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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훈련 / 열매 영성 (요 15;16)
지난 월요일은 입추였습니다. 가을의 문턱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말복이었습니다.
이제 폭염도 한 풀꺽일 것입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고추 잠자리가 하늘을 날고 있고, 가을의 꽃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가을입니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열매 맺는 영성을 요구하십니다.
열매없는 영성은 쭉정이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역사상 흐르고 있는 두 주류의 신학이 있습니다.
칼빈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입니다. 칼빈 신학은 5가지입니다.
튜립 신학이라고도 말합니다.
1. 전적 타락
2. 무조건적 선택
3. 제한적 속죄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
5. 성도의 견인
사람은 에덴 동산에서 전적으로 타락하였다는 것이 칼빈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조금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간단하게 말해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완전히 기절하여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칼빈입니다.
누군가가 건져 주지 않으면 죽게 된 상태입니다.
자기의지 0, 건지는 사람 의지 100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그래도 허덕일 수 있는 힘은 조금 남아 있어서
밧줄을 던지면 잡을 수 있고 끌어주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만은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두 이론의 공통점은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구원시켜 주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내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여기에 온 것 아닙니다.
주님이 오게 하셨습니다. 내가 숨쉬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숨쉬게 하셨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왜 우리를 불러 주셨나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는 금년 처음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고구마 1100주, 땅콩 250주를 심었습니다.
풀을 뽑아 주면서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거름을 주었습니다.
물도 가끔 주어 수분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농약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대견스럽습니다.
마치 자식같습니다. 비가 오면 고구마, 땅콩이 생각납니다.
누가 심었나요? 내가 심었습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심기워진 것 아닙니다.
왜 심었나요? 고구마 캐고, 땅콩 거두려고 심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여 주고 있습니다.
목적은 꼭 하나 열매 맺으라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도록 하나님은
모든 기도응답을 다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을 다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열매는 의무이고, 응답은 축복입니다.
의무와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섬짓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신우회가 있습니다.
육사에 입학하면 6개월동안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6개월만에 휴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육사 생도들 가운데
예수 믿는 이들이 모인 육사 신우회가 있습니다.
신입생들중에 약 100명 정도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6개월 훈련후에 일주일 휴가로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도들은 날라 가듯이 집으로 갔습니다.
부모도 만나고 애인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며
온통 신나는 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우회 생도들은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 곤지암 수양관에 와서
2박 3일 성막을 공부하고 집으로 가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우리 수양관에 모두 모였습니다.
부모들이, 애인들이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우리 수양관으로 몰려 들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 때 2박 3일 동안 공부하면서
잊지 못 하던 장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수업시간 내내 부동자세입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무 토막을 100개 깍아 놓은 것같았습니다.
그리고 졸리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에 가서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졸음이 달아다면 제 자리에 와서 앉았습니다.
밤 10시경에 수업이 끝나고 나면 두 시정도까지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속에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끝나고 돌아갈 때 방에 가보니
이부자리를 두부자른 듯이 각지게 개어 놓았습니다.
청소는 먼지하나 없었습니다.
옆에 흐르는 개천까지 청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섬짓하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휘관이 왔습니다. 수업시간 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귀관들은 돼지다. 돼지를 기르는 이유는
꼭 하나 잔치날 잡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다.
귀관들 한 명 한 명에게 4년 동안
조국이 2억이 투자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앞장 서서 죽어라.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조국은 귀관들의 공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알겠나?”
“네.”
그들의 “네” 하는 함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불렀다. 열매를 맺게 하려고 기대하고 있다.
열매 맺게 하려는 기도는 모두 응답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온통 관심이
내게 집중되어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지금 살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나는 전주 수양산 기도원 산상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집필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방애인 선생 전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방 애인은 전주 기전 여학교 교사로서
6년 전주에서 살다가 24살에 죽은 처녀입니다.
고향은 황해도 황주입니다.
공부는 개성 호수돈 여자 고등학교를 최 우수 졸업하였습니다.
개성 호수돈이 6.25 전쟁 때 대전으로 이사왔습니다.
대전 호수돈 여자 중고등학교 교실에는
방애인이 고아를 업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나는 방애인 선생님에 대하여
“수도의 향기”라는 책에서 처음 접하였습니다.
최두섭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방애인 묘앞에서
최 목사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도 그 묘지를 한번 가보고 싶다.”
마침 전주 수양산 집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전주 배기남 장로를 만나서 부탁드렸습니다.
“장로님! 전주 방애인이라는 분을 아시나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8월 7일 전주에 내려갈 예정입니다.
방애인 선생님에 대하여 조사하여 주시겠어요?
묘지 그리고 그 분의 행적 그리고 그 분에 대한 자료를 부탁합니다.”
배 장로님은 내 부탁을 받고
방 선생님에 대하여 더 조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세히 조사하여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익산에 있는 묘까지 다녀왔습니다.
서문 교회에 자료가 있는 것을 아시고 찾아가서
모든 자료를 다 모아 두었습니다.
특별히 방 선생님에 대한 책이 꼭 한 권있었습니다.
서문 교회 당시 배은희 담임 목사님이 저술한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 책자를 구하여 주었습니다.
방 선생님을 제일 잘 아는 분은 서문 교회 최창선 장로님이십니다.
그 분은 14년 전에 서문 교회에서 은퇴하신 장로님이십니다.
서문 교회 100주년 기념 역사 박물관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132년된 서문 교회 살아 있는 역사책이셨습니다.
그 분이 지금은 이미 절판된
이 책 세 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귀중한 자료 세 권중에 한 권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8월 9일 수요일 기도원에서 오전 집회를 마쳤습니다.
식사를 하고 배 장로님과 함께
익산에 있는 방애인 선생님 묘지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중복과 말복 사이여서
연일 폭염 주의보를 내리고 있는 무더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만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시원한 날씨였습니다.
전주에서 고속도로로 달려
20여분만에 익산 서문 교회 묘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 깊이 들어갔습니다.
산 중턱에 서문 교회 묘지가 있었습니다.
양쪽으로 이미 묘들이 즐비하였습니다.
가운데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중간쯤 올라가 오른 쪽에 첫 번 묘가 방 애인 선생님 묘였습니다.
1933년에 세운 묘비가 100년 비바람을 맞은 흔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초라한 묘지앞에는 비문이 검은 돌에 가지런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관리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 일씨년스러웠습니다.
배기남 장로가 풀베는 낮을 가지고 와서
묘지를 다듬은 후에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서문 교회로 갔습니다.
하늘도 슬픈 듯 엄청난 비가 퍼부었습니다.
서문 교회에서는 가장 방애인 선생을 잘 아는
최창선 장로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애인은 황해도 황주가 고향입니다.
최 장로님은 그 옆이 고향이랍니다.
공교롭게도 우리 할아버지는 황주에 사과밭이 있었습니다.
나는 황해도 신천입니다.
모두 같은 고향이기에 더욱 친밀할 수 있었습니다.
방 애인의 출생
방 애인은 황해도 황주읍 벽성정 51번지에서
방중일(方中日)씨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방 중일은 부자였습니다.
할아버지 방흥복(方興復)은 자선사업가였습니다.
당시 모두가 알아주는 자선사업가였습니다.
할머니 정신복, 어머니 김중선도 신앙이 깊었습니다.
모두 황주읍 교회에 다녔습니다.
새벽기도에 결석하지 않으면서 성실히 기도하는 식구들이었습니다.
방애인은 이런 가정에서 일찍부터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가 교회를 잘 섬기고 믿음이 좋아서
어머니의 품안은 방애인의 신학교였습니다.
방애인은 어머니 품에 안겨 세례를 받았습니다.
방 애인의 신앙적인 DNA는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방애인는 양성학교에 다니면서
입학부터 졸업까지 단 한번 결석하였습니다.
지각이나 조퇴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었습니다.
한번 결석한 이유가 있습니다.
입학하고 일년후였습니다. 방애인가 8살때였습니다.
몹시 배가 아팠습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학교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엄한 아버지는 아파서 고통당하는 딸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종아리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너 학교 가기 싫어서 그렇지? 꾀병이지? 다 안다. 내가 그랬었다.”
아버지는 자기 경험을 회상하며
딸도 그렇다고 여기고 사정없이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방애인는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때리는 대로 다 맞았습니다.
그리고 6년 동안 결석, 지각 그리고 조퇴 한번 없었습니다.
졸업할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그 때 내가 너무 하였다.”
방애인은 13살 되던 해 3월 25일 양성학교 졸업을 하였습니다.
최우등생으로 마쳤습니다.
평양 공부
방애인은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최고 학교는 평양에 있었습니다.
평양 숭의(崇義)여학교가 당시 최고로 좋은 학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숭의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 애인는 최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등생이었습니다. 천재로 알려졌습니다.
선우 교장 선생님은 방애인를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학교 아래 윗층을 방애인를 업고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사고가 났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다른 학교로 전학가야 했습니다.
학생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방애인은 개성 호수돈 여자 고등학교로 전학하였습니다.
1926년 최우수 졸업을 하였습니다.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
그는 처녀 선생님으로서 전혀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향수는 물론 크림조차 얼굴에 바르지 않았습니다.
옷도 한 벌 가지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값진 옷감이나 멋있는 옷은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오직 기도, 오직 성경, 오직 전도, 오직 예수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병든 자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슬픈자에게 다가가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거지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싸우는 자에게 다가가서 화평을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불평이 없는 온유한 선생님, 거만이 없는 겸손의 성도,
꾸밈이 없는 청빈의 시민,
그리고 항상 정직하고 누구나 사랑하는 사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산속 깊은 곳의 수도사가 아니라
거리의 성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청빈과 거룩과 순복을 생명으로 여기는 수도사로서
삶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산속에 숨어 있는 수녀가 아니라 학생속에 성자요,
사회속에 등불을 비추는 성녀요, 그늘진 곳에 서광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을 도피하는 숨은 선지자가 아니라
세상에 희망을 주는 신앙적 낙관의 성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제자를 섬기는 봉사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죄인을 책망하는 매서운 선지자가 아니라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는 눈물의 사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방애인의 수도적 삶의 동기
방 애인 선생에게 사람들이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수도적 삶을 살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방애인 선생은 그저 웃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방애인은 친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가려고 애썼습니다.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새벽에 부흥 강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영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 때부터 내게 수도사적인 삶의 영이 흘렀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많아도 청빈한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편한 것보다 불편한 삶, 행복한 삶보다
십자가 지는 삶이 내게는 더 편안하여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30년 1월 10일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눈과 같이 깨끗하거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다.”
1월 11일 일기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르겠는 데
세 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적인 소리인 음향(音響)이었다.
혼자 신성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
방애인이 수도사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과정임이 틀림없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이 그 사람되는 원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된 원년은
고기 잡이하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모세가 모세가 된 원년은 양을 치던 중에
불타는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바울이 바울된 원년은
다메섹으로 예수믿는 이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때였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이 그 사람된 원년이 있습니다.
방애인이 방 애인된 원년은 이 때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전주에서 방 애인의 첫 교사 생활은
때 묻지 않은 여 교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방 애인은 어딘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번째 전주에 와서부터
그는 방 애인다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기도
이미 언급한 대로 아버지는 부자였고 황주 초대 교인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음란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황주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남자들이 한 여자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 하고
첩을 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방애인 아버지는 본 부인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을 구실삼아
첩을 두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색에 빠져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재산이 빠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상이 아닌 것은 비정상입니다. 가정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방애인은 재산이 사라지는 것보다
아버지 영혼이 타락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재산이 사라질 때마다 한숨을 내쉬며 걱정하였습니다.
방애인은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재산이 없어지는 것에는 마음 두지 마세요.
아버지는 이 보다 더 큰 시련을 당해야 회개합니다.
재산을 다 없애도 천국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잃고라도 하나님께 돌아 왔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와 꼭 잡고 이렇게 말하는 방애인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등을 적셨습니다.
당시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는
방애인 선생을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오직 겸손, 봉사, 사랑, 구제에 전념하는 방애인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방 애인은 배 목사를 세상에 둘도 없는 멘토로 여겼습니다.
방애인 선생의 주일
방애인의 주일은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였습니다.
오전 예배에는 완산 교회에서 드렸습니다.
오후 예배는 서문 교회에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북과 장고를 들고 거리 전도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호기심에 방 선생에게 모였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이들의 영은 옥토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대로 스폰지가 물을 빨아 드리듯이 받아 드렸습니다.
아이들로 교회가 여기저기 개척되었습니다.
얼마후 부모들이 따라서 모여 교회다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여기 저기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서문 교회에서는 일군들을 파송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든든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기전 학교 기숙사로 가서
기숙생들을 모아 서문 교회로 인솔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딴 생각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방 애인 선생의 주일은 분초의 쉼이 없는 하루였습니다.
방애인 선생의 평인
방애인의 평일은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걸인을 찾았습니다.
창녀촌을 방문하였습니다. 오직 복음 증거가 목표였습니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았습니다.
방 선생은 학교에만 머믈러 있는 항성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는 유성이었습니다.
그는 고아들이 의외에도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고아들이 겨울이면 칼바람을 맞으며
굶으며 길거리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름이면 무더위속에 모기와 뜯기며
야외에서 지내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방 선생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급료를 모두 고아,
창녀, 걸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아원 창립
방애인 선생은 고아원을 세우기 위하여 모금을 하여야 했습니다.
메달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메달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고아들을 도웁시다.”
집집마다 일일이 방문하면서
고아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메달을 팔았습니다.
푼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파리채를 만들어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물품을 만들기에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손이 부르터야 했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잠을 자지 못 한 채
학교로 출근하기도 하여야 했습니다.
병들어 고향으로
무리한 사역으로 방애인은 몸이 허약하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을 돌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느 누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공하지도 않았습니다.
혼자 살면서 끼니를 거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아버지를 위하여 평생 아침 금식을 하였습니다.
월급은 모두 그늘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몸은 점점 허약하여 갔습니다.
1933년 6월 31일 방학을 맞아
아픈 몸을 질질 끌고 고향 황주 집으로 갔습니다.
기침이 심하였고 고열이 치솟았습니다.
두 달 열심히 치료를 받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전주
방 선생은 9월 1일 개학을 맞아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전주로 왔습니다.
이미는 그는 누가 보아도 살아 있는 송장같았습니다.
교단에 다시 서지 못 하고 예수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병명은 장티프스였습니다.
결국 소생하지 못 하고
24살의 아까운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아, 창녀, 기생, 걸인들이 만장을 들고 장례식에 모여들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부르짖는 학생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목메어 부르는 고아들의 부르짖음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갔습니다.
펄럭이는 만장이 1km 늘어섰습니다. 온 전주가 떠들썩하였습니다. 전주 전체를 울리는 장례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공동 묘지에 안식되었습니다.
공묘(公墓)
그 후 공동묘지는 도시 계획으로 사라졌습니다.
방 애인 시신도 그 때 사라졌습니다.
도시계획 부르도자에 밀려버렸습니다.
서문 교회 100주년인 1999년 방 애인 기록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묘지를 찾았지만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주변을 삿삿히 뒤졌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묘비를 찾았습니다.
흙속에 묻혀 있던 비석이었습니다.
서문 교회 묘지에 공묘(公墓)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가묘(假墓)입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진품 묘비를 찾은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