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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묵상글 들 (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 관계 성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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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관계 성찰
어제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이어 오늘 디모테오와 디도 축일을 지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깊은 연관성이랄까 관계성 때문이지요.
두 분은 바오로 사도가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는 개인적 친분의 관계일 뿐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지역 교회의 책임자로 임명한 대리자들이요 동반자들이었지요.
이런 관계를 보면서 우리는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를 성찰해야 하기에 오늘은 저의 관계들을 성찰해봤습니다.
저의 관계들을 돌아보니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일 안 좋은 관계들로 저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관계들입니다.
성향이나 취향이나 관심사나 가치관 같은 것이 다르기에
아예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경우이고 그래서
어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관계들입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두 번째가 문제입니다.
저의 인격적 결함과 일하는 방식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저와 얽히기를 거부하는 관계들입니다.
저의 교만이나 독선이나 위선이나 권위주의적인 면 때문에
저와 얽히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제일 쓰라린 경우이고,
제 옆에 있으면 찔릴까 봐 피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세 번째 관계는 저를 지지하고 제가 하는 일을 후원하는 관계입니다.
앞서 봤듯이 제가 인격적인 면에서 결함이 많지만
제가 하는 일만은 좋게 보기에 지지하고 후원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제 옆에 있으면 데일까 봐 적당히 거리를 두는 관계들이지요.
이에 비해 네 번째는 데이고 고달파도 제가 하는 일을 함께 하는 관계들입니다.
말하자면 동역자 관계들인데
이 동역자들은 저로 인해 찔리고 데일지라도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느님 때문에 저와 함께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너무도 고맙지만
그런데 고마운 데는 늘 미안함이 같이 있잖아요?
특히 미안한 것은 제가 바오로 사도 같으면
동역자들이 받은 은사를 불태우도록 옆에서
그 불을 북돋아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오늘 디모테오 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저의 동역자들에게 그리하지 못하고,
스스로 힘을 내고 불사르라고만 하기에 저의 동역자들이 결국은
지쳐 나가떨어지게 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고 미안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소리를 많이 듣지 않지만
옛날에는 종종 제게 카리스마적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리가 진정 카리스마 곧 은사를 사는 사람이라면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도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도
은사를 불태우도록 같이 불을 살라야 함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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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예수님께서는 일흔두제자들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돈주머니 대신 당신께 대한 ‘믿음의 주머니’를 차고 여행보따리 대신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자신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자신의 평화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평화’는 또한 부활의 첫 번째 선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도 평화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루카 24,36). 그리고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라 하십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말고 친교를 나누며, 동시에 이는 “차려주는”대로 먹으로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곧 유대 율법에 따라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차려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함을 말해줍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 하심입니다.
그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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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 하시며 홀로서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사는 왜 하는가? 생각해 보면, 사랑과 존경에서 합니다. 인사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잘 보이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또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은 잃은 채 껍데기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인사까지 하지 마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한눈팔지 마라’,‘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소명을 들었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지 어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되겠습니까?
언젠가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며 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끊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오로지 주님 안에 머물라는 사랑의 충고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인사를 하다 보면, 다시 말해 사람에게 매이다 보면 진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는 일깨움을 주십니다. 사람이 정에 매달리다 보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주님의 눈 밖에 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이사61,10).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즐거워해야 하거늘 인간적인 욕망이 왜 그리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바오로는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테오 1,8). 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갈망하는 오늘을 겸손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을 거쳐 손발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한편 수확할 일꾼이 적다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작 나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입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손길에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주일 미사 중 신부님의 강론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성당 안에 요란한 총성이 울렸습니다. 놀란 신자들이 저마다 납작 엎드리거나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쥐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아주머니가 부랴부랴 꼬마를 안고 성당 문을 향했습니다. 문가에 이르렀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나갈 필요 없다’며 말했습니다. “난 사람들이 오늘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댁의 아들은 신부님이 1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한 거라구요!”할아버지는 총성이 꼬마의 장난감 총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역시 삶의 경륜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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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도의 기념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도 바오로가 선교여행 중에 만난 이들 가운데 눈여겨보았다가 선교의 협력자로 삼아서 제자 훈련을 시킨 후 에페소와 크레타에 파견한 선교사입니다. 이 두 사람말고도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였다가 제자가 된 이들은 여럿이 더 있는데, 루카(콜로 4,14), 에바프로디토스(필리 2,25), 실라스(사도 15,40), 마르코(필레 1,24), 아리스타코스(필레 1,24), 데마스(필레 1,24), 프리스카와 아퀼라 부부(로마 16,3) 등이 그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개척선교 노선은 이들 협력자와 제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교회에 자리잡게 되었고, 후대 역사를 통해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의 선교는 개척적인 특징이 많았습니다. 그가 사도단에서는 비주류 출신이어서 끌어주는 사람도 없고 함께 할 이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시작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러니 불러주는 데도 없는 데 무작정 찾아나선다든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굳이 천막 만드는 험한 노동을 해 가며 스스로 수입을 충당한다든가, 그냥 세례를 주고 떠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신앙으로 공동체를 이룰 때까지 기다린다든가 하는 그의 선교활동 특징들이 자칫 이어받는 후계자가 없으면 중단될 수도 있는 불안정성을 내포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정하게 사도 바오로가 시작한 복음화 과업이 중단되지 않고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스 일대 섬들에서 지속되었음을 알려주는 이들이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두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파견기사는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루카만이 기록해 전해주는 이야기인데, 파견된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신앙적 원칙과 파견지에서 지켜야 할 수칙은 열두 제자의 파견기사와 동일하지만, 파견되는 제자들이 일흔 두 명으로 늘어났다는 점이 눈에 띄는 차이점입니다. 이 일흔두 명의 제자들은 애초에 열두 제자들이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합류한 예순 명의 아나빔들이라고 추정됩니다. 초대교회의 주류가 된 이들은 예수님께서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보내달라고 청하여 받으신 일꾼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보면, 예수님 이래로 교회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일꾼은 늘 부족했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이 만성적인 성소 부족 사태의 해결책은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 단 하나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되, 기도로 청할 때에는 “청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기도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마태 21,22). 여기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는 일이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는 일”로서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곁들여 얻어지리라(마태 6,33)고도 일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짚어 보면, 기도에도 믿음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오로 시대에도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일을 하면 됩니다. 관건은 믿음입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당부한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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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옛날에 읽었던 동화책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그에는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 사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동생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자기 방에 왕이 입는 옷을 벗어 놓은 채 외출했습니다. 쾌락에 빠져 있던 동생은 형인 임금의 외출 소식을 듣고는 방에 들어가 임금의 옷을 입어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임금이 되면 얼마나 즐거울까?’
왕의 옷을 입고 있을 때, 형이 갑자기 들어와서 외칩니다.
“반역이다. 이 자를 체포해서 처형하라.”
동생은 그냥 한 번 입어본 것이라면서 자비를 청했지요. 그러자 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동생이니 특별히 배려해 주겠다. 네가 왕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니 앞으로 일주일 동안 왕의 모든 권한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처형할 것이다.”
일주일 뒤에 왕이 동생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왕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는데 즐거웠냐?”
동생은 울면서, “곧 세상을 떠날 걸 알고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단 하루도 편하게 잘 수 없었습니다.”라면서 말했습니다. 왕은 웃으며 말합니다.
“이제야 깨달았구나. 너는 반드시 세상을 떠난다. 일주일 후든, 7년 후든 아니면 70년 후든,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쾌락만 좇을 수 있겠느냐?”
이처럼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좇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수확이라는 이미지는 구약성경에서 세상 종말에 가서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들이는 종말론적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전교 활동의 주의사항은 여행에 필요한 용품 등을 준비하여서 다니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준비를 못 하는 우리입니다. 하느님께만 온전히 맡기는 삶이 아닌, 세상의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것으로만 착각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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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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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게 살기
독일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1분에 30걸음을 걷는 속도로 넓은 실험실 안을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평소 속도의 1/3 속도였고,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의 평균 속도였습니다.
이 짧은 실험이 끝난 뒤 학생 참가자들은 ‘깜빡하다’, ‘늙다’, ‘외롭다’ 등 노인과 관련된 단어를 훨씬 빨리 알아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노인을 생각하도록 촉발했던 행동이 노인과 연관된 단어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노인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젊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젊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희망, 도전, 열정…. 반대로 늙게 살고자 한다면 절망, 좌절, 포기 등의 생각을 하면 될 것입니다.
희망의 주님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떤 생각을 해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젊은 생각을 해야지만 희망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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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6년 5년 전입니다. 한국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이 있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사람과의 바둑이라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바둑은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인공지능 알파고이 승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능력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이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생명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식, 사육, 재배’라는 이름으로 다른 생명의 숫자를 조절하였고, 우리의 입맛에 따라서 유전자 조작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공지능이라는 프로그램을 인간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은 많은 정보를 알고, 계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공지능에 비해서 정보의 양이 적고, 계산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아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입력하고 나서야 모르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첫 눈에 모르는 것을 압니다. 정보를 다 입력하지 않아도 ‘몰라’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몰라’라고 쉽게 말 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는 하느님께서 천사보다 약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그 자유의지와 초월적 자아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자유의지가 겸손과 만나면 타인을 위해서 목숨을 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교만을 만나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희망과 만나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절망을 만나면 풍요 속에서도 근심과 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고, 성인과 성녀들이 따라간 길이고,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욕망의 덫에 걸리면 하느님의 아들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했던 큰 아들이 되고 맙니다. 헤로데가 그랬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가 그랬습니다. 제도와 직책으로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과 인내 그리고 믿음과 희망으로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난이 다가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만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늘 기도하고, 언제나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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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스승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
- 훌륭한 제자의 삶 -
“성인이 되십시오.”
“참사람이 되십시오.”
“훌륭한 사람이 되십시오.”
면담고백성사시 자주 드리는 조언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라고 불림 받았습니다. 참 기쁨도, 참 행복도 성인이, 참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있습니다. 참 중요한 필생의 목표가, 과제가 성인이, 참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이런 근원적 갈망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평생 공부는 이런 성인이 참사람이 되는 공부일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공부입니다.
요즘 부모들로부터 자녀들과의 소통부재에 대해 많이 듣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고의 젊은 세대를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삶의 스승처럼 본보기가 되었던 부모들만은 예외입니다. 참으로 부모의 믿음을, 사랑을 보고 배웠던 자녀들은 이런 혼란한 사회 현실중에도 신앙생활에 충실합니다. 정말 신자 부모들이 물려줘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은 신앙임을 절감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라는 말마디 안에는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참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보고 배워야 할 참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참 스승이자 주님으로 모시고 평생 배우며 살았던 분이 우리 가톨릭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어제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이어 오늘은 사도의 참 아끼는 제자이자 협력자이자 동반자인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역시 스승 예수님에게서 보고 배운 후 파견되는 제자들입니다. 파견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제자들의 우선적 일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기도할 수 뿐이 없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기도를 당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정말 좋은 일꾼들을, 좋은 성소자를 보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기도와 더불어 우리 자신이 좋은 일꾼으로, 좋은 성소자로 살게 될 것이며 적절한 때 주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바오로 스승이 제자 티모테오를 위한 기도와 격려는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죽음을 앞둔 수인 바오로의 감옥에서의 유언같은 편지입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 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이런 바오로 사도의 감동적이고 진정성 넘치는 감사와 격려의 말씀, 그대로 기도의 열매임을 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스승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제자 티모테오를 사랑한 ‘기도의 사도’ 바오로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무욕無慾의 삶입니다.
무욕의 지혜, 무욕의 겸손입니다. 파견된 삶을 사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부하는 무소유의 정신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에 충실할 때 주님 친히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참으로 이리 떼 세상 한 복판에서 홀가분한 무집착의 자유로운 복음 선포자의 삶을 촉구하는 예수님이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문자 그대로가 아닌 무소유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복음 선포의 본질적 사명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충고도 아주 간명하고 분명합니다. 가능한 환대하는 교우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고 참 좋은 평화를 선물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일꾼으로 파견 받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기도도, 무욕의 삶도, 치유의 힘도 여기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우리 또한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하느님 나라와 치유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저절로 치유입니다. 절망보다 치명적인 병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비전이 우리를 건강히 살게 하는 최고 처방의 명약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되고 영원하신 스승이시고 주님이시며, 우리는 파견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1.늘 기도하며 삽시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2.늘 무욕의 삶을 삽시다. 무욕의 지혜요 겸손입니다.
3.늘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삽니다.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최고의 명약입니다.
한결같이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주님의 참된 제자의 삶, 훌륭한 성인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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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사랑한 제자들로,
사도의 선교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협력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다음 날인 오늘 두 성인의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으시어,
당신께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복음 선포로 하느님 나라에
모아들여야 할 온 세상 백성이 수확물에 비유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온 세상을 향하는
커다란 수확의 시작이었고, 이제 이를 함께할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을 각각
“사랑하는 아들”과 “착실한 아들”이라 부릅니다.
바오로 사도가 두 성인과 함께 펼쳤던
활발한 선교 활동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가는 곳 어디에서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으로 함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도, 칼도, 그 무엇도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향한 열정을 막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로마 8,35 참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음 선포의 여정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어려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하여 파견되는 제자들은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무장하여 온전히
자신들의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 일흔두 제자, 바오로, 티모테오, 티토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름 모를 제자가 흘린 땀과 피를 기억하며,
우리도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복음 선포에 투신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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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추구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아마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첫 선교여행 중에 개종한 것 같다. 티모테오는 바오로와 같이 두 번째 여행과 세 번째 여행을 함께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겼다.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카와 코린토의 공동체들을 맡겼다. 사도는 그에게 신약에 정경이 된 적어도 두 서간을 남겼다.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가 첫 번 감옥에 있는 동안 가까이 있었고 그 후에 에페소에서 주교직을 행하였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두 번째로 로마의 가는 길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또 다른 협력자인 티토는 이방인 가정의 출신이었다. 사도는 그도 사도의 첫 여행 중에 개종시킨 것으로 보인다. 티토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까지 동행하였다. 티토는 코린토와 사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바오로가 남긴 서간에서 이미 크레타의 사목자로 나타난다. 성 바오로는 그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면서 에피로에 있는 니코뽈리와 일치하라고 적고 있다. 그는 달마치아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을 이루어 당신에 앞서 보내셨다. 왜 그랬을까? 이 두 사람은 이리 같은 세상에 먹이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두 제자는 그들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간 것이다. 사랑으로 모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은총이 되게 하시려고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일까? 어느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일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이 구원사업을 위해,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일꾼들을 위해, 또한 더 많은 일꾼이 나오도록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우리 가운데서 배출해야 한다.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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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 2)
수확의 여정은
일꾼의 여정입니다.
일꾼은 수확을 통해
일꾼다운 일꾼이
되어갑니다.
수확을 통해
놀라우신 하느님을
만나게됩니다.
소중한 일꾼이며
소중한 추수밭의
모습입니다.
수확의 영역 안에는
일꾼도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일꾼은 일꾼의
역할을 다하며
점점 수확의 여정을
사랑하게 됩니다.
일꾼의 손길과
발자국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일꾼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또한 사랑할
수확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확할 것과
일꾼들을 가치있고
아름답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오늘도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기도로 오늘을
봉헌합니다.
일꾼도 수확할 것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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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과 선교활동>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예수님 말씀은 선교활동에 대한 지침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에 대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함께 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줌으로써 새로운 일꾼을 모집하는 생활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신앙인의 기본 의무이고,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일은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신앙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요한 15,19),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말씀 뒤에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10,16).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랑 실천’입니다.
‘슬기로움’은 성령의 은사이고(1코린 12,8),
‘순박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얻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이 말씀은, ‘세속 일’에 연연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은 ‘돈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돈이 많으면, 또 세속의 인맥이 많으면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런 생각은 세속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실제로 돈이 많다고 해서, 또 세속의 인맥이 많다고 해서,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더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예수님)의 방식’으로 해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신앙인의 의무이지만,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그 책임은 받아들이지 않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복음 선포가 기대했던 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고,
반대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되더라도 잘난 체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뿐이며, 일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7-8).”
이 말씀을 “주는 대로 먹어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호의호식하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여기서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9).”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고,
또 누구든지 믿고 회개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은(또는 병자들을 보살피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주는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지이고,
그것을 전해 주는 일은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일입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0-12).”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기쁜 소식’ 자체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은 ‘멸망을 경고하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실제로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먼지를 털어 버리는 동작은, 심판 때의 멸망을 상징하는 동작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 없이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은,
마치 신발에 묻은 먼지가 털리는 것처럼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후회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해 주려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씀은,
‘심판’이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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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 한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는 삶 ♣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1,8)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인 티모테오와 티토의 기념일입니다. 47년경에 개종한 티모테오는 15년간 온갖 어려움 중에도 바오로 사도의 선교여행에 함께하면서(사도 16,1-4) 박해 중인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격려하고, 코린토 신자들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가 체사레아에서 투옥되고 또 로마로 이감될 때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후 그는 에페소로 가서 그곳의 초대 주교로 봉사합니다. 그는 디아나를 공경하는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티토는 개종한 뒤, 바오로 사도의 비서가 되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합니다. 그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이끌 임무를 맡습니다(티토1,5). 그는 코린토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바오로 사도의 부탁을 받고 파견되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합니다. 그 뒤 크레타의 주교로 축성되어 바오로 사도의 복음선포 활동을 이어가다 달마티아를 방문한 뒤 크레타에서 선종한 듯합니다.
오늘 복음말씀과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의 삶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면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10,4)고 하십니다. 곧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하느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닌 재물이나 인간의 힘에 의존할 때 결코 복음은 선포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복음은 삶의 한가운데서 선포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까닭은 인간을 당신 관계 안으로 끌어들이시고,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어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슬픔과 고통, 불의와 빈곤, 차별과 소외가 존재하는 '지금, 여기' 삶의 복판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 해방과 자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10,5-9). 한마디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선을 전하는 것이 곧 복음선포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면 나 자신이 기쁨의 존재가 되고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품고 어디서나 선을 발생시키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끝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성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과 박해를 견뎌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려면 그런 고통을 견디고도 남는 큰 사랑이 있어야겠지요. 나아가 단지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헌신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태도일 것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불린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지니고,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항구히 복음을 선포했으면 합니다(2티모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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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에 충실하기 위한 과감한 가지치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힘차게 시작하신 복음 선포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협조자들이 열두 사도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루카 복음사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루카 복음 10장 1절)
열두 사도의 이름은 복음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일흔두 제자의 이름은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 그 어디를 샅샅이 살펴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저런 정황들을 고려할 때, 몇 명의 사람을 유추해볼 수는 있습니다.
바르나바가 확실히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공감합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갈라티아서 2장 9절)
소스테네스도 일흔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추정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드립니다.”(코린토 전서 1장 1절)
교회 전승은 유다 대신 사도로 뽑힌 마티아와 또 그와 함께 후보로 지명되었던 요셉 유스투스도 일흔두 제자에 속했다고 전합니다.
요셉 유스투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자리에는 더 많은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사도행전 1장 15절)
어디 그뿐인가요? 바오로 사도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코린토 전서 15장 3~6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 홀로가 아니라 열두 사도와 함께, 그 둘레에 일흔두 제자, 150명의 제자, 500명의 형제들이 복음 선포 대열에 합류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모습, 정말 장관이었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역시 너무나도 당연히 그들 무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일흔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시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마치 바로 옆에서 제게 건네는 말씀 같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복음 10장 2~4절)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 선교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우리로부터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예수님께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 충실하기 위해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대한 과감한 가지치기를 요청하십니다.
복음적 청빈과는 너무나도 멀어져 버린 오늘 우리의 발밑을 슬픈 눈동자로 내려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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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은사 불 붙이는 법: 고통과 멸시의 부싯돌을 사용하라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성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는 성 바오로 사도가 ‘안수’를 통해 지명한 지역 주교들입니다.
안수는 자신이 받은 은사를 전해주는 교회의 오랜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이 말씀은 ‘은사’는 내가 불태우려는 노력이 없으면 불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치 자동차의 기름처럼 내가 시동을 걸고 달려야 불탑니다.
사제들도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은 그 은사를 받은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는 그 은사를 사용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목 서간을 통해 그 은사를 불태우는 방법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불태우는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청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실 때 “고통과 멸시를 주십시오”
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이 받은 은사를 무용지물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청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이 형제 중에 선택되어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바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도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그는 그 은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다윗은 그 은사를 믿고 골리앗과 맞섰습니다.
그 무모한 도전이 은사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우리 상황을 어려운 처지에 몰아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은사에 불이 붙습니다.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십자가와 결합할 때 후광이 되는 것입니다.
김경일 인지심리학 교수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런 실험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1반부터 4반까지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 있는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 각기 30분씩 들어갑니다.
여러 도형이 15개 그려진 그림을 보여줍니다.
1반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들아, 너희는 이 도형 중 각자 5개씩 골라서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들어봐라.”
그러면 아이들은 특이한 도형은 절대 고르지 않습니다.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입니다.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네모와 동그라미 등으로 기차나 자동차를 만듭니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집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젠 2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들아, 마음에 드는 도형 다섯 개 골라라.”
그러면 아이들은 특이한 도형들을 고릅니다.
그제야 이렇게 말해줍니다.
“네가 고른 다섯 개로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들어봐라.”
아이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꽤 재미있고 신기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젠 3반에 들어갑니다.
거기서는 도형을 아예 안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들려면 무엇을 만들래?”
지구 평화를 지키는 로봇, 남북통일을 시킬 수 있는 무기, 영원히 충전하지 않아도 되는 스마트폰 등
엄청난 것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도형들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말한 것을 이 도형 중 다섯 개를 골라서 만들어봐라.”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다섯 개를 골라서 작업을 합니다.
4반에 들어가서는 마찬가지로 먼저 만들고 싶은 것을 정하게 하고 나중에 도형을 보여준 다음에 다섯 개를 고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다 골랐으면, 옆 사람과 바꿔!”
경상도 학교에서 이 실험을 할 때 한 아이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교수님, 이거 아동학대 아닙니까?”
결과는 평범한 3반과 4반 아이들이 만들어낸 것들이 우리나라 3학년 아이 중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아이들에게 같은 그림으로 만들라고 한 것보다 창의력 점수보다 2~3배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은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자신의 능력을 더 끌어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아드님이 돌아가실 때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희생, 그것은 고통과 멸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여 발휘되고 있지 못한 능력들은 가장 먼저는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고, 그다음은 우리가 우리 환경을 십자가의 고통과 멸시의 환경으로 만들지 못해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발휘된다는 것을 믿으면 못 할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을 어려움 속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것도 능력입니다.
슈퍼맨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슈퍼맨이 한 인간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갈 때는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토네이도에 날아가 사망하기 직전에도 아들은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 없어서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죽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새로 태어납니다.
자신의 참 아버지, 곧 자신이 타고 온 우주선에 입력된 아버지의 말을 통해 진정한 슈퍼맨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배트맨도 부모의 죽음으로 탄생한 캐릭터입니다.
모든 히어로가 탄생하는 데 나의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누군가의 죽음이 전제되지 않는 히어로는 하나도 없다시피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능력과 은사가 있어도 그것을 누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나를 지배하고 있는 나의 자아입니다.
그 자아가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것은 고맙지만
이제 참 아버지의 능력이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비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아가 나 자신이기에 나 자신을 죽이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서는 세례 때 받은 아버지의 능력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나를 죽이는 고치가 되는 작업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장 좋은 방법이 ‘고통과 멸시’를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이 뭐 중세시대냐고 말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 라고 말하며,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또 그분 때문에 감옥에서 고통당하는 자신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며,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 안의 은사가 어떻게 발휘되는지 명확히 안 것입니다.
추워 얼어 죽어가고 있는 동굴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기름을 받았습니다.
그 기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부싯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부싯돌을 십자가를 위한 ‘고통과 멸시’로 보아야 합니다.
이 두 부싯돌을 부딪치면 불꽃이 튀어 내 안의 은사에 불을 붙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필요한 진정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에 머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복음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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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 티모테오 주교와 성 티토 주교-묵상과 기도
성 티모테오와 티토는 바오로 사도의 제자며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습니다. 티모테오는 에페소 교회를, 티토는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둘째 서간’과 ‘티토에게 보낸 서간’은 교회 지도자와 신자들이 지켜야 할 지침, 도움과 권고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음의 아들로 여기는 그에게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의 믿음이 깃들여 있음을 고마워하면서 하느님의 은사로 다시 불태우라.고 권고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외에 칠십 이 제자를 파견합니다. 그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이 몸소 가려는 고을에 그들을 앞서 보내시며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주십사고 청하라.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2티모 1,1-8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0,1-9
실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열두 제자들을 각 고을에 파견하시고 또한 칠십 이 제자들도 파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장에 그들을 앞서 파견하시며 둘씩 보냈습니다. 칠십 이 제자들을 파견한 것. 삼십 여 고을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곳, 또 다른 고을의 수확을 위해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주십사고 청하라. 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 위한 일꾼을 위해서 요청의 기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의 복음 파견의 차림이 풍족함이 아니고 넉넉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 선포에 온전한 준비를 이룬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린 양이 이리떼 앞에 있는 것.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고 중간에 멈추지도 말라. 고 하였습니다. 가난과 겸손의 자세로 떠나가라. 그리고 단지 어느 집에서든 평화를 빌어주고 거룩한 일꾼으로 병자를 고쳐주라. 그 집에서 머무르면서 먹고 마시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마라. 고 하였습니다.
복음 선포는 가난과 겸손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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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한 부분입니다.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다가 다시 독서의 이 말씀에 멈칫했습니다. 저는 숨기고 싶지도 않고 솔직한 저의 감정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를 향해 한 말씀입니다.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그것도 끊임없이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하게 아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상이 다르지만 아끼는 것은 주로 연배가 높은 사람이나 직위가 높은 사람이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향해서 하는 행동으로 최소한 동등한 위치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저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역활이 바뀌었습니다. 아낀다는 의미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먼저 사전적인 의미를 떠나서 아낀다는 말은 제일 먼저 절약한다의 의미가 가장 많이 연상될 수 있을 겁니다. 또는 소중한 것을 조금씩 사용하는 거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건 굳이 사람 인간 세상에서 서열과 같은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논외로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마치 나라를 지키는 것 하면 군인만 연상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군인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이가 어려도 윗어른을 깍듯이 예의를 다해서 소중하게 또 마음을 다해 존경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은 성별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학벌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사회적인 지위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티모테오를 아끼는 마음처럼 저는 그런 마음으로 육적인 피를 나눈 분은 아니지만 저는 마음으로, 영적으로는 육의 형제보다도 더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분이 계십니다. 저희 본당에 계시는 스물두 살 연상이신 자매님이십니다. 때론 어머니처럼, 때론 이모처럼, 때론 심지어는 옆집 누나처럼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제가 이분을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분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지금 그분을 뵌 지 한 달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연말에 문자만 남겼습니다. 인사만 드렸던 것입니다. 혹여나 제가 문자를 드리면 또 답장도 하시게 하는 그런 번거로움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 제가 문자에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으니 답장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자매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예전엔 그렇게 해도 답장을 주시거나 어떨 경우엔 바로 전화를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는 정말로 죄송한 일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성모님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미사 참례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꼭 그분 댁 앞을 멀리서 지나가면서 봅니다. 댁을 보면서 자매님 얼굴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운전을 하고 갈 때는 하필 그 부분에서는 코너를 도는 위험한 구간인데도 속도를 늦추어서 창문을 한 번이라도 보고 지나갑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이해를 할 수 있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저을 보고 사오정 같다고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조금도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그건 정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또 정말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사랑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어떻게 전달이 되는지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순수한 사랑은 말과 특히 목소리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눈빛입니다. 얼굴은 양보해서 가면을 쓴다고 해도 눈빛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절대 숨길 수 없습니다. 제가 그분을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분께서 저에게 주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3년 전쯤에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을 때 첫마디 인사말씀 "베드로야! 잘 있제" 하는 말씀. 글로써는 잘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감정이 들어간 그 말씀은 아마 제가 하늘나라 갈 때까지 치매가 걸리지 않는 이상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특이한 감성이 발달된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37년 전 처녀 영어 선생님의 눈빛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입니다. 특히 그 선생님 덕분에 제가 영어를 좋아하게 된 것이지만 사실 그분은 처녀 땐 이국적인 외모였는데 졸업 후에 진주에서 8년 만에 인사를 드렸을 땐 시집도 가시고 애도 있고 하셔서 그런지 이국적인 모습은 다 사라지셨기는 했습니다. 졸업 후 어떻게 어떻게 경찰서의 도움으로 지금 같아서는 통신비밀보호법 때문에 할 수 가 없지만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게 되어 선생님을 진주에서 뵙게 되었을 때 마치 중학교 시절로 되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는데 처음 만나뵈었을 때 순간 놀랐습니다. 예전의 그 모습이 어디로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마치 그 선생님께는 세월도 비껴갈 것 같은 착각을 가진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학원을 경영하면서도 여학생들도 제가 남자 선생이지만 왠만한 여자의 감성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이런 부분에서는 독특하고 이상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감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저는 그 자매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감정은 절대 가식적인 감정으로는 천하의 명배우라도 그런 연기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진실한 감정이 배어 있고 그게 목소리로 그대로 전달된 것입니다. 순수하고 맑은 감정이니 아마도 그 감정의 주파수가 울리는 공명이 더 커게 되어 저에게 전달이 돼서 그런지 저는 그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분은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에는 미스코리아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는데 이젠 그 말씀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젠 세상 나이로 일흔 셋인데 설령 제 마음이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을 것 같기 때무입니다. 그래도 미스코리아랑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 제 눈에는 아직도 제가 어려서 50대 아주머니를 바라본 그런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분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모르겠지만 근 1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분에 대해 조금도 좋지 않은 이야기와 또 험담을 한 번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이것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미처 이분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분이 많으실 겁니다. 저는 남들이 보지 못한 그런 부분을 이분에게서 많이 봤기 때문에 단순히 존경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 안에서 흠모합니다. 흠모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그리고 우러러 따른다의 의미입니다. 이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말씀 한 구절 때문에 자매님이 많이 생각나서 이런저런 싱거운 이야기만 했는지 모르겠네요. 자정 전에 그냥 독서와 복음만 묵상하고 자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새벽 1시 40분이 되었습니다. 6시에 기상해야 돼서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분은 항상 가슴속에 기억으로 남는다는 게 제가 드리고 싶은 뜻입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수정처럼 순수하면 그 마음을 받는 사람은 무한감동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ps 잠이 쏟아지려고 해서 내용을 점검하긴 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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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제1독서(2티모1,1~8)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6~7)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의 은사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과거 자신이 안수했을 때 하느님께서 티모테오에게 주셨던 은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구절은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의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말씀과 상통한다.
물론 표현의 차이는 다소 드러나지만, 이 둘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에서는 티모테오에 대한 안수가 원로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내 안수로'로 언급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디아 테스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 무'(dia tes epitheseos ton cheiron m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by the putting on of my hands)에서 전치사 '디아'(dia)는 '~에 의해서'( by), '~을 통하여' (through)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곧 '나의 안수를 통하여'가 된다.
그렇다면,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의 개인 안수를 받은 것인가? 아니면 원로단의 안수를 받은 것인가?
당시 초대 교회의 관례를 보면, 티모테오는 원로단의 안수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안수를 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티모테오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자신(2티모1,1)의 계승자요, 대리자요, 영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은사'로 번역된 '토 카리스마 투 테우' (to charisma tu theu; the gift of God)에서 '카리스마'(charisma)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리스마'는 본래 '거저 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리죠마이'(charizomai)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코린토 1서 1장 7절, 코린토 2서 1장 11절, 로마서 1장 11절 등에서 나타나는 바오로 사도의 특유한 용어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성령께서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교회의 건설과 선익을 위해 베푸시는 은혜와 능력(특은)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며 교회를 다스리고', '참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식별해서 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은사일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로 하여금 이러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한편, '안수'로 번역된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epitheseos ton cheiron)에서, '에피테세오스'는 본래 '얹어 놓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티테미'(epitithemi)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70인역(LXX)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손'에 해당하는 '타스 케이라스'(tas cheiras)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사도6,6; 8,19; 13,3; 1티모5,22) 안수 행위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행위는 안수하는 자를 통하여 안수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능력이나 축복, 그리고 권위 등이 전달되는 것을 상징한다.
티모테오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은사를 부여 받았다.
그런데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가 '예언을 통하여' 부과되었다고 첨언하고 있는데, '예언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기 보다는 '예언과 함께 동반된 것'임을 드러낸다.
아마 이 예언은 티모테오가 안수를 받을 때, 안수에 동참한 원로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베푼 교훈을 가리킬 것이다.
결국 이 예언은 테모테오가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께서 부르신 사람으로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여기서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는 사목적 직책과 소임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받은 은사가 외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은혜라는 점을 '그대가 받은'(호 에스틴 엔 소이; ho estin en soi; which is in you)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 속에 있는' 이다.
곧 티모테오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목적 소임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은사를 이미 부여받았으므로, 그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듯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불태우십시오'라고 번역된 '아나죠퓌레인'(anazopyrein)은 본래 '계속해서 새롭게 불타오르도록 하다','계속해서 극렬하게 타오르도록 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나죠퓌레오'(anazopyreo)의 현재 부정사로서, '티모테오 안에 있는 은사가 새롭게 불타오르도록'이라는 의미이다(to kindle of fresh; to fan into flame).
사도 바오로가 보기에, 티모테오에게는 거룩한 하느님의 사목을 위임받던 당시의 은사들이 식지않고 계속 뜨겁게 타오를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당시 나이가 어렸던 티모테오는 내적으로는 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거짓 교사들로 인해, 그리고 외적으로느 점차 가중되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로마 감옥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 티모테오에게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사목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안수받을 때의 일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리스도교 봉사자들은 그들 자신이 받은 일들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작은 일일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한 특별한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가 포함되어 있어서, 티모테오에게 그의 안수식을 상기시켜 그가 부여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워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를 밝힘에 있어, 사도 바오로는 영어의 'not ~ but' 용법처럼, 전자를 부정함으로 후자를 보다 강조하는 '우 ~ 알라'(u ~alla)란 표현을 사용한다.
사도 바오로가 먼저 부정하는 것은 '비겁함의 영'이다.
'비겁함의'로 번역된 '데일리아스'(deilias)는 본래 '의기소침함' 이나 '비겁함', '두려워함'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비겁함의 영' 곧 '의기소침한 마음'이나 '비겁한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번역되고 이해됨이 타당하다.
사도 바오로가 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티모테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마음 혹은 정신; 프뉴마; pneuma)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힘의 영'이다.
여기서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메오스'(dynameos)는 사도 바오로 특유의 표현으로, 로마서 1장 16절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어구에서 강력하게 표명된 바로 그 힘(능력)이다.
나아가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랑의 영'이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아가페스'(agapes)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표명된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이다(1요한4,18).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부여하는 것은 '절제의 영'이다.
여기서 '절제의 영'으로 번역된 '소프로니무스'(sophronimus)의 원형 '소프로니스모스'(sophronismos)는 '보존하다'(루카17,33)라는 의미의 동사 '소죠'(sozo)와 '생각'이란 뜻의 명사 '프렌'(phren)의 합성어로서, '근신하다', '통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소프로니죠'(sophronizo)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자기 통제'(self-control)을 말한다.
2021년 1월 26일[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비겁함의 영이 아닌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우리 안에 주셨다.
(루카10,1-9)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셨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역할, 그 일을 하라고 보내시는 것이다.
(루가1,76-77)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요한1,23)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 제자 둘, 각자의 생각이 아닌 주님의 뜻 그 길, 곧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그 구원의 기쁜 소식(복음)을 한마음으로 선포하라고 보내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주님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소리를 내면 되는 것이다. 그 복음의 소리를 듣고 받는 이들이 믿음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도록 시는 분은 늘 함께하시는 주님의 영, 성령이시다.(마태20,28 요한14,26참조) 또한 그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원, 그 새 계약의 증인이시다.(히브10,15-18)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 일꾼들, 그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또 다른 일꾼, 곧 하늘의 일꾼, 성령을 청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수확할 수 있는 실력(능력)이 못 된다는 것이다. 곧 누가 참 믿음인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13,24-30. 39참조)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 박해, 핍박을 각오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의 칭찬, 대우 같은 것을 받을 생각을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 사람들의 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또 사람의 방법, 길(道)로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 인간들의 평화, 그 이야기하지 말고 먼저 주님의 平和를 주는 그 기쁜 소식, 福音을 이야기하라 하신다.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 필요 이상으로 대접 받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신다.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 당시에 잘 모르는 집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았답니다. 부정한 재료로 한 음식을 줄까봐, 그러면 율법을 어기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관습을 깨라고 하신 말씀이다.
(사도10,13-15) 13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4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티모4,4) 4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다 좋은 것으로, 감사히 받기만 하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의 관습(慣習)을 부수어 고쳐준 것이다. 율법에 묶여 죄의 용서도 모르고 法 지킴의 그 무거운 짐 같은 신앙으로, 마음이 짓눌려 고생하는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그래서 하늘의 평화, 안식을 살도록 하늘의 대속, 그 진리(생명)의 복음 선포로 고쳐준 것이다.
오늘 독서의 선포, 소리로 치유를 받고자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구원)의 약속이 있다고 전하고, 그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 평화가 내리신다고,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재의 영을 주셨다고 하신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힘과 사랑과 절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주기 위한 것으로,(신앙 진리는 영생, 구원을 주는 십자가의 대속, 그 길)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한 것이고,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이전에 *약속하신 것이라 전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변할 수 없는) 그 하느님의 말씀, 약속이 하느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의 그 가까이(엥기켄-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이미 와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깨닫고 믿었을 때 하늘나라를 미리 살 수 있는 것이다.
(히브4,2-3)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하느님나라)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제사와 윤리의 그 자기 의로움의 신앙으로는 절대 누리지 못하는 하느님나라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죽음, 그 의로움을 생명, 구원의 진리로 믿고 의탁했을 때 누리는 자유와 안식, 곧 하느님나라다.
(골로1,13)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야고1,25)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 천주의 성령님! 우리 모두가 十字架의 福音, 그 완전한 자유의 법에 머무는 그 實行으로幸福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희가 의탁합니다.~~~아멘!!!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복음(루카10,1~9)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3)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는 제자들의 수가 70인으로 되어 있지만, 바티칸 사본과 베자 사본 등에는 72인으로 되어 있어 파견받은 사람의 수효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70이나 72라는 숫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상징적이며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70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수로 여기는 7에 충만한 수의 의미를 갖는 10이 곱하여진 숫자이다. 그리고 72는 12의 6배, 즉 12사도의 6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당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실제적인 수효임과 동시에 앞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 의해 온 세상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임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창세10장; 창세46,27; 민수11,16~25참고).
또한 루카 복음 10장 1절에 72인을 수식하고 있는 '다른'이라고 번역된 '헤테루스' (heterous)는 형용사로서 명백히 12명의 사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둘씩 보내시며'에 해당하는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아나 뒤오'(apesteilen autous ana dyo; sent them two by two)에서 '보내시며'로 번역된 '아페스테일렌'(apesteilen)는 '파견하다'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apostello)의 부정과거형으로써 12사도의 파견 때에도 사용된 같은 단어이다(루카9,2).
이것은 보냄을 받는 72인의 제자들이 12사도와는 확실히 다른 별개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이유'나 '목적', '권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씩'에 해당하는 '아나 뒤오'(ana dyo; two by two)의 의미는 아마도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마르6,7; 코헬렛4,9), 그들의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율법의 요구를(신명19,15; 민수35,30)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섬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는 '수확'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및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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