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 [☆강원도, 시로 물들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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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만나는 강원도와 춘천
[강원도, 시와 물들다]
한국시인협회 엮음 / ♡♡시선 485 / 주) 글씨미디어(2015.11.11) / 값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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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雪嶽 물소리
강문석
어느 누가 저지른 해찰이기에
밤 낮 없이 엎질러지는
설악 물소리야.
겨우 여운만을 남기고 떠나간
보화普化*의 괜한 요령鐃鈴 소리나
우연같이 생색내고 있느냐.
사라져가는 물소리가
이승으로 꺾어 던진
꽃 한 송이.
200억 광년 저쪽으로 건너간
어느 별 하나
빙긋이 웃고 있다.
백도白島
구봉완
하얗게 세월을 붙들고 눈물 쏟아내는
먹먹함 눈시울에 올려놓고 고뇌를 하는
홀로 빛나는 섬이 있다
파도를 삼키며 오후가 자맥질하는 동안
바다는 하늘을 안고 누워 구름처럼
포말의 갈기를 세워 달려가는 파도 너머
사랑도 눈물도 응시하다 사라지는 그곳
하루하루 걸어온 길을 보게 하는
스스로 하늘에 이르는 검고 푸른빛을 따라
수평선 목에 두르고 뒷모습인 그대
바다를 향해 갈매기 울부짖는 섬.
강원도
김상현
우리 땅
반만 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척추가 건강했기에 가능했으니
한반도의 척추
우리 강원도
이 땅의 보배
죽서루
김유신
두타산자락에서 흘러내리는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오십천 맑은 물소리
松江 정철의 관동별곡처럼 詩聖들 다 끌어 모아 화두와 화답을
즉흥으로 받아 읊게 되는
오십천 벼랑 위에 죽서루 아직도 흥에 따라 한산모시
꼿꼿이 풀 먹인 옷자락 선비 한량들 지금쯤 얼마나 찾는가,
회화나무들이며 烏竹들이 절기의 바람 이르며
아직도 神仙들을 노니는 곳에
한평생 詩다운 시詩 갈증에 살아온 내게 화두를 넌지시 보내오는
오십천 여울진 바위에 도롱이 뒤 짚어 쓴 왜가리
한 마리.
월정사 전나무 숲
김인숙
마음의달이 아름답다는 월정사.
천년을 이어온 전나무 숲의 호흡이
한낮을 건너는 폭염으로 짙푸르게 끓어 넘치고
고장 한 번 나지 않는 미세한 전류가 자잘하게 흐른다.
쏟아지는 반사 볕에 활짝 옷을 벗은 숲엔
피톤치드로 섞이는 바람의 호흡이 있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그늘에 들면
숲의 북소리에 바람개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빨대를 꽂고 청량한 계절을 삼킨 나무는
마디마디에 등을 달고 식도를 밝히면서 영원을 산다.
자궁을 열고 물길을 낸 숲,
호흡기 주의보 내린 산객山客이
전나무 숲에 아득히 묻히면
피톤치드가 표류 중인 오솔길을 서슴없이 허락한다.
푸르게 점화된 불꽃
염색의 한낮이 또 어떤 색깔을 골몰하고 있다.
청춘열차
박해림
용산에서 아이티엑스 청춘열차를 탄다
도심을 뚫고 거침없이 달려가는 청춘을 만난다
창에 번진 수채화가 춘천에 닿을 즈음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권의 책이 된다
서럽던 그 예전의 눈물어린 풍경이
소양강에서 충천댐 의암댐으로 방류될 때
오래 전 쿨럭 기침을 하던 사람들이
안개와 김유정과 동박과 호수를 푹 삭혀
쉬지 않고 길을 만들고 있었다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
이제 막 하늘에 연을 날리는 사람들을 위해
청춘의 도시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청춘열차를 타면 한 날 씩 젊어진다는
새로운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
마침표 없는
이 세상 단 한 권만 있는 책을 펼치고 싶을 때
우리는 춘천행 청춘열차를 타야 한다
달무리
유준화
강릉 바닷가 국도 옆 등명낙가사가 있는 괘방산에
일광 도령 월광 도령이 상고 살고 있었다는데
어느 보름날 바다 한 복판에 달님이 내려와
밤 깊도록 승무를 추고 놀다가 하늘로 가셨다는데
그때 달님을 보고 한눈에 반항 월광 도령이
달그림자를 품에 안고 상사병으로 하루 만에 죽고 난 뒤
월광 도령을 사랑했던 바다는 그 후
일광 도량한태 시집 가서 팔천 년을 살았다나 뭐라나
아무튼 시방가지 바다는
두 서방님을 몰래몰래 밤낮으로 품에 안고 살아서
가슴을 매일매일 바위에 부딪치고 꼬집고 그러다가
시퍼렇게 멍들고 그랬다는데,
은가락지 낀 달님이 아스름 내려앉는 밤이면
그 이튿날은 바다가 펑펑 울고 그러는 게
두 사방 섬기는 마음이 오죽 아파서 저러는가 하는 말이
신라 때부터 전해왔다나 뭐라나
두 도령은 보살이 되어 괘방산에서 있다나 뭐라나
애착도 지나치면 병이라든가
낙산사에서
윤순정
화마가 할퀴고 간 후
다시 태어난 낙산사
고사목 아래 옛사람
다시 살아온 듯하고
관음보살의 관능의 몸짓
머무는 정점
동해 아스라한 하늘 아래
용의 강렬한 춤사위
새 생명의 숨결을
휘몰아 온다
보리 고추장
이돈희
마디 굵은 어머니의 손맛이다
어머니의 오감五感으로 발효돤
보리 내음 구수한
추억의 맛
여름날 오후 고봉으로 단김 보리밥 한 사발 냉수에 말아
반찬은
아삭이 고추, 보리고추장 찍어 먹는
강원도의 우직한 맛
고향의 맛
*보리고추장 : 보리를 주원료로 빚어진 고추장(강원도 영월 농협 생산품)
월정사 기행
이문걸
먼지 하나 없는 숲길에서 만난 토종 산다람쥐의 앙징스런 눈알은 금당계곡에서 방금 흘러내린 맑은 물처럼 시원하고 그물망토를 걸친 여름 벌레들은 제철을 만나 일제히 목청을 뽐내는 여기는 가원도 평창면 진부면 동산리 일대 산자락의 무량수불 월정사 입구. 하늘을 빼곡히 가린 전나무 숲길을 걸어서 오르는데 그 상쾌함이란, 이런 곳을 두고 천의무봉의 자연경관이라 했던가. 산문을 들어서자 일주문 대신 길 왼쪽엔 성황각이, 그리고 청정문의 상층에는 윤장대가 있어 원형의 수레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죄업이 사라지고 소원이 성취된다가기에 몇 바퀴나 돌리고 나니 배가 고프다.
월정사에서 서북쪽으로 한 삼십 여분을 달려 연화교와 상원교를 건너 어렵게 조착한 상원사 입구에 보존된 고인돌 석탑모양형의 관대걸이*… 지존은 이미 역사의 회랑 속으로 점멸되었고 오늘은 옷걸이 혼자서 관광객을 맞는다.
돌아오는 길에 ‘산촌식당’에서의 늦은 점심으로 나눈 산채정식 정말 별미 중의 별미였어. 산나물의 풋풋한 향은 금세 노독을 풀어 주는 한약재처럼 한 입을 넣는 순간 문득 시야가 맑아지며 밥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게 하는 최상의 진수성찬이었어.
*관대걸이 : 조선조 세조대왕이 목욕할 때 의관을 걸었다는 옷걸이
춘천
이영춘
골목길을 걷다 보면
‘춘천 불닭갈빗집’이 냄새를 풍기며 달려 나온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이 도시; 사람들의 근성
보불에 허옇게 익은 얼굴ㄹ들이 붉은 살점들을 뚝뚝 끊어
서로를 교환한다
오래 몸에 밴 인연처럼 자욱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면
만나지 않아도 다 고만고만한 이웃들의 발길 트이는 얼굴, 얼굴들
지글지글 세상의 근심 풀어내듯 옹진 화덕 불에
계륵鷄肋이 없는 계륵 같은 말들을 풀어 놓는다
빨간 말들이 빨갛게 익어가는 밤,
맑은 소주잔에 어슴푸레한 눈알 같은 달이 뜨면
인연처럼 끈끈한 냄새 밴 얼굴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심장처럼 오르라든 불판들은 여기저기 고도처럼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초저녁부터 기다리던 달이 빠르게 걸어 내려와
호수의긴 입과 긴 문을 안개로 잠그고
혼곤한 잠에 드는 이 도시의 밤, 춘천
설악 안개
임승천
하얀 치맛자락 흩어지면
보이는 설악의 숨소리
낮은 목숨 몰려와
바람으로
비안개로 수없이 흩어지고
계절마다 피어난
꽃과 나무 사이
쏟아지는 하얀 넋두리
내리치는 바람소리
씻기는 산소리
온 산 가득 덮이는 그대의 소리
설악은
치맛자락 깊은 숨소리로
순간마다 하얀 춤을 추고 있었다
홍련암紅蓮庵
조창환
홍련암紅蓮庵 섬돌에 앉아
깨끗한 고요 가득 품은 허공의 무늬 바라본다
저 파문, 바다에서 온 것일까
하늘에서 온 것일까
미소의 뿌리는 관음觀音에게서 온 것일까
의상대義湘臺 앞 소나무는 바다를 향해
벼랑 끝에 버티고 서 잇는데
아슬아슬하게 편안하구나
저런 환함 왜 이리 익숙한지
아마도 다른 생에서 겪었을지 몰라
그 흔한 천국 아니라
잘 아는 누구 얼굴에서 만났을지 몰라
은밀하고 고혹적인 고요의 입김에
신성한 우수가 서려 있다
돌 속에는
주원규
봄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돌 속엔 봄이 꿈꾸며 산다
사랑은 또 어디로부터 오는가
돌 속엔 사랑이 새처럼
지저귀며 산다
돌 속엔 봄이랑 사랑이랑
푸른 파도랑
아직 벙글지 못한 작약이며 쇠별곷
버들강아지랑 봄까치꽃이랑 고깔제비꽃이랑
말 없는 꽃달개비꽃이랑
눈이 퇴화된 두더지랑
천진에 이른 달마랑 함께
그리운 사람들 어울려 산다
아, 미시령
진명희
미시령이란이름이 좋아서
한 번 더 발걸음 하던 곳
구름과 동행하고
안개를 거느릴 수 있는
심호흡하면
폭설 소식도 반가운
아, 미시령
산허리에
시름을 내려놓고
늦가을 햇살이
설악을 넘어가고 있다
숲이 울 때
차한수
숲의
맥박
점점이 늘어선
바다 위로
심장의 가
는 떨림
이슬
망울망울
떠가는
구름한 점
십일월 저녁
하수현
붉은 듯 검은 가로수
줄지어 선 거리에
십일월 서늘한 저녁이 있네
그 저녁 가운데서
고독을 만나지 아니하고
그대,
거리를 지나갈 수 있는가
불멸의 추전역
한성희
너무 쉽게 부려놓고 떠나가는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일로 막차를 기다리네
바람 따라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불빛이었다면
이곳은 마음이 타들어 가는 춘전역
서로 닿은 수 없는 순백의 높이에서
그때를 기다리는 일로 신호등도 흔들리네
차창에 매달리는 불빛 몇 점
당신의 길에서 차가워지고
눈꽃으로 지울 수 없는 불면마저 끌어안네
추적추적 눈발들이 산허리를 낮추고
늦은 불빛이 폭설로 사라지네
비탈의 나무들 백색어둠으로 흩어지는데
타고 남은 미련이 유리창에 달라붙네
혈맥을 뚫고 밤새도록 달려온
마음의 등뼈
검은 허물을 벗고 싸리밭골로 휘어지네
더 오를 수 없다 해도
- 화천 곡운구곡 다산개정 제3곡 망단기와 벽력암에 부쳐
허문영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면벽수도를 하는 바위
험한 길마저 끊겨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해도
솔개처럼 날아가
무릎을 꿇고 싶은 정수리
돈오돈수도 좋고
돈오점수도 좋으나
벼락같은 소리로
깨달음이 찾아올 것 같은
청천벽력처럼
하늘의 말씀이 들리는 곳
정동진에서
황국산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정동진에 왔다
정동진에서,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보았다
꿈틀거리는 바다, 거대한 몸짓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저 바다,
마치
그녀의 가슴처럼
솟아오른 젖 봉오리처럼
거칠게 숨 쉬는 저 바다, 나는 바다 앞에서
그녀를 본다
내 모든 것 다 감싸 안고
영원을 노래하던 그녀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바람이 몹시 불고
간간이 눈발이 날리는 날
나는 정동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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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강원도, 시로 물들다
― 강원도와 춘천을 시로 노래하며
나무가 태양을 향해 가지를 뻗는 것처럼 시인은 태생적으로 아름다움을 향해 예민한 촉수를 들이밉니다.
상처와 소외, 불화하는 세계에 마음을 쓰는 것이 바로 시인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의 근원인 자연에서 시적 영감을 받고 새로운 시 창조의 원동력을 얻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번 사화집의 주재를 <강원도, 시로 물들다>로 장정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강원도’라는 말은 우리에게 하나의 지역이나 행정 구역이기도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과 강, 가장 눈부신 햇살을 피워 올리는 바다가 잇는 웅혼한 미적 공간입니다.
새해 첫 날 가장 순열하게 타오르는 첫 해를 맞이하기 위해 그 어느 곳도 아닌 강원도 동해로 달려가던 열정을 떠올려 봅니다.
한국시입협회는 이 가을, 강원도를 주제로 시를 써서 거칠고 더렵혀진 이 시대에 그윽한 시정신을 일깨우고 다시 한 번 싱싱하고 깊게 사람들의 마음을 물들이려 합니다.
정동진의 해변에서 새해 첫 해를 맞고 설악을 오르며 감탄했던 마음과 그 아름다운 산맥의 끝에 이르러 문득 분담의 뱍 앞에서 발걸음을 더 이상 내딛지 못하던 가슴 안타까운 경험도 떠올렸습니다.
사화집 <강원도, 시로 물들다>에는 한국시인협회 소속 시인 320여명이 참여했습니다. 사화집 출간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여기 모인 시편들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강원도의 아름다운 산하처럼 깊고 짙게 물들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가을
사단법인 한국시인협회
회장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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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아름다운 사계절을 품은 산과 강, 눈부신 햇살과
바다를 통해,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고
이 시대에 그윽한 시정신을 일깨우는 320여 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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