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고려와 조선의 병존 ?
광해군일기[중초본] 59권, 광해 4년 11월 6일 병신 6번째기사 1612년 명 만력(萬曆) 40년
호조 판서 황신이 지휘 황응양과의 대화 내용을 아뢰다
국역
원문
중초본/정초본.원본 보기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비밀리에 입계하였다.
"신이 오늘 아침 황 지휘를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어 붓과 벼루를 가져오라 하여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 ‘나에게 조씨(趙氏) 성을 가진 한 친구가 있는데 친형제가 7인이다. 지금 귀국의 서해(西海) 가운데 있는데 섬 이름은 불새라고들 한다. 그의 아래 3, 4천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임진년 왜구가 왔을 때 내가 그에게 나가자고 청하였으나,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왜구가 장차 조선을 취할 것이니, 나와 자네가 먼저 점령하였다가 고려국에 돌려주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합니다. 신이 이어 조씨는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 때문에 바다 가운데 사느냐고 물으니, 지휘가 말하기를 ‘조씨 이름은 임(任)이며 호는 임란(任蘭)이었는데 지금은 호를 고쳐 태충(太沖)이라고 들었다. 이 자는 진사 가어사(假御史)로서 죄가 있어 도망하여 바다 가운데 살고 있는데 지금의 나이는 68세이며, 여러 동생들은 나이가 젊고 건강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묻기를 ‘그에게 이미 3, 4천 명의 사람이 있는데 상국(上國)의 지방을 소란케 한 적이 없었습니까? 이미 우리 나라 해상과 서로 가까우니 다른 날 소란을 일으키는 걱정이 없겠습니까.’ 하니, 지휘가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는 동요한 적이 없어서 조정에서도 감히 그를 따지지 않았으며 양 도대(楊都臺)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나를 부른 적이 있었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글씨 썼던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손을 저으며 ‘이 말을 조심하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휘의 이 말은 허망한 듯하나 거짓이든 사실이든 간에 이미 들은 바이기에 감히 진달합니다."
○戶曹判書黃愼祕密入啓曰: "臣卽朝往見黃指揮, 指揮從容談話, 仍取筆硯, 書示臣曰: ‘我有一友姓趙, 親兄弟七人。 今在貴國西海中, 其島名㞸崽。 手下有三四千人, 壬辰倭寇時, 我去請他, 他不肯來。 他謂我曰: 「倭寇將取朝鮮, 莫如我與爾先占, 待交還麗國」云。’ 臣仍問: ‘趙是何人, 因何事住海中耶?’ 指揮曰: ‘趙名任, 號任蘭, 今聞改號太沖。 是進士做御史者, 有罪逃躱在海中, 年今六十八, 其諸弟則年皆少壯。’ 臣又問: ‘彼旣有三四千人, 不曾擾害上國地方否? 旣與我國海上相近, 則日後不無擾害之虞否?’ 指揮曰: ‘豈有此理? 他不曾動, 朝廷不敢問他, 楊都臺亦不敢動他。 他曾招我, 我不往’ 云。 仍取所寫小紙, 細細裂破, 搖手謂臣曰: ‘此語愼勿煩說’ 云。 指揮此言, 似爲怪誕, 而虛實間, 旣有所聞, 不敢不達。
2. 조선1리의 거리=1리*1.333333333
개벽 제39호 > 杭州西湖에서
잡지명 | 개벽 제39호 |
발행일 | 1923년 09월 01일 |
기사제목 | 杭州西湖에서 |
필자 | 東谷 |
기사형태 | 기행문 |
杭州西湖에서
東谷
風打浪打의 나의 放浪
오래동안 南國의 해상에 나그네 노릇하던 나는 癸亥7月13日 아츰에 北陸으로 도라갈 旅裝을 收束하다.
내가 中州에 逋逃(포도=도망한지)한지 임이 5個의 春風秋雨를 지낸지라 나의 素性이 名山大川의 間에 잇슴인지 又는 世波의 역류에 風打浪打로 放浪의 생애에 맛을 들음인지 모르나 晉陽의 鄕國을 떠난지 임이 10有5年에 7,8의 星霜을 京師에 旅食하고 이여 笈을 東瀛에 負하야 강호의 風晨雨夕에 때로 鄕雲을 望하야 覊懷의 그 依할대 업슴을 頻嘆하면서 일로부터 우주의 間에 任其所之하야 나의 行蹤을 無常에 맛길가 하얏다. 其後 時勢의 변천은 또한 나의 몸을 中原의 대륙에 실어다 놋케되다.
伊伊이來 10有5年間 天之涯地之角에 無常히 獨往獨來하는 동안 素來로 放浪의 性도 잇섯지만은 더구나 覊旅의 생애를 오래하게 되며 또는 世運의 萬態는 더욱 나의 踈狂의 癖을 도와 名山大川과 勝區佳境에 나의 맘을 만이 牽引하얏다. 그리하야 辛酉夏에 東三省을 일주하야 과거의 我祖宗의 遺趾와 大野大江大山의 間에 명승의 景을 探하고 松花江의 長流를 順하야 黑龍江으로 「쉬을가」江 (俄羅斯 아무르州에 在)에 이르러 西比利 大陸을 足下에 두고 西으로 들어가 「우랄」산의 고봉을 바라보면서 세계최대호의 名이 잇는 「바이갈」湖畔에서 나의 幽懷를 暢叙한 적도 잇셧다. 그러나 伊來 中州에서 오래동안 覊旅의 생활을 하는 가온데 내가 幼時에 經學배울 때에도 中州 西湖의 名과 姑蘇城외 寒山寺에 夜半鍾聲到客船이라는 詩句만 읽고도 깁히 깁히 蘇杭의 勝景을 憧憬하얏거니와 幸히 中州의 南國에 나의 몸이 자조 寄跡케 되는 것은 실로 天假其便이요 또는 세사의 무상에 토할 수 업는 耿孤의 懷를 한번 勝景의 산간에서 寫吐하야 볼가하얏다. 그러나 까닭업시<38> 悾惚한 이 몸은 그 勝景의 산하를 每樣咫尺의 간에 두고서도 怱怱히 空過한 적도 잇스며 들지 못한 적도 잇섯다.
1一1年有餘를 燕京의 고향에 蟄伏하야 잇다가 금번의 南行도 실로 우연의 중에 잇섯스나 개중에 幾分南國의 미를 한번 探看하야보랴는 의미를 가지엇다. ............... 해상의 雨는 黃梅의 節에만 이르면 실로 無日不雨인데 이 때는 임이 數旬동안을 長霖이 支離하얏는지라 이날도 장마 끗헤 가는 비는 부슬부슬 나리는데 北坫으로 나와 滬杭鐵路에 우리 2人이 몸을 실으니 맛치 띄끌세상에 버서나 타향으로 가는 듯한 기분이 생긴다.
......
吳姬越女의 餘音
......
. 新橋로붓터 松江, 楓涇 등지의 일대는 全히 無邊大野에 稻田이 橫比하야 잇다. 松江의 大野를 세갈내 네갈네로 논워 흐르는 淸流는 灌漑의 源을 이여 이의 富源을 가지게 되는 모양인데 참으로 江蘇의 富裕가 다 여긔 잇지 안이한가. 該 楓涇은 江蘇와 浙江兩省의 分界處인데 산하는 의연히 秀美한 中該驛에 당도하자 해상으로부터 오래 그립던 산이 멀리 그의 雄姿를 들어낸다. 나는 山國의 人이라 산 바라보기를 실혀하지는 안는다. 그러나 無邊大野에 眼界가 툭 터진 것을 항상 爽快히 알며 조와함으로 中州의 대륙이 자못 나의 氣性에 마즈나 넘우도 山 보기에 주리엇는지라 大野중에 웃둑솟아 별로히 秀麗한 것 갓지는 안으나 霽後에 산듯한 그 遠影은 만히 나의 眼界를 늘인다. 벌서 江蘇地界를 넘어 杭州의 勝景을 가진 浙江으로 들어오게 되니 探勝의 懷는 기분 노이는 듯 하다. 浙江은 中國 全名勝 30處중에 6處를 혼자 가진 곳이라 그럼으로 山河의 秀美가 他省 보담은 물론 나은 모양인데 이곳 저곳 조그마한 산들이 벌여잇는 것 보아도 名勝이 생게날 것을 기억할 수 잇겟다. 이로부터 嘉善 嘉興 등지로 들어서니 이곳 저곳 삐죽삐죽 소슨 산이 나의 일행을 마저 勝區로 인도하는 것 가튼데 멀리 보이는 杭州의 莫干山이 더욱히 西湖의 갓가워짐을 알뵌다. 그러고 平原廣野에 빈땅 업시 갓득 들어선 것은 뽕나무이라. 이것만 보아도 금속이 만히 산출되는 것을 알겟스며 浙人의 專業이 繭絲業인 줄을 가히 짐작하겟다. 莫干山과 西湖의 避署客을 갓득 실은 차은 벌서 筧橋에 이르러 莫干山으로 가시는 손님들은 내리워 보내고 바로 杭州城坫<40>
으로 갈랴는데 驛名表를 본즉 艮山門拱宸橋 兩驛만 지내면 곳 杭州이다. 車는 이여 一聲汽笛을 토하면서 杭州역에 도착하니 때는 正히 下午 3시 40분頃이다. 上海로 붓터 杭州 里數는 350里 가량인데 特別快車(急行)로 가면 4,5時이면 갈 수 잇고 慢車는 6時 가량이다. 滬杭間에는 快慢 兩車가 매일 6,7次인데 우리는 慢車를 탓기 때문에 동일 오전 9時에 上海에서 發한 바 同3時頃에 도착하고 본즉 여섯 시간쯤 되는 모양이다.
西湖 第一味의 龍井茶
오랫동안 憧憬에 憧憬을 더하던 東南의 全美인 杭州에 도착하고 보니 맛치 그리던 애인을 만난 것 갓다. 該 驛에서 西湖로 가자면 한 8,7里쯤 되는데 行裝을 가지고 역전으로 나가니 湖邊에 잇는 여관 접객인들은 언제 본 것 갓치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마저 西湖로 인도하야 준다.
....
西湖에 배 띄우고
.................
그그그리하야 爲先 十景붓터 보려하는데 舟子가 말하기를 杭州之景은 在西湖하고 西湖之景은 在之潭印月이라는 말이 곳 글인 그 好文章을 외우면서 草絲波紋上에 順風에 돗을 달고 배를 쓸쓸 저어 印月로 향하려하다 此에 同日의 본 바의 景을 쓰기 전 爲先 서호의 槪說을 잠간 써두어 叅考에 供하여야 하겟다.
杭杭州는 현 浙江省 首府요 秦隋唐 이래로 한 勝區로 擅하얏스되 唐 이전에는 실로 寂然無聞이엇섯는데 唐 李泌氏가 비로소 개척하야 湖流를 통하게 한 후로 東波 居易등 大詩人이 杭州에 謫宦케 되는 동시에 湖中에 二長堤를 築하고 名區의 갑슬 알며 名區의 勝景을 錫名해 냄으로 인하야 西湖의 名이 비로소 大著케 되고 其後 宋高宗이 都를 臨安에 建케되고 淸聖祖 康熙가 屢次 此에 來遊케 됨애 소위 천하의 勝이니 하는 소리가 나게 되야 人人의 稱道하는 바가 되다. 西湖의 名은 錢塘湖 高士湖 西子湖 등의 諸名이 有하나 그 지면이 城西에 在함으로 통칭 西湖라 하나니 湖周는 30餘里(我里 近 40里)이요 삼면이 環山이요 계곡이 실갓치 이여 點綴되야 잇는데 그 하에는 百道의 淵泉이 모히여 湖가 되야 수심은 불과 기척이요 수색은 심히 말그며 그 가온데 각금 각금 옷독 옷독 소슨 孤山 더욱 湖面의 支柱갓해 보힌다. 山前은 外湖가 되고 山後는 內湖가 되야 西으로 蘇堤(東波築)에 亙聯되며 堤以內는 裡湖라 하는데 全湖 면적이 약 16方里라 伊來 수천년래로 古蹟이 만이 兵禍에 업서지고 자조자조 변천이 무상하얏스나 淸聖祖 康熙 來遊시에 이르러 蘇白去後의 일시 장관을 부흥하얏던 모양인데 洪秀全亂에 또한 焚毁되고 其後 지금은 西湖 工程局을 置하야 날노 수리하야가는 중이라 한다. 그러고 名士 富人의 別庄 高士侯客의 墳墓가 다수를 점하게 되고 이즘에는 西人의 양옥 別庄도 날노 興築되야간다 云云.
3. 우랄산 넘어 사는 조선인
잡지명 | 별건곤 제46호 |
발행일 | 1931년 12월 01일 |
기사제목 | 結婚風景, 朝鮮靑年에게 求婚하는 露國處女 |
필자 | 金나콜라이 |
기사형태 | 기행문 |
結婚風景, 朝鮮靑年에게 求婚하는 露國處女
金나콜라이
「서백리아」를 지나 「우랄」산을 넘으면 「에까데린부르그」라는 도시가 잇다. 루비와 알렉산드리아 등의 보석(寶石)이 만히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남녀로소 할 것 업시 보석반지 안낀 사람이 업고 외국려객들을 위하야 정거장 구내에서까지 보석을 판다.
시가지는 그리 크다 할 수는 업지만 광막한 서백리아 벌판보다는 경치도 조코 겸하야 강까지 잇서서 녀름에는 홀륭한 피서지가 된다.
그곳에는 조선사람이 상당히 만히 살고 잇다. 모도들 관청이나 실업방면에 나서서 그다지 군색지안은 생활을 하고 잇다.
4. 만주국
삼천리 제8권 제12호 > 新京有感
잡지명 | 삼천리 제8권 제12호 |
발행일 | 1936년 12월 01일 |
기사제목 | 新京有感 |
필자 | 金璟載 |
기사형태 | 기행문 |
新京有感
金璟載
나는 마음이 산란해지고 머리가 뒤숭숭하여 지고 잡념이 떠오르는 때에는 언제나 산보 나가는 것이 버릇이다. 그 버릇이 이제는 한 개의 日課化하여서 아참에 자고 이러나서 저녁후에는 반듯이 20분 혹은 30분간을 것고 나서야 마음이 흡족해진다.
그러나 나의 가는 길은 언제나 일정해 있다. 新京에서 북으로 1리 가량을 나가면 寬城子라는 폐허 같은 荒落한 시가지가 있다. 퇴색한 건물 주민의 零落한 생활도로 외 파손 그 어느 것으로 보든지 人亡宅癈又村荒 그대로이다. 아즉도 그대로 남어 있는 것은 울창한 정원의 수림이 있고 이제는 兵營이 되였으나 역전의 하나인 前東鐵俱樂部가 그 웅대한 모양을 그대로 남기고있다.
極東에 海參威港을 열고 그에 명명하야 「동편을 점령하라」고 (우라지오스톡크)―한 제정 露西亞는 일사천리의 세로 滿洲에 손을 대이였다. 삼국간섭에 의하야 日本의 손에서 旅順 大連을 빼앗고 그리하야 다시 영국과 제휴하야 대청국을 남북으로 양분하려고 하여섰다. 그러나 日露전쟁의 결과 露國이 패하니 그는 一步退却하게 되였고 長春을 分水嶺으로 하야 그 이남은 日本의 권익지대가 되고 그 이북은 露西亞의 권익지대가 되였다. 포스마스 조약은 滿洲를 양분하였다.
寬城子가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長春이 滿鐵의 종점이 되고 寬城子는 東滿鐵道의 종점이여서 여기에서 日露 양국의 세력은 서로 대립하고 있섰다. 그후 露西亞는 망하고 蘇聯이 된 후에도 寬城子는 北鐵의 終滿驛이여서 거기에는 國體를 근본적으로 달니하는 日, 露, 中의 삼국 스파이가 대강이 싸홈을 하고<107>있든 곳이다.
세월은 흐른다. 역사는 변한다. 滿洲에 있서 나는 새라도 안즈라면 안젓고 불든 바람이라도 끝이라면 그 자리에서 정지하리만큼 위세를 뵈이고 있든 張씨의 세력도 겨우 2代가 못가서 몰락되였고 滿洲國이라는 새 국가가 형성되면서 長春의 일홈이 변하야서 新京으로 되고 그곳이 滿洲國의 首府가되고 北鐵이 소련의 손에서 완전히 떠나 나고 보니 露西亞人의 福地이든 寬城子는 그만 황락한 촌락이 되고 마럿다. 다만 주택의 양식이 露西亞식이요 癈衣破帽의 露西亞인이 좋은 집 좋은 방은 모다 내어 노코 土幕생활에 영양부족으로 인한 靑白한 얼골을 갔고 街路에서 방황하는 외로운 모양이 뵈일 뿐이다.
나는 寬城子의 거리에서 그들 白系露人의 쇠잔하고 있는 자최를 目睹하면서 묵묵히 아모도 없는 길을 것고 있는 그때가 좃타. 바른 대로 말하면 결코 좃타는 것은 않이다. 내가 무었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저 아무 생각도 없고 담은 입에 밭가는 길에 그대로 것고 있는 것이 유쾌한 것도 아니요 구태나 願하는 것도 아니나 매일 그러케 하게 되고 또 그리하여야 마음이 흡족하게 생각된다.
5. 세계일주........경성=신경(대륙한양에서 반도한양으로)
삼천리 제10권 제8호 > 世界 一週歌
잡지명 | 삼천리 제10권 제8호 |
발행일 | 1938년 08월 01일 |
기사제목 | 世界 一週歌 |
필자 | 六堂 |
기사형태 | 시 |
世界 一週歌
六堂
한양아 잘 잇거라 갓다 오리라 앞길이 질펀하다 수륙 십만리
4천년 옛 도읍 平壤 지나니 굉장할사 鴨綠江 큰 쇠다리여
7백리 遼東벌을 바로 뚤고서 다다르니 奉天은 옛날 瀋陽城
東福陵 저 솔밧에 잠긴 연기는 250년동안 꿈자최로다
남으로 만리장성 지나 들어가 벌판에 큰 도회는 北京城이라
太和殿上 날니는 닷동달이 旗 유신정부 새 빛을 볼 것이로다
萬壽山 동산 안은 쓸쓸도 하다 떠러지는 나무입 나붓기는대
의구한 正陽門 밧 雜踏한 시가 누른 띠끌 하늘을 가리웟도다
黃河, 天津 지나서 大徐제국의 끼친 터를 좌우로 指點하면서
陽子江口 上海의 번화한 市況 동양제일 무역항 두로 본 뒤에
선창에 몸을 기대 황해 渤海에 白鷗로 벗을 삼아 旅順口 오니
203고지에 육탄혈전을 지는 해에 依稀히 짐작하도다
大連港은 南滿洲 大관문이라 예서 南滿 철도의 손님이 되니
1천 7백리 와서 新京끝 되매 가튼 차로 東淸線 접속하더라<293>
松花江 다다르니 하루빈이라 北滿洲 중심으로 시설이 큰대
동으로 海蔘威에 잠간 들러서 돌아서니 까마타 시베리아벌
여기까지 이르는 無邊광야는 前肅愼 後渤海의 반만년 舊彊
一望無際 길 넘는 강낭이 밧이 부질없이 옛 자최 파무덧도다
興安嶺 뫼부리에 걸닌 해 보고 바이갈 가람 속에 잠긴 달 보며
점으는 날 새는 날 들에 지내기 몇 날이냐 어언간 우랄산이라
긴 등우에 境界標 얼는 뵈더니 넘어서니 유로파 땅이라 하고
볼가江 얼는 지나. 모스크바에 2만리 철로를 다 왓다 하네
.................
순식간 東京市가 여기로구나
.................
밧븐 길에 神戶를 거저 지내니 白砂 靑松 경조타 須磨 明石개
일홈 놉흔 錦帶橋 어대쯤이냐 白馬橋 생각나는 馬關이고대
차 나리자 연락선 가라 타고서 하로 밤 玄海灘에 풍랑 격그니
반갑다 압장 나서 맛는 五六島 故園의 봄빗이 지금 엇더뇨
新京을 곳장 가는 歐亞 연락선
마조막 나그네 몸 부처 실니고 꿈가튼 지난 길을 돌아보는 중
洋洋한 한강 물이 눈에 보이네 그립다 남대문아 너 잘 잇더냐
아모래도 볼스록 깃븐 제 고장 坤輿를 두로 돌 제 만흔 늣김은
말슴할 날 잇기로 아즉은 이만 - 大正 5년 - <299>
6. 제주도 앞바다(강) 뗏목 바다낚시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 11월 9일 계유 2번째기사 1880년 조선 개국(開國) 489년
표류한 배를 원적이 있는 고을로 호송하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한규직(韓圭稷)이, ‘표류민(漂流民)을 문정(問情)한 일에 대해 방금 이달 15일 유시(酉時)에 도착한 부산 첨사(釜山僉使) 임형준(任衡準)의 치보(馳報)를 받아보니, 일본(日本)의 화륜선(火輪船) 1척이 당일 묘시(卯時)에 수종(水宗)에서 떠나왔다고 하였으며, 역학(譯學) 유광표(劉光杓)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객관(客館)에 도착한 돛이 2개인 화륜선 1척에 대해 문정하니 선주(船主) 히로세 가이키치[廣瀨塊吉]와 선격(船格) 30명과 표류민을 인솔해 온 통사(通事) 1인(人) 등이 함께 탔으며 항해증명서와 일본 영사관(領事官)의 개인편지 1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당 선주가 말하기를 『우리 배는 객관에 머물러 있는 상고(商賈)들이 무역한 물건을 삯을 정하여 운반하려고 왔는데 귀국의 표류민 9명과 통사(通事) 1인 등이 함께 타고 이달 12일 진시(辰時)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통사가 『이번 표류민은 저를 차임(差任)해서 인솔해 오게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표류민 등에게 표류하게 된 사연과 이름, 거주지를 물어보니, 선주 김치일(金致日) 등 9인은 모두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좌면(左面) 평대리(坪岱里)에 사는 백성들인데 뗏목 배 2척으로 고기잡이를 하려고 각자 낚싯줄과 밥을 가지고 함께 타고 금년 9월 21일에 별방포(別坊浦) 앞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22일 새벽녘에 서북풍이 몹시 불어 큰 바다로 표류해서 27일 오시(午時)에 일본 영해에 이르러 고기잡이 하는 일본 사람이 구해 주었습니다.」하였습니다. 단지 9명만 일본 배에 옮겨 탔으며 원래 탔던 뗏목 배는 큰 바다에 내버리고 29일에 떠나서 오늘 묘시에 객관에 도착하였다는 사정(事情)은 일본 사람들이 말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앞으로 바람을 조심해서 배를 운행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엄하게 신칙(申飭)한 후 해관(海關)으로 하여금 급히 압송하여 올려 보내게 하였는데, 본진(本鎭)에서 신문하여 공초 받은 여러 사연은 한결같이 역학이 문정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미 고의로 표류한 흔적이 없으므로 원적(原籍)이 있는 고을로 호송하라는 뜻으로 동래 부사(東萊府使) 심동신(沈東臣)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하였으며 또한 본영에서도 특별히 도와주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첫댓글 fitfear님! 께서 올려주신 글.. 의 六堂 崔南善 "世界 一週歌" 中의 부분에서
"興安嶺 뫼부리에 걸닌 해 보고, 바이갈 가람 속에 잠긴 달 보며
점으는 날 새는 날 들에 지내기 몇 날이냐 어언간 우랄산이라
긴 등우에 境界標 얼는 뵈더니 넘어서니 유로파 땅이라 하고
볼가江 얼는 지나. 모스크바에 2만리 철로를 다 왓다 하네
순식간 東京市가 여기로구나"(윗글 따옴)
==========================
六堂 崔南善 先生께서 고증해 주시는 부분이
흥안령=> 바이칼=>볼가강=>모스크바
2만리 鐵路 着地가 모스크바 여기가 바로 "東京市"
따라서, 모스크바가 모스크본이고, 이가 바로 日本이고 수도가 "東京市"
땅으로만 찾아가 보아도 모스크본이 일본이라는..
해뜨는 곳이 본이 아니고.. 해가 저무는 곳이 본이므로.. 일본이라는 말이 지극히 合理.適當!
즉, 삼위태백(용장백산맥) 서남쪽에 모스크본=일본이 있었고
조선과의 서북경계가 세베로드빈스크(북두비나강;북두칠성이 비나리는강=두만강)
세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듯...
거기 다 생략한건데요. 너무 길어서...유럽돌고 미국가고 일본가고 새로운 수도 한반도로 왔다는 이야깁니다. 대륙조선에서 여행을 출발하여 반도조선에 도착하는 여정을 그린 것입니다.
먼저, 좋은 글 올려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fitfear님!의 의견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 떄론 고집스럽게.. ㅋㅋ 댓글 다는 사연은
역사를 중간에서 부터 찾게되면, 많은 혼선 속에서 찾아 헤메다 보면 어느날 오랑우탄되어 버리기에..
땅이 처음 식기(徐冷)시작 한 곳에서 부터..고상고사(始發)가 형성 되기에..
삼위태백에서 부터 현근대사로 양쪽방향에서 동시출발해야..
원하는 실제적역사(강역 포함)를.. 할배들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기에..
삼위태백을 강조하는 것 입니다!
역사공부를 많이 하게되면.. 일본서기의 역사가 극동아시아의 역사가 아닌,
삼위태백(용장백산맥) 서쪽의 북극의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재야/강단 포함하여 전 세계의 사학자들이 무시/간과(근원과 시발을 개무시)하는 부분이 북극의 역사..
하여, 본인들도 여지저기 헛방 날린것을 지속 감추기(개똥박사/소똥석좌)위해..
지속적으로.. 헛소릴 남발하는 실정 이지요! 해서 삼위태백을 지속 강조하는 것이고..
이전의 사학자들의 전처를 밟는 것을 막기 위함 이랍니다!
커다란 오해는 없으시길...
@錦鶴東子 네 ^^
예카테린부르크도 지명이동된 내역이군요. 찾아보니,,,현 지역에 보석이야기는 나오질 않고, 제주도에 서 뗏목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현 반도 기준 절대 불가한 이야기임이 정확하니 현 반도 이야기가 아님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카테린부르크 인근 우랄산에서..
1. 에메랄드(흑운모 편암)생산..
2. 자수정..
3. 크리소베릴..
4. 토파즈(밤에도 빛을 잃지않는 신성한 돌)
기타 이외의 사하지방에서 다이아몬드생산
그 옜날에는 우랄에서 생산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공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모스크바에서 주로 가공업이 활발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답니다!
@錦鶴東子 소상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興安嶺 뫼부리에 걸닌 해 보고 바이갈 가람 속에 잠긴 달 보며> 라는 글이 송화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야기임이 틀림없으니 바이칼호수는 현 오비강을 중심으로 존재한다고 봐야 하겠군요....현 노보시비르스크의 거대한 호수는 발해 경박호가 분명한데,,,우리나라가 이고토를 잃어버리면서 경박호가 바이칼호가 된것인지...그렇지 않다면, 압록강 주변에 있었던 바이칼호수가 없어진 것이든...둘중 하나가 틀림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