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리사이인과 세리의 기도 -
☆ 2014년 가해 3월29일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수원] 가슴을 치며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호세 6, 1 - 6
† 복음 : 루카 18, 9 - 14
★ 호세아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백성의 모습을 노래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셨고, 우리를 치셨지만 살려 주셨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드신다.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확신하고, 또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려는 자들에 대한 훈계의
말씀이다. 이 비유에는 겸손을 촉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의 기도에 깔려 있는 마음은 자기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며 느끼는 즐거움입니다. 곧 우월감과 교만함에서 나온 만족감입니다.
이 만족감은 세리와 자신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는 것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 벽을 누군가가 무너뜨리려 할 때 그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불안에 빠질 것입니다. 이 바리사이는 종교적 우월감에서 희열을 느끼지만,
오늘의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의 대상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 외모, 지위, 학벌, 성취도 ……. 그 공통점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에서, 또 다른 사람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데에서 얻는 기쁨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불행하고 슬픈 것이며 잘못된 것인지
알려 주십니다.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행복하고 구원된 사람임을 암시하십니다.
이러한 깨달음, 곧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서 가지는 우월감과 즐거움이,
남들과 형제로 느끼는 데에서 오는 기쁨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온몸으로 깨달은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튼입니다.
"루이빌 상가 중심에 있는 4번가와 월넛 가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리를 오가는 이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며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들의 것이며, 비록 서로 낯선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서로
이질적인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던 것이다. …… 다르다는
착각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에 너무도 안심하고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 감사합니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고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것에 감사드립니다"(『토마스 머튼의 단상`-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에서).
길에서 갑자기 그를 사로잡은 이 깨달음이 토마스 머튼에게는 자신의 영성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오늘 복음을 다시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이웃과의 소박하고 격의 없는 친교에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겸손한 죄인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루카18,9-14)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복음 : 루카 18,9-14
겸손한 죄인
성직자가 좋아하는 신자는 우거지 신자이고 싫어하는 신자는
원불교신자랍니다. 우거지는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원불교는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신자랍니다.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올바른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 보다 더
낫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해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게 된다면 알맹이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갖 선을 행하고 신앙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더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오로지 냉혹한
비판만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도 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죄인보다 못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순명한 후 주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면 죄로 얼룩진 과거의 삶이 보이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미래의 삶이 보일 뿐입니다. 주님의 소명이 나를 재촉합니다. 나의
허물이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 라마크라슈나 우화
한 수도원에 유명한 수사님이 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수도원 가까이에
매춘부의 집이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사내들이 매춘부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뜰에 돌을 하나씩 주워 모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돌무더기가 점점 커지자,
수사님은 매춘부를 불러 그 돌무더기를 보여주며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매춘부는 두려움에 떨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날 밤 죽음의 천사가 찾아와서 수사님도 매춘부도 함께 데려갔습니다.
그러데 어찌된 일인지 매춘부는 천국으로 가고 수사님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수사님은 항의 하였습니다. 일생을 금욕과 절제 속에서
하느님을 흠승하며 살았는데 왜 지옥으로 가야 하느냐? 일생을 간음죄만
짖고 함부로 살았던 여인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느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수사님, 하느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수사님은 평생
수도자라는 자만심과 명예만을 지키며 살면서 죄만 가릴 줄 알았지 사랑을
베풀 줄은 몰랐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도 구원합니다.
2014년 가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복음 : 루카 18,9-14
일주일만이지요? 중국 소주에서의 특강을 잘 마쳤고, 더불어 신부님들과의
모임도 잘 마치고 이렇게 다시 새벽 묵상 글로 복귀했습니다. 이번 주 동안
외국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는 교우들의 모습을 통해 많은 감동을
얻었고, 더불어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제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많은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간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갈 것을 이 공간을
빌어 약속드립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오늘부터 오랜 준비기간을 끝내고 프로야구 개막을 합니다. 이 야구를
보다보면 생각나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신부님께서는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 정말로 열심히 강론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준비한 만큼 사람들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었고,
또 많은 사랑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좋은 강론으로
다가선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아서 선배 신부님을 찾아가 이 고민을
털어놓았지요.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 야구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프로야구 타자 중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이 기껏해야 3할을 친단다. 10번
중에서 3번 정도 안타만 쳐도 아주 잘하는 타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
또 홈런 타자라고 해서 매번 홈런을 치는 것이 아니야. 어쩌다가 한 번 홈런을
치는데, 그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훌륭한 선수라는 호칭을 받는 것이야.
신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떻게 매번 안타를 치고, 매번 홈런을 칠 수
있을까? 때로는 평범한 아웃도 당하고, 그냥 서서 삼진도 당하는 것이 신부의
모습 아닐까?”
10할 타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매번 홈런을 치는 타자도 있을 수
없지요. 사제 역시 매번 좋은 강론으로 다가선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길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자신을 좋게만 꾸밉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깔고 뭉개는 것도 당연한 듯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는 과연
좋아하실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아시와 세리의 기도가 비교되어 나옵니다. 먼저
바리사이의 기도를 보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도짓도,
불의도, 또 간음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더불어서 주님 앞에서 ‘저 세리와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하면서 세리를 깎아내림이 문제였지요. 결국 주님께서 어떤 이를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옳음만을 주장하고 또한 다른 이를 낮추려는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세리의 고백을 더욱 더 기쁘게 받아주신 것입니다.
내 자신이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사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좋아하는 세리의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의로움을 고백하기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도 구원합니다.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힘에서 생기는 미덕이다(스피노자).
바위를 뚫은 화살
한나라의 명장 이광은 어릴 적부터 힘이 장사였고, 천성이 쾌활하여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산야를 달리며 사냥하기를 즐겼다.
그는 대단한 명궁이었는데, 그의 화살이 날아간 곳에는 어김없이 새나
짐승들이 쓰러져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산중에서 혼자 사냥을 하다가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밤새들이 우는데 그는 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풀숲에서 거대한 호랑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놀라 뛰는 가슴을 진정하고 급히 화살을 집어 들었다. 호랑이가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 화살이 빗나가면 그는 하릴없이 호랑이 밥이 되고
말 처지였다. 이광은 온 몸의 신경을 곧추세우고 호랑이를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호랑이가 분명히 화살을 맞았는데도 움직이질 않았다.
이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였다. 그가 쏜 화살은 바위 깊숙이 박혀 있었다.
기이한 생각에 그는 그 바위를 향하여 화살을 날려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살이 박히기는커녕 화살촉은 돌에 튕겨 나가고 화살대도 부러지고 말았다.
이광이 집에 돌아와 양자운이란 사람에게 이 일을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쇠붙이나 돌덩이라도 열수 있는 법일세'
상대가 호랑이라고 생각했을 때 날린 화살과 호랑이를 닮은 바위라고
생각했을 때 날린 화살의 모양은 같지만 그 날린 사람의 뜻은 엄청나게
다르다.
불가능은 없음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 쉽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성이면 감천이랍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평생공부 -하느님과 나를 아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호세6,1-6 루카18,9-14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복음 : 루카 18,9-14
평생공부 -하느님과 나를 아는 것-
평생공부가 하느님과 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평생학인이자 평생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배워가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도 없습니다.
졸업이 없어 죽어야 끝나는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평생공부입니다.
참 끝없는 앎의 욕구, 소통의 욕구입니다. 바로 이게 사람입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지하철을 타고가다 보면 무수한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바로 인간 소통의 욕구, 앎의 욕구가 얼마나 큰지 깨닫습니다.
정보의 바다, 지식의 바다입니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앎의 욕구를 채우려
하다보면 넓이만 있고 깊이를 결하기 십중팔구입니다.
하여 생각없는 인간, 영혼 없는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분별의 지혜가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공부중의 공부, 평생공부가 하느님과 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굳이 나에 대해 공부하지 않아도 하느님
공부에 전념하다 보면 저절로 나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겸손과 지혜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교만과 무지입니다.
오늘은 평생공부의 원리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자, 주님께 돌아가자.“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호세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떠나 방황하기에 삶이 복잡하고 혼란합니다.
주님께 돌아갈 때 삶은 단순하고 질서도 잡힙니다.
평생공부의 첫 원리가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주님을 잊고, 잃고 정처없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은 우리의 고향이자 참 앎의 원천입니다.
사실 돌아갈 곳은 주님뿐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호세아의 호소가 고맙습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우리를 진정 위로하시고 치유하실 분은, 평화를 주실 분은 주님뿐입니다.
저 역시 새벽 묵상후 강론을 쓰는 시간은 주님을 통한 정화와 치유, 평온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둘째, "주님을 알자“입니다.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아는 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앎과 나에 대한 앎은 함께 갑니다.
하여 주님을 알아갈수록 나를 알아 겸손과 지혜요 깊이의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수행은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호세아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마음에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호세아는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시인이자 신비가임이 분명합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은 자작 애송시 '봄비'가 생각납니다.
"하늘 은총,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같은 하느님입니다. 복음의 바리사이, 이런
하느님을 알았다면 자기자랑, 자기도취의 공허하기 짝이 없는 독백의 기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하며 남을 판단하는 죄도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던 바리사이입니다.
반면 세리는 하느님을 알았고 자신을 알았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의 하느님을, 죄인으로서의 불쌍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알았던
세리였습니다. 세상 똑똑한 이가 어리석은 이로, 세상 어리석어 보이는 이가
지혜로운 이로 들어나는 순간입니다.
셋째, "주님을 사랑하자“입니다..
순서로 하면 주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요 주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알 때 보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공부의 첫째 조건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해야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들이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될 때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주님 사랑에서 샘솟는 마음의 순수요 열정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첫째 계명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습니다.
호세아를 통한 주님의 호소가 구구절절 공감입니다.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정녕 주님을 사랑할 때 신의요 하느님을 아는 예지입니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거부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신의와 예지의 주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다정한 권고입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자, 주님을 알자.
자, 주님을 사랑하자..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복음의 세리처럼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회개하는 마음.
소나무 신부와 함께하는 마음의 산책
'아픔이 있었기에 당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2014년 가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루카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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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바리사이와 늘 죄인이라는 생각이 가슴 한 켠을
떠나지 않았던 세리.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너무도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판정은 세리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는 신자라면 바리사이의 기도가 너무 형편없었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반면 세리의 기도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판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입을 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니 어느 쪽이 자신의 삶과 비슷하기를 원하고 있을까요?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죄를 피할 수 있고, 겸손한
사람이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죄를 짓고 싶어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죄를 짓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죄짓지 않고 교만한 것보다 죄짓고 겸손한 것이 낫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리사이는 죄를 짓지 않아서 교만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리는 죄를 지었기에 겸손해진 것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는
근본적으로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율법조항에만 충실했던 사람이었을
확률이 크고, 세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생계는 이어 가게 했지만,
동족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가책에 시달린 사람이었을 공산이 큽니다.
오늘의 주제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바리사이도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살았다면 그 역시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세리도 끝까지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의 죄를 부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즉, 두 사람이 어떤 삶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두 사람의 태도는 정반대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세상을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분명히 피하고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죄와 동떨어진 곳에서 죄와 상관없이 이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안에서 산 것은 바리사이나 세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잣대로 죄의 크기를 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죄가 없어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지를 모르기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죄가 많아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가 만드는 아픔을 알기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슴을 치며"
2014년 가해 3월2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복음 : 루카 18,9-14
< "가슴을 치며" >
[TV동화 행복한 세상]은 실제로 있었던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1권에 나오는 ‘누나와 앵무새’란 제목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어머니는 벌써 몇 년째 앓아누워만 계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쪽찐 뒤 우리 남매를 불러 앉혔습니다.
어머니는 마치 먼 여행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슬픈 얼굴이었습니다.
“정수야, 누나를 부탁한다. 니가 누나의 목소리가 돼줘야 해. 그럴 거지?”
“엄마,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어머니는 말 못하는 누나가 마음에 걸려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다며 나의
손을 꼭 잡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며칠 뒤 우리 남매의 손을 그렇게
하나로 맞잡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먼 친척의 도움으로 야간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나는 서울에 직장을 얻어 상경했고 누나는 떼래야 뗄 수 없는 혹처럼
나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피곤에 절어 집에 돌아온
나는 누나가 집에 앵무새 한 마리를 들여놓고 동네아이들을 불러다가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주주... 주... 주우.......”
앵무새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아이들도 뭐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은 그 후로도 며칠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주욱.... 주욱.....”
천식환자처럼 그렁그렁 대는 앵무새는 그날부터 내 늦잠을 방해하고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제발, 저 앵무새 좀 치워 버릴 수 없어?”
나는 누나에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내 성화를 못들은 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생일... 추카... 생일... 추카!”
앵무새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누나가 건네준 카드에는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생일 축하한다. 내 목소리로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생일축하! 목소리가 없는 누나가 난생 처음으로 들려준 말이었습니다.
앵무새에게 그 한마디를 훈련시키기 위해 누나는 그렇게 여러 날 비밀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나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입 안 가득 미역국을 퍼
넣었습니다.
정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말을 못하는 누나를 자신 책임으로
맡겨주었기에 자신이 잘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행동뿐이었지, 마음은 자신에게 그런 혹이 있는 것을 불편해
했습니다. 그 누나가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를 들려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는지는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수는 외적인
행동은 있었지만 마음이 없었고, 누나는 행동으로는 거의 표현을 할 수
없었지만 따듯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오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매일 미사에 나오고, 교무금
십일조 내고, 많은 봉사생활과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단식을 자주하여
그 돈으로 이웃을 돕는 완전한 신앙인입니다. 문제는 자신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 자신처럼 살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는 매국노에다가 돈만 밝히는 사람이고 쾌락에 찌든 사람입니다. 다행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는 성전에 나와서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에겐 행위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이
사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한 것이고,
죄인이라 고백하는 이는 마음이 겸손해진 것입니다. 이 겸손한 마음은 오히려
그동안의 모든 죄를 씻어버릴 힘이 있지만, 아무리 잘 살아도 남을 판단할
정도로 높아져 있다면 지금까지 한 선행은 물거품이 됩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30센티 정도이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맙시다.
그리고 조금씩 행동이나 머리보다는 따듯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3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3월29일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복음 : 루카 18,9-14
어릴 때, 소풍가기 전날은 설레고,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그만큼
재미있는 일도 적었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저는 오늘 마치 소풍가는 날처럼
설레고,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처음 본당신부로 있었던 ‘적성성당’엘 가기
때문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제게 사순특강과 미사를 부탁했습니다. 15년
전에 저는 적성본당 주임신부로 있었습니다. 첫 본당신부로 있었고, 제게는
아련한 추억이 있는 본당입니다. 주말에는 쉬기 때문에 토요일에 가서 하루
자고, 주일에 미사와 사순특강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은 평일에는
신자들이 많이 올 수 없습니다. 교통편도 불편하고, 봄철에는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미사와 특강을 함께 하게 됩니다.
꽁꽁 얼었던 임진강에서 썰매 타던 일, 아이들 태권도 가르치던 일, 신자들과
주문진으로 가족캠프 가던 일, 김수환 추기경님 모시고 대림특강 듣던 일,
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 치우던 일, 눈 내린 성탄절에 가족 노래자랑 하던 일,
백학 저수지에서 낚시 하던 일, 매 주일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3년 동안 있었는데 저의 사제 생활은 그 3년이 샘물 같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면 적성에서의 생활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기운이
나고, 용기가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잘 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서울의 큰 성당에서 사목을 하는 것도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사목을 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불평하면 불평할
일만 생기기 마련입니다. 감사드리면 감사드릴 일들이 찾아옵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 진다고 말을 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희망은 함께 할 때 현실이 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주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주말을 지내는 분들에게 구상 시인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내 탓이요, 너의 큰 탓이로소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순 제3주간 토요일(2014년 3월 29일)
내 탓이요, 너의 큰 탓이로소이다.
수도자나 성직자들, 혹은 성당에서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신자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은 영적으로 교만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많이 범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자리에 서서 잣대를 사람들에게 들이대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십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독백이며 자아 칭찬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단죄하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 자리로
한껏 들어높힙니다. 영적 교만으로 똘똘 뭉쳐있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자기
자신은 기도하는 줄로 여깁니다. 교만이 영적으로 마음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철저히 마음이 무너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아 우리가 미사 참회 예식에서 하는
것처럼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며 가슴을 치고 참회합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참된 의인으로 높여집니다. 거짓 의인은 우스게 말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너의 큰 탓이로소이다” 한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은 거짓 의인입니까, 의로운 죄인입니까?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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