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되신 예수님
요15:13-14“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침묵기도 중 떠오른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 켄 가이어의 <영혼의 창>에서 읽은 “그리운 케니”라는 편지제목, 은퇴후 밤에 자가용 창문으로 바라본 김천 역은 제 자신도 모르게 아픔의 눈물을 쏟게 했습니다. 무의식층에 깊이 잠재해 있던 영혼의 아픔은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솟아오릅니다.
잠재해있던 상처의 아픔들이 드러나는 순간은 우리의 친구 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 영혼이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주님은 영혼의 목자가 되시어 우리 영혼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것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초중고 동기들, 기독학생회 회원들과의 만남은 이어졌지만 과 동기들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목회 은퇴 후 용인으로 이사한 후 고향친구의 친구를 통해 대학동기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대학동기들과의 만남을 통해 잊혀졌던 70년대 추억들이 되살아나고 홀로 외롭게 사색하며 보낸 대학생활의 허전함과 그리움을 늦게나마 풀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온전함을 위해서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잠재해있는 상처나 그리움을 드러나게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친구로 삼지 못한 사람들은 상처를 깊이 숨겨두고 멀리합니다. 깊이 묻어둔 상처의 노출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친구가 된 사람은 상처의 노출을 기뻐합니다. 상처의 노출은 곧 치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친구가 되신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경험은 없습니다. 세상의 친구를 진정 사랑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나의 친구가 되셔야 합니다. 율법에 충실했던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멸시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이 되면 우리는 다시금 바리새주의로 돌아갑니다. 조금만 나와 달라도 상대를 멀리하고 판단하는 모습은 바리새주의의 특징입니다. 점점 세상은 관용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모르거나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못박히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내 자신이 예수님의 진실한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내 자신 또한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사랑하는 형제들을 위해 목숨 내어주기를 기뻐했고, 사도의 사랑하는 형제들 또한 사랑하는 사도를 위해 자기들 목까지 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면 사랑하는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 언제나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은 질그릇에 담긴 하늘의 보배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가운데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조만간 깨어져버릴 질그릇이 아니라 약속된 예수님의 생명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딤후1:10)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복음전도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능력과 영혼의 아름다운 향기에 있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혀 달려가는 삶보다 더 아름다고 귀한 삶이 없습니다. 24. 11. 24 장기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