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기회를 준다.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다. 여자는 돌아서 가버린다.’ (영화의 프롤로그)
욕망과 제도 사이의 갈등은 예술의 해묵은 주제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사회적 타협의 산물이 등장했고 오랫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렇듯 결혼이라는 제도도 어디까지나 타협이지 누구에게나 맞는 제도는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제도도 바뀌지만 후자의 변화는 늘 느리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충돌이 일어난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욕망과 사회적 압력 사이에서 갈등하고 타협하며 살아간다.
이 영화가 배경으로 다룬 1960년대 홍콩에서 2020년대의 한국과는 상당한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있지만, 두 곳 모두 비혼을 포함하여 여러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세계적인 큰 변화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는 행간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미묘한 표정, 대사에 인물의 심리와 당대 분위기가 슬쩍 슬쩍 엿보인다. 한 마디로 말해 개인의 내면과 시대적 분위기가 행간에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 영화다.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화양연화(花陽年華).
인생에서 꽃처럼 피어났던 가장 좋은 시절이 또한 그 좋은 것들을 모두 감추어야 했던 아픈 시절이라는 것. 그 역설이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보기에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의 핵심이고 양자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절묘한 균형을 이룬 것이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이다.
표면적인 스토리만 떼어 놓고 보면 여기도 불륜, 저기도 불륜, 그래서 불편하고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여주인공은 사장의 불륜의 충실한 조력자이기도 하며, 남주인공의 절친은 유부녀라도 유혹하려는 천박하면서도 일견 우스꽝스러운 남자다.
그러면서 결혼이라는 형식은 되도록 유지하려고들 한다. 사장, 여주인공 부부, 남주인공 부부.
왜? 이목, 체면 때문이다.
남녀 모두 각자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상황은 영화의 초반부에 제시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그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어쩔 것인가.
각자의 배우자가 도대체 왜 바람을 피우는지 이해가 안 되어, 두 사람은 일종의 상황극을 연출한다. 출장이라는 핑계로 장기간 떠나 있는 각자의 배우자들. 아직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는 남녀는 배우자들이 했을 법한 말과 행동을 상상해 본다. 과연 왜 그랬을까. 이럴 때 어떤 말을 했을까.
‘오늘밤 집에 들어가지 말아요.’ (여자의 남편이 상대에게 했을 법한 말)
‘남편은 그런 말 못해요.’
그렇지만 여자는 자신이 과연 남편을 그만큼 잘 알고 있는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의 ‘데이트’가 시작된다. 데이트를 하는 각자의 배우자들의 상황에 대한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데이트’ 장소는 주로 식당이다. 그 전까지 그녀는 혼자 먹는 저녁을 주로 국수로 때웠다. 허기를 대강 채우기 위해 국수를 사러 나가는 길에도 예쁘게 차려 입고 나서는 여주인공은 관객의 눈에는 오히려 오히려 더 외로워보인다. 생존을 위해 국수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는 그녀의 피곤한 모습에 애정 결핍으로 인한 정신적 허기가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데이트’를 하며 그녀가 맛나게 먹는 스테이크는 그녀의 육체적 허기뿐만 아니라 정신적 허기마저 채워주는 듯하다. 그녀의 접시에 스테이크 소스를 덜어주는 남자의 동작은 그런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요소이지만, 또한 그녀를 약간 당혹스럽게, 또는 착잡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짜 데이트가 될 것 같은 위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신 부인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요.’ (식당에서 주문을 남자에게 맡기며)
‘당신 부인은 매운 걸 좋아하나 보네요.’ (여자의 접시에 남자가 덜어준 소스에 스테이크 한 점을 찍어 먹은 뒤)
마치 두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있으며 각자의 배우자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의미의 층위가 한층 복잡해진다. 관객은 화면에서 보이는 남녀의 감정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어디서부터 연극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객의 짐작대로, 두 사람의 애초의 의도와 달리 연극이 진실로 점차 바뀌어간다.
어쩔 것인가. 불륜 배우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될 것인가.
부부간이건 불륜 관계이건 욕망 자체의 본질은 같다. 애정에 대한 갈구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사회적 계약, 관습, 이목의 압력이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 보아 이혼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은 더욱 선택지가 아니었다.
남: 나도 영화 좋아했었어요.
여: 예전에 취미가 많았네요.
남: 혼자일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지만 결혼하면 많은 게 달라지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고요. 안 그래요?
여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남: 결혼 안 했으면 어땠을까요?
여: 지금보다는 행복했겠죠.
결국 여자는 ‘플라토닉 러브’라는 틀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타협을 한다.
‘우린 그들하고 다르니까요.’
욕망과 관습의 경계를 긋는 선은 때로는 매우 가늘고 침범할 위험도 있다. 그러나 그 선 마저 없으면 ‘편안한’ 데이트는 불가능해진다.
두 사람이 진실을 직면할 때까지 주어진 시간은 일본에 출장간 각자의 배우자가 돌아올 때까지다. 그 사이 남자는 부인으로부터 편지로 이별 통보를 받지만 여자에게는 밝히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직면해야할 진실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결혼은 끝났지만 여자에게 이혼을 강요할 수는 없는 미묘한 상황에서 남자는 마침내 떠나기로 한다.
여: 왜 갑자기 싱가포르로 가요?
남: 환경을 바꾸고 싶어요. 뒷말 들리지 않게요.
여: 우리만 아니면 된 거 아닌가요?
남: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신경 안 썼어요. 그들처럼은 안 될 거라 생각했죠. . . 근데 아니었어요. . . 당신은 남편을 떠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떠나려고요.
여: 날 정말 좋아할 줄 몰랐어요.
남: 나도 몰랐어요. . . 두 사람의 시작이 어땠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게 됐어요.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이별 연습을 요청한다.
여: 앞으로 날 찾아오지 말아요.
남: 남편이 돌아왔나요?
여: 네. 난 정말 바보예요. (바람핀 남편을 과감히 떠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책망이다)
남: 그렇지 않아요. 다신 찾아오지 않을게요. 남편 잘 지켜요.
남자가 마지막으로 손 한 번 잡아주고 돌아서자, 여자는 허허로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오열한다. 살아오며 처음 만난 사랑을 떠나보내야 하는 처지와 이제 정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에서 오는 슬픔이다.
연애 감정이라는 것은 딱히 어떤 합리적 이유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불행은 그 연애가 결혼 후에, 그것도 타의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각자의 배우자의 불륜이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 불행이 불행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가 헤어진 그 기간은 쓰라리지만 달콤했던, 달콤했지만 쓰라렸던, 그들의 인생의 가장 빛나던 나날, 즉 화양연화다.
이 영화에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는 남녀 주인공의 절제된 표정과 말투다. 울고 불고 하는 과잉 연기를 보였다면 그저그런 불륜을 다룬 B급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왕가위 감독은 초기 작품에서는 스타일에 대한 극찬을 받은 반면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스타일과 스토리가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조화의 불가결한 요소가 양조위와 장만옥의 극도로 절제된 연기다.
특히 이별 연습을 한 후 어찌할 수 없는 텅 빈 마음을 표현하는 장만옥의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영화 곳곳에 삽입된 냇 킹 콜의 달콤쌉싸롬한 노래도 두 사람의 감정 상태에 대한 절묘한 은유로 작동한다. 달콤하지만 너무 달콤하지는 않고, 따스하지만 뜨겁지는 않은 감정, 그리고 은근히 배어나는 우수(憂愁).
영화 말미에는 남자의 마지막 제안이 나온다.
‘배표 한 장 더 있으면 나랑 갈래요?’
여자는 망설이다가 뒤늦게 호텔로 가지만 남자는 이미 체념하고 떠난 뒤다.
‘배표 한 장 더 있으면 날 데려 갈래요?’
여자가 이 말을 실제로 한 것인지 마음 속으로만 한 것인지는 모호하다. 다만 남자가 이미 떠난 호텔 방에서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얼굴에 겹쳐 들리는 이 말은, 두 사람의 길이 이미 어긋났음을 알려준다.
사랑도 타이밍이다. 특히 감정이 미묘할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랑의 감정이 해일처럼 몰아칠 때는 작은 어긋남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러 가지로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작은 어긋남으로 인해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 영화는 그리 아름다운 영화는 아니다.
아니, 다시 말해야겠다. 영화적으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종류가 흔히 생각하는 인간 관계에서 경험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욕망과 금기, 표출과 절제 사이의 절묘한 긴장감, 인간으로서 추해질 수 있는 지점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아슬아슬한 지경을 절묘하게 포착한 데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모든 일이 다 지나간 후 앙코프와트의 나무 구멍에 속마음을 털어놓고 흙으로 메우는 차우는 확실히 옛날 사람이다.
인간이 만든 유적을 나무가 뒤덮고 있는 앙코르와트.
대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주인공 남녀의 연애는 한낱 먼지와 같은 작은 일에 불과하며, 세월이 가면 앙코르와트의 유적처럼 빛바랜 추억일 뿐이다.
그러나 그 추억을 술자리의 가십으로 털어놓지 않고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가 마침내 고대 유적지에 장사 지내듯 묻는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보석 같은 감정 중 하나다.
그를 지켜보는 동자승의 모습이 여운을 남긴다. 아직 남녀간 애정의 애틋함과 쓰라림을 모르는 동자승의 천진함과 그 시절을 뒤로 한 중년 남자의 대비. 삶은 그렇게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_Fg95PhPg6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