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전담
인터넷으로 구매한 물건이 택배로 배달되어 왔습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어서 구입했는데, 문득 들은 생각이 있습니다.
‘또 짐이 하나 느는구나.’
책이야 다 읽고 나서 제가 현재 생활하고 있는 갑곶성지의 ‘작은 도서관’에 내려놓으니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누구에게 주자니 상대방이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고, 가지고 있자니 짐입니다. 또 버리자니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물건이 외치는 것만 같습니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소유할까요? 정말로 많은 것들을 소유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분은 살아가는 행위가 소유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로는 소유하는 즐거움 때문에 삶이 즐거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작정 소유하는 것에만 집착하다보면 인생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제 조그마한 방 하나에 있는 많은 물건들을 보면서, 문득 ‘죽고 나면 다 남겨두고 떠날 것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정신이 번쩍 듭니다.
무소유를 강조하신 법정 스님의 글입니다.
“우리들은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가진다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진정한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완연한 봄을 느끼는 이 4월이 되었습니다. 올해 4월은 교회력으로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성주간이 있으며,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삶 전체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노력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삶,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삶을 지향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도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이 땅에 오셨고, 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이 땅을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 세상 안에서의 소유를 늘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소유를 늘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보화는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사랑을 내 삶 안에서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보화를 쌓는 우리의 노력은 얼마나 해야 할까요? 우리가 너무나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모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실 성모님의 삶 전체가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노력이었습니다.
예수님 잉태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낮추면서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헤로데를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을 갈 때에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에도,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자신의 품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았을 때에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맞추셨습니다. 성모님의 삶 전체가 세상 안에서는 가장 어렵고 힘들게 보이지만, 평생에 걸친 순명과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치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치과 가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곧바로 치통이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치통이 완전히 치유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통제는 단기적인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에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치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근본적인 치통을 없애는 방법은 그토록 가기 싫은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단기적인 만족이 아니라 지속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단기적인 만족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진통제와 같은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면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지요.
지속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통해 이 세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 영원한 보화를 비로소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모습이 그 순간에는 불만족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 참 기쁨과 희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결심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실천해야
이제는 실천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깃줄에 참새 다섯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 중 한 마리가 날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면 전깃줄에는 몇 마리의 참새가 남아 있을까요? 정답은 다섯 마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결심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맞습니다. 결심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많은 결심을 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변화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결심이 내게 이루어지는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지금 해야 할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떳떳한 마음으로 주님을 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던 우리들, 특히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에 대해 ‘나중에’만을 외치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이웃들을 멀리하면서 과연 주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요? 주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만큼 하늘나라 안에서의 행복도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참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는 이제 결심과 함께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을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 안에서 지금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내 것’을 늘리는 것보다, ‘내 것’을 나눠주는 사랑의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하늘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 출처: 원글보기;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019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