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德田 이응철
수필과 비평 신인상(97년)
고성군 현내면 대진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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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이 지나니 봄이 오는 소리가 완연하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 물소리가 돌돌 거린다.
성급히 논에 검은 두엄을 여기저기 퍼 나르는 농부도 이따금 모습을 보인다. 꾸역꾸역 봄이 밀려온다. 그러나 왠지 봄은 오는데 연초부터 자꾸 깊은 시름에 젖어드는 것은 어인 주책인가!
-이 서방! 자네 올 을유년엔 봄만 잘 넘기면 되네.
-운수대통인데 3, 4월에 구설수가 있거든.....
지난 주말이었다. 모처럼 처가에 인사차 다녀올 때였다. 큰 도로변까지 따라 나오신 장모님께서 느닷없이 귀엣말로 속삭여 준 말이었다.
구설수라? 생전에 어머님께서 홀로 구 남매를 키우실 때, 매일같이 자식들 앉혀놓고 귀가 닳도록 당부하신 금기의 말씀이라 여간 자극을 주는 단어가 아니었다. 퍼뜩 놀랐다.
장모님은 서예를 하시다보니 한학에 밝으시다. 해가 바뀌면 월력과 토정비결을 끌어안고 사신다. 가까운 친척은 물론 이웃사람들까지 일년의 운세를 꿰뚫고 앉아 계신다.
저는 그런 것을 믿지 않으니 괘념치 마시라고 늘 말해도, 맏딸 어찌 될까봐서인지 해만 바뀌면 가장 먼저 보시고 천기를 일러 주시며 일장 연설이시다.
그러나 사실 내겐 늘 못 마땅하기만 하다. 노력만이 살길이라고 갖은 역경을 헤쳐온 내게 미신 같은 토정비결이 무슨 설득력이 있단 말인가! 만류를 해도 막무가내시다. 정초면 당신께선 뭐니뭐니해도 그것을 무기로 이 사람 저 사람께 큰소리치시며 으쓱하시니 뭐랄 수 있는가. 허나 내심은 여간 불만스럽지 않은게 솔직한 심정이리라.
토정비결을 통해 일년의 운세를 점친다는 것이 요즘 세대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이미 골동품으로 역사의 박물관에 진열할 법한 산물인데, 아직도 연초에 역술인들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을 추스르며 책장에 눈이 가니 아직도 신통력이 잔존해 있단 말인가!
토정비결하면 예전에 들은 얘기로는 못된 것은 맞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반에서 떨어진 떡처럼 좋은 행운은 스쳐 지나가고, 못된 불운만 적중한다면 불가에서 말하는 고해이기 때문인가? 너무 형평성이 어긋난 처사 같기도 하다.
물론 운명의 여신을 귀머거리나 장님으로 몰아 부쳐, 불가항력의 운세라는 신비를 마다하고 인간의 손아귀에 있다고 큰소리치며 산전수전 겪은 우리같은 강심장들이야 별 문제 없지만, 뜬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도는 연약한 서민들에겐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토정비결은 누가 이렇게 형평성에 어긋나게 만들었는가? 조선 중기의 학자 토정 이지함도 이런 운세를 점치면서도 정작 본인은 마포 강나루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거했다고 한다. 토정비결이란 그 해의 간지와 갑자, 을축과 같이 다달이 배정된 월건(月建) 그리고 육십갑자를 숫자로 풀어 신수를 보는 것이다. 주역의 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주역보다 작은 규모이다. 괘의 숫자가 주역의 48괘보다 16이 적고, 년, 월, 일, 시에서 시가 빠져 총괘가 144개로 424괘인 주역보다 크게 적다.
토정 이지함은 고려말 목은의 후예로 서경덕의 문하에 입문하여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특히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 등 여러 분야에 해박하다고 알려져 있다. 덕이 하늘에 닿은 분이셨다. 토정은 주경궁리(主敬窮理)를 학문의 방법으로 삼은 학자이면서, 정치에 입문해서도 손수 백성을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아산 현감때 관내 끼니조차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기위해 평생 몸을 바치셨다. 걸인청을 두어 길거리 걸인들까지 구휼의 손길을 내밀었다니 얼마나 어려운 인생들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겠는가!
특히 그는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항상 탐구하며 불쌍한 자들을 걱정하신 관료이시다. 때문에 그의 토정비결을 보면 비교적 은유적인 표현으로 풀이하여 놓았다. 길흉화복 표현 자체가 사람들에게 활기있게 하였고, 힘을 북돋아주는 역할을 해 당시 선조 때 많은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토정비결은 헛된 망상이며 형평성에 어긋나는 우려의 대상은 아니다.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러 점집이나 무속인을 찾는다. 헛된 망상이라고 일축하면서도 구휼에 생을 바친 토정을 생각하면 분명 진의는 숨겨져 있다. 그렇다.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여 운은 확대시키고 액을 날려보내거나 최소화시킨다면 얼마나 평탄한 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순간 지나온 내 생의 오솔길을 되돌아본다.
누구에게나 세 번의 기회는 온다고 한다. 외길로 살아온 내 인생-. 30대에 분명 길운이 찾아왔음을 느껴본다. 도심외곽으로 몇 년 후 도시계획이 발표되니 값싼 야산을 사노라고 조카사위가 귀뜸을 해준 일이 있다. 자기가 구매하는 옆이라고 권했지만 마다했다. 만약 그 때 부동산에 투자하면 로또 복권이나 다름없이 평생을 날개 달고 영화를 누린다는 토정비결이 나왔다면 어떠했을까? 워낙 박력이 모자라지만 관심을 가지고 과부 변리 돈이라도 내어 밀어 부쳤을지도 모른다. 조카는 그 때 주장대로 허름하게 산 땅이 후평동 일원에서도 노른자가 되어 일약 빌딩 주로 군림하며 유복하게 지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70년대이다. 오토바이 사고로 초죽음을 당했을 때도 네비게이션처럼 야간에 운전하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메시지를 어떤 문구로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참변을 당하지 않고 조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무조건 거기에만 의존하고 믿고 아무 노력도 안 한다면 큰 낭패를 겪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모처럼 찾아온 길운을 모르고 지나쳤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운이 좋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훨씬 수월하게 잘 풀릴 것이요, 악운이 있다고 할 때 무조건 투자한다면 그 결과는 또한 어떠하겠는가?
신앙에 돈독한 내자는 하나도 기도, 둘도 기도란다. 반성하고 간절히 염원하는 생활을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길운이 간절한 기도에 스치면 어떤 물리력이 더욱 탄력을 받아 성사될 것으로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운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깊은 통찰력과 주변상황에 대처하는 인간의 노력이 가세해야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름이 무엇인가? 반추하는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스스로 깨닫고 고쳐나가며 살아간다. 내 주장보다 남의 의견을 많이 듣는 힘 또한 중요하다. 혼자 무인도에서 살 수 없으니 남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는 한해를 세우리라. 조금은 손해를 보며 살아가는 삶을 터득해야 한다. 그간 얼마나 이기주의에 통달하며 살아왔던가! 21세기는 남을 위해 살 때이다. 촌철살인의 강수를 놓더라도 되받지 말고 한번 더 생각하고 천천히 답하는 한해를 보내리.
꼬기꼬기 구겨 던져버린 토정비결을 펴 다시 읽어본다.
-재물이 풍족하니 심신이 편안하리라.
가는 비가 내리고 봄바람이 부니 백가지 초목이 다시 소생함과 같다.
집안이 안락하니 재록이 스스로 왕성해질 것이다. 이 모든 게 그동안 쌓아놓은 업이리라. 특히 3, 4월에 남과 시비하지 마라. 구설구가 생기면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수는 평탄하고 길하지만 질병이 침노할까 염려되니 평소에 건강을 잘 지켜야 한다. 친한 사람이 해를 끼칠 것이니 매사에 조심하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