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어떤 한 책을 읽었습니다..
"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보신분들도 많을테지요..
베스트셀러였으니까..
저는..그 책을 읽고..우리 나라에 많은 실망과...
일본에 대한 분노가..함께 휘감겨 오르더군요..
항상 비굴하기만 한 우리나라...
그리고 비겁한..일본..
누구를 탓할것도 없습니다...
일본과..한국..두 나라가 함께 만든 역사니까요..
요새 일본의 교과서에 대해 말들이 많지요..
아니..벌써 다들 잊으셨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그렇지요..
한번..휭~하고 바람이 불고나면..그대로 잊혀지는..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가 이렇게 왜곡되고 있어도 모르는..
"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책을 꼭 권해드리고 싶네요..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서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꼭 바로 아셨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를 살리는길이 어떤건지..아셨으면 해서요..
더이상..일본에게 억눌리기는 싫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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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가 이사진들을 올리는 이유는...
우리도 한번쯤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있지 않느냐 하는 이유에서...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진실을 알았으면 좋겟다 하는 의미에서...
일본이 철처하게 계획한 일이라서 왜곡된 사실이 너무나도 많아서
다 적을수가 없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잇던날 경복궁 내의 공사(지금의 외교관정도)들이
돌아가며 거주햇던 그건물에
그날이 당직날이었던 러시아 공사만 없었어도
이사건은 영원히 일본의 계획아래 철처하게 뭍혀버렷을것입니다.
그 러시아공사 덕분에 사건이 사람들에게 알려질수 있었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그 진실을 알리고 싶어서요..
흥선 대원군
자는 시백, 호는 석파, 남영군 구의 아들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패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흥선대원군과 일본의 합작이 아니냐 하는말이 잇는데...절대 아닙니다...
아마도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정치적라이벌이라는 이유에서 그 타당성을 찾으려 하실지도 모르겟는데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갈등을 일으켯던것을 얼마되지않는 짧은 기간이엇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던날 흥성대원군이 그자리에 잇긴햇지만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한 일본낭인배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전에
흥선대원군이 거처하고 잇는 곳에 들러 강제적으로 가마에 태워서 데리고 간것일 뿐입니다..
고종황제 와 순종황제
(고종은 다 알듯이 명성황후의 남편이고 순종은 명성황후의 아들)
자적용포 입은 임금모습은 전통적인 의관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 이촬영한것이다.
-뮤비에서도 알수 있듯이 "놔라놔라"하는 어린아이가 순종이구요.
그때 고종과 순종은 폭행 당햇죠. 일본놈들한테.
그러나 순종은그때 죽지 않앗습니다. 칼에 찔린것은 아니고 칼의 손잡이에 맞아서 기절한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뒤에 신하는 칼에 찔려서 죽은게 맞습니다..뮤비에서도 보면 알수 잇듯이 피가 튀기는게 보이거든요.
하지만 뮤비에는 고종이 폭행 당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순종황제 (융희)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907년 헤이거 밀사사건에 책임을지고
고종이 양위 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이다.
슬픔에 잠긴 고종황제(1899년)(광무)
이사진은 명성왕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것이다.
병풍으로 주변을 막고 있는 뒤편에 백립을쓴 상주가 숨어서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보인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8일 일본낭인배들에게 시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에는 일본인들이 갖은 수단방법 이용해서 백성들에게 알려지는것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에게는 명성황후가 궁궐밖으로 도망갔다고 하면서 명성황후의 이미지에 해를 끼치려 햇습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은 이미 시해당한 먕성황후가 아직 죽지 않고 어디 안전한곳에 살아잇는줄 알았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여론을 조작한것이지요..
그리고 이만행이 세계에 알려지는것을 두려워해 조선에 잇던 외국인 기자들과 외교관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다룬
기사를 자기나라에 보내려고 우체국으로 가서 전보를 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놈들이 이미 모든 통신수단을 마비 시킨후라서 시해사건을 다룬 기사를 보낼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도 반환해주엇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마자 각국의 공사(외교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일본의 마우라(명성황후 사건의 주동자)가 계속 그사건은 일본이 일으킨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조선인이라는 사악하고 악의에 찬 사람들의 말을 듣는것 보다는 진실되고 (암튼 그렇게 좋은 뜻으로)일본인의 말을 밑는게 나을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공사(외교관)이 말하기를 "그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라 러시아인
(위에서 말했듯이 고종과 황후의 근처에 외국인 공사들이 거처하는곳에 당직을 맡앗던 사람)이요"
라고 말을 하자 미우라는 아무말도 없이 회의 장소를 나가 버렷다.
명성왕후(민비) 시해된곳 (옥호루)
명성왕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랑인배(깡패) 를 동원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 하여 시해함.
일본낭인배들에의해 옥호루에서 시해된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이건물은 궁중의나인들이 자주 사용하는곳이다.
오른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참고 : 민비는 일제가 명성왕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
-명성황후의 장례식은장례식은 1897년 11월 22일날 치러졌습니다.
즉 죽고 나서 2년2개월이 지나서 장례를 치른것이죠..고종이 그렇게 한것입니다..
나쁜의도가 아니라 일본에게 대항하려는 그런 일때문이엇는데요..자세한건 좀더 알아봐야겟습니다..
그리고 왕후가 죽고 나서 거기에 가담한 일본인들을 재판하기 위해 일본으로 보내졋는데요. 그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낫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더욱 존경받으며 정치쪽으로 까지 진출하고 그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일일뿐이엇죠..
명성황후 장례준비1897년
명성황후의 시신은 일본낭인배에 시해되어
불에탄 뼈조각과 숯덩어리 뿐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당시 조선에는 청나라 일본 다른한나라 세력..
이렇게 강한 3개국이 조선을 주도하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명성황후는 조선이 다른나라의 손에 국권을 빼앗기게 하지 않게하기 위해
그 중에 가장 믿을수 잇는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면서 다른나라들이 국권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땜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황후는 궁월의 제일 북쪽 깊숙한곳에 거주햇습니다...
그리고 거처하던 궁궐안의 가까운 곳에 서양외교관들이 거처할수 잇는곳을 마련하여 각국의 외교관들이
돌아가며 거처하게 하여 일본세력을 견제하엿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날도 그곳에 거처하고 잇던 러시아공사(외교관)이 아니엿다면 이사건의 일본의 계획대로 영원히 역사속에 뭍혀 버렷을것입니다
명성왕후 인산준비 1897년
궁중내시가 무엇인가 유심히 바라보고있다
능을 준비했는데 봉우리가 약 40~50 피트나 되었다.
(프랑스인 알렉빅그 촬영)
명성황후 장례식 1897년
상복차림에 인산을 들고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침통한 표정들 이다
장례행렬에 동원된 초롱등은 5천개나 되었다.
명성왕후(민비) 홍농도착 1897년
홍농에 도착한 대여가 홍살문 입구에서 잠시 대기 하고있다.
한나라의 국모를 잃은 백성들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그결과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고종황제 인산행렬 1919년
대여뒤를 따라 거리에는 온통 인산행렬이 가득하다.
비운으로 국왕의 모습을 빼앗긴 조선은 일본을 항거할 힘도 없었다.
-일본에게 국
이사진들은 모두
http://www.kbs.co.kr/event/myungsung/history.htm 에서 퍼온것입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에 좀더 관심을가지고 잇는 사람들은 http://www.crezio.com/drama/series/myungsung/special/special.html
여기 들어가보면 수요기획과 역사스페셜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적나라한 진실을 알수 잇을것입니다.
관심잇는 사람은 꼭 봤으면 좋겟습니다..아니 꼭 보세요~~~
그리고 이사진
1895년 명성 황후 (진위를 가려야할 추정사진)
고종의 황후, 성은민 본관은 여흥, 민치록의 딸. 1866년 왕비에 책봉 되었고,
일본세력 견제책을 견재하고자 친러책을 강구하다 1895년 일본 낭인배에 의해 살해 되었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도되었다.
이사진은 진위를 가려야할 추정사진이라고 되어있지만 절대 명성황후가 아닙니다..
그냥 신문에 실린 궁궐의 한 궁녀엿는데.
역사가들의 실수로 인하며 명성황후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일본의 작은 계략중 하나엿습니다...ㅠ.ㅠ)
저 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시대의 신문에서도 확인됐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저사진이 명성황후라고 하면 꼭 아니라고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명성황후의 사진은 한장도 남아있지않습니다. 단한장도...
그리고 명성황후를 민비라구 부를때도 있는데..그건 옳지 안습니다.
비라는 명칭은 일본이 우리를 낮춰 부르려구 일부러 그런것입니다.
그러니까 명성황후라고 불러주세요...아셨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한다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얽힌 이야기들은 쓸 내용이 너무 많아서 다 쓰지 못햇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으실거라고 생각됩니다.
궁금하신분은 위에 주소올려놓은 곳에서 수요기획과 역사스페셜보시면 정말 정말 정말 좋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