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오늘의 명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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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TV체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bs“무엇이던 물어보살” 오락프로그램을 잠깐 보는 순간 깜짝 놀랄 멘트를 들었다. 보살로 분장한 서장훈이라는 전직 농구선수가 미스터트롯에 나온 이도진이라는 가수의 고민에 대해 “인생에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총량이 있다”고 하면서 “지금의 시련은 좋았던 시절이 있었던 만큼의 과보(果報)이고 또 다시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는 맥락의 조언을 해주는 장면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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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인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대해서 적잖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인과(因果)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 스스로 지은 인과(因果)의 업보(業報)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통과 괴로움도 충분히 반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다면, 청정자성(淸淨自性)으로 들어가서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떤 인연을 만나더라도 늘 마음이 자재(自在)하고 평안할 수 있음이니, 순간순간 찰나에 라도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본질(本質)은 의외로 간단하다. 더 좋거나 더 싫고 나쁜 것은 없다. 좋은 만큼 싫고 나쁘고, 싫고 나쁜 만큼 좋은 것이다.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인과법칙(因果法則)이다. 다만 좋고 나쁜 시절인연의 시차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윤회고(輪廻苦)를 벗어나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분별(分別)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어렵다. 업습(業習)이 깊어서이다. 그래서 인과(因果)와 연기(緣起), 공(空)과 중도(中道)를 여실히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분별심(分別心)을 여의어야 한다. 그 뿐이다.
{금강경 강의}
제 10. 장엄정토분 (莊嚴淨土分 – 정토를 장엄함 6.)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부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만일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 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몸을 크다 하겠느냐?"
[붙임]
수미산왕(須彌山王)이라 함은 산의 높기와 넓기는 3백3십6만리나 된다고 한다. 지금의 계산법으로는 8십4만Km . 지구를 157바퀴 반을 도는 높이와 넓이이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물론 상징적으로 크다는 표현을 하기 위함이다. 수미는 묘(妙)히 높다는 뜻이요, 산왕(山王)이라 함은 뭇 산 가운데 가장 크다는 뜻이나, 마음이 그만큼 한량없다는 표현이다.
부처님께서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불(三身佛)로 나뉜다.
법신(法身)은 청정자성(淸淨自性)을 가리킨다. 청정자성은 있다 없다의 분별(分別) 인과(因果)를 떠난 자리이므로, 불과(佛果)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니, 얻었다 고도 할 수 없고 얻지 않았다 할 수도 없으며, 깨달았다 고도 할 수 없고 깨닫지 않았다 할 수도 없는, 생각을 붙이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중도(中道)의 몸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고, 상대적인 것을 떠나 절대적인 자리이니, 이름하여 피안(彼岸)이요, 실상(實相) 그 자체요, 해탈(解脫)이요 열반(涅槃)이며, 청정자성(淸淨自性) 또는 청정본심(淸淨本心)이라고 부른다.
보신(報身)은 천장(千丈)의 노사나신(盧舍那身)이시다. 우리 중생들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몸이시다. 우주 전체가 부처님의 몸이시니, 부처님 몸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를 보신(報身)이라 하고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이름한다. 즉, 비유하자면 파리가 우리의 몸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주 전체의 부처님 몸을 보지 못하는 격이다.
화신(化身)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하여 화작(化作)한 몸이시다. 우리가 보는 대상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님의 모습이시다. 내가 보는 대상이 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나를 돌봐 주심에도 업(業)이 두터워 부처님의 모습으로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화작(化作)하여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심이다.
- - 진우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