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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을 믿습니다
시편 108:1~13
오늘 저녁 생각하게 될 시편 108편 1-5절까지는 이미 생각한 바 있는 시편 57편 7-11절 말씀과 똑같은 내용의 반복입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은 지나서 6절 이하의 말씀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을 기다리면서 이미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알게 된 사실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내가 응답을 기다렸으나 하나님께서 벌써 내게 응답하셨도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체험입니다.
우리가 간구한 것을 기다리기 전에 응답이 사실상 먼저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우리의 간구한 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간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이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였습니다. 기도로 간구한 바를 얻었으며 얻을 것을 확신하는 것이 신앙의 의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받은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진리를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홍해가 가로막혀 당황하는 저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여러분이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있습니까? 이미 받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던 시간은 지났고 지금은 믿음으로 그 축복을 느끼며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 돌려야 할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다윗이 오랫동안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어느 순간에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께 구했던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말했습니다. 본문 7절에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저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의 반석 위에서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서 편지하면서 빌립보서 4장 1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주 안에 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감정에 따라서, 기분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에 따라서, 이성으로 이해가 되고 납득되는 때만 따르고 믿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성은 제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이 될 것만을 믿는다고 하면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벙어리가 아니십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을 때 에덴 동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뱀에게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때 그의 아들에 관해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향한 소망의 전달자가 아닙니까! 히브리서 1장 1-2절을 보세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한 이 사실에 대하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간청에 대한 응답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셨던 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로고스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인격에 관하여 충분히 말씀하셨던 유일한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 위에 우리 신앙의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사실 우리의 신앙이 서 있을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으로 우리의 신앙이 말씀에 근거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다가도 어떤 때 의견이 잘 맞지 않으면 논쟁이 벌어지고, 심해지면 심각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아예 이야기를 안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자존심(?)이란 것이 있어서 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어떤 가정은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일주일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지옥의 그림자입니다. 말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숨막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 명령을 어긴 인간에게,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할 바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거기에는 자기에게 관계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인 경우, 말한 대로 따르는 행동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말씀한 대로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불신이 따릅니다.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한 말을 국민이 믿으려 하지 않으면 이것은 큰 일입니다. 사직 당국에서 발표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디엔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것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규명하고, 어떤 희생이 따른다고 해도 감수할 수 있어야 나라가 삽니다.
민주사회는 모든 것을 밝게 해야 합니다. 국민의 총화는 지도자를 신뢰할 때 열리는 열매입니다. 구호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5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공의도 지키시고 사랑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번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는 ‘그렇다’ 하시고, 저기서는 ‘아니라’ 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그렇다 하시면, 내일 아니다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 3:6) 한 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영원히 불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이 한 마디에 이와 같은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하여 약속하신 것이 있다면 죄인이 회개할 때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사람들을 향해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신실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약속은 꼭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믿는 사람이 갖는 기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아직까진 우리에게 이루어진 바 없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의 마음은 기뻐 뛰놀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앙적으로 바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여 뛰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믿는 아이는 아버지가 약속하면 그대로 이루게 될 것을 믿기 때문에 얻은 것이나 다름없이 기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지금 내가 당장 받기에는 너무 고귀하다면 이제 앞으로 내 영혼이 점점 성장해서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될 날을 생각하며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성도에게는 기쁨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내 눈 앞에 당장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믿음으로 성취될 것을 내다보기 때문에 지금부터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천당에 가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믿기 때문에 그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가을이 올 것을 내다보면 짜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병이 나서 고통스러울 때 완쾌되어 건강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해도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는 것을 믿을 때 감사하며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했습니다.
하늘나라 집이 마련되어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집이 무너질 때 두려워하거나 초조해 하거나 이성을 잃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침착하게 준비 잘하고 주변의 분들을 위로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이 복되다”고 했고,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권사님이 폐암에 걸리셨습니다. 가까운 분들이 알고, 얼마 후에는 본인도 불치의 병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몸이 괴로워서 입원하셨다가는 조금 덜하면 나오셔서 교회 봉사를 하셨습니다. 언제나 만나면 그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집에서 가료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가 뵈었더니 권사님께서는 깜짝 놀라시면서 “아니 바쁘신 목사님이 여기까지 왜 오셨어요?” 그러면서도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권사님께서는 아드님 네 형제를 두셨는데 다 미국에 유학을 보내서 박사 학위를 받아 미국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어머니 였습니다. 몸이 불편한 중에 미국 아드님 댁을 차례로 다 다니시고 그렇게 아드님들이 붙드시는데도 “나는 한국에 가서 교회를 봉사해야 돼.” 하시면서, 서울에 오시면 혼자 사실 형편이지만 교회 때문에 다시 오셔서 문자 그대로 생명이 다하도록 교회를 위해 사시다가 장하게 가신 권사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입니다. 찾아가 뵈었더니, “어이구, 목사님 왜 오셨어요? 다른 일 바쁘실텐데 저까지 찾아오실 것 있어요. 이번에 폐렴이 좀 든 모양인데 며칠만 치료하면 곧 나을 거예요. 빨리 가 보세요.” 그렇게 속에는 고통이 있지만 밖으로는 명랑한 얼굴을 잃지 않으시려고 애쓰셨습니다.
산소 호흡을 하시면서도 문병을 가면 웃어 보이시던 권사님, 아무리 괴로워도 다른 사람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시던 권사님, 그 분 자신은 미리미리 다 하늘 나라의 가실 준비를 하시고 계시면서도 믿음으로 끝까지 싸우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마지막 단계에 의사가 항암제를 맞아 보자고 권했더니 권사님 말씀이, “의사 선생님, 제가 이제 항암제를 맞아 무엇합니까? 제 병을 제가 압니다. 저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하시면서 항암제 주사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삶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사경을 헤매게 되면 빚을 내서라도 약을 쓰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살아 보려고 하는 것이 본능인데 이 어른은 이를 초월하신 훌륭한 분입니다. 돈이 없어서, 아들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서 그런 분도 아니었습니다.
권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미 준비해 놓으셨던 유서를 내놓으셨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 중 한푼도 아들들에게 남겨 주지 않으시고 쓰고 계시던 집은 교회에 기증하고, 헌금은 관계하시던 기관에 골고루 다 나누어 주시고 가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세상을 떠나시는 분을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장하게, 훌륭하게 본이 되게 가시는 분을 아직은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귀하게 가셨습니다. 저는 이 권사님께서 가실 때 수없이 울었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아쉬워서가 아니라 너무너무 훌륭하게 가셨기 때문에 감격스러워서 울었습니다. 위대한 승리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집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그는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말씀 따라서 활동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이 이 땅들을 내 나라의 한 부분으로 주셨으니 가서 취하리라” 이것이 귀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그와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니 먹고 마시고 잠이나 자자. 하나님께서 수확이 있겠다고 하셨으니 씨뿌리는 수고를 할 것 뭐 있나? 늦게까지 잠이나 자자.”고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이것은 기독교를 숙명론으로 전락시키는 잘못입니다. 기독교는 팔자를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허리를 동이고 일해야 합니다.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이 말은 약속을 얻을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들과 싸워 이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을 밟아 복종시킬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까? 저기 숙곳이 있는데도 척량하지 않으며, 세겜이 있는데도 나누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받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축복을 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축복을 주시는데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습니까? 손도 내밀지 않는데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소유를 다 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도 내 것이며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고”(7-10)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이 여러 곳이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다윗에게는 깊은 흥미를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따분하고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도 수면제 같은 책일는지 몰라도, 그러나 신실한 성도에게는 그 안에 약속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읽게 될 것입니다.
이 성경 속에 축복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낱말 하나하나가 다 음악처럼 들릴 것입니다. “중생이 내 것이요, 칭의가 내 것이요, 부활도 내 것이고, 영생도 내 것이고, 만유가 내 것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런저런 축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면 하나님께 청할 자격과 권리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룩한 자리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닮은 사람되기 위해, 경건에 이르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진취적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에돔을 주셨으니 내가 그것을 취해야겠다. 그러나 거기는 아주 점령하기가 어려운 곳이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고.” 이런 정복열과 진취적인 정신이 그 영혼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언행이 일치하시니 필경 우리를 인도하사 승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진취적입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려움이 극복될 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마지막 13절을 다 같이 읽고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다. 강하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깃발을 드십시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나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의 앞날에는 여리고 성보다 견고한 성이 있다 하더라도 무너뜨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밝음의 비밀
(시 108:1-13)
찬송 544장
시 108편은 다윗이 자기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하나님이 멸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구원과 승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찬양시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었지만 바벨론포로 이후 시대에 57편과 60편에서 각각 발췌하여 하나로 편집한 혼합시입니다.
특이한 점은 두 편이 모두 비탄시인데도 두 편이 합하여 밝은 찬양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고난 중에 더 찬양하고 더 밝은 승리와 힘 있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