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을 만드는 시간 / 려원(고옥란)
아버지는 한 권의 책이었다. 곁에 두고 오래도록 읽고 싶었던 책. 그러나 오래 읽지 못하였다. ‘아버지’라는 책을 읽던 스무 해 봄날의 기억은 50페이지 언저리에서 멈춰버렸다.
부모로부터 생물학적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내 몸 안 DNA 이중 나선 어딘 가에는 아버지가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슨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언급한 문화적 유전자 ‘밈’(meme)도 생물학적 유전자 ‘진’(gene)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되어 세대를 초월해 진화한다고 한다. 앞선 이들이 내 몸에 문화적으로 남기고 간 모든 흔적을 ‘밈’이라 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서로의 인생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의 원인은 바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아버지와 나, 부녀로서 서로를 선택할 수도 없었고 선택하지도 않았지만, 아버지 안의 어떤 것들이 지금의 나를 불러내었으리라. 화장할 때마다 얼굴에 아버지를 그린다. 눈가에 섀도를 바르면서 아버지의 눈을 기억하고 립스틱을 바르면서 아버지의 입매를 기억한다.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나이면서도 아버지인 흔적을 추적한다. 내 안에 젊은 아버지와 내가 알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의 얼굴이 공존한다.
햇살 내리쬐던 어느 봄날, 책꽂이 앞에서 아버지의 밈을 복제하고 있었다.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 해가 비쳐 들면 책들은 나른한 기지개를 켰고 펼쳐진 책 위로 조각난 햇살이 머물렀다. 그 햇살들을 모아 책갈피로 삼았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학교 도서관, 어른 키보다 훨씬 높은 책꽂이엔 제목조차 생소한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골리앗처럼 버티고 서서 어린 나를 내려다보던 책들, 두툼한 책과 얇은 책, 커다란 책과 조그만 책, 들쑥날쑥한 책들, 그사이에 유년의 시간이 있었다. 도서관은 유년의 놀이터였고 책을 읽는 일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당연한 유희였다. 책꽂이 앞에 서 있던 어린아이는 책꽂이 너머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지 못했다. 창문으로 해 그림자가 길게 들이칠 때까지 무언가에 열중하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는 일이 좋았다.
책에는 활자화된 누군가의 생이 담겨 있고, 전하고 싶은 목소리가, 흘리지 못하는 눈물이, 쓰린 고통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웃음이, 해석하기 어려운 미소가 스며있다. 책 맨 뒤 대출 이력서에는 빌려 간 이들의 이름이 파란 잉크로 빼곡히 적혀있었는데 책의 나이테처럼 여겨졌다. 그들의 몸에 새겨졌을 책의 흔적들, 내 몸 어딘 가에도 그 시절 책이 새겨 놓은 푸른 잉크 빛 나이테가 남아있을지 모른다.
밈을 복제하는 시간과 공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기름칠하는 아버지 몸에 밴 끈적끈적한 기름 냄새, 고기잡이 아버지 몸에서 풍기는 비릿한 바다 냄새, 요리사 아버지 몸에 스며있는 고소한 음식 냄새, 농부 아버지의 손바닥에 스민 촉촉한 흙 냄새,... 세상의 거룩한 노동의 냄새들,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지만 어떤 이유로든 연결된 이들은 부모의 밈을 복제하고 그 밈들은 때로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의 설계도가 되기도 한다.
허물처럼 벗어놓은 양복에는 아버지의 하루가 들어있었다. 눅눅한 종이 냄새, 웅크린 글자들의 냄새, 습기를 머금은 나무 책꽂이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날마다 아침이면 허물을 걸치고 일터로 향하셨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매미처럼 허물만 남겨두고 떠난 젊은 아버지를 오래도록 냄새로 기억했다.
삶이 버거워지면 미로 같은 책 속으로 달아나곤 했다. 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길을 잃기 위해서 여백과 행간을 수없이 더듬었다. 미로 끝에 서면 책은 언제나 곁에 두고 오래도록 읽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50페이지 남짓에서 멈춰버린 아버지라는 책을 열고 밈을 복제한다. 술술 읽히지 않는 글자들, 난해한 기호들이 언젠가는 내 안에서 해독되어 스스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뒤흔들던 날은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다. 내리쬐는 햇살이 책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문득 책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이미 흙 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보고 싶어 허둥지둥 아버지 묘소로 달렸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저 멀리 언덕배기에 아버지가 누워있었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스산한 들판, 새들의 덧없는 춤만 보고 돌아섰다. 깊은 방황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 허무감이 밀려올 때마다 내 안에 복제된 아버지를 꺼내 읽었다. 해마다 켜켜이 몸 안에 새겨지는 것들은 서고 어딘가에서 나도 모르게 복제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밈들이 만들어 낸 궤적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내 책은 아버지 책 두께만큼 되었다. 상상 속 아버지의 서가에서 햇살을 모아 다시 책갈피를 만들고 해 그림자를 따라 밑줄을 그어가며 아주 느릿느릿 책을 읽고 싶다. 켜켜이 쌓여가는 인생의 나이테 한 자락에서 아버지가 남긴 흔적들을 더듬으며 알게 모르게 습득해버린 밈들, 어느새 내 안에 자리 잡아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되어버린 밈들을 헤아려 본다.
겨울 바람이 거세게 유리창을 두드리고 창틀에 소독 소독 눈이 쌓이던 오래전 그때로 돌아가 볼 붉은 여자아이가 되어 네덜란드 풍차마을에서 지치도록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 나무에 살고 있다는 작은 사람 위플라라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커다란 회색곰의 흔적을 찾아 깊은 동굴로 들어가 보고 싶다. 새빨간 가죽표지에 고급스럽게 금박이 새겨진 책들, 제목조차 희미한 그 책의 한 페이지에는 어린 날의 나와 젊은 아버지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햇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여전히 아버지의 밈을 구독 중이다. 내 안에 새겨진 흔적들,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또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다. 인연으로 맺어진 누군가에게 푸른 잉크 빛 나이테가 새겨지기를 바라고 복제된 밈들 속에 아버지의 밈 또한 영원히 머무르기를 바라고 있다. 오래도록 밈을 읽는 시간, 등 위로 해가 머문다.
시흥문학 32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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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원 (고옥란)
월간문학 수필 등단,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금상,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대한민국환경문화대전 최우수상, 김포문학상 우수상, 한민족이산문학 우수상 등을 수상하였고 2020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을 수혜하였습니다. 산문집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을 출간하였습니다.
첫댓글 엄마 산소를 얼마 전 다녀왔다. 산소 아래 복숭아 밭에는 냉이가 많다. 냉이, 달래 캐기의 달인인 작은 언니와 나는 봄에 엄마한테 올 때 아예 호미를 가져와서 엄마가 주신 봄을 캐갔었다. 그 작은 언니도 세상 떠난 지 8년이 되었다. 냉이를 보면서 엄마와 언니를 떠올리고 그리운 그 시간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