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해 삶의 진정성과 치열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시와시학』의 등장으로 한국 문학의 질이 고양되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 취지에 동참하여 시의 군불을 지피던 이들이 하나둘 등단하여
시의 지역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대구시학회동인」들이다.
이번에 계간 『시와시학』출신의 대구시인들이
전국 『시와시학』출신 시인들의 도움으로 쓰여진 테마시와
대구출신시인들이 쓴 동인시를 묶어
대구시학회동인시집 『그 집에선 누구나 새가 된다』를 펴내면서
새로이 독자들을 만나고자 한다.
현재 활동 중인 시인은
박영호, 박윤배, 안윤하, 이승주, 이정화, 이진엽, 장하빈, 정숙, 조두섭, 류인서, 최동룡이다.
초여름의 더위를 이들의 시편으로 식혀가며 의미 있는 저녁 한때를 가지고자 합니다.
지역에 계시는 문인들과 전국 『詩하늘』 가족들을 모시고
시 낭송회를 가지고자 하오니 오셔서 즐거운 시간 나누시기 바랍니다.
-때 : 2005년 6월 17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곳 : 대구MBC방송국 맞은편 삼성화재빌딩 지하1층 카페 '스타지오'
-회비 : 10,000원(저녁, 음료수, 작은 시집 제공)
-주차 : 지하층 3시간 무료 주차
*시편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이팝나무 아래 들어가다
-박영호
가지가 휘어지도록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넓은 그늘 만든다
어서 먹고 가라고 고단한 몸 쉬어 가라고 만들어준
그 꽃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그늘인데도 무슨 축복처럼 너무 환하다
흩뿌려지는 꽃의 흰빛과 아찔한 꽃향기 만나
환한 연등을 밝히는 거다
허기진 사람들을 위하여
희망의 밥상을 가득 차려 놓은
나무들의 마음을 읽으며
나무그늘에 앉아 땀이나 식히는
나는 언제 허기진 사람들을 위하여
가난한 밥상이라도 차린 적 있었느냐
좀더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려고
가지들은 자꾸 땅으로 처지고 있다
가지는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하얀 밥상을 가득 차려 놓았다
그늘·4月의·어머니
-박윤배
물괸 웅덩이 내려앉은 산벚나무 꽃잎이 저녁을 환하게 한다. 가벼운 손짓의 바람에도 물살은 일렁이고, 겨울동안 얼었던 나무가 살결에 분바르듯, 피었다가 지는 꽃잎 속으로 천천히 걸어오시는 어머니. 얼음 풀린 땅 위에 분홍의 당신이 보내온 편지가 시커먼 몸통 울먹임 벚나무를 흔들고 있다. 벌떼들도 웅성거린다. 생전 누구든 추위 가려주던 배려의 따뜻한 마음이, 꽃핀 나무가 되어 4월의 길목에 서 계신 걸까.
당신이 그리운 저녁, 나는 강변을 서성이고 싶다. 가끔 들여다보는 어머니 유품인 거울모서리, 남겨진 사진에도 꽃이 피고 있다. 내가 걷는 강변에도 수없이 핀 꽃들, 늘 꽃이 배경인 어머니. 지난 폭풍에 잘려진 가지 옹이 위에도 온기가 전해지길 기다리는가. 물괸 웅덩이는 별빛 소쿠리로 곁에 두고, 물 위에 내 모습 비춰 유리처럼 슬픈 사랑감옥에서 나를 꺼내주려 하신다. 당신 울타리에 나 너무 오래 갇혀 있음을 걱정하시듯 강 건너 진달래 손짓으로 팔 벌리는 어머니. 흙탕물 위 산벚꽃 꽃잎인 나를 이끌고 계신다.
목수와 아들
-안윤하
강 목수의 아들은 내내 컴컴한 방 어둠을 베고 누워만 있다. 애비에겐 그 자리가 왜 그리도 밝은지 대패로 밀고 밀어도 비뚫어지는 다리 곧은 못만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휘어지는 가슴 위로 해는 기울고 공사장 대들보의 어깨도 기울어지기만 했다
못대가리에 불이 튀도록 내려친다.
아들의 가슴에 불꽃이 튄다.
못대가리에 튀던 불이 술잔에 부딪히고
낙지다리가 꼬부라든다
아들의 비틀리는 다리와
애비의 비틀거리는 걸음이 맞물린다
어제는 낙지다리가 있어 술을 마시고
오늘은 가고 없어 다시 또 술을 마신다
아들의 바람손이
애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하늘종
-이승주
갓 물맞이 끝난
연분홍 덴드로비움꽃 같은 여학생들
소리 맞춰 글 읽는 소리 들으면
하늘에
보이지 않는 종 줄줄이
걸려 있음을 보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색을 가진 종
아침마다
누가 울리는지 알겠다
칼날 위의 봄날
-이정화
아슬아슬한 작둣날 위의 몸
미친 신명으로
즈려 뛰기까지 하다
초록 호수
물수제비 뜨는 시간 위
뚝뚝 모가지채 지는 동백꽃
제 몸 조명으로 한 순간 세상천지 환하다
시간의 이불
-이진엽
그리고 어둠은 깊어가고
나는 오늘밤도
시간의 이불을 천천히 펼치며
조용히 잠을 청한다
망각의 솜과 물안개로 가득 찬
신비한 그 이불
한 끝으로 기어들면 세상의 고통들이
쉽게 잊혀져간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었지만
그 이불 속에선 온통 알몸으로
나는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빠르게 흘러가는 물소리
망각의 젖은 솜으로 쓰린 상처를 다독이며
영원 속으로 흘러가는 끝없는 울림을
나는 밤마다 시간의 이불 속에서 듣는다
잊어라, 삶은 그렇게
흐르는 물에 실린 순간의 파문이므로
오늘밤도 나는 다만
먹빛 슬픔들을 시간의 이불 속에서 껴안고
다시 잠을 청해야 한다
첫사랑
-장하빈
천등산 끝자락에서
가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린다
박하 향기 아득한 시간의 터널 지나
푸른 기적 달고 숨가삐 달려 와서
내 생의 한복판 관통해 간
스무 살의 아름다운 기차여!
동거
-정숙
겨울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파리 거의 다 뜯기고 말라가던
호접란이
어느 날 꽃대를 밀어 올려 한 오 개월
곰곰 생각에 젖더니 이제 바나나 속 살빛 웃음을
흘리며 두려운 듯 삭막해진 주위 살피고 있다.
깃털 다 뽑히고 붉은 벼슬만 남아있는 제 볼품에
이제껏 꽃송이들이
나비의 날갯짓으로 품위를 살린 것은
뿌리와 이파리의 지긋한 정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는지 손톱 깨물며 발등만 바라본다.
핏기 잃은 듯 파리한 그 얼굴 안쓰러웠던지
냉이풀이
사랑이란 서로 빈자리 채워주는 거라며
마른 잎 대신하여 난의 우아한 멋을 살려보겠다고
언제 뿌리내렸는지 좁은 난 화분 빈 공간에서
푸른 잎으로 제법 운치 있게 곡선을 그리고 있다.
눈빛은 호접란 꽃대 받들어 우러르며
병아리 눈물방울만한 꽃송이들 하얗게 앞세우고
노래의 안쪽을 걸어가다
-조두섭
고요는 야성으로 살아 있다
내 안으로 한 발 한 발 옮겨놓는
별노랑이꽃은
고요의 형형한 눈빛이다
처마 끝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는
큰 절집을 갠지스강으로 끌고 갈 듯이
밤에도 용을 쓰는 물고기는
폭풍의 혀
달빛의 지느러미 같은
고요의 갈증이다
오, 바위가 새떼처럼 날아오르다가
영원 앞에 멈춘
눈 덮인 산자락은
고요가 다다른 눈부신 경지
한 점 바위도
하루 몇 번이나 전신이 확 달아올라
참고 견딜 수 없는 먹구름으로 뒹군다
노래의 심장인가 고요는
제 피를 피로 씻는
천둥 같은 야성으로 살아 있다
구름도넛
-류인서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달콤한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게 된 남자, 생각 끝에
구름수풀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주었지
강변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여자와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는 강물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혔지
물항아리 속 웅숭깊은 우렁각시 그 여자, 날마다
남자의 빈집으로 동그랗게 소반을 차리러 가지
그녀가 나간 사이
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지
저녁의 붉은 강물이
그녀의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개망초꽃 떨리는 꽃빛이 빠져나가고
잠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가 빠져나가지
달콤한 도넛구름이 빠져나가지 남자가 빠져나가지
우렁이 껍질같이 가벼워진 물항아리만 물 위에 두고
그녀가 빠져나가지
바다‧3
-최동룡
먼저 알봉으로 가려면
배낭에다 김밥, 건빵, 물통 말고도
나를 사로잡는 궁금증도
단단히 봉하여 오르는 것이다
나는 알봉, 알봉 하며
알을 상상하다가
중얼중얼 봉을 떠올리다가
그만 봉우리 위의 알을 놓쳐
바다 쪽으로 굴리는 것이다
파도 깃 속에 담기어
몸 굴리는 알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 속에 반쯤 익은
말랑말랑한 꿈을 까먹는 것이다
사십 년 전 내 모습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두메산골 한 어미가 낳은 알
풀섶을 떠돌던 어눌한 멧새알
저잣거리 기웃거리는 사이
허명(虛名)에 눈파는 사이
아아, 존재의 새는 날아가고
이제 섬 바윗돌에 나앉은 껍데기
너무 닳고 금이 가
오늘 아침 철사로 얽었습니다
안평전에서 오르는 길, 벼랑 타는 길
아, 아직도 알봉에 닿을 길 멀었습니까
날아간 새 다시 돌아오겠습니까
첫댓글 좋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기다려집니다.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길 바래봅니다.
정숙선생님 꼭가서 뵙고싶었는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