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1-7, 메시아 시대의 묘사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견딘 사람들을 위한 소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망은 새로 태어난 아기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그 아기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다윗 왕조를 공평과 의로 다스릴 것입니다.
1절은 산문체이며, 2-7절은 시가 형태입니다.
(1)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1절은 앞에서 본 어둠과 뒤에 이어질 빛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전의 상황과 새로운 소망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앗시리아는 B.C.732년 북왕국의 북동부 지역(납달리 당, 19:32-39)과 북서부 지역(스불론땅, 수 19:10-16)을 그들의 손에 넣었습니다.
이곳은 앗시리아군에게 처음 빼앗긴 곳으로서 요단강 건너편의 길르앗과 함께 앗시리아의 통치 구역이 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B.C.732년 혹은 B.C.722년 사건 이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잠시 동안 예루살렘 상황에서 벗어나 북왕국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날이 올 것입니다.
이사야는 새로운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 앗시리아의 지리적인 경계(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사용했습니다.
그 영광의 기초가 2-7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어두움에서 헤매던 자들에게 빛이 주어집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은 땅에서 사는 자들에게 서광의 빛이 발합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자주 빛으로 표현됩니다.
인간의 죄와 반역이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저주했지만 이 사람들은 그를 기다리던 자들이었습니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두 가지 은유를 사용하여 완전한 기쁨을 강조합니다.
추수하는 즐거움,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4)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선지나는 청중들에게 특히 소망을 유산으로 받기 원하는 남은 자들에게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극적인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미디안을 치신 날입니다(삿 6-8장). 기드온은 위에서 언급된 납달리, 스불론을 해방시킨 자입니다(삿 6:35).
기드온은 300명으로 수만 명의 미디안 군을 물리쳤는데, 그 사건은 인간의 명성을 드러내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역사와 축복을 강조하는 일입니다.
둘째,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멍에(레 26:13), 어깨(시 821:6), 무거움(출 1:11; 2:11; 5:4-5), 압제자(출 3:7;5:6).
(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평화로운 미래를 생각하라는 권면입니다.
모든 군사들의 군화, 군복이 불에 타 없어지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한 아이가 탄생합니다(6-7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가 인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우리에게 났고~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우리에게”가 두 번 반복됩니다.
인간의 아이지만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부터 온 자입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 아기 위에 모든 책임을 지닌 정사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무거운 짐처럼 그것이 그분의 두 어깨에 주어져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이름이 네 개가 주어집니다.
기묘한 모사
놀라운 상담자라고도 번역합니다.
이사야가 선언한 그 아이는 보통 인간을 훨씬 넘는 수준까지 상담하고 조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계략을 영적인 지혜가 부족하지만 이 아이는 연약함에 강함이 있고 항복할 때 승리가 주어지고 죽음 안에 생명이 있다는 지혜를 지녔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전사이시다 라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군사적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아이의 이름을 신적 영역과 연결시켰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구약에서는 왕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지만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표현할 때(시 68:5), 그의 백성을 치리 하거나 훈계할 때(시 103:13),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렘 3:4,19)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라 불리운 것은 이 인물의 통치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그대로 행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존한다는 것은 여호와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만큼 이 아이는 범상치 않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
평화는 절정적이자 최종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류 역사의 흐름과 방향은 평화라는 개념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그 평화를 상실했습니다.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드디어 평화가 주어집니다.
메시아가 찔리고 고난을 당함으로 백성들이 평화를 얻게 됩니다.
7절에서 이사야는 이 아이가 가져올 평화에 대해 다시 강조합니다.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의 통치는 아무도 흉내내지 못합니다.
그의 통치 영토가 계속 커져만 갑니다.
그의 사역에 힘입어 평화도 온 세상을 향해 계속 팽창해 갑니다.
그의 통치는 오래 전부터 예언된 대로 다윗의 왕계를 이어가는 통치입니다(창 49:10; 삼하 7장).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일을 실현시킬 것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3번 사용이 되는데 모두 남은 자를 보존하시는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이사야서 에서는 히스기야의 기도 속에 포함되어 있는 표현입니다(사 37:32; 왕하 19:31).
“남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고, 환난을 피한 사람들이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정열을 가지고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이 일을 꼭 성사시킬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