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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7월19일(월)맑음
지금으로부터 463년 전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은 일행을 이끌고 소위 <지리산 청학동 원정대>를 꾸려 화개동-쌍계사-불일폭포-청학동 코스를 답사했다. ‘청학동 신선 유토피아를 찾아서’가 테마였다. 남명선생은 성리학자로서 유가의 현실참여와 仙家의 현실초월을 상호비교하면서 자기의 입장을 재확인하고자 하였다.
1558년 4월 18일, 비가 와서 쌍계사에 머물렀던 남명 일행은 다음 날 아침, 비가 개자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청학동’이 아니고, 예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는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을 향해 올라갔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인생이 험난할수록 유토피아는 더욱 그리운 법이다. 위기의 시대 신라말에는 최치원이 이곳을 찾아와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쌍계사와 불일암 중간쯤 길에 있다. 최치원은
‘속세를 멀리 떠난 것은 비록 즐거우나(遠離塵世雖堪喜),
풍류의 감정을 막을 길 없으니 어이하리! (爭奈風情未肯止)’
라며 세속과 선계 사이를 방황하였다. 남명이 살았던 16세기는 사화로 얼룩져 더욱 험난하였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회피하기 위하여 청학동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리 떨어져서 현실을 다시 보고자 함이었다. 남명 일행이 쌍계사 스님인 신욱(愼旭)의 안내에 따라 수십 명이 상·중·하 무리로 나누어 청학동을 등반했다. 앞에서는 북을 두드리고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산행을 독려하였고, 중간에서는 남명을 비롯한 여러 선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힘겹게 올랐으며, 그 뒤는 요리사와 음식을 운반하는 종들이 짐을 지고 따랐다. 남명은 당시의 등산하는 모습을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듯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파르게 오르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신선이 사는 초월의 세계, 청학동은 수많은 질곡이 있는 현실세계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닐까? 부조리한 현실을 떠나 자신의 내적 초월만 강조되는 신선의 세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남명은 청학동이란 유토피아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고민이 <청학동(靑鶴洞)>이라는 7언절구에 담겼다.
한 마리 학은 구름으로 솟구쳐 하늘로 올라갔고
구슬처럼 흐르는 한 가닥 시내는 인간 세상으로 흐르네,
누 없는 것이 도리어 누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산하대지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네
獨鶴穿雲歸上界, 一溪流玉走人間; 독학천운귀상계, 일계류옥주인간;
從知無累飜爲累, 心地山河語不看. 종지무루번위루, 심지산하어불간.
남명이 하늘과 연결되는 ‘학’을 중시하는가, 인간 세상으로 이어지는 ‘물’을 중시하는가가 문제인데, 그는 물을 선택했다. 정신으로는 세상 너머를 노닐지만, 몸으로 세상과 함께하기 위해서 세상에 얽매임을 기꺼이 받아드린다. 불일암 동쪽에 있는 불일폭포를 보면서 이런 사유는 계속된다. 그리하여 평생 지리산 등반을 12번 하였지만 늘 현실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지리산이라는 의리의 산을 바라보며 현실에 참여하여 실천하는 양심이었다. 이는 내면으로 정신의 칼을 갈아 존재의 빛을 발하는 길이었다. 그런 상징으로 敬과 義가 새겨진 두 자루의 칼 敬義劍경의검을 지니고 다녔다. 내명자 경(內明者 敬)이요, 외단자 의(外斷者 義)라. 안으로 (양심을) 밝게 함이 경건함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정의이다. 자신의 양심을 살펴서 항상 밝게 깨어있는 것이 경건함이요, 나라의 정치과 사회현실을 대할 때 시비와 정사를 분명하게 판단하여 행동을 결단함을 정의라 한다. 이것이 간디가 지향했던 정치의식이 깨어있는 영성(politically awakened spirituality)일 것이다. 이것은 붓다가 가르친 사티(Sati, mindfulness, awareness,알아차림, 주의기울임)의 일상생활화이다. 그런 사람은 두 발로 풍진을 밟고 두 눈으론 광대무변한 시공을 본다. 그 사람은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이며, 어둠을 뚫고 나온 별이다.
덕산(德山)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쓰다:
請看千石鐘, 非大扣無鳴; 청간천석종 비대구무명;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쟁사두류산, 천명유불명
그대, 저 천 섬이나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
크게 치지 않는다면 울지 않는다는 말일세
어떻게 해야 나도 저 지리산처럼
하늘이 운다 해도 (부동심의 경지로)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덕산에 자리 잡고서 쓰다:
春山底處無芳草, 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 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 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有餘. 은하십리끽유여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옥황상제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을 사랑했네,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얼 먹고 살 건가?
은하 십 리 맑은 물, 마시고도 남으리
無題 제목없음
雨洗山嵐盡, 우세산람진
尖峯畵裏看; 첨봉화리간
歸雲低薄暮, 귀운저박모
意態自閑閑, 의태자한한
산안개 말끔히 비 씻어 가니
그림 같이 드러나는 뾰족 산봉우리
저물녘 녈 구름은 낮게 깔리어
그 모습 저절로 한가롭구나
중국공산당은 중국 내의 자본가들을 소위 ‘紅色 資本家, 붉은 자본가 Red Capitalist’라고 인정해주면서 그들의 역할을 활용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국부가 축적되어 G2의 위치를 점하게 됨으로써 상황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공산당의 통제를 넘어서려는 사기업 자본가들을 당의 영향력 밑에 두려는 첫 단추를 끼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알리바바 총수인 마윈의 앤트그룹을 주저앉힌 일이다. 일찍이 마윈은 법을 바꿀 수 없다면 그 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자신의 현재 상황을 예견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중국은 공산당 독재의 붉은 자본주의 Red Capitalism이다. 공산당소유 자본과 월가는 이익을 공유하는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글로벌 자본의 민낯이다. 그 둘은 Friendenimy(친구면서 적)인데, 바이든 정부와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미중의 무역전쟁을 교묘하게 다루어 가고 있다.
2021년7월20일(화)맑음
1. 삶은 충동이며 운동이며 변화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식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인식은 항상 자기인식이다. 자기의 감각기관에 비친 대상과 세계를 자기 방식으로 인식한다. 네 눈의 가시 영역을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느냐? 없다. 자기의 감각기관에 투영된 대상을 감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감각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감각기관이 경험한 자료를 원인으로 자아관념이 발생한다. 사람은 자아관념에 다시 갇힌다. 이렇게 인간은 감각에 갇히고, 인식에 갇히고, 자아관념에 갇힌다. 인간존재는 삼중의 감옥에 갇힌다.
2. 인간은 새로운 것을 찾는다. 새로운 사물과 사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정이 솟구치면 살 맛이 난다고 여긴다. 새로운 것을 향한 충동, 처음 보는 대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감각기관을 자극하여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우리 삶에 새로운 것이 없다면 얼마나 진부하고 권태로울 것인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결국 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걸 리비도libido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有愛, 유애, bhava tanha는 삶에 대한 본능적 충동 혹은 열정이다. 그것은 윤회하는 세계를 움직이고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3. 자기 주변을 둘러보라. 한때는 모두 첫 만남이었으며, 내 가슴을 뛰게 했고, 내 눈을 반짝이게 했던 새로운 것들, 새로운 사람, 신상품 brand new이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모두 헌 것, 낡은 것, 오래된 것, 익숙해진 것, 항상 거기에 그렇게 있던 것, 당연한 것,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내 앞에 널브려져 있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나? 나는 새것을 게걸스레 삼켰다가, 헌 것을 배출하는 배설기관인가?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가 주어지건만 저녁에 돌이켜보면 없어도 좋을 그저 그런 잃어버린 하루가 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싱싱한 선물을 받자마자 곧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 새것을 내놓으라고 손을 내민다. 왜 내 눈과 귀에 스치면, 헌 것이 되고, 내 손과 발과 몸에 닿으면 유행이 지난 중고로 변한단 말인가? 인간은 모든 새로운 것들을 헌것으로 만들고, 모든 고귀하고 고상한 것들을 무덤덤하게 만들며,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싸구려로 만드는 무슨 특별한 재주라도 타고났단 말인가? 세계는 매 순간 갱신되어 항상 새것으로 거듭나는데, 자기 생각에 갇힌 인간은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때를 묻히고, 만지는 것마다 흠을 내면서 생생한 현재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 인간은 <천지창조 이전-텅 빈 현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두뇌 속에 기억된 과거의 언어로 변환하여 현재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이거다 싶어 잡으면 벌써 저만치 빠져나가 있다. 그래서 항상 미진한 게 남는다. 매 순간 새로운 원재료인 지금-현재를 짓밟고 다음, 다음,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기를 빨리 빨리 재촉한다. 마치 앞에 있는 매혹적인 먹잇감을 향해 긴 혀를 쭉 뻗는 카멜레온처럼. 그러나 거기엔 언제나 이미 허겁지겁-공허와 결핍-불만족과 자기의심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의 시간은 무익하게 소모된다. 현재를 생략하고 다음 순간으로 건너뛰면서 부지런히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여, 한순간에 오직 한 번만 살뿐이다. 지금 현재를 멋지게 사는 사람은 다음 순간도 멋지게 산다. 현재를 건너뛰어 남보다 먼저 미래로 가려고 서두는 사람이여, 가장 확실한 미래란 죽음이란 사실을 아는가? 늘 지금 현재에 산다면 죽음을 넘어서리라.
4. 인간은 익숙해지면 권태를 느낀다.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이나 귀중한 물건이라도, 아무리 굉장한 경치나 고매한 영적인 경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덤덤해지고, 따분해지면서, 권태를 느끼게 된다. 시간은 모든 걸 삼켜버리는 괴물인가? 시간은 새로운 것, 귀한 것, 고상한 것, 아름다운 것을 無化시켜 버린다. 시간은 카오스이다. Kronos is Chaos. 시간 앞에 살아남을 사람과 대상, 眞善美와 聖스러움이 있는가? 너는 시간의 위력을 이길만한 무슨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느냐?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게 없으면 시간은 나에게서 아무것도 뺏어가지 못한다. 내게 한 물건도 없는데 시간이 무엇을 빼앗아 갈 수 있으리오? 무집착의 지혜는 시간을 이긴다.
2021년7월21일(수)흐림
중복. 오후에 수박 나누어 먹고 쉬다.
<거리의 파토스the pathos of distance-니체>
나는 출가수행자로서 저 속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은밀하게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저들보다 지적으로 우월하고, 문화가 높고, 생활수준이 높고, 의식수준이 높다고 여기면서 우월하다는 미묘한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저들은 낮고 나는 높고, 저들은 저질이며 나는 고급이며, 저들은 수준이 떨어지며 나는 수준이 높다는 관념이 내면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게 아닌가?
네가 ‘둘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깨달았다 하더라도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너의 마음은 벌써 나와 남으로 쪼개졌으며, 한 물건이 없는 게 아니라 나와 남이라는 두 개가 생겼으니, 너는 ‘한 물건도 없는 게’ 아니다.
2021년7월22일(목)맑음
大暑대서.
白鯨飮盡大洋水, 백경음진대양수
珊瑚枝枝撑捉月. 산호지지탱착월
하얀 고래가 큰 바닷물을 다 마시니
산호 가지마다 달이 맺혔네
<감상>
파릉(巴陵)선사에게는 불교의 가르침을 세 구절로 정리한 간명직절한 법문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어떤 것이 취모검인가? 如何是吹毛劒?’ 이다. 칼날이 하도 날카로워 솜털 한 가닥이라도 입김으로 불어 칼날을 스치면 반으로 잘라지기에 吹毛劒(불 취, 털 모, 칼 검)이라 한다. 취모검은 중생의 망심을 한칼에 자르기에 殺人劍살인검이다. 이걸 교학에서는 반야지혜라고 하며, 선어록에는 금강보검(金剛寶劍), 막야검(鏌鎁劍)이라 한다. 반야지혜의 신통한 작용을 비유한 것이다. ‘어떤 것이 취모검인가? 如何是吹毛劒?’ 이에 답하기를 ‘珊瑚枝枝撑捉月. 산호지지탱착월. 산호 가지마다 달이 매달렸네.’라 했다. 중생의 망심을 죽임으로써 활발발한 생명을 살려내는 까닭으로 活人刀활인도가 번쩍 나타났다. ‘산호 가지마다’란 일체처 일체시 일체동작,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말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거기엔 이미 벌써 달(분리되지 않은 전체, 완전함, 청정본연, 원만구족)이 빛난다. 이는 혜능대사가 깨닫고 나서 외친 오도송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하기자성본자청정 何期自性本自淸淨?
하기자성본불생멸 何期自性本不生滅?
하기자성본자구족 何期自性本自具足?
하기자성본무동요 何期自性本無動搖?
하기자성능생만법 何期自性能生萬法?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을 내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저절로 갖춰져 있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능히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리오?
사람마다 갖추어진 성품에 이와같은 덕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경이로움에 찬탄하는 것이다. 와, 진짜 놀랍네, 나한테 이런 게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 게 아무 조건 없이 나에게 주어져 있다니, 신기하고도 신기하구나! 누구라도 이 사실을 진짜로 알게 된다면 경천동지할 일이요, 환희용약 할 일이다. 혜능대사 오도송의 내용을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여 한 구절로 말하면 ‘珊瑚枝枝撑捉月. 산호지지탱착월. 산호 가지마다 달이 매달렸네.’이다. 파릉의 취모검이 번쩍이면 곧 산호 가지마다 달이 둥그렇게 밝아있음을 본다. 여기에 제삼자가 있어 ‘그런데 왜 나한테는 보이지 않고 실감도 나지 않나요?’라고 불평한다면 곧 취모검에 머리를 베여야 할 것이다. 선사의 한칼에 머리가 날아가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머리를 달고 다니면서 ‘아이고, 내 머리가 어디 갔지?’ 찾고 있는 사람이여! 머리를 만져보게.
그러나 법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지 않은 일반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자성법문을 들이댄다면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선수행자에게 국한된 것이지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일반 불자에겐 자성이 가진 덕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성법문에 조금씩 감화되고 직접체험이 하나둘 늘어나다가 어느 날 신심이 태산처럼 확고하고 바다처럼 풍만해져 일거에 “아, 이거였네!”하고 소리칠 날이 꼭 올 것이다.
2021년7월23일(금)맑음
더운 가운데 아주 덥진 않다. 응달에 들어서면 선선한 바람기를 느낀다. 쓰르라미 소리가 염천을 청량하게 식혀준다. 그래도 방안에서는 선풍기를 간간이 틀어야 더위를 이겨낼 수 있다. 산속의 더위는 세간에서 느끼는 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산속 절집은 여유와 녹음이 있고 초연함에서 오는 한가로움이 있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서 지지해주는 시주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일이다. 옥천 석교에서 시원히 불어오는 계곡 바람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인연이 모여 일어난 緣生法연생법이다. 연생법이라고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인연의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이다. 한 줄기의 바람이 스치는 일에도 천지조화가 작용한 것이기에 고마워할 일이다. 마치 한 공기의 밥에 뭇 사람들의 노고가 깃들어 있음을 알고 감사드리는 것과 같이. 너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연과의 조화를 어그러뜨리며 살고 있는가? 자연과의 조화라고? 몸이 이미 하나의 자연이니, 네 몸과의 조화를 이룸이 곧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첫걸음이다. 자기 몸의 리듬에 맞춰 생활의 리듬을 살리면 만 생명의 합창에 참여한다.
2021년7월24일(토)맑음
오전에 봉래당, 영모전 주변 풀 뽑는 울력하다.
조선에 인물이 있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천재이며 자유주의자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선생을 생각한다. 그는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를 뒤엎고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민주적 질서(豪民論)로의 혁명을 시도했던 혁명가였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조선의 봉건체제는 총체적 모순을 드러냈으며 이는 고통 받는 민중의 피와 땀과 좌절과 분노로 터져 나왔다. 그는 양반주류에서 소외되어 차별받는 서얼계급과 승려세력, 호민(허균은 민중을 세 부류로 분류하였다. 항민恒民 양반에 복종하여 생존유지에 급급하는 부류, 원민怨民 양반에게 당하는 것을 원망만 하는 부류, 호민豪民 부조리에 항거하는 담대한 부류)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했음이 분명하다. 해인사 홍제암에 주석했던 사명대사를 평생의 형이자 스승으로 모셨으니, 두 위인이 상통했던 心中事가 분명 있을 것이나 이제는 천고의 침묵 속으로 묻혔다.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했으며, 백월거사(白月居士)라 자칭하였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말할 정도로 신심이 장했는데, 불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까지 당하면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다고 밝혔다. 허균과 사명당 사이에 오갔던 교류와 대화가 궁금하지만 기록으로 남은 게 거의 없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그가 명나라의 이단 사상가 이탁오의 분서를 읽었으니, 기존질서에 저항하여 시대를 앞서서 당대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자유정신이었다. 不如世合불여세합. 세상과 야합할 수 없음이여! 그것이 바로 조주의 無! 이며,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생명의 활발발한 발현이며, 천지자연의 自彊不息자강불식함이다.
첫댓글 如何是吹毛劍이냐?
珊瑚枝枝撑捉月이로다.
"珊瑚枝枝撑捉月"을 어떤 유명한 선사가 말했는가는 모르지만, 이 말이 늘 껴끄러웠어요. 그것은 결코 앎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그 시원찮은 말을 무조건 信賴해 거기다 註釋를 계속 내니 더 더욱 이상하게 됩니다.
내가 88년 부산 海雲精寺 眞際스님 會上에 살때부터 그 말이 목에 까시처럼 걸려 늘 이상했어요. 이 말은 제대로 된 答이 아닙니다. 中國 놈이라고 무조건 信賴할 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錯答인 줄 모르는 게 不幸일 뿐!
"吹毛劍[道]이 뭐다"라고 말해 버리면 이미 죽어버린 말이 되지요. 또한 말하지 안으면 말하지 못한 연고로 틀려 버리지요.
나 日震이 着語허면
如何是吹毛劍이냐?
"그놈은 입을 열어도 어긋나고 입을 다물어도 어긋난다."
"내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본래 저절로 갖춰져 있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능히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줄을 내 어찌 알았으랴."
이 六祖스님 말씀을 들어보면 答이 卽時에 내려집니다. 日震스님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