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73
9월4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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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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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DAbxIHi2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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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 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 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 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두 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쫀쫀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루카 복음 6장 3~4절)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 있게 적용될 수 있고, 예외적인 상황 앞에서는 면제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복음 6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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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z4oMhjXyl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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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세 부류: 바리사이-율법학자-제자>
오늘 복음도 어제의 복음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어제 복음은 단식에 대한 원칙주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에 관해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남의 밭에서 밀이삭을 훔쳐 먹은 당신의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말은 크게 두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겠는데,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을 지배하는 분이시지, 그것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율법을 그 주인을 위해 지킨다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대치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세 부류 모두 율법에 충실해지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율법을 지켜 안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신 제자들뿐이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먼저 바리사이는 율법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이들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율법의 행위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입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집중합니다. 이들은 ‘위선자’라 불립니다.
그 다음 율법학자는 ‘원칙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꼭 해야 하는 의무만 철저히 수행하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조항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독선적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지만, 자신처럼 살지 않는 타인을 심판합니다. 물론 바리사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참다운 율법의 정신을 잃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하고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볼 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라 예측 불가입니다. 심지어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이제 소설 하나를 소개시켜 드릴 텐데 누가 바리사이고 누가 율법학자이며 누가 주님의 제자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아버지의 강요로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의사 칠링워드와 결혼합니다. 헤스터는 남편의 권유로 먼저 영국을 떠나 미국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곧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이 세월이 꽤 흘러도 오지 않자 그 마을의 인기 있는 목사인 딤스데일과 불륜을 맺고 딸 펄을 낳습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붉은 ‘A’를 새기고 3시간 동안 교수대 위에서 딸을 안고 만인의 구경거리가 되게 합니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Adultery’의 약자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동안 그녀는 항상 가슴에 붉은 ‘A’를 붙이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절대 자기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A’를 ‘Able’(능력 있는)로 읽을 정도로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돈을 벌어가며 딸 펄을 잘 키웁니다.
그러던 중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가 도착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칠링워드가 헤스터의 남편인 줄 모릅니다. 칠링워드는 헤스터의 불륜을 파헤쳐 결국엔 그 상대가 존경받는 딤스데일임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기 전까지 그는 그 괴롭힘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말에 딤스데일은 속이 썩어들어갑니다.
7년이 지난 뒤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함께 도망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딤스데일은 이미 죄책감에 속이 문드러져서 육신까지도 망가졌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딤스데일은 헤스터가 섰던 그 교수대에 올라 설교를 마치고는 자신이 헤스터의 내연남이었음을 밝히고 죽습니다. 그의 옷 속에도 붉은 ‘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바리사이는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할 수 없었던 딤스데일 목사입니다. 율법을 어겼지만, 그 책임을 사람들만 모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소설에서는 설교 중에 간간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더 겸손하게 보이게 만들어 인기를 더 얻게 됩니다. 남이 볼 수 있는 행위에만 치중하는 이는 절대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딤스데일이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 고백하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게 하려고 주홍글씨를 헤스터만 달고 살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바리사이는 솔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율법학자는 누구일까요? 헤스터의 남편인 칠링워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목사인 딤스데일의 불륜관계를 알아채고는 목사를 계속 괴롭힙니다. 그래서 그가 죄책감으로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는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봐 줄 수 없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가 정의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아내와 딤스데일을 용서하고 다시 잘 살아나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헤스터일 수 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딸을 잘 키워야 했기에 그녀는 죄인이라는 명패를 가슴에 달고 열심히 일하여 현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의 최선은 남에게 잘 보이는 것이고 원칙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에 발 빠르게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합니다. 헤스터와 같이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참 주님의 종입니다.
성당에서도 이런 세 부류의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부님이 볼 때만 열심히 봉사하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행동이 달라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요? 당연히 바리사이입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 보든 말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융통성이 없습니다. 자신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함으로써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율법학자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본인이 죄인으로 찍힐 것을 알면서도 바로 그 순간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율법이고 뭐고 없습니다. 율법의 주인은 하느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몸 – 이성 –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에 집중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사람은 몸이 다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을 삽니다.
이성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믿습니다. 이들이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입니다.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뜻’에 집중합니다. 뜻은 행위의 의도와 목적에 해당하는데 그 행위가 누구의 뜻,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했더라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때 그런 행위는 하느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를 당신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공부를 참 잘하고 왔을 때,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했다고 하거나, 그냥 자기만족을 위해 공부했다고 하면 아버지 마음은 어떨까요? 기껏 먹여주고 키워주었더니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한다면 계속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안 생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할 때 자녀가 사랑스럽습니다.
바리사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같고,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율법학자요 원칙주의자이며, 아버지를 위해 공부한 아이는 주님의 종이요 제자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구도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굳이 판단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이 세 기준으로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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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6,1-5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안식일이 아닌 은총의 안식일, 영원한 부활의 안식일을 주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처신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비난해 왔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맺은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한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고 하기보다, 그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즉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라고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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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26,5 참조).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을 체험한 뒤(사도 9,1-19 참조) 그는 자신이 받은 모든 종교적 특권과 윤리적 노력이 하찮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다만 옛것이기에 버린 것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을 자신들의 위선으로 왜곡하여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길을 막았고 그들의 행동은 ‘육적인 것에 대한 신뢰’,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하느님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갈라 1,12)이기에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통하여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중요하고, 그 정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신 ‘우리’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오시어 구원하시고자 한 대상인, 바로 우리 ‘사람’인 것입니다.
혹시 사람보다 일을, 돈을, 명예를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의 어떤 것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나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곧 사라져 버릴 것에 믿음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만드신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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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을 보면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일기예보가 있습니다. 주식정보가 있습니다. 작년부터 전 세계 코로나 현황을 보고 있습니다. 9월 3일 현재 상황은 이렇습니다. 220,129,238명은 확진자입니다. 4,559,948 명은 사망자입니다. 195,049,002 명은 완치자입니다. 미국은 40,513,018명의 확진자가 있습니다. 662,853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31,199,835명의 완치자가 있습니다. 한국은 257,110 명의 확진자가 있습니다. 2,308명의 사망자가 있습니다. 228,618명의 완치자가 있습니다. 한국은 실시간으로 백신 접종현황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9월 3일 현재 상황은 이렇습니다. 29,644,464명은 1회 접종자입니다. 16,783,832명은 2회까지 접종받은 사람입니다. 교황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백신의 접종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치료제가 개발되어 중증의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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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은 새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느님>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먹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오직 트집을 잡기 위해 그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이라고 예수님을 반박합니다. 구약의 백성은 천지창조 후 마지막 날, 주 하느님께서 쉬셨기 때문에 그날을 거룩한 날이라 여겨 어떠한 노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쉬셨다”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정작 그 주체이신 “하느님”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쉬셨기에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날의 주인이시고 이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기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이날을 보내야 한다는 의미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이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바로 그 아들인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명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본래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같이 더 많이 사랑하는 날이며 그분을 통해 제대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날이기도 합니다.
묵상 질문: 지금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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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하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코린토 신자들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 있었지만 오만함과 허영심에 가득 차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아폴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하느님의 종에 지나지 않으니 어느 가르침이 훌륭한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을 지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 규정의 참뜻은 사람들의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지 말라는 금지 규정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안식일에 율법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안식일 규정의 근본정신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제사 빵을 먹은 행위는 율법을 어긴 행위로 볼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 곧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가난했지만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따르려고 애썼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부자가 되려는 허영심을 버리고 죄의 용서와 화해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힘썼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몫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 영적인 자유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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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인정도 사정도 없는 사람의 법>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5,17)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이미 반감(反感)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부터 그랬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고, 병의 뿌리로 간주되는 “죄를 용서한다.”는 말에 대하여 그들은 트집을 잡았다.(5,20-21)
이는 그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다분히 종교적이었으며, 동시에 유대교의 기존 정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그 일행을 요주의 인물로 정하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래 감시자의 눈에는 좋은 것은 안 보이고 하자만 보이는 법이다.
어느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의 일행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던 일로 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진다. 루카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그대로 베껴 쓰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구절은 의도적으로 삭제해버렸다.
남의 밭에 자라고 있는 곡식에 낫을 대지 않고 그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된 일이다.(신명 2,26) 그런데 문제는 이 행위가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야 함은 십계명의 제3계명이다.(탈출 20,8)
이 계명의 세부규정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쉬어야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탈출 31,15; 35,2; 레위 23,3)
여기서 ‘철저하게 쉬어야 하는 것’의 목적은 이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좀 애매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철저하게 쉬는 것인지 말이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개의 세부지침을 만들게 된다.(미슈나 샤바트; 예루살렘 탈무드 참조)
바로 이 39개의 금령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 즉 추수하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은 제자들의 행동은 추수로 간주되어 안식일 법을 위반한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분명히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
예수께서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의 일행이 몹시 굶주린 나머지 제단에 바쳐진 빵을 먹었다(1사무 21,1-10)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법에도 예외규정을 있음을 환기시키신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한해서는 예외규정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한낱 예외규정으로 제자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바로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이신 것이다.(느헤 9,14; 이사 56,4; 에제 23,38) 루카가 마르코복음을 베끼면서 27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을 삭제한 이유도 이점을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루카는 예수께서 율사들에게 하신 답변의 인본주의적 법이념보다 그리스도론적 법이념에 역점을 두려했던 것이다.
오늘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계명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겠다. 통상 주일의 성화는 주일미사 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일미사 참례의무는 교회법이 명기하고 있듯이 모든 신자의 의무이다.(교회법 1246조)
그렇다고 주일미사 참례 하나만으로 주일성화의 계명을 완수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의 주일의무가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의 주일의무는 안식일 다음 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인류의 죄를 씻고 세상에 구원을 선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은 분명 부활신비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요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날인 셈이다. 따라서 주일성화의 의무는 교회가 만든 법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신비를 묵상하는 데 있다.
사람의 법은 법 자체의 이유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존재이유는 법 자체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그 정신이 비록 인본주의에 있다하더라도 결국 사람의 복종을 무차별적으로 요구하며, 때로는 인정사정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에 거기에는 인정도 있고 사정도 있고 눈물도 있다. 하느님이 그 법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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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임성환 요셉 신부님]
<안식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중의 하나인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은 도둑질이기에 바리사이 몇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휴식의 날이기 때문에 일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밀이삭을 잘라먹는 것도 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을 가지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인데...”
“배 고파 죽을 판인데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아무리 배 고파 죽을 판이지만 니는 하느님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 성경 말씀도 모르느냐? 하느님은 그 크신 당신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실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말일까요?
우리 신앙생활을 위해서 만들어진 규율을 그대로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급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상황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종종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나서 우리가 내린 결정을 다시 고민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더 옳을까요?
이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저 사람의 말도 맞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서 이 사실을 다시 물어보고 뽀족한 대답을 얻기까지 두 사람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고 한 사람만 맞고 나머지 한 사람은 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참으로 난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더 명확한 규율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결국 모든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 모여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맞느냐? 저게 맞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렇게 따지는 나의 속마음에 내 욕심과 내 명예욕 때문에 따지느냐 아니면 진정으로 예수님 그분께로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서 따지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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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일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막을 가리던 휘장을 찢듯, 율법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말씀으로 은총의 새 옷을 입히십니다. 앞 장면에서 단식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마태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마르코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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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새 옷을 입히시니, 새 날이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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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2)
<안식일에 대한 성찰!>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신 것에서 시작된 규정입니다.
안식일에는 39가지 노동을 금지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추수작업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을 추수작업으로 보고,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예수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규정 자체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질과 오히려 안식일에 해야 할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본질과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콜로1,21-22)
이렇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나를 살려주신 하느님, 나의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더 깊게 머무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힘입어 다시 일어서는 날', 곧 '부활의 날'입니다.
안식일인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주일을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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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 마음>
루카 6,1-5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 마음>
괜찮아
먹어도 돼
배고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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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갑곶성지에 살다 보면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지 안에 봉안당이 있어서, 거의 매일 안치되는 고인을 위한 안치 예식을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더 가까이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언젠가 죽을 것이 확실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늘 불안한 미래로 바라보는 우리입니다.
우선 이 세상 안에서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많이 남든, 얼마 남지 않든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 계속해서 생각하면 오늘이란 하루가 공허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허한 오늘을 만들지 않으려면 미래를 오늘과 철저하게 분리해야 합니다.
미래는 행복으로 가득 찬, 희망의 미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미래가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살기 위해서는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부정적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주저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미래를 바라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 몇 사람과의 안식일 논쟁은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안식일 논쟁의 첫 번째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향해 적대적이지 않았을 때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어서 안식일 법을 위반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협된 사고를 하면서 안식일을 만드신 하느님을 속 좁으신 분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나 존경하는 다윗 왕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다윗 왕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었습니다. 율법에 분명하게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다윗을 사랑했던 하느님은 이를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도 이런 그의 행동을 참성자요 예언자로 행동했기 때문에, 옳고 바르며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성자이신 예수님은 어떨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희망을 두어야 하는 미래, 또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미래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그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포하십니다. 즉, 종이 주인의 말을 철저하게 듣고 따르듯이, 주님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희망찬 미래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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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줘서 고마워.>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이때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대부분 “미안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이 사과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지난 약속에도 늦은 것이 기억나면서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이 효과적이고 기다린 사람에게 기쁨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다음의 말이 최고의 정답이라고 합니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감사의 표시입니다. 이 감사의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이 상대에게 했던 공헌감을 느끼면서, 먼저 나와 기다린 것이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감사의 인사는 그냥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며, 상대의 말과 행동에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도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존중하기에 또 주님의 일에 큰 의미가 있기에 당연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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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를 위한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 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옭아 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에 참례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글자에 매인 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예언적 말씀에 마음을 닫아걸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말과 규율로 이루어진 그들의 틀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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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
-예수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가 결정적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별들을 바라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편8,4-5)-
저절로 시편이 흘러나오는, 참 오랜만에 보는 별 총총한 가을 밤 하늘입니다. 어제 쓴 짧은 시도 생각납니다.
-“가을은
기도와 은총의 계절
밤알을 줍듯
은총을 줍느다
눈만 열리면
온통 널려 반짝이는 은총의 선물들이다”-
저에겐 성경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들이 그러합니다. 오늘 성무일도시 독서의 기도, 시편136장 1-26절까지 내용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웠는지요. 매절 마다 계속되는 후렴,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시간 되면 읽으며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첫절과 끝절입니다.
-"1.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26.하늘의 하느님을 찬양들 하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미사 때 성가를 부르지 못한지도 1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문득 생각난 둘 다 ‘주 예수’로 시작되는 가톨릭 성가 두장의 첫절입니다.
“주 예수 우리의 희망, 우리의 행복,
내 일생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리.
생명의 길 밝혀 주시니, 주님을 따르리, 십자의 길로
주님을 현양하리, 사랑의 길로.”(성가19)
“주 예수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성가61)
더불어 생각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ㄴ)
믿음 대신 사랑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사랑하느냐? 보지 않고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고 사랑하는 예수님인가 자문하게 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절정인 이상적인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를 위한 헌장과 같은 한문장으로 된 72장(4-12) 긴 부분을 나눕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저에게 날마다 새벽 강론 쓰는 시간은 1.기도하는 시간, 2.사랑하는 시간, 3.회개하는 시간, 4.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강론을 쓰는 이른 새벽 고요중에도 무수한 가을 풀벌레 맑고 영롱한 찬미소리는 밤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중 무엇보다 주목되는 절이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다.”입니다. 그대로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는 구절과 일치합니다.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그리스도 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모범인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고백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하느님과 우리의 화해자이자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우정관계는 날로 깊어져가고 있는지요.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꿋꿋이 견디어 내며 주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를 깊이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처럼 비슷한 내용의 연장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은 사실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섭니다. 여전히 바리사이의 꼰대질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처럼 새 부대의 의식으로 바뀌어야 새 포도주의 현실을 분별할 수 있었을 터인데 이들은 절벽같은 율법지상주의자들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사랑의 잣대가 아닌 율법의 잣대를 들이 댑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진리를 망각했습니다. 사랑의 절대적 법 앞에 상대화되는 율법임을 몰랐습니다. 나무와 더불어 숲을 봐야 함을 몰랐습니다. 똑똑한 바보, 말그대로 무지의 사람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늘 새 부대와 같은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새 포도주같은 살아 있는 현실을 담아 냈습니다.
새삼 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예수님과 사랑의 우정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주변환경이 아름다워서 평화의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가 깊어갈수록 평화의 천국입니다. 강론을 쓰는 도중 화답송 시편이 반갑게 한 눈에 들어 옵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 이처럼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근본주의자이자 율법주의자인 바리사이들에게 다윗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이들의 사고 방식의 전환을 촉구하며 결론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도 사랑의 예수님 앞에는 상대화 된다는 것이니, 바로 하느님의 선과 진리와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분별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사랑의 우정관계가 깊어가면서 우리 마음이 예수님 성심聖心의 마음이 될 때 저절로 올바른 분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분별에 임박하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물으면 절로 답이 나올 것입니다. 마침 어제 읽은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똑같은 날,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말합니다. “친구여, 만일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안다면 너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네가 모른다면 너는 율법의 파괴자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참 의미심장합니다. 생각없이 하는 무지의 행위가 아닌 사랑의 행위는 무죄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자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우정관계를 날로 깊이해 주시며 분별력의 지혜를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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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 주십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이번에는 안식일 논쟁입니다. 그런데 묻는 대상이 "당신의 제자들은~~?"이 아니라 "당신들은~~?"입니다. 이 경우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덫을 놓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무언가 알고 싶어 묻는 질문이 아니라 추궁과 공격의 의미가 더 큽니다. 바리사이들은 밀 이삭을 뜯어서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의 행위를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간주하고 안식일 법을 들이댑니다. 어떤 사실을 자기들의 의도에 맞춰 과장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예수님은 다윗이 했던 일을 예로 들어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거나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 유지를 위해서라면 이해와 사랑이 먼저임을 밝히십니다. 율법을 함부로 어겨도 무방한 사람은 없지만, 굳이 율법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는 상황도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은 모든 이에게 평등히 쉼을 제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을 통해 종들과 이방인, 짐승, 땅에게까지도 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셨지요. 안식일법은 유한함을 운명처럼 안고 사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증진하고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필수적인 회복 장치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계급 사회에서 "주인"은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타인을 착취하고 목숨까지 사유화하기도 했지만, 그건 하느님의 시선에서 가장 주인답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혹여 "주인"의 권리를 그렇게 쓰면서 그걸 당연히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악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느님의 "주인다움"은 어떤 의미일지 제1독서에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콜로 1,22)
하느님은 "죽음"으로 주인의 최대 권리를 행사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주인이지, 타인의 죽음을 양분 삼아 부와 권력을 쌓는 주인이 아닙니다.
원죄에 물들어 악의 어둠에 짓눌린 인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다시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모습, 즉 하느님의 모상성을 온전히 회복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인이심을 말씀과 행위로 당당히 밝히십니다. 주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종의 종이니까요. 그분 생애가 시작부터 마침까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일행의 범법을 찾아내려 핏대를 올리던 바리사이들 중에 단 한 번이라도 하느님의 이러한 주인다움을 실천해 본 이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공감하며 이해했을 겁니다. 복음 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으리라 희망을 가져 봅니다.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화답송)
시편 작가는 안식일의 주인,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떠받치고 계시다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먹고 나날이 생기를 얻어 누리는 행복한 종들입니다.
관습과 규범, 전통에 앞서 사랑을 우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막아 줄게." "내가 책임질게" 하며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를 떠받쳐 주고 계시니, 우리도 용기를 내고 사랑을 다해 그분을 따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과 사회. 공동체 곳곳에서 '진정한 주인다움'을 살고 있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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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qz56Mnw4Zf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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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사람의 아들은
사람을
살리신다.
삶의 문제는
놓쳐버린
정체성의
문제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랑의
존재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에
수 많은
안식일의
율법조항이
마구 생겨난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사람을
모르는 것이다.
가장 바른 길은
생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참된 진리이다.
참된 사랑만이
참된 열매를
맺는다.
안식일을
치유하시는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
안식일은
구원을 향해
언제나
열려있어야 한다.
건강한
안식일의 삶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핵심이다.
사람의 기쁨이
안식일의
진정한 기쁨이다.
사람의
아들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랑의
시간이다.
안식일은
나 자신과
이웃에게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은
규정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주인이신
주님이시다.
사랑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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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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