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계19:11-21)
갈등
1.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어느 황량한 마을, 전쟁의 폐허가 된 땅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평화롭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폭군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마을이었어요. 거리는 황폐했고,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웅크리고 살았습니다. 어느 집 앞에서 노인이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이 땅의 우리 왕은 어디 계신가? 우리는 영원히 이들의 지배 아래 살아야 하는가?’사람들은 왕을 기다렸습니다. 오래전, 이 땅에는 참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롭고 백성을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왕이 떠날 때,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을 회복하리라.’세월이 흘러가며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갔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폭군에게 굴복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왕은 돌아오지 않아. 이미 늦었어.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야. 폭군에게 충성하자.’어느 날, 거친 구름이 갈라지며 하늘이 열렸습니다. 저 멀리서, 백마를 탄 한 분이 나타나셨어요. 그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고, 그의 옷자락은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면류관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습니다.“그분이 오셨습니다!”한 사람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습니다.‘드디어 우리의 왕이 돌아오셨습니다!’
2. 그분은 16절,“그 옷과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그는 세상을 심판하고 공의를 세우실 참된 왕이십니다. 사도 요한 시대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어요. 만왕의 왕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폭군과 함께 멸망할 것인가?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 왕의 귀환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 것입니까? 백마를 타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유혹에 빠져 멸망하는 자가 될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백마를 타고 오시는 왕으로 표현했는지 궁금합니다. 백마를 타고 오실 우리의 왕은 어떻게 승리하실지도 궁금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예수님의 재림은 머나먼 전설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분이 오실 때, 우리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할 것인지 심판의 두려움 속에 있을 것인지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봅니다. 백마를 타신 왕이 오십니다!
갈등 심화
3. 종말에 대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최후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17-18절,“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앙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이것은 예수님의 최후 승리를 앞둔 전쟁의 서막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에요.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열린 승리의 축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 스포츠 경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팀이 결승전에 올라갔습니다. 상대 팀은 경험도 부족하고 조직력도 엉망이었어요.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해설자는 보통 미리 우승 세리머니를 준비하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곧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경기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공중의 새들을 초청하는 것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과 악-사탄-의 권세 사이의 전쟁은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저항했던 짐승과 악한 세력들-거짓 선지자들은 저항할 힘도 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4. 17-21절의 전쟁 이야기는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의 대승리를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는 새들의 잔치라고 불립니다. 이 전쟁을 새들의 잔치라고 부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매우 강렬한 표현입니다. 보통 전쟁의 승리를 왕의 축제나 승리의 개선식 같은 장면으로 연상하잖아요!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같이요. 여기서는 전쟁의 결과를‘새들의 잔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승리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했던 자들의 말로는 매우 참담합니다.
19-21절,“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했던 자들이 모두 잡힐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과 연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던 자들이에요.(일부 표적도 행하며) 그들은 산 채로 지옥 불에 던져지고 검에 죽고 또 새들이 먹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어린 양 혼인 잔치 이후 새들의 잔치로 종말 이야기를 전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실마리
5. 백마를 타신 예수님이 등장하는 장면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상징(symbolism)으로 기록되었기에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단 교주들이 대개 백마를 타고 사진을 찍고, 어느 스타디움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백마를 타고 등장하거나 왕복을 입고 부부가 등장을 합니다.(신천지 이만희도) 고대 로마와 유대 문화에서 백마는 승리와 정복을 의미했어요.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식(parade)에서 백마를 타고 입성했습니다. 백마는 강한 힘과 통치를 상징하며, 특별히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마차를 끄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오신다는 것은 그분이 최후의 승리자로 등장하심을 의미합니다. 슥6:1-8에 네 마리의 말(백마, 홍마, 검은 말, 어두운 말)이 등장하는데, 백마는 승리와 정의로운 정복을 의미합니다. 11절,“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요하은 예수님을“충성되고 진실한 이”그리고“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고 말했어요. 백마를 타신 예수님은 불의한 세상을 정의롭고 공의롭게 심판하는 왕이십니다. 이는 선지자 스가랴와 시편에서 예언한 의로운 왕, 메시아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6. 시45:4-5,“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소서.”사11: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예수님은 초림 때에는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셨지만(슥9:9, 마21:1-9), 재림 때는 백마를 타고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겸손한 종에서 승리한 왕으로 등장하시는 장면이에요. 백마를 타고 오시는 주님께서 진정한 정복자로 등장하여 최후 승리를 이루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의 새들의 잔치에 앞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9절)은 예수님과 함께 승리한 성도들이 참여하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신부(교회)가 신랑(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에요. 새들의 잔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적했던 짐승(사탄)과 그를 따랐던 자들(거짓 선지자들)이 패배하여 심판받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들의 먹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도 종말 강화를 통해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28)
7. 어린 양 혼인 잔치와 새들의 잔치, 이 두 잔치는 마치 결혼식 피로연과 전쟁터의 만찬을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쪽은 기쁨과 축복의 식탁이고, 다른 쪽은 전쟁 결과로 황폐한 땅에서 새들이 먹이를 찾는 장면이에요. 사도 요한이 두 가지 잔치를 한꺼번에 소개하는 것은 사람들은 두 가지 잔치 중 하나에 초대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새들의 잔치 이야기는 우리가 읽기에 이 구절이 너무 잔인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폭력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전쟁 후에 남겨진 시체들이 들짐승과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렘7:33,“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
”겔39:4,“너와 네 모든 때와 너와 함께 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넘겨 먹게 하리니.”고대 전쟁에서는 패배한 군대가 철수한 후에도 시체를 수습할 사람조차 남지 않으면, 그 땅은 황폐해지고 들짐승과 새들이 그 시체를 먹는 일이 흔했습니다. 완전한 심판과 패배를 의미합니다. 어떤 전쟁이든 승리한 자는 영광을 누리고, 패배한 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예수님을 대적한 자들은 비참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보여주며, 그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승리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 제시
8.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이 땅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시며, 결국 모든 권세 위에 계십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폭군이 아닙니다. 그분은 공의롭고 자비로운 왕이십니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영광과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과 함께 그의 나라에서 다스리며, 승리의 개선식을 함께 즐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유혹이 아니라,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가치 없는 존재에게 우리 몸을 던지는 자는 매우 어리석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예수님께 있어요.
세상의 권력자들과 악한 세력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최후 승리는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 세상에서 핍박받고 억압받더라도, 결국 우리는 승리자 예수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세상의 악이 판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악한 세상-악인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하며, 마지막 날 예수님이 승리자로 오셔서 모든 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백마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은 겸손한 나귀를 타신 초림의 예수님에서 이제 승리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기대
9.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속하여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까? 여러분,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주님의 편에 서십시오! 백마를 타신 왕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세상의 유혹과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최후 승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최후 승리를 준비하는 성도가 됩시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오늘날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해요. 오늘날에도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것인가? 그분을 믿고 따르며, 신부된 교회로서 승리의 잔치에 참여할 것인지, 새들의 잔치의 희생자가 될 것인지요. 세상의 가치와 권력, 죄악을 따라가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결단은 양자택일입니다. 우리가 어느 잔치에 참여할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함께 심판받을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혼인 잔치로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이 초대를 거절하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