조용히 있으면서 교제를 간결히 하였으며, 일상 생활에서 실사(實事)가 아니면 마음에 두지 않았다. 성현의 경훈(經訓) 및 사전(史傳)을 취해서 잠심(潛心)하여 즐거움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특히 ≪논어(論語)≫ 읽기를 좋아하여 항상 “젊은 날에 병을 잘 앓아 학문할 시기를 놓쳤는데, 늙고 나니 비록 정신을 집중해 읽으려 해도 근력(筋力)이 미치지 못한다.” 하며 한탄하였다.
매양 말하기를, “교목지신(喬木之臣)의 집안은 분의(分義)가 자별하다.” 하면서 국휼(國恤)을 만나면 반드시 5개월 동안 안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인조(仁祖)ㆍ효종(孝宗)ㆍ현종(顯宗) 삼조(三朝)의 기신일(忌辰日)이면 늙어서도 반드시 소식(素食)을 하였다.
벼슬에서 이미 물러난 뒤에도 왕실에 마음을 써서 조정 정령(政令)의 잘잘못을 들으면 근심하고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임종(臨終) 때 탄식하기를, “나는 본디 재주가 없는데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한 번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고자 하였는데 이제 스스로 갚을 길이 없게 되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였으니, 공이 평소 마음속에 품은 바를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부인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유순(柔順)하고 정숙하여 전혀 세속의 부화하고 사치한 습성이 없어 원평공이 매우 마땅하게 여겨 매양 현부(賢婦)라고 칭찬하였다. 공보다 2년 먼저 출생하여 18세에 공에게 시집왔으며 공보다 11년 뒤에 졸(卒)하니,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원몽정(元夢鼎)은 천거로 주부(主簿)에 제수되었고, 차남 원몽은(元夢殷)은 백씨 관찰공에게 출계(出系)하였다. 맏사위는 판서 권상유(權尙游)이고, 둘째는 현감 이당(李簹)이며, 셋째는 이수번(李秀蕃)이다. 측실(側室) 사위 여필응(呂必應)은 진사이다.
장남 원몽정의 아들은 현감 원명익(元命益)과 원명직(元命稷)이고, 사위는 봉사(奉事) 이사일(李思一)이다. 차남 원몽은의 아들은 원명설(元命卨)이고, 사위는 생원 임상악(林象岳)과 황중(黃重)이다. 외손(外孫)으로 맏사위 권상유의 아들은 권소(權熽)ㆍ권혁(權爀)ㆍ권위(權煒)이고, 사위는 이현록(李顯祿)이다. 둘째 사위 이당은 아들 이기진(李箕鎭)ㆍ이규진(李奎鎭)과 사위 윤익동(尹益東)을 두었다. 막내 사위 이수번은 아들 이사휘(李思徽)를 두었다.
원명직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원경순(元景淳)이다. 원명석은 1남 1녀인데 모두 어리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집안에서의 수행(修行)은 오직 질박하고, 관직에서 베푼 정사는 오직 실제 혜택으로 하였네.
늙기 전에 돌아와 쉰 뜻 개석(介石)같았고, 나라 잊지 않고 구차한 녹봉 부끄러워했네.
밭 갈고 경계 나누며 하고 싶은 대로 했네. 임금이 말하기를, “와서 교목세신의 의무를 다하라.” 하시었네.
공은 망설이며 삼가다가 홀연히 나가 명에 응해 책임을 다했네.
백구(白駒)를 저녁 다 가도록 매어 놓기 어려웠네.
여강(驪江) 언덕에서 공이 즐기시니 강은 길고 산은 높아 발자취 우러르네.
무덤에 묘갈명 써서 세우니, 그 사(辭) 부끄럼이 없는데,
영원히 다음 세대에 오탁(汚濁)을 경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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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元萬春 墓碣銘[李畬]
昔我先君子歸老于驪江之南岸, 與右尹元公竝居, 昕夕相遊從, 實有同志同傳之契。 畬以不肖每得奉杖屨周旋, 逮先君子下世, 其依仰於公益深。 今公之沒又十九年矣, 公之胤主簿君泣謂畬曰: “先君之墓木將拱, 而顯刻尙闕, 子盍勉焉?” 畬義不敢以不文辭, 遂相與涕沱而敍之。
謹按公諱萬春, 字君始, 其先原州人。 興於麗季, 世襲簪纓。 至防禦使、贈左議政諡忠壯公諱豪, 雖以武登, 實篤儒行, 値壬辰之亂, 捍賊立慬, 至受天朝褒賜, 於公爲曾祖。 祖原溪君諱裕男, 考左議政原平府院君諱斗杓, 俱策靖社勳, 三世以忠義傳家。 原平公爲國楨幹, 儀表百僚, 公其季子也。 外祖執義崔公東式, 亦以當昏朝立異讎母論, 追贈都承旨。
公以天啓丙寅九月十八日生。 自幼氣度沈凝, 長者期以遠器。 旣受室, 外舅校理朴公宗阜, 素簡重少許可, 以亟稱公俊拔, 館待之特異。
丁丑後, 虜索公卿子爲質, 公有兩兄, 自請以行, 時年十七。 留瀋二年, 常懷隱痛, 不以虜中一物染橐, 有女御代室隨往, 終不一近。 一夜, 館中驚擾, 謂天兵大至, 無不惶惑失措者, 公獨牢臥鼾睡, 俄聞乃可汗死, 非兵也, 衆皆歎服。
旣歸, 遭祖妣喪, 期年着縗絰居外處, 廢擧。 其後連中解不利。 公以質子恩例當除官, 而嫌於年早, 久之爲氷庫別檢, 歷司宰主簿、掌穎院司評, 監平康縣, 又監洪川。 洪民少役煩, 公更定邑規, 民以永賴。 繡衣以治行褒聞, 賜表裏。 兩縣俱以從原平公赴燕陳章遞, 民皆樹鐵碑追思之。 又歷宗廟令, 守安城郡, 値畿甸檢田, 分等最平, 老峯閔相公爲使, 令列邑視效。
尋遭叔父府尹公喪, 爲親檢終事遞歸。 拜白川郡守, 以績最有陞敍之命。 俄丁外艱, 執禮甚嚴, 未葬啜粥, 旣葬不食菜果。 服闋, 由司宰僉正, 爲金川郡守, 辭遞, 監延安縣。 未久以親病歸。 拜豐德府使, 不赴。
由掌隷院司議, 拜忠州牧使。 忠地大民衆, 値辛亥大侵, 竭誠賑哺, 所活累鉅萬。 兼具耕牛種糧, 以資農民。 賑畢, 恥於徼賞, 不以私備賑穀, 聞於上官。 踰年辭歸。 拜漢城庶尹、翊衛司禦, 皆以病遞。
旋丁內艱, 公年已衰, 而持制愈嚴。 葬畢, 仍家驪上, 爲終焉計, 取《孝經》語, 以用因名齋, 蓋不欲復爲祿食也。 連拜忠勳都事、星州牧使, 皆不就。 庚申秋, 以靖社功臣子, 參會盟祭。 命加通政階, 公以支子被恩典非例不欲受, 筵臣有爲白於上者, 寢其命。 拜尙州牧使, 又不赴。
癸亥, 用薦擢鎭水原府, 朝議蓋將大用也。 公固辭不起, 有旨問備促赴。 黽勉就任, 至則上疏, 條陳軍民積弊, 多所變通創置, 有馬別隊, 令緩急可運輜重, 節縮宂費, 修繕器械, 戎備一新。 摠使上聞, 降旨賜馬褒諭, 秩滿歸驪。
除忠淸兵使、判決事, 皆不赴。 筵臣有言: “公年紀漸邁, 宜亟擢用。” 上問公年甲, 且曰: “予見神采尙旺。” 仍令選部陞擬二品望, 會時事大變, 寢不行。 甲戌, 除楊州牧使, 辭遞。 丙子, 始申前命, 超授漢城右尹。 公愈益退遜, 旣連章懇辭, 不得, 則爲肅命入京, 旋又再呈告, 特命還給, 仍兼同義禁、副摠管, 公惶恐勉起供職。 時京兆法綱久弛, 公執三尺不撓, 都下肅然。 數月乞暇歸遞。
丁丑, 用大臣言, 復拜右尹, 力辭不赴。 未幾感疾, 以是年十二月二十六日卒。 訃聞, 賜賻致祭如例。 戊寅二月, 葬于原州長山里原平公墓左酉向原。
公忠孝質直, 確然有執守。 原平家敎甚飭, 尤謹於喪祭, 一遵文公禮, 公服行不敢墜。 在原平公側, 日必冠帶, 執洒掃。 小心飭躬, 未嘗與幕佐輩私致慇懃。 晩年侍大夫人, 猶服勤左右, 以順適其意, 保護如嬰兒。 在郡邑, 別置庖廚於軒側, 朝夕躬在視甘毳以進。 自經前喪, 不御華采。 平居寒不袴帛, 暑不衣紵, 袍弊輒補綴曰: “此吾家法也。” 事兩兄, 愛敬篤至。 仲氏嘗遘癘, 公扶護不去曰: “吾素不畏癘。” 旣而仲氏獲瘳, 公亦終無恙。 待宗族甚厚, 收恤窮餓, 惟力是視。 外氏貧甚, 大夫人嘗以時節, 備送祭需, 公終身不廢。
居恒儼然端坐, 動止有常度。 閨門之內相敬, 大小化服, 罔不肅恭。 性不喜聲色紛華, 於一切世俗所好, 泊如也, 視勢利若或浼焉。 有一二權奸舊曾相識, 及其用事張甚, 過門而避不見人, 或危之而不顧, 後其人果伏拜誅。
居官謹守法度, 絶無姑息苟且之意。 常曰: “心公, 則雖不中不遠。 若少有毁譽之念, 則鮮不害事。” 處斷堅確, 請托不行。 尤以廉白自礪, 公物不以毫毛近己, 每歸橐蕭然。 杜門守靜, 簡於交遊, 日用非實事, 不以留意。 取聖賢經訓及史傳, 潛心以爲樂。 晩年尤喜讀《論語》, 常以 “少日善病失學, 旣老雖欲專精, 筋力不逮”爲恨。 每曰: “喬木之家, 分義自別。” 遇國恤, 必盡五月不寢內。 仁、孝、顯三朝忌辰, 至老必素食。 旣退猶係心王室, 聞朝廷一政令得失, 憂喜見於色。 臨卒歎曰: “吾本不才, 荷國厚恩, 欲以一死報國, 今無以自效, 死目將不瞑矣。” 公之素所存於中者, 於此可見矣。
夫人咸陽朴氏, 柔婉貞靜, 絶無世俗浮靡習, 原平公甚宜之, 每稱爲賢婦。 先公二年生, 十八歸于公, 後公十一年卒, 祔葬公墓。
有二男: 長夢鼎, 以薦授主簿: 次夢殷, 出後伯氏觀察公。 三女壻: 長權尙游, 判書: 次李簹, 縣監: 次李秀蕃。 側室壻呂必應, 進士。 長房男命益, 縣監: 命稷。 壻李思一, 奉事。 次房男命卨。 壻林象岳, 生員: 黃重。 外孫男權熽・爀・煒、壻李顯祿, 男李箕鎭・奎鎭、壻尹益東, 男李思徽。 命稷二男二女, 長景淳: 命卨一男一女, 幷幼。 餘不盡載。
銘曰:
脩行于家惟其質, 施政于官惟其實。 未老歸休志介石, 匪忘于國恥苟祿, 我耕我疆適我適。 王曰來汝義喬木, 公惟逡巡足踧踖。 乍起膺命勉吾責, 白駒難縶不終夕。 驪江之岸公所樂, 水長山高仰遺躅。 揭銘墓隧辭無怍, 永示來許戒汚濁。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