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코끼리의 힘
조 명
보아라, 나는 선출된 여왕이므로 곧 법이다
가장 강한 그대는 우리들의 길잡이, 나의 남편이 되어라
선두에 서서 몸 바치는 백척간두의 생
최고의 건초와 여왕의 믿음을 받으라
행여, 그대가 독불장군의 힘을 믿게 된다면
나는 뭉쳐진 무리의 힘을 사용할 것이다
짓밟힌 만신창이로 추방될 것임을 미리 알라
두 번째 강하고 매력적인 당신, 그대는 여왕의 경호원 애인
나의 배후에서 우리들의 길잡이를 견제하라
달콤한 건초와 은밀한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대 또한 징벌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잊지는 말라
부드러운 경고는 두어 번뿐이다
우리는, 씨방을 말리는 건기의 샘을 찾아가는 여정
나의 무리들은 모두 기억하라
한 마리 코끼리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나는 너희들과 함께, 젖줄과 숨줄과 힘줄로 한 덩어리 되어
한 마을을 초토화할 것이다
천둥과 폭풍과 해일을 넘어서는 힘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한 조각 정신의 이탈도 없이
생이 버거운 너무 커다란 몸뚱이를 뚜벅이면서
종족보존, 그 운명적 목표를 위한 젖샘에 도달할 것이다
그날의 노을은 유독 붉은 핏빛이 아니겠느냐
공룡은 죽고 코끼리는 살아남았느니라
한 무리 사자가 한 마리 코끼리를 어려워한다
온갖 초식동물들이 코끼리와 더불어 한가롭다
그가 내게로 다가와 나를 끌고 다닌다
모를 일이다. 어느 날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나를 끌고 다닌다.
벌써 10여 년 전 일이다. 서울대공원 장미원에 장미화 만발하던 봄날, 동물원에서 아기호랑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는 대공원에 근무하던 친지의 호의로 그 아기호랑이를 품에 안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때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동물원을 찾아갔던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무렵 나는 ‘테드 휴즈’의 「표범(The Jaguar)」이라는 시에 매료되어 있었으므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태어난 지 한 달쯤 지난 호랑이는 인간에게 이미 맹수였으므로 따로 격리되어 사육되고 있었다. 그때 내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또 거짓말처럼, 한 사육사가 아기호랑이보다 더 어린 애기재규어를 데려와 내게 안겨주었다. 그 어린 맹수의 튼튼한 뼈대, 뻣뻣한 터럭, 당당한 숨결은 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렬했다. 검은 재규어를 품에 안고 사육장 밖 붉디붉은 줄장미를 바라보며, 나는 내 야생의 심장박동소리를 직감했다.
그러고 나서 친지로부터 소개받은 수의사의 안내로 꽃향기와 동물 냄새가 스미는 봄날 저녁의 동물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태생적 이야기꾼이었다. 이따금 그 수의사를 생각하면 내가 아니라 그가 시를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날 그 운명의 코끼리우리 앞에서 그의 이야기는 무르익었다. 코끼리에 대하여, 코끼리의 모계사회에 대하여, 여왕코끼리의 심리세계와 그 위력에 대하여 얘기할 때엔, 내가 정말 무더운 바람과 그 바람에 눕는 마른 풀들과 여왕코끼리의 결연한 의지와 꿈이 일렁이는 건기의 아프리카 초원을 걷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직관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시(詩)다!
그리하여 나는 야생의 심장이라도 얻은 듯 열정적으로 「여왕코끼리의 힘」을 쓰긴 썼다. 그러나 솔직히 이런 식의 글도 시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마치 돌연변이 같았다. 어찌 읽으면 터무니없는 것도 같고, 어찌 읽으면 아주 멋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2003년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계간 『시평』에 발표할 등단작을 선별하기 위해 추천인에게 작품을 보내는 과정에서도 시 25편 중 24번째에 이 시를 끼워 넣었었다. 바로 그 시를 신경림 시인께서 맨 앞으로 내놓으시며 추천의 글을 써 주셨다.
그렇게 탄생한 「여왕코끼리의 힘」은 2003년 계간 『시평』 봄호의 등단작이자 표제시가 되었고, 2008년 초봄 민음사에서 발간한 첫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의 표제작이 되었다. 그 후 한 신인으로서 여러 시인들로부터 “그 여왕코끼리가 이 여왕코끼리입니까?” 라는 농담어린 인사를 받곤 했다. 그 코끼리가 나를 끌고 다닌다. 평생을 끌려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그가 어떻게 내게로 다가왔으며 나는 어떻게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는지. 그리고 그가 왜 나를 끌고 다니고 있는지. 아니, 나는 왜 이렇게 그에게 끌려다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때 그 야생의 내 심장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 대목에서 나는 요즘 심장이 무너져내릴 만큼 괴롭고 두렵다. 그러나 이 또한 어쩌겠는가.
또 다른 그를 만날 때까지, 거대한 꽃잎사귀 같은 귀때기를 펄럭이면서, 사유의 씨앗 같은 조그만 눈망울에 불을 밝히면서, 뚜벅뚜벅,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3년 · 상반기 제8호
조 명
대전 출생. 2003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