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신심이 좋은 남자나 여인이 이 비밀하고 신비한 진언을 잠깐이라도 귀기울여 들으면 몸에 있는 백천만의 죄가 다 없어지리라.
이 다라니는 십악업과 오역죄를 없애주며, 가이없는 큰 죄를 저질러 자기 몸에 죄가 있음에도 깨닫지못하여 하늘이 용인하지 아니하고 땅이 실어주지 아니할 죄업으로 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도 참회할 곳이 없는 사람의 죄업조차 없애준다.
만약 자애롭고 순한 남자나 여인이 부모의 깊은 은혜를 갚고자 이 불정심다라니의 진언 글귀를 보고 사람을 청하여 써서 지니고 읽고 외우기를, 날마다 아침에 부처님을 향하여 향을 피우고 이 다라니를 외우면 이러한 사람은 마침내 지옥에 떨어져 죄를 받지아니하며, 백년이 되어 목숨을 마칠 때에도 마음이 산란하지 아니하여 시방의 거룩한 보살들을 뵙게 될 것이다.
이 때 보살들은 저마다 연화대와 깃발과 수레바퀴같은 양산을 가져와 그 광명이 집에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보살들이 이 사람을 맞이하여 정토에 나게 될 것이다.
또 믿음이 좋은 남자와 여인이 이 불정심자재왕다라니경을 보고 듣고 베껴쓰고 읽고 외우면 그 사람의 모든 번뇌가 앞 길을 막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 혹시 재산이 흩어지거나 구설이 다투어 일어나거나 집안이 편안하지 아니하거나 혹은 다섯가지 길이 막혀 괴이한 악몽을 많이 꾸거나 질병이 몸에 붙어 어찌할 줄을 모르겠거든, 오로지 아침마다 이 다라니를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공양하며 외우도록하라.
그러면, 항상 관세음보살의 가이없는 위신력과 금강밀적(금강역사)이 밤낮으로 이 사람을 둘러싸고 지켜줄 것이며 모든 소원을 다 원만히 이루어 줄 것이다.
또 만약 믿음이 좋은 남자나 여인이 온갖 소원을 구하거나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일체종지)를 이루고자하면, 반드시 고요한 곳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관세음보살을 마음에 생각하되, 다른 데 마음쓰지 말고 이 다라니경을 일곱번 외우라.
그러면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게 없으며 또 모든 사람의 사랑을 얻게되며 모든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달마대사가 전한 법은 말과 문자가 문득 끊긴 ‘불립문자 언어도단’(不立文字 言語道斷)의 진리입니다. 본래 법이라고 이름 붙여서 설한다는 그 자체가 잘못입니다. 입을 열면 이미 잘못 된 것(開口則錯)이지요. 명(名)과 상(相)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내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어도단에 심행처(心行處)가 멸(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법문을 잘 하지 않아요. 하더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그때 그때 대중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근기에 맞는 떠오르는 말을 할 뿐이지요.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데 새삼스레 말씀드릴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어요. 온 세상과 우주에 법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무슨 신통한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후 열반하시면서 “나는 아무것도 설한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성철스님 역시 열반송에서 “평생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 것이 이 뜻입니다. “원래 얻을 것이 없으며, 줄 것도 알 것도 깨칠 것도 없는데 무엇을 설할까 보냐” 이런 의미지요. 법문이란 것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아야 지혜의 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그릇에 ‘발 씻은 물’, 꿀, 밥, 오줌을 넣으면 오물통, 꿀단지, 밥통, 오줌통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사람에 맞는 방편을 설할 때 ‘참 법문’이 되는 겁니다.
한 생을 버려서라도 안되면 누생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도를 깨닫고 말겠다는 굳은 서원을 지니고 수행할 때 비로소 깨달음이 다가옵니다. 그때는 조금만 일러 주어도 ‘법의 문(法門)‘이 열리고, 심지어는 돌부리에 채여도 깨닫는 것입니다. 결국 법이란 자기가 노력해서 스스로 얻는 것이지, 남이 떠다 먹이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수행 체험담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수행의 3요소는 잘 알다시피 대신심(大信心), 대의심(大疑心), 대분심(大忿心)입니다. 나의 경우는 신심으로부터 수행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겼습니다.
나는 남들보다 늦게 출가를 했어요. 집안이 넉넉해서 화학공장을 경영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해 보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도 술·담배도 하지 않았고 세속적인 즐거움에는 초연한 편이었어요. 평소 몸이 약해 결혼도 하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공장에서 염소가 터지는 바람에 폐가 나빠졌어요. 당시 폐병에는 약이 없어서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죠.
요양이나 할 생각으로 금산 태고사를 찾았어요. 그때가 28세. 태고사에는 나의 첫번째 은사가 되신 포산(飽山)스님이 계셨어요. 포산스님을 뵙고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10권을 숙독하는 등 철학과 문학에 나름의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처음 불교를 접하다보니 호기심도 들고 지적인 욕구도 강하던 터라 토론은 2주일 정도 계속되었어요. 결과는 내가 읽고 들은 철학·문학이 불교에는 필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예요. 철학·문학 등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 위대하다는 서양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윤리도덕 정도의 가르침이었어요.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내 병이 업력으로 인해 생겼음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역시 공업(共業)임을 알게 되었어요. 스님은 업장을 소멸하고 건강을 찾고 싶거든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라고 하시더군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잠도 안 자고 앉아서 부지런히 외웠어요. 아침·저녁엔 옆방 스님들과 참선도 같이하면서 약 5주 동안 일심으로 모다라니를 외웠습니다.
하루는 다라니를 외우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유명한 일본인 내과과장인 나리 타가 나타났어요. 내몸 이곳 저곳을 검진하고나서 “다 나았다. 아주 기쁘다”고 말하더군요. 이 때 앉은 채로 꿈이 깨었는데, 날아갈 듯이 몸이 가뿐했어요. 문득 무언가 먹고 싶다는 생각에 40리나 떨어진 연산시장으로 뛰어내려갔어요. 그전에는 입맛이 없어서 공양도 겨우 했는데, 시장에서 국수 떡 등을 배불리 먹었어요. 그러고 나니 기운이 솟는게 몸이 나은 것을 느꼈지요. 불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었어요.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포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포산스님은 앉아서 10리 밖의 일을 보고 듣고 하실 정도록 도가 높았어요. 포산스님은 ‘옴마니반메훔’ 6자대명왕진언을 외우셨는데, 모다라니를 계속 외웠어요. 스님에게서 주력수행법과 함께 생식·벽곡 등을 하는 신선도를 배우기도 했어요.
당시 태고사에는 5명의 스님이 계셨는데 모두 개성이 강하고 수행에 열심이었어요. 숙명여대 교수를 지낸 정남조 스님과 땡초라고 자임하던 스님, 한학자 출신 스님등 모두 학식도 높고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이었어요. 그중 땡초스님은 묵언정진으로 ‘벙어리 시늉’을 계속 했어요. 나는 그걸 따라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어렵더군요. 얼굴도 안 변하고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이 묵언정진보다 수십배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 스님에게서 ‘탁발(托鉢)은 저렇게 하는구나’를 배웠지요.
6.25전쟁 때는 거지 생활을 곧잘 했습니다. 여름에는 남산에, 겨울에는 한강변에 움집을 지어놓고 거지 생활을 했어요. 솥단지를 걸어놓고 깡통에 담아온 음식을 모두 넣고 끓여요. 그러면 병도 안 생기고 참 맛있어요. 나는 부잣집에 태어나 잘 먹고 호강하며 지냈지만 깡통에 든 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어요. ‘일체유심조’라는 진리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가난한 사람일수록 없는 살림에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부자는 인색한 것으로 부자가 되는가 보다’했지요. 탁발은 수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독소인 아만과 아집을 없애고,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주는 공덕이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3년경에는 서울 선학원에서 당시 조실로 계시던 금오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되었어요. 당시 만암스님이 종정으로 계시면서 수행승(비구)과 교화승(대처)의 거주 사찰 지정문제로 종단내의 의견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이해 8월 선학원에서 열린 제1차 수좌대회가 파한 뒤 효봉, 동산스님 등과 함께 정화의 실천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지요.
금오스님은 늘 나보고 참선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당시 주력수행에 몰두하던 터라 참선이 잘 되지 않았어요. 몇년 뒤에는 마곡사 토굴에서 정진했는데 주력을 통해 삼매나 정(定)에 드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마치 참선을 할 때 화두를 참구하듯이 항상 외우면서 수행의 요체로 삼았지요. 마곡사 토굴에서 1년정도 지냈는데 느낌이 이상해 내려가 보니 정화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봉은사 주지 등을 맡으며 정화운동에 참여했어요.
당시 선학원에는 경지가 높은 쟁쟁한 스님들이 많아서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동산스님은 복이 많은 분이었고, 효봉스님은 덕이 많은 분이었어요. 금오스님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동진출가한 청정 비구이셨죠.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화두는 어떻게 드느냐 하면 일체 경전을 다 본 후에 의심을 내라’는 등의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던 중 1968년 10월8일에 금오스님이 세수 73세로 입적하셨어요. 이후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계시던 혜암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어요. 혜암스님은 어디서나 설법하여 사람들을 교화하셨어요. 70세가 넘도록 매일 새벽 108배의 참회예불을 중단하지 않으셨죠. 특히 신도나 청소년을 대할 때마다 신의와 효도를 강조하여 도의(道義)재건운동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혜암스님 역시 나를 참선으로 이끌기 위해 애를 쓰셨어요. 하루는 스님께서 <반야심경>에 대해 물으며 ‘부처 불(佛)자 보다 더한 곳이 있으니 일러라’ 하셨는데, 나는 답을 못했어요. 그로부터 ‘내가 안다는 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주력수행만 해서는 안되겠구나’ 느꼈지요.
그때부터 참선수행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는데 <반야심경>의 이치를 깨칠 수 있었어요. ‘마음이 곧 부처(心則是佛)‘ 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예요. 혜암스님은 <반야심경>에 대한 나의 답변이 옳음을 인가하고 ‘효일(曉日)’이란 호와 전법게를 내리셨어요.
은산철벽이 터지면 화두가 술술 풀려요. 경전과 선어록을 봐도 모르던 부분이 저절로 환하게 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별 것 아닌 것이 수행자들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오도의 세계’ 첫 관문을 통과한 뒤에는 ‘놓고 쉬는’ 공부를 해야 해요. ‘내가 깨쳤네, 내가 큰 스님입네’하는 상을 일체 버려야 해요.
참선이란 것은 본디 내 마음자리를 바로 보는 거예요. 거울의 때를 벗기면 자기 얼굴이 환하게 보이듯이 본래 나만 남는 거예요. 그 경계에 들어서면 춤도 춘다고 하지만, 그때부터가 중요해요. ‘안다고 하는 그 생각’ 마저 버려야 해요. 백양사의 서옹스님처럼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야 해요. 참도인은 어린애처럼 즐거울 뿐 아무런 상이 없는 거예요. 보림(保任·保護任持의 준말로 깨달은 이가 그 경지를 잘 보호해 지켜가지는 것)이란 게 딴 게 아니예요. 수억겁 동안 쌓인 습을 지워내는 작업이예요. 미세한 식·색·명·리(食色名利)·잠 등 오욕락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쉬지 않아야 해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배부르게 먹으면 성욕이 발동하고, 권력을 잡으면 재물을 모으려 해요. 그래서 밥을 적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요.
50여년의 수행으로 얻은 결론은 ‘절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과도 같은 것이죠. 선악과 생사 등 모든 가치는 둘이 아니요, 그 어떠한 것도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상대성원리를 발표했지만 불법은 정신과 물질, 모든 것이 절대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보는 선악 등 온갖 분별이 절대성을 갖지 못해요.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에 처했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예요. 그렇게 될 만한 이유가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이란 말이지요.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오욕락이 쌓이고 탐진치가 모여 벌어진 일이니까요. 업력으로 주고 받는 것이기에 연기론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착하게 인욕과 보시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온갖 나쁜 일 저지르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두루 행하라.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는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계율, 즉 칠불통계(七佛通戒)가 불법 수행의 요체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화 당시 효봉스님의 사제인 향봉스님이 조계사 법당 안에서 모 스님과 서로 주지를 안 맡겠다고 싸워 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언론에서도 청정 비구의 무소유 정신의 상징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어요.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정부쪽에서도 비구측의 손을 들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정화가 끝나고 40년도 안 되었는데 당시의 청정비구의 서슬퍼런 지계의지가 많이 희석되지 않았습니까. 무소유 정신도 약해지고 호사스런 생활로 불자들의 비판을 받는 스님마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선각들의 훌륭한 전통은 잊어버리고 불교가 형식화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수행의 전통을 되살려야만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정신의 고향으로 불교가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점 명심하시고 불자들은 ‘참 자기’를 찾는 일대사에 진력하시기 바랍니다.
현대불교신문 김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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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불은에 보답하기위해 했던 출가 (범행스님 법주사조실, 팔달선원조실)
나이 스물일곱 덜컥 폐병에 걸리고 말았다. 폐가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화학공장을 경영했던 까닭에 폐병이라는 무서운 병마에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었다. 지금이야 약이 좋아 폐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드물지만 천구백사십년대 말의 폐병이라는 것은 불치의 무서운 병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아버님과 큰형님, 넷째 형님이 모두 폐병으로 인해 돌아갔는데, 집안이 넉넉했던 터라 큰 형님은 일본의 대학병원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목숨을 읽고 말았으니 내게 찾아온 폐병은 곧 죽음을 의미 하고 있었다. 별다른 치료방법도 없었으므로 공기 좋은 곳으로 가 요양이나마 할 요량으로 대둔산에 있는 태고사을 찾은 것이 출가에의 인연이 될 줄이야.
태고사는 일고여덟분의 스님들이 주석하여 참선수행을 하고 있던 조용하고 풍광이 좋은 절이었다. 촛대바위가 절경인 그곳에서 평소에 가까이하던 철학 서적을 읽으며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조실스님께서 내 방엘 들러 물으셨다.
'그래 무슨책을 그리 읽고 있소'
그렇게 조실스님과 토론이 시작되었다. 여러 사업으로 꽤 재산가였던 내 아버님은 '일본말 배워 그들 하인 노릇 하려 하느냐'며 자식들을 학교엘 보내지 않았다. 해서 나는 일찌감치 경영에 눈을 떴고, 그 틈틈이 세계문학전집이나 철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있던 터였다.
]래서 웬만한 인생살이엔 말문 안 막힌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날 조실스님의 방문 후 내 밑천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스님과의 토론이 이어졌던 한 주일후엔 내 스스로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땐 몰랐으나 훗날 알고보니 그분이 일관했던 말씀은 '공도리空道理'였는데, 무슨 수 세상사를 관통하는 불법의 논리를 대응할 수 있겠는가.
병에 걸려 절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집 사람들을 내심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말 절집 생활이란 말이 아닐 만큼 가난했고 대처승이 많았다. 스님네들이 절에서 엿을 고아 가지고 오거나 튀각 같은 것을 해가지고 신도집에 오면 쌀 한말씩 얻어가곤 했고, 조그만 사찰에선 볏단을 얻어다 먹고 살았던 시절이었으니 불법이 무엇인지 모르던 내 눈에 그들이 그저 천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독립군 출신이며 만공 스님의 상좌였던 조실 포산 스님의 '공도리'가 나를 압도했던 것이다. 어렴풋이나마 '불법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나는 문학서적도 남의 팔자얘기나 듣는 것 같아 시들해 졌고 토론에서 번번이 패하기만 했던 철학책에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럴 즈음 조실스님께서 비로소 내게 그곳에 온 이유를 묻더니 조그만 책 한 권을 내놓았느데, '불정심관세음보살모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牟陀羅尼經'이었다.
'이 경 속에 있는 관세음보살모다라니주'를 일심정념으로 꿈속에서도 송주할 수 있도록 정진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고 그대의 병이 나을수 있다.'
이미 불법의 깊은 진리에 관심이 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스님을 깊이 믿고 있었으니 그 분의 말씀에 뭐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그날부터 앉으나 서나 누워서나 일념으로 주력을 하기 시작했다.
불법에 있어 주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었으나 조실스님을 믿고 전심전력으로 주력에 몰두했으니, 나중에는 태고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도 주력이 실려 있는 듯 주력과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한 달은 채 안 되었을 것이다. 삼주쯤 지났을 때였을까.
나를 돌보아주었던 의사가 내 몸을 진찰해 보더니, '아, 이 선생 병이 다 나았군요'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반가워 일어서니 법당 안이었다. 비몽사몽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날아갈 듯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순간 불전에 나도 모르게 무수히 예배를 드렸다. 그 불치의 폐병이 그렇게 씻은 듯이 사라졌으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한 가피, 헤아릴 수 없는 대은혜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처님 법을 믿고 수행 삼매에 들었을 때 오는 그 무한한 가피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 가피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인가는 경험한 이만이 알 것이다. 나는 그때 경험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고 그 후로도 어떤 인연으로 선을 하게 될 때까지 줄곧 서른 해를 주력으로 수행을 삼았다.
아무리 성취하기 어려운 일도 내게 맡겨지면 안 되는 일이 없었으니, 주력수행은 나와 뗄 수 없는 인연이 깊은 수행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피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몰아의 경지로 수행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이 바라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부처님법이 무엇인지 공부해 자신에 맞는 수행법을 찾아 정진하다보면 자연히 부처님법이 내 것이 되어 실생활에 실천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가만 보면 부처님법을 알려고 노력하고 수행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저 뭔가 이루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기만 한다. 기도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부처님 법을 깊이 체득하고 원을 세워 수행정진하다 보면 업장이 녹아 어려운 일을 미리 막기도 하는 것이다. 경전을 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수행이 제대로 되는 것이어서 나는 신도들에게 경전을 익혀 불법이 무엇인지 알고 수행에 들어가라고 이르고 있다. 경전을 공부하며 스스로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 수행이 빛이 나는 것이다. 끊임없이 참회하며 수행에 매진해야 한다.
병이 씻은 듯이 나은 후 곧 포산스님을 은사로 오계를 받고 절집사람이 되었으니 사실 나에게 행자시절이란 것이 생략된 셈이다. 글쎄 굳이 행자시절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포산스님의 공도리를 들으며 불법에 끌렸던 일,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찬 없는 밥 먹어가며 주력삼매에 빠졌던 그 시간들과 그후 태고사를 떠나 계룡산 용화사로 들어가 다시 주력으로 수행하며 지낸 몇 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 사제인 탄성스님이 문득 입적했다하여 법주사엘 다녀왔다. '인욕보살'이었던 그도 세월이 가니 그렇게 갔다. 어느덧 불가에 들어와 쉰해를 넘겼고 다시 여든을 넘겼다. 세상
은 날이 갈수록 존재 아닌 소유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난리법석인데,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입산한 이 출가수행의 길에서 얼마만큼의 힘을 세상에 회향했을까. 어쩐지 그 일을 생각해도 흡족하지 않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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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쓰고 외우기만 했거늘 이렇게 큰 위시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무마이타불 나무관세음보살_()()()_
좋은 글 감사합니다. 또, 새로운 걸 배워갑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