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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계명 - 브랜드 네임 가치
20: 7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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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브랜드 가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업의 무형자산을 말하는 상표의 가치를 말할 때 브랜드라는 말을 합니다. 이름 값이라해서 브랜드 네임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엔진 구글의 브랜드 가치가 돈으로 따졌을 때 860억5700만달러로 세계 최고입니다. 한국 최고 기업인 삼성은 58위로 한국 기업으로서는 유일하게 글로벌 브랜드 100위 안에 들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 톱 10을 보면, 구글(860억 달러)에 이어 제너럴일렉트릭이 브랜드 가치 714억달러로 2위에 올랐고, 마이크로소프트가 709억달러로 3위, 이어 코카콜라 4위(583억달러), 차이나 모바일 5위(572억달러), 아이비엠(IBM) 6위(553억달러), 애플 7위(552억달러), 맥도널드 8위 (495억달러), 노키아 9위 (440억달러), 말보로 10위(373억달러)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회사들이 전쟁을 치르듯이 각 기업마다의 Brand Name을 통해 자기들의 기업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그 실체와 이름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렇게도 중요한 것 입니다.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는 잘 생각해서 지어야 합니다. 이름 잘못 지어서 놀림 받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짐박/진밥, 밥오/바보…그런데 대부분의 집안은 애가 자라서 이렇게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복을 많이 받으라고 복돌이라고 짓고, 영광을 누리라고 영광이라고 짓습니다. 부자로 잘 살라고 만석이라고 짓기도 하고 한석봉같은 명필이 되라고 석봉이라고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름이 그렇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거지로 사는 사람 중에도 멋지고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이름은 신실이데… 행동은 영 엉망인 사람도 있고, 이름은 화평인데…늘 싸우는 사람이 있고, 이름은 평강인데 항상 불안과 근심 걱정이 가득한 사람 도 있습니다.
이름의 가치 때문에 요즘에 소위“짝퉁이”가 나옵니다. (유명 브랜드 도용)
가짜가 하도 많이 생산되는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가짜도 급이 있어서 아주 잘 만들어서 진짜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가짜가 있어서 값도 다 틀립니다. 그러니까 가짜인줄 알지만 정말 좋은 것을 사기 위해서는 물어봅니다. “이거 진짜 가짜요?” 거의 진짜에 가까운 진짜 가짜인가 물어보는 겁니다. 그만큼 그 이름의 가치와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에도 짝퉁이 있는 거 아십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없이 많은 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고 하셨는지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십계명 강해 세 번째 시간입니다.
제일 계명은 신앙과 경배 대상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섬기라는 것이고,
제이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방법으로,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제 제삼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정신을 가르쳐 줍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셋째 계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으로서 5,193회가 기록되었고,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3,584회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과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합치면 자그마치 8,777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이름의 책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신약 성경에도 보시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이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찬송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 왜 주님의 이름이 존중되어야 할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수 없나니 천하사람중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고 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에서 친히 예수가 되어 이땅에 오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이제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예수의 이름보다 더 소중하고 더 위대하고 더 고귀한 이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찍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였을 때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를 통한 메시아의 출생을 예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찬송가91장 의 작시자 리디아 박스터(Lydia Boxter)는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왜 주님의 이름이 소중합니까? 그분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온 세상의 구원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제3 계명은 그런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2.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수 있을까요?
두 가지로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직접적인 형태에 속한다면 또 하나는 간접적인 형태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여기서 망령되다는 말은 가치가 없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을 가치없게 하는 것일까요?
1) 직접적으로 주님과 관련된 것들을 함부로 말할 때입니다.
출20장의 10계명을 번역하면서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 번역은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 96:8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이름을 부를 때….그냥 김정일 동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앞에 수많은 수식어를 갖다 붙입니다. ‘민족의 태양이신 경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라는 등 길게 수식어를 붙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함부로 그 이름을 부르면 언제 잡혀가 곤욕을 치를지 모릅니다.
하물며 온 천지의 창조자이시고 완전하게 거룩하신 우리의 생명의 주인 하나님을 부를 때 어찌 함부로 생각 없이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비만 오지 않아도 하나님을 욕하고, 장마만 들어도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합에 지고도 하나님 욕하고, 길 가다가 제가 잘못해서 넘어지고도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전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주전자를 기울여 보면 압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1)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 속에 죄와 악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영어권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라는 단어(Gosh, Jesus등)가 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장 고귀한 단어가 가장 비속한 욕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사단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추하게 변질시키는 일- 그것이 바로 사단의 전문사역입니다. 우리들 성도들은 특별히 이런 언어 사용에 사단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건전한 유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선 농담으로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를수 없다고 해서 여호와란 이름대신 아도나이(Adonay)라고 대신 표기하는 전통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언어사용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언어는 가치 전달의 수단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경박하게 사용할 때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의 가치를 농담수준으로 격하시킬지 모릅니다.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 앞에서 주님의 교회나 주님이 쓰시는 사역자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들의 언어를 통해 가치를 학습받고 있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교회나 메신저를 실컷 비난하는 부모들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어떻게 신앙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자라 날 것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목회 생활을 통해 자녀들이 신앙을 떠나는 과정에서 두가지 원인을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모들이 교회 생활은 하지만(심지어 직분도 갖고 있지만) 가정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모범을 배우지 못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늘 교회나 사역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상을 갖고 있는 가정들이 결국은 신앙전수에 실패하는 것을 봅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말이 씨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을 바꾸십시오. 경건한 말, 거룩한 말, 따뜻한 말, 긍정의 말들을 말해 보십시오. 가정이 바뀔 것입니다. 자녀가 바뀔 것입니다.
2) 간접적으로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암시할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주인이시라면 이제 부터는 그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그런가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시인되고 고백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진학지도를 할 때 혹은 취업 선택을 할때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허락한 은사보다 혹시 부나 출세나 명예를 더 고려하도록 영향을 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는 예수를 주라고 가르쳐 놓고 실제로는 돈이 주라고, 인기가 주라고, 명예가 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는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장애가 바로 이런 크리스쳔 부모들의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태 혹은 일관성이 없는 자녀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는 오늘의 부모들의 망령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부모들에게 호소할 말은 …“제발 망령 부리지 마십시다”
3.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존중할 수 있을까요?
두가지 결론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1) 매일의 일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예수의 이름을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이제 그 이름으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찬양은 그 이름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 이름으로 주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를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그의 이름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의 이름으로 모여 그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이름 때문에 살고 그 이름 때문에 죽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며 우리의 행복의 비밀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이름을 높이는 삶인 것입니다. 장애 시인 송명희는 그 이름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수 없네/
그 이름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우리의 예배로 기도로 전도로 사랑함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그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2)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주 중요한 위기에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기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너무 너무 억울할 때는 황제에게 호소하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황제의 측근이 그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신문고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옛날 백성들 중에서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밤새 한양까지 걸어와서 새벽에 신문고를 두드립니다. 그러면 왕이 신하를 보내어 그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조사해서 그것이 사실이면 악한 짓을 한 원님이나 권력자를 감옥에 넣고 그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로마 황제에게 호소 하면 황제의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을 때 로마황제에게 호소했습니다. 이유는 어떻게든 황제가 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이름으로 호소하면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편에 보면 억울함을 당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기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하는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자기가 조금만 힘이 있어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억압하고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호소할 길을 주셨습니다.
“환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나라가 없고 왕이 없는 난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왕이 있고 그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이 자기의 힘만 믿고 믿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소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 중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급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해 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여호와 이레’ 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의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병이 들었을 때는 ‘여호와 라파’ 라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셔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이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는 ‘여호와 닛시’ 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 적을 이기게 하셔서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어서 두려울 때는 ‘여호와 살롬’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 하셔서 마음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실제적인 재산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롬 10:13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요 1:12에는『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14:13-14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귀하게 사용하고 함부로 사용하여 죄를 짓지 맙니다.
주기도문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기도를 외울 줄 아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과 행실이 일치되게 살아서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성장한다면 그분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하여 핍박도 받아야 합니다. 행 4장 29-30에는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간구하며 핍박 중에도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행 5:41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능욕을 당해도 그 이름을 위해서 당한다면 기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바로 사용하는 자, 그리고 그 이름을 전파하며 그 이름 때문에 기꺼이 고난도 당하는 사람을 알아주시고 갚아 주십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자녀중에 한 사람이 부스에게 다가와서 “아버지, 힘드시겠지만 여기 서류에 서명해 주시면 재산 정리의 어려움을 피할수 있게 되겠습니다”고 말하자 부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그앞에 펼쳐진 서류에 그가 가까스로 힘을 내어 서명한후 그 서류는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세상을 떠난후 가족들이 서류를 열었을 때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부스가 남긴 마지막 서류 싸인에는 부스 자신의 이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 그 서류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남기고 싶었던 이름, 그가 세상을 떠나가는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름, 그의 자녀들이 또한 붙들고 살아주기를 기대했던 이름, 아니 그가 그의 가족들에게 남길수 있었던 최대의 유산은 돈이 아닌 예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3계명을 통하여 직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