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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18) 하느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
예비자 교리를 할 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우리에겐 이미 익숙해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용어가 예비 신자에게는 무척 생소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다루어 볼 ‘섭리’도 그런 용어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완결된 상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만물은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진행의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진행의 상태로 창조된 만물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배려를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02항). 성경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모습은 당신 백성과 늘 함께하시며 돌보시는 분, 심지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어두신 분으로 하느님의 섭리는 우주적 원리나 커다란 역사적 진행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부분에 이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03항).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사소한 것까지 돌보시는 분이라고 해서 세상 만물이 그저 꼭두각시처럼 하느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이미 계획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에서도 마리아의 응답이 함께 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 계획의 실현을 위해 인간의 협력을 이용하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06항).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인간이 도리어 인공지능이 인간을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반드시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과는 달리 위대하시고 선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무조건적 복종이 아닌 자유로운 의지로 당신의 계획에 참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온 땅을 다스릴 책임을 맡게 된 인간은 자유로이 이 세상의 완성을 향한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할 권한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동이나 기도,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계획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07항).
선하신 하느님의 창조와 궁극적 완성을 향해 하나하나 모든 이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섭리라는 주제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문제는 바로 악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왜 악도 창조하셨는가? 왜 세상의 완성을 향해 이끄시면서 악을 그대로 놓아두시는가?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은 사실 어느 하나의 대답으로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창조와 하느님의 섭리라는 주제 아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악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실 수도 있었지만 ‘진행의 상태’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 그래서 당신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여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며, 하느님의 섭리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악에서마저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 속에 형제를 죽이려고까지 했던 요셉의 형들이 저지른 악을 하느님께서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모든 이를 살리는 자리에 이르는 놀라운 선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창세 45,8; 50,20 참조). 세상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들은 여전히 수많은 악이 남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게 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작용하여 좋은 결과들을 만들어 내도록(로마 8,28 참조) 세세하게 돌보시며 우리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감실(龕室, tabernaculum)
어느 성당이든 제단 앞쪽에는 작은 빛을 내는 감실등이 켜져 있습니다. 성체의 현존을 표시하기 위해 켜둔 등불인데, 예수님의 몸인 성체가 그 옆 감실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미사 후에도 성체를 따로 모셔두는 건 그리스도교의 매우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테르툴리아노(160~?)에 의하면, 박해 시대 때 교우들은 성체를 집에 모셔가 필요할 때 영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 암브로시오(339~397)는 항해자들이 위급 시 영성체를 못 하고 죽을까 봐 성체를 모신 함을 가지고 승선하였다고 전합니다. 니케아 공의회(325)는 임종 위험에 있는 환자들이 반드시 성체를 영해야 하고 사제가 없을 땐 부제가 영해줄 수 있도록 규정함(13-14항)으로써 성체를 모셔두는 곳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성당 안에 모시는 관습은 4~5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체는 이동할 수 있는 용기에 담아 제의실 역할을 하던 ‘성구실’(聖具室, sacrestia)이나 제단 가까이에 두었습니다. 그 후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안전을 위해 열쇠로 잠가 보관하도록 규정했습니다. 16세기에는 감실을 성당 중앙 제단의 위쪽에 두는 게 일반화되었고, 1863년 예부성(Congregation of Rites)은 이외의 모든 방식을 금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명동대성당이나 주교좌 의정부 사적지 성당에는, 신자를 등지고 미사를 드리던 뒷제대의 정면 위편에 감실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사경본 총지침」에서는 “각 성당의 구조와 적법한 지역 풍습을 고려하여 성당의 한 부분에 감실을” 두라고 규정합니다. “감실은 보통 붙박이로… 단단하고 깨지지 않는 불투명 재질로” 만듭니다. 그리고 “거룩함이 모독 될 위험이 결코 없도록 닫아 두어야”(314항) 합니다. 한편, “표지라는 뜻에서 볼 때 미사가 거행되는 제대에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가 보존되는 감실을 두지 않는 게 더 맞다.”(315항)라고 명시합니다. 왜냐하면 성당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현재화되는 ‘제대’이기 때문입니다. 감실은 제대의 중심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 고귀한 위치를 찾아야 합니다.
미사 후 성체를 모셔두는 목적은
① 병자들에게 성체를 영해주고,
② 미사 외에도 성체 안에서 계시는 그리스도를 흠숭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감실에 성체를 보존하는 성당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매일 적어도 몇 시간 동안 개방되어야 합니다(교회법 937조). 또한 매년 적당한 기간에는 비록 연속적이 아니더라도 장엄한 성체 현시가 거행되도록 권장됩니다(942조).
구약의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장소가 되었듯이, 오늘날 삶의 광야를 걸어가는 우리에게 감실은 주님의 현존과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게 하는 길이 되어 줍니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교회 – 마리아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함이란 무엇일까요?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단순한 전율이나 신비로운 각성일까요? 아니면 집단이 느끼는 공감 내지는 고행을 통해 찾은 내면의 초월을 말하는 걸까요? 거룩함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신부로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교회헌장은 거룩함에 대해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거룩함은 선별적이거나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거룩함이 개인의 수고나 지위로 얻어지는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보편적인 선물임을 뜻합니다.(〈교회헌장〉 2장 참조)
둘째, 거룩함은 한순간에 성취되지 않으며 긴 여정 안에서 지속됩니다. 이는 교회의 목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고 긴 여정의 끝에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니까요.(〈교회헌장〉 7장 참조)
이와 같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은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만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성모님을 바라보도록 이야기합니다. 성모님의 삶 자체가 거룩함의 모델이기 때문에 마리아의 신비와 긴밀하게 연결시킵니다.(〈교회헌장〉 8장 참조)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어느 모로든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어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시는 것처럼, 이 지상에서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서 빛나고 계신다.”(〈교회헌장〉 8장 68항)
거룩함의 원천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를 통해 아드님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승리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구성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심으로써, 교회의 가장 훌륭한 전형이자 모범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바라봅니다. 그분은 당신 아들의 고난을 스스로의 고통으로 몸소 감내하시어 인간들의 곤경과 어려움을 실존의 신비로 승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삶을 아드님 영광에 결합하시며 인간 삶의 존귀함도 알려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도록 협력하셨고, 참된 삶으로 나아가도록 삶의 모범이 되어주십니다. 이처럼 성모님은 신앙인들의 구원 여정 안에서 거룩함의 인도자이십니다.
종교적 심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여느 종교적인 감정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그 소명을 간직한 교회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거룩함은 교회의 본질이며, 모델이신 성모님을 통해 그 본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헌신과 요청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 위에서, 거룩함의 소명을 이어 나가야겠습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2) I.N.R.I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푯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교리실을 빙 둘러보던 학생이 십자고상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선생님, 십자가 위에 글자가 있는데 왜 새겨져 있는 것이고, 무슨 뜻이에요?”라고 질문합니다.
십자고상 위에 새겨진 ‘I.N.R.I’를 보고 묻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전 저와 같이 궁금한 것이 많은 이 학생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상징과 상징어’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알파(A)와 오메가(Ω)
그리스어 문자 ‘A’와 ‘Ω''는 알파벳 첫 글자와 끝 글자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A’와 ‘Ω’는 일반적으로 시작과 끝을 나타내므로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시초부터 종말까지 우주를 지배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돼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묵시 22,13)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상징은 종종 십자가나 키로(☧)의 형태로 표현되며, 주님 부활 대축일에 사용되는 초에 새겨집니다.
키로(☧)
초대 교회의 중요한 상징이었던 ‘키로''는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ός)’의 첫 두 글자 카이(Χ)와 로(Ρ)를 따서 꾸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하는 상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널리 사용하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으로, 제단·제구·제의 등에 쓰입니다.
물고기(ⅠΧΘΥΣ, 익투스)
물고기는 로마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던 암호로 ‘그리스도’를 가리켰습니다.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의 어절 첫 글자를 따로 모으면 물고기(ⅠΧΘΥΣ)라는 단어가 됩니다.
예수 : Ⅰ - Ιησούς (예수스)
그리스도 : Χ -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
하느님 : Θ - Θεος (테오스)
아들 : ϒ - Υιός (휘오스)
구세주 : Σ - Σωτηρ (소테르)
신약성경에서 물고기는 참된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표현됩니다.(마태 13,48-49; 루카 5,1-11; 요한 21,1-13 참조)
I.N.R.I
이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한 19,19)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유다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써 붙인 명패로, 예수님의 죄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고상 위에 라틴어 어절 첫 글자를 딴 ‘I.N.R.I’를 붙입니다.
예수 : I - Iesvs (예수스)
나자렛 사람 : N - Nazarenvs(나자레누스)
임금: R - Rex (렉스)
유다인들 : I - Ivdaeorvm(유데오름)
IHS
이는 예수님을 뜻하는 모노그램(두 개 이상 글자를 합쳐 한 글자 모양으로 도안한 합일문자)입니다. 예수의 그리스어 표기(Ιησούς)는 대문자로 ‘ΙΗΣΟΥΣ’ 또는 ‘IHCOYC’입니다. 로마자로는 ‘IHSOVS’라고 쓰는데, 이때 첫 3글자를 따서 만든 모노그램이 바로 IHS입니다. IHS는 15세기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처음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현재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창립한 예수회(Societas Iesu)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17)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
사도신경의 첫 구절은 하느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고백합니다. 창조와 관련된 교리 교육은 매우 중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282항)하며, 창조론이라는 별도의 과목으로 다룰 만큼 창조의 의미, 목적, 진화론과의 관계 등 전통적으로 강조된 내용도 많고 우리 시대의 문제 앞에서도 중요한 내용들이 참 많습니다. 다만 상당수 내용들은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이거나 교리서를 읽어보시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우리 시대에 중요한 주제라 생각하는 ‘무에서’ 창조하신다는 내용만을 간략하게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 행위들을 하긴 하지만 인간만큼 이 부분에서 탁월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물건들만 보더라도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일 것이며,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끝없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복제하고, 인간과 비슷한 수준을 넘어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등 이제 인간의 능력은 그 한계를 모른 채 끝없는 창조 활동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는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조합하거나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창조이며, 자유로이 ‘무에서’ 이루신 창조입니다. 하느님의 전능 또한 이처럼 무로부터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만드신다는 데서 드러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96항).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가 흙의 먼지나 사람의 갈빗대라고 하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이용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나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창조 이야기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위해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오직 말씀만으로,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끝없는 과학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이제는 신의 자리를 대신한 것처럼 착각하는 우리 시대의 인간이 기억해야 할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또한 우리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실들을 전해 줍니다.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은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그들에게 영혼 생명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죽은 이들에게 부활을 통해 육신 생명을 주실 수 있으며,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빛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98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