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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사Nisa의 별
별에도 빛깔과 향기가 있다 눈으로 보아야 보이는 별이 있고 귀로만 듣는 별이 있고 혀로 맛보아야 살아서 돌아오는 별이 있다 저 아득한 옛적 제국의 수도 위로 뛰어내린 별들은 지금은 모래 속에 묻혔다 여염에 살을 섞던 별들은 지금도 바람이 되어 어디론가 가고 있으리라 이승의 풀잎 위에 몸을 던진 별들은 강물을 따라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을 따라 반짝이는 부활의 몸을 찾아 오늘도 제 몸을 때리며 흘러가고 있으리라 흥망을 아는 별들의 이마에는 오늘밤에도 이슬이 고인다 온몸을 불살라서 더는 빛날 몸이 없는 땅을 찾아서 홀로 맨발로 고요히 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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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니사 Nisa
니사로 가는 길은 무덥다
길은 팍팍하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의 양편은 무성한 숲의 바다
그러나 길은 졸린 듯 꺼질 듯 감감하다
누군가 가만히 투덜댄다, 삼십육 도
안나가 눈치껏 말한다
이 정도의 기온이 뭐가 더우냐고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이런 정도의 더위는 더위가 아니라고.
문득 이틀 전의 일이 생각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의 실내가 너무 무더워
에어컨을 틀어 달라고 요청하자
우리 가이드인 우즈베크인 알리는 말했었다
이 정도의 기온을 더위라고 할 수 있느냐고
오십 도는 돼야 조금 더운 거라고.
에어컨을 틀어 주면서도 젊은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니사의 언덕을 오르는 안나가 그랬다
그녀는 그냥 웃는다
노란 금발에 파란 눈이 반짝인다
무더위는 알고 있을까
가진 자의 살갗과
못 가진 자의 살갗을 어떻게 괴롭혀야 할지를
내리쬐는 햇살은 알고 있을까
개양귀비꽃 무성한 오름길
고도가 높아질수록
드넓은 저평지의 광활함이 눈앞을 다가들고
숲과 농경지는 조화를 이루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고요함에 있다
저만치 침묵에 잠긴 코팻닥 마운틴kopetdag mountain
늘어선 연봉의 정상들은 여태 설경을 이루었다
코팻닥 마운틴은
아쉬가바트 남쪽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경을 이루는 황량한 산맥
카스피해에서 시작해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경을 따라 테젠강까지
육백사십오 킬로미터를 달린 산맥
사람들은 왜 이 설산을 ‘달의 산맥’이라 불렀을까
삼천백구십일 미터의 최고봉 ‘쿠에쿠찬’의 기슭
육십 미터 지하에 있는 코브아타 동굴은
수온 36°의 뜨거운 호수 바카르덴이 있다는데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바카르덴이 더우니 우리도 더운 걸까
와하비즘Wahhabism과의 거리를 두는
영구중립성을 표방하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땅에도
더위는 있다
표고가 높아지니 조망하는 풍광도 아름답다
빛나는 햇살
더위도 사랑스럽다
니사 -
현재의 바기르Bagyr
파르티아 왕국의 첫 번째 수도였던 곳
코팻닥 산맥을 병풍처럼 둘러친 자연요새 도시
니사, 저 찬연한 파르티아 왕국의 여름별장은
기원전 1세기 말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무너지고
지금 남은 것은 그 쓸쓸한 잔영
지금도 발굴과 복원을 동시에 진행 중이다
왕의 거성居城은
방금 풀잎과 잡초들과 황량한 땅들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나 남은 자취만으로도
육백 년 번영의 풍문이 허언이 아님을 알겠다
평생 이곳에 살았다는 니사유적지 해설자인
건장한 체격의 ‘바드르’씨
햇살에 그을고 깊게 주름살이 패인 그의 얼굴은
폐허가 된 니사의 유적을 닮았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파일자료를 일일이 보여주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지나간 시대의 유적을
심드렁해 하는 우리를 염두에 두는 탓일까
아니면 무너진 돌과 흩어진 성채의 슬픔 때문일까
그러나 잃어버린 고도古都를 일러주는 그의 말은
비록 땡볕에 그을려도 사뭇 진지하다
폐허의 잔영이
어느덧 그의 가슴속을 이는 바람이 되었을까
깨어진 돌조각 하나까지도 그의 핏줄이 되었을까
애정이 스미지 않은 눈빛은 한 터럭도 없다
아마도 한 인간의 생애가 다할 때쯤
복원된 도성은 뒷날에 그의 육신을 기억하리라
왕의 접견실, 물 저장고, 구리로 만든 아네네 상
상아제 뿔잔, 등신대의 채색인물 조소
망루와 위병소, 초소, 성벽의 둘레
여행자의 의혹어린 눈길을 만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파괴되기 전의 신전과
화려한 궁전의 원형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파일을
무시로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왕국의 영광과 변영은 당신들의 머릿속 그림보다
마치 훨씬 더 위대했었다는 듯.
세계의 문화유산은 방금 더위 속에 묻혀 있다
거기 늙은 영혼의 문지기가 있다
바드르 씨
개양귀비꽃을 닮은 남자
저 위대한 파르티아 족속의 자취어린 얼굴
니사를 지키는 마지막 후손
바람의 힘은 강하다
군대도 제왕도 그 아래 드러눕는다
산 아래로 보이는 무성한 숲은
복숭아나무, 뽕나무, 사과나무, 체리나무
사이프러스나무, 포플러나무, 소나무, 측백나무
유적지 언덕에서의 조망은 녹색의 향연
초록바다를 지키며 살아온 바드르의 생의 여정
마지막으로 그가 소개한 니사유적지 팸플릿을
우리 중 아무도 사는 이가 없었다
늙고 정직한 얼굴을 지닌 유적지 현지해설가
바드르 씨
나는 버릇처럼
누군가 나에게 유적지에 대한 말을 들려줄 때
정보의 정확성보다는
매양 말하는 자의 인간됨을 먼저 살핀다
바드르가 그랬다
우리 일행과 작별인사를 나눌 때
나는 바드르의 이마를 얼핏 스쳐가던
쓸쓸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니사의 적막한 유적처럼
노련한 중개자의 주름살에 숨은 그 적막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니사는 외롭다
그 복원의 길은 아득하다
바드르는 더 외롭고 고독하다
유적지에 버려진 그의 생애
아니 유적지와 함께 풍화되는 그의 미소
다음 팀이 올 때까지 그의 입술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밤에도 나사의 별은 외로우리라
마치 금방이라도 파르티아의 번영이
손에 잡히기라도 할 듯이 진지하게 들려주던
주름살 많은 사내
한동안 그는 다시 침묵하리라
찬연한 복원의 날이 와서
그의 눈앞을 스치는 영광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기까지는
니사의 별 아래 외로이 앉아
주름살 하나 더 늘이리라
(이어짐)
첫댓글 그렇군요, 별에서 빛깔과 향기가 있고 니사의 온도가 높다는 것을 알게하는군요. 낯선 곳의 이야기이지만 좋은 글를 통해 간접적인 여행으로 동행하며 고독을 같이 느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