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익는다! 아픔이 익는다!
이제 길을 떠나 지구촌 나그네로 산 세월이 만 29년이 되었다.
세월의 무게가 저절로 느껴진다.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궤도에서 두 번이나 이탈하였음에도 추락하지 않고 폭발하지 않고 살아서 건재함이 참으로 은혜다. 인도와 중국을 지나온 지금 다가오는 세계의 모든 것이 마술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한 쪽에는 하늘에 닿는 인간의 지식과 발견과 발명의 온갖 과학의 기술이 탑재된 현재 속의 미래, 바벨탑이 위풍당당하고 다른 쪽에는 그 그림자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작고 초라하고 외롭고 슬픈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고 초라한 사람들, 운명적으로 슬프고 아픈 사람들 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긴 세월을 그들의 곁을 넘나들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무던히 희망하며 절망하였고 눈물로 기도하며 몸부림 쳤다. 내 몸을 팔아서 먹이고 입히고 싶었다. 대신 아프고 슬프고 싶었다. 대신 고난을 짊어져 주고 싶었다.
세월이 익었다. 이제야 비로소 십자가 앞에 서서 있는 그대로를 가만히 직시한다. 꿈을 꾸라고 말하지 않는다. 변화하라고 외치지 않는다. 개혁을 소리 높여 말하지 않는다.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기도한다.
나의 행복을 당신께 드립니다. 나보다 더 행복하십시오!
나의 매사보다 당신의 매사가 잘 되길 빕니다. 나보다 더 잘 되십시오!
나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복이 되길 빕니다. 나보다 더 복 되십시오!
나는 쇠하고 날마다 만나는 모든 분들이 흥하길 간절히 빈다.
세월이 익으니 아픔도 따라 익었다.
내 몸 속에 나그네살이에서 받은 크고 작은 아픔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상처와 절망, 분노가 저마다 자리 잡고 가끔씩 나를 휘저었다. 나는 그것들을 뽑아내거나 억지로 잊으려 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 손에 맡겼다. 그럼에도 가끔 뛰쳐나와서 찌르고 자르며 고통을 주었지만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다독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축복하였다.
이제는 아픔들이 뛰쳐나오지 않는다. 그 동안 아픔들이 익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된 것이다. 금번에 글을 쓰면서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웃으며 편하며 남의 이야기처럼 말할 수가 있다. 이 책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느 때와 다르게 아픔, 고통의 이야기를 몇 편 다루었다. 이는 선교현장이 무풍지대가 아니고 여느 시장과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어둠이 있고 선악의 갈등의 시험으로 유혹이 많음을 알리며 더 많은 중보기도가 요청됨을 아뢰고자 함이다.
어젯밤 인도에서 부고가 들어왔다.
너무 뜻밖이어서 믿지 않았는데 이 목사님께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며칠 후에 뉴델리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부고가 떴다고!
매씨 원장은 28년 된 친구다.
28년 전, 뉴델리 나자부가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십 여명의 나환자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모금으로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의 삶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지금까지 동역자로서 함께 하였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소명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불편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식하고 용감하게 고아들을 오는 대로 다 받아들여 한 때 고아들과 버림받은 노인들이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를 시기한 사람들이 고아원의 많은 아이들이 그의 자녀로 등록된 것을 경찰서에 고발하면서 그의 시련과 고통이 쏜살처럼 다가왔다. 그의 죄는 문 앞에 그냥 버려진 아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자기 자녀로 다 입적시킨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120명의 고아들이 다른 고아원으로 끌려갔다. 뿌렘담에서 존중받으며 자유롭게 자란 우리 고아들은 강제로 배정받은 감옥과 같은 고아원을 탈출하고자 식음을 전폐하며 거리로 나와서 살려달라고 절규하였다. 그는 고아들의 비명소리에 단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빼앗긴 아이들 120명을 찾아오기 위해서 재판을 하겠다며 나에게 재판비용을 대주라고 하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혔지만 아이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을 받았다. 당시 재판 비용이 1500만원 기본비에 재판이 열릴 때 마다 300만원을 선 지급해야 했다. 어쨌든 우리는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다 이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아이들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아원에서 탈출하여 다 뿌렘담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축제의 광란에 빠졌다.
그와 나는 가끔 고아들의 돌아오게 된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미를 돌렸다. 그 때 그 귀한 거액의 헌금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쾌척해주신 분들이 내 가슴에서 별이 되어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는 그 사건을 반추하며 이야기를 나눌 벗이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나에게 많은 아픔과 고통을 수시로 선물 하였다. 나는 그의 선물을 받고 숙제를 하면서 아픔이 찬미가 되고 환희가 되고 영적인 성장의 자양분이 됨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대를 만났기에 인도 광야에서 외롭지 않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행운을 누렸음을 고백하오. 벗이여! 우리는 사나 죽으나 벗이오. 함께 계속 이야기를 나눕시다.
샨띠홈을 빼앗기고 아이들이 거리에 나와서 배회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교통사고로 죽었다.
마니푸르 폭동으로 가옥과 전 재산을 잃고 도시로 나와서 난민이 된 교우들은 직업이 없이 막막하다. 자위대로 나가 순국한 청년들의 이야기는 너무 슬프고 아프다. 그 순국자들이 부모님이 토해내는 말들은 핏덩이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죽었다. 부모들의 심장에 칼을 꽂은 인간의 탐욕은 화려한 전쟁 비즈니스 쇼를 펼치며 인류를 무감각, 무관심 그리고 쾌감 본능으로 인도한다. 서너 달 전에 우리의 보살핌 속에서 아름답게 자랐던 아이가 가출하여 돌아오지 않고 있다. 또한 우리의 촉망을 받은 청년이 집을 나가 자기와 다른 계급의 청년과 결혼하였다. 그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칠천 여명의 미얀마 난민들이 밥과 약 그리고 교과서를 요구하였다. 그들의 고통, 눈물, 분노와 상처가 지금 나를 가장 들쑤신다.
시마다 때마다 나를 괴롭혔던 고통과 아픔들이 세월 따라 익어 정금이 된 것을 보기에 결코 낙심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얀마 난민 친구들이 주는 아픔은 내 힘으로 감당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 날마다 엎드려 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기도한다.
그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직접 고쳐주시라고 기도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교과서, 책을 주시라고 기도한다.
언젠가는 미얀마 난민들이 주는 아픔과 고통도 익을 것이다. 향기롭고 아름답게 익어서 하나님 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물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아픔을 끌어안는다.
29년 동안 현장이 주는 고통과 아픔은 나 혼자 끌어안은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보 기도를 바치는 수많은 교회와 교우님들이 함께 끌어안아 주셨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귀한 헌금을 바치어주신 교회와 후원 벗님들, 기관과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주셨다. 선교 현장에서 고단한 삶을 감내하며 감사하며 믿음의 소망으로 묵묵히 기도하는 벗님들, 목회자님들께서 함께 끌어안아 주셨다. 그리고 비전아시아 이사장님과 이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은 나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차게 끌어안아 주셨다. 남편과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언제나 조건 없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나를 힘껏 끌어안아 주셨다. 무엇보다 그 많은 끌어안음을 가능하게 해주신 주님의 끌어안음! 하나님의 끌어안음이 나를 세월 속에서 견디며 부대끼며 잠 못 이루며 익게 하셨음을 고백한다.
금번에 나오는 ❰짜이 한 잔과 불고기 열세 마리❱는 5부로 구성하였다.
1부, 2부, 3부는 현장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현장의 막중함으로 말미암아 마니푸르 폭동 이야기, 미얀마 내전 이야기가 많은 쪽수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내용이 무겁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기도와 격려의 시간이 되길 빈다.
4부는 선교 역사에 대한 단편을 적었다. 16세기 일본의 선교와 19세기 말에 시작된 호남 선교에서 밀알이 되었던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한국에 온 일본 선교사 이야기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 이야기를 담았다. 비전아시아를 만들고 세상을 떠난 이중표 목사님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서 담았다.
5부는 고향이야기다. 고향 사람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많은 망설임 끝에 그 동안 가슴에만 담고 혼자 묵상하며 힘을 얻었던 어린 시절에 꾼 꿈과 치유의 체험과 기도를 적었다. 지금도 나를 이끌고 있는 꿈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어린 나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임이 분명하다.
다시 한 번 29년의 긴 세월 동안 함께 동역해주신 교회와 목회자님들, 교우님들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엎드려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바쁜 시간에도 책을 읽어주고 정성스럽게 추천사를 써주신 비전아시아 이사장 육순종 목사님과 사랑하는 친구 최선욱 문학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무더위에 거친 작업을 하면서 정성을 다해 책을 제작해주신 도서출판 동연의 대표님과 편집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참으로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을 부르고 동행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하고 일하심을 목격하게 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엎드린다.
임마누엘 평화!
2026년 8월 3일 월요일 쓰고
10월 7일 수요일 자시에 올리다
온고을에서 우담 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