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끝까지 행하라 (창 37 : 12~17)
요셉은 꿈의 사람이고, 말씀에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동행했던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특별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성실성입니다. 요셉에게 성실성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성실성입니다. 그래서 많은 말씀을 들을 때,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실성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실이란 단어는 여러 곳에서 사용되지만, 히브리어로 성실은 ‘에메트’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메트에서 파생된 단어가 ‘애므나’와 ‘애메스’가 있습니다. 애므나와 애메스는 둘 다 진실을 뜻합니다. 에메트에서 파생된 단어 애무나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애무나를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견디다라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을 보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것을 인용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에 나오는 그의 믿음으로 라는 말에서 믿음이 ‘애무나’입니다. 또 다른 뜻으로는 ‘견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성실이라는 단어는 ‘아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아멘’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진실로,’ ‘성실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주로 언급하셨던 “내가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은, “내가 아멘, 아멘”과 같습니다. 예배시간에, 아멘을 자주 하시는 분들은, 예수님의 말버릇을 따라하는 분들입니다. 아멘은, 진실로, 성실함으로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을 쓸 때에 어떤 학자들은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아멘, 아멘 에고 에이미를 그대로 해석하기를 바랐으나, 말투가 이상한 관계로 그냥 진실로, 진실로를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실로, 성실함으로의 뜻은 분명히 ‘아멘’입니다. 그래서 성실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진실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실함은 진실한 삶이고, 믿음의 삶이며, 견디는 삶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붙잡은 뒤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실하게 살아야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견디는 것입니다. 결코 뒤돌아서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것, 여기에 바로 성실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백성은, 그 기도의 결과가 성실함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실함이 무엇입니까? 진실함과 견딤, 성실함과 믿음인 것입니다. 맡은 자리에서 버티는 것, 이것이 바로 승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에서 39장까지를 살펴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셉이 꿈을 붙잡고 행동했던 것은, 꿈을 이루기를 기대하며,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7장 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을 형들이 있는 세겜으로 보냈으나, 거기에 형들이 없음으로 도단까지 갑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대략 80km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를 걸어간 것입니다. 하루나 이틀정도를 쉬지 않고,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상 가보니 형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실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뭔가를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형들이 없는 것을 본 요셉은, 형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다 전합니다. 요즘 청년들에게 이런 과정을 시키면,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걸어서 80km에 막상 도착하니, 형들은 보이지 않고, 물어 물어 형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이것이 가능할까요? 혹자는 전화를 걸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형들을 야곱이 있는 땅에 쉽게 불렀을 것입니다. ㅋㅋㅋ 요셉은 아버지가 부탁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과 성실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성실한 사람에게 일을 더 맡기면, 그 사람은 그 일을 꼭 마무리 할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이라도 맡기면, 끝까지 일을 할 사람입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꾀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기 해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내가 이 교회에서 이런 존재였다고, 내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아 라고 하는 등. 자기 공로를 세웁니다. 하지만, 성실한 사람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합니다. 요셉이 세겜 땅으로 형을 찾아 갔으나, 그 자리에 없음으로 다시 도단까지 이릅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요셉이 도단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구덩이에 빠지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실하면, 어떤 위기에 처합니까? 죽을 위기까지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형통함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난관과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이끌어 가십니다. 이 세겜에서 도단까지가 22km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찾아 또 걸어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이 요셉의 모습과 같아야 합니다. 우선 불만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믿는 자에게 승리라는 것은, 중간에 실패를 많이 견디고 이겨냈기 때문에 승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런 전쟁도 치루지 않고, 승리했다는 것은,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버지 곁에만 있었더라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꿈은 그가 헤브론을 떠나 세겜으로, 세겜을 떠나 도단으로, 도단을 떠나 애굽으로, 이렇게 팔려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는 자는 믿음에 있어서 성실함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가 한 교회를 섬기는 것이나, 사역자가 한 교회를 잘 섬기는 것이나, 한 해 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서 성실하게 섬기는 것,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성실함을 통해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요셉과 같이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그 꿈을 통하여 요셉과 같이 나를 사용하실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는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PS. 자신을 개발하고 투자하라 자신의 마음을 공부하고 개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을 개발하고 자기성장에 투자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랑의 기술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에게 가장 고귀한 것을 투자하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을 이용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 뿐 아니라 그가 누구이든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도와주고 애쓰는 것이다. - 강준민 목사의 ‘마음을 가꾸는 지혜’에서 -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지속적인 성장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것들로 마음을 채우지 않을 것이며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자신을 가꾸고 돌아볼 것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지혜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