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서 올라오는 봄은 지리산 자락에서 잠시 쉬며 푸른 숨을 고른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섬진강에 다다른 봄의 숨결은 갓 여물기 시작한 봉오리를 쓰다듬고, 기다렸다는 듯 꽃망울을 후드득 터뜨린다. 새색시처럼 다소곳한 강물에 마음을 빼앗겨서일까. 남해보다 먼저 매화꽃을 피워내는 곳이 섬진강변이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을 견뎌낸 듯 섬진강은 온 힘을 다해 물길 가득 꽃길을 펼친다.
그중에서도 4월, 백운산 언덕을 흰빛 가득 내뿜는 매화꽃은 그야말로 산과 물과 하늘이 빚어낸 자연의 선물이다. 봄을 시각이 아니라 심장으로 느끼려면 분명 가슴에 매화를 담아봐야 한다.
여행의 시작은 19번 도로다. 전남과 경남을 가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간간이 매화 꽃송이가 눈에 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그리운 꽃향기다.
차창을 열고 분홍빛으로 풍겨오는 매화 향기에 취하니 없는 재산에 그림을 판 3,000냥으로 매화나무를 샀다는 김홍도의 마음이 이해된다. 나무 아래에서 술이라도 한잔 하면 이보다 더한 호사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마음을 이 길에 모두 줄 필요는 없다. 섬진대교를 건너면 눈이 아릴 만큼 수많은 꽃눈송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
어디라고 콕 집어서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다리 건너편은 온통 꽃천지다. 백운산 자락을 따라 봄눈처럼 내린 꽃송이들이 발산하는 향에 어지러움마저 느껴진다. 논두렁, 밭두렁은 물론 개울가 전체까지 온통 매화나무로 가득한 이곳은 이름 하여 '매화마을'이다. 5만 평의 대지에 현재 들어선 매화나무만 30만 그루가 넘는다니,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매화마을의 정점에는 청매실농원(061-772-4066)이 있다. 이 지역 매화단지의 원조이며 전국에서 매화나무 집단 재배를 먼저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보다 이곳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역시 150만 평 산자락에 펼쳐진 매화나무 군락이다. 농원 입구부터 가득 펼쳐지는 매화나무 밑에는 푸른 보리를 심어 매화의 색이 더욱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파릇한 보리밭 위로 푸른빛의 청매화, 붉은빛의 홍매화, 희디흰 백매화가 활짝 꽃을 피운 모습에 들뜨는 마음. 봄을 탓할 것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매화를 탓할 것인가.
길 양옆으로 고개를 내민 매화를 감상하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니 2,500개가 넘는 장독대가 흰 꽃무더기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숙성된 연도를 표시하기 위해 장독 위에 올려놓은 돌멩이의 수가 연륜을 말하는 듯하다. 햇볕이 가득 내린 독 안에는 매실을 넣어 담근 고추장과 된장, 장아찌가 고향의 정취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산책로로 올라가면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린다. <서편제> <흑수선> <다모> <바람의 파이터>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의 세트로 사용된 높다란 대숲이 나타난다. 지금도 이 부근에는 영화 촬영 세트가 준비 중이다. 영화 제목은 극비라고.
산책로 정상에 서면 섬진강과 비탈을 이루며 형성된 푸른 보리 융단 위로 매화꽃밭이 펼쳐진다. "매화는 나의 딸, 매실은 나의 아들이지요." 농원의 주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명인 홍쌍리 씨가 매화나무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잠시 농장을 떠나 있으면 아들딸이 그렇게도 눈에 밟혀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이 언덕에 올라 '나 돌아왔다'고 소리를 지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매화나무들은 신이 나 어깨춤을 들썩인다 한다. 땅과 교감을 하는 이들에게 바람은 흔들림이 아니라 하나의 손짓과 발짓이다.
어미가 되어 자식을 죽이는 짓은 할 수 없다며 그녀는 농약 대신 황을 뿌리는 친환경 농법을 실시한다. 산책로 곳곳에 보이는 풀 위로 희뿌옇게 보이는 것이 바로 황이다. 이렇게 어미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난 매화는 봄에는 하얀 꽃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6월 초여름에는 꽃이 피고 진 자리에 맺히는 매실로 효도를 한다. 수확한 후 3일을 넘기면 매실 특유의 약성이 떨어지므로 바로 가공에 들어가야 한다. 이 시기에 농장을 찾으면 매실 수확과 장아찌 담그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청매실농원 장독대 앞에는 직접 재배하고 가공해서 만든 매실고추장, 매실된장, 매실장아찌 등 매실 용품을 구입할 수 있는 전시 판매장이 있다. 매실 씨앗으로 만든 건강 베개와 모래에서 구워내 바삭한 한과도 인기 품목. 판매장과 식당을 증축 중인데 3월 중 오픈할 예정이다.
청매실농원 산책로를 따라서 조금만 올라가면 수백 개의 장독대와 매화 너머로 섬진강이 바라보이는 지점이 나온다. 푸른 물길과 하얀 꽃,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이 지점은 사진작가도 즐겨 촬영을 할 만큼 구도가 완벽하다.
강가에서 바라보는 매화도 아름답지만 매화의 절경을 감상하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 9m 간격으로 비탈길에 매화를 심어놓은 청매실농원의 산책로는 매화음(梅花飮)을 즐기기에 제격.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온통 흰빛, 분홍빛 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