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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초포교를 다녀 와서 공주 우금치 전투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동학농민군 3만5천여 명이 죽었다는데, 그에 비하여 관군은 (실상은 일본군) 겨우 1명이 죽었다 하고, 어찌하여 그렇게 대량 죽음에도 맹렬하게 대항하며 싸웠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실화가 옛날 기록에 남아 있어서 소개합니다..
1894년 갑오년 당시의 민심이라든가 동학의 위세가 얼마나 맹렬했는지, 이런 민심이 훗날 기미 독립만세운동으로, 또는 의병활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감히 추측해보기도 하게됩니다.
온갖 상념을 떠오르게 하는 실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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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사상의 최대 활극 동학란 실화 >
홍종식 구연, 춘파 기
( 사진 글 내용 옮기기)
(희미한 사진 속에서 국한 혼용문에, 옛 문체, 옛 구어체로 쓴 것을 보고, 오늘날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많은 잘못이 있으리라 믿지만 대강의 뜻은 알 수 있으리라 믿어 감히 시도해봅니다. *는 옮긴이의 임의 첨가 부분임. 2023.11.17.(금))
<제1장>
-소개 - 홍선생은 갑오동학란 때 덕포(?德布)의 접주로써 운량관(運糧官)이란 직책을 가지고 수십만 동학군과 같이 충청남도 서산 해미 당진 신례 등지에서 관군과 더불어 싸워 연전연승을 하다가 그만 때 이롭지 못하여 홍주(洪州) 패전으로서 종막을 닥치고 난 뒤 이래로 삼십 유 5년간을 천도교에 시종해 오시는 우리교의 도사 어른입니다( ?경도호-- 홍석무씨 부친).
창도 70년을 기념하는 이때에 있어서 70년 역사를 돌아보며 장로숙덕 어른들의 실지 경험담을 듣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익한 동시에 특히 70년 역사 중 최대 활극이요 가장 가치적 기록인 동학란 실제담을 듣게 된 것은 무엇보다 다행한 일로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는 통쾌한 일도 많고 기쁜 일도 많고 눈물 나는 일도 많은 것은 물론 특히 기운이 번쩍번쩍나서 하늘로 올라가리만치 야단스러운 구절이 많으니 누구든지 자세히 들어 주십시오.(필자)
갑오(*甲午:1894년) 당시의 입도식(*入道式)
여러분의 참고를 위하여 우선 갑오년 그 때의 입도 예식이야기를 하지요. 갑진(*甲辰)이후에 입도한 이들은 그때 즉 동학 때의 입도식은 모르리이다. 지금은 입도식이 매우 간단해졌지만 그때에는 꽤 복잡하였습니다. 여간한 집 대소상(*大小喪) 제사보다는 물론 굉장하였지만 여간한 잔칫상보다도 굉장하였지요. 장에 가서 온갖 예물을 사다놓고 목욕재계를 하고 의관을 새로 정제하고 병풍을 치고 촛불을 밝히고 청수 상 앞에 꿇어앉아 입도식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탁 위에는 흰밥이며 흰떡이며 삼색과실이며 감주며 민어포며 백미 한 말이며 돈 한 토리며 안 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참말 굉장하였지요.
나는 갑오년 2월 초여드렛날 김 병학이라는 이의 소개로 한윤 삼형제 외에 6.7인과 같이 입도를 하였습니다. 그의 권고를 듣기 전에 미리부터 동학이란 것을 들어 알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동학을 하면 조화 부린다는 데에 매우 혹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동학을 한번 알아보기로 하였던 터인데 마침 김 씨를 논두렁에서 만나게 되어 은근히 동학을 물어보았습니다. 마침 김 씨는 미리부터 동학을 은밀히 믿던 터이라 나의 귀에다 입을 대고 넌지시 일러주며 같이 믿자고 합니다. 믿으면 조화도 나려니와 장차 양반이 되고 훌륭한 일을 하고 또한 삼재팔난을 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장에 믿기를 승낙하고 김 씨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날 저녁으로써 이웃에 있는 도인 6.7인과 같이 입도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나의 입도의 동기이었고, 또한 그 때의 입도식이었습니다. 그 때가 벌써 36년 전 즉 내가 30세 청년 시절입니다. 세월이 참말로 빠르외다.
수돗물 놓고 다투어 입도
운수는 참말 있습데다. 자 - 이런 일도 있겠소. 내가 입도한 지 불과 며칠에 전지 문지(*傳之 聞知)하여 동학의 바람이 사방으로 퍼지는데 하루에 몇 십 명 씩 입도를 하곤 하였습니다. 마치 봄 잔디에 불붙듯이 포덕(*布德)이 어찌도 잘 되는지 불과 1, 2삭(*朔) 안에 서산(*瑞山) 일군이 거의 동학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첫째 시운이 번복하는 하는 까닭이요, 만민평등을 표방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재래로 하층계급에서 불평으로 지내던 가난뱅이 상놈 백정 종놈 등 온갖 하층 계급은 물밀 듯이 다 들어와 버렸습니다. 더구나 때 맞침 전라도 등지에서 동학군이 승승장구한다는 기쁜 소식이 날로 때로 올라 벋치니 누가 기운이 아니 나겠습니까? 그래서 모두 다투어 입도를 하는데 길 가던 자는 우물이나 개천을 향하여 입도식을 하고 산에서 나무 베던 자는 숫돌물을 놓고 다투어 입도를 하였습니다. 하루라도 먼저 하면 하루 더 양반이요 하루라도 주저하면 하루 더 상놈이라는 생각하에서 어데서나 닥치는대로 입도부터 하고 보았습니다. 참말 야단법석이었지요. 지금도 그런 광경을 한번 보았으면요.
그런데 이때에 있어서 제일 인심을 끈 것은 커다란 주의나 목적보다도 또는 조화나 장래 영광보다도 당장의 실익 그것이었습니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데서 모두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두 집안 식구 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천국천민(*天國天民)들이었지요.
<제2장>
제1차 원벌 집회
동학군의 기세가 이렇게 굉장해지는 반면에 재래의 세력자들은 반동운동이 또 맹렬하였습니다. 마침 서울 양반의 후예인 이 진사라 하는 자가 서산에 살았는데 어떻게도 동학군을 음해하며 또한 재물을 탈취하는지요, 그래서 이놈을 중벌하기 위하여 제1차로 통문을 돌려가지고 홍주 원벌에서 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갑오년 7월인가 보외다. 어데서 몰려오는지 구름 모이듯 잘도 모여듭디다. 순식간에 벌판을 덮다시피 몇 만 명 모였습니다. 이 소문은 벌써 이 진사에게 갔습니다. 이 진사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곧 사죄를 하기로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의 집 가까이 개심사(開心寺)란 절로 이진(*移陣)을 하였습니다. 이 진사는 그만 백기를 들고 나와 전과를 사죄하고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항자불사(*降者不死: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는다.)라고 우리는 그를 효유하여 놓아 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기세는 한층 더 높았습니다.
정말 기포는 10월 1일
우리가 정식으로 기포하기는 10월 1일입니다. 9월 28일에 상부로부터 통문이 왔는데 보니까 10월 1일 오정(*午正)으로써 일제히 서산(瑞山) 읍내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모이데 일제히 농기(*農旗)와 농악(*農樂)을 가지고 총 있으면 총 가지고 칼 있으면 칼 가지고 총칼이 없으면 죽창(竹槍)이라도 깎아들고 바랑에다가 사흘 먹을 음식 해 지고 의복은 튼튼히 입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동원령이었습니다.
이 통문을 받고 우리들은 승패리둔(勝敗?-- )은 교계할 여지도 없이 덮어놓고 기고만장하여 일제 출군 준비를 하였습니다. 바랑을 만들며 떡을 치며 죽창을 깎으며 식칼을 갈며 총을 닦으며 미투리를 삼으며 버선을 기우며 집집에서 야단들 났습니다. 그리고 일변 사면팔방으로 사발통문을 돌리는데 어찌도 빠른지 지금의 전화전신보다 더 속하였습니다.
10월 1일 이 날에 나는 공교롭게도 시제(時祭) 역을 맡아서 시제를 차리기로 되었던 터입니다. 그러나 시제고 무어고 그까짓데야 마음이나 켕기게습니까. 되는 대로 대강 차려 지내고 그날 오정 쯤 하여 서산읍으로 달려갔습니다. 중도쯤 가니까 벌써 도인들이 말을 대령하고 있습데다. 집어 타고 단숨에 서산읍에 들어가니 웬걸 벌써 함락을 시켜 놓았겠지요. 군수는 목을 베어 쑥굿대에 매어달고 관아와 관속들의 집들은 불을 놓아 왼 거리가 쓸쓸한 연기 속에 잠겼는데 실로 보기에 전쟁판 같습데다. 들으니까 벌써 태안도 함락시켰다 합니다. 이날은 서산읍내에서 한 오리쯤 나와서 진을 치고 유숙하고 그, 이튿날 해미(海美)로 내달아 해미 읍내를 또 함락시켰습니다. 비금주수도동학화 ! 그러자 대장소로부터 이제는 또 당진으로 진출하라는 영이 내렸습니다. 만산천야가 도시 동학군인데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날던 새도 갈 곳이 없어 동학군의 품(*<춤)으로 날아들고 영악한 여우놈들도 달아날 곳이 없어 우리의 발밑으로 기어들어 살려주기를 애원하는 듯 한 것이 실로 볼만하였습니다. 비금주수(飛禽走獸*나는 새, 달리는 짐승)도 동학화(*東學化)는 이때였습니다.
<제3장>
하룻밤 사이에 십리 똥성
이것은 극히 더러운 말이나 그러나 그때의 실경(*實景) 그대로 이야기하려니까 똥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수십만 동학군이 송산이란 높다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하룻밤 지내게 되었습니다. 자는둥 마는둥 두루 법석을 치다가 아적(*아침)에 나가보니 10리 주위가 전부 똥으로 성을 둘렸겠지요. 거짓말 없이 실로 한 자 높이에 두자 너비는 됩니다. 이것을 보면 동학군이 얼마나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면팔방이 도시 밥광주리
?횟독발자부터 진두에 나서서 보니까 사면팔방으로 모여드는 것이 도시(*모두) 밥광주리입니다. 아낙네는 이고 사내들은 지고 늙은이는 죽을 들고 아이들은 물을 들고 이리로 저리로 모여드는데 실로 밥 난리가 났습니다.
포와 포를 분별하고 동리와 동리를 분별하여 각각 맡은 대로 들어오는 밥을 받아 쌓아놓고 각기 대오를 분별하여 밥을 노나 먹는데 제법 규율이 정제하여 하나도 어지러움이 없었습니다. 비록 무식 농군이나 동학이란 씨알맹이가 있는지라 과연 모범할 곳이 많았습니다.
적수공권으로 격퇴 관군
아침을 노나 먹이고 장차 행군할 것을 의논하는 중에 마침 한 장의 급한 보고가 오는데 홍주로부터 한일청연합군이 막 밀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처음으로 크게 놀래었습니다. 그러나 ?심고한 번식을 튼튼히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천사님이 감동하야 하나도 죽지 않을 것을 자신하고 형세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만에 건너 산을 바라보니까 햇빛에 번쩍번쩍하는 것이 관군들의 칼빛이겠지오. 아닌 게 아니라 처음은 가슴이 뜨끔합디다. 우리들은 수는 많으나 대개 죽창을 가진 농군들로서 앞으로 갓 ! 뒤로 갓! 한마디도 못해본 군사들이요 저들은 새로운 무기를 가진 조련한 군사들이니 접전을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실로 야단났습니다.
그렇다고 여러 수 만 명을 가지고 도망할 수도 없고 대들어 싸울 수도 없고 기세양난이었습니다. 도망을 하거나 싸우거나 죽기는 일반이니 기왕이면 눈 딱 감고 싸워보자! 하고 일제히 고함을 치며 사면팔방으로 물밀듯 확 내밀었습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어느 겨를 엔지 우리들은 벌써 관군들의 시체를 타고 서서 칼을 바꿔 차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화 아니고 무엇입니까. 참말 조화 중에도 신통귀통한 조화지요. 관군들은 수십만 우리 동학군들의 고함 소리에 벌써 기겁이 되어 ?자상천답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꼭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리하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적수공권으로 관군을 진멸하고 승승장구로 면천읍을 함락하고 다시 구만터란 곳을 거쳐 예산 신례원(新禮院) 장터를 점령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더- 한 층 조직을 군대식으로 튼튼히 하였습니다. 여기서 내가 운량관이란 직명을 비로소 가진 것입니다. 이 신례원에서도 관군과 접전을 하여 빈주먹으로 그들을 포위하여서 진멸을 시켰습니다.
오호 ! 홍주일패 !
실상은 홍주서 관군과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닙니다.
관군들은 홍주성을 튼튼히 닫고 지구전을 하기로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오래 - 항하기가 어려워 자퇴하여서 헤어진 것입니다.
역시 운수이지요. 삼남 각지가 모다 불리한 뒤니 어찌합니까?
그 뒷 이야기는 그만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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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3.11.22일 자부리 정리 )
첫댓글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