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블루스
김 난 석
밤바람 찬 대전역 플랫 홈에 두 남녀가 등장한다.
오래 머물 새도 없이 북쪽에서 기적소리가 났으니
대전에 머물렀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대전 발 0시 50분 열차였다.
이내 기적소리와 함께 한 사람은 열차에 실려 떠나고
남은 한 사람은 힘없이 돌아선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사내가 여관에 들어 시 한 수 써 내려갔으니
그게 바로 대전 발 영 시 오십 분의 작사자 최치수였던 것이다.
1960년대 중반이었다.
그 때는 월남전이 개전되기 얼마 전이였다.
육군부관학교를 수료하고 나니 배치 받고 싶은 부대를 신청하라 했다.
한 기에 백 명씩 수료했는데, 수료성적이 5% 안에 든 사병들은
희망하는 부대로 배치 받을 수 있었다.
입대 전의 교직 근무처에서 가장 가까운 부대가
대전의 목척교 건너 육군통신학교였다.
그래서 이곳을 신청해 배치 받고 3년 만기 제대를 했다.
거기서 내 젊은 날의 초상이 다 펼쳐져 대전 블루스가 되었던 것이다.
1964년 12월 26일이 육군통신학교 전입명령일이었다.
하루 전인 25일 중으로 부대에 도착하면 되었다.
그래서 25일 크리스마스를 대전 고모님 댁에서 거의 다 보내고
밤 11시 50분에 부대에 도착했다.
가지런히 정돈된 내무반에 병사들은 곤히 잠을 취하고 있었고
불침번 한 사람만 입속말로 가만가만 말하면서
어서 침상에 올라가 자라했다.
실컷 쉬다 왔으니 잠이 올 리 있으랴.
그래서 책꽂이에 다양하게 꽂혀있는 책들을 주욱 훑어보면서
군대생활도 할 만 하다는 생각을 해봤던 것이다.
다음 날 밤이었다.
내무반장이 모두 집합하라더니 나를 엎드리게 하고는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숫자를 세라기에 마흔까지 세고는 양팔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유인즉 졸병이 전입해 와 건방지게 책이나 뒤적거리고,
또 늦게 왔다는 거였다.
이때에야 아! 군대생활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생각을 해봤다.
또 다음 날, 보초근무 명을 받고 철조망 가에 서서
멍든 엉덩이를 매만지며 밤을 지샜다.
휘황찬란한 시내의 불빛 사이로 들리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어찌 그리 슬프게 들리던지...
다음 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선임병사들은 모두 외출하고,
후임병사 몇 명과 함께 내무반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연서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들고 자랑해대는데
나는 그 중 선임으로서 아무런 선물도 받아보지 못했으니
얼마나 처량하랴.
그런데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
면회 온 사람이 있었으니 위병소 앞으로 나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영문도 모르고 뛰어나가자 후임병사들은 박수를 쳐대고,
나는 순간 마음이 달뜨고 있었다. 참 뜻밖이었다.
내 사범학교 동창녀인 윤이가 선생님이 되어
곱게 차려 입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가슴 설렐 일이랴.
하지만 그 뒤를 보니 뒤에 윤이의 남동생 준이가 있고
또 그 뒤에 윤이의 어머니가 있고
또 그 뒤에 공군후보생이 블루칼라의 제복을 입고
떡 버티고 서있질 않은가.
갑자기 관자노리가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떡보따리를 풀어놓기에 주섬주섬 주워 먹었지만
저들은 모녀사이에 남매사이에 약혼자사이에
처남매부사이에 장모사위사이였으나
나는 그들이 쳐다보는 꾀죄죄한 동정남이 될 뿐이 아니었던가.
알고 보니 그들이 찾아온 건
나보다 1년 뒤에 전입해 온 준이를 잘 보살펴달라는 뜻이었으니
나는 남의 꽃밭에 물을 주는 신세였던 것이다.
내무반에서 구타가 심해 나는 야간 비상근무실 근무를 자청했다.
이곳엔 일반전화도 설치되어 각 부대나 육군본부로 부터 수시로 전달되는
긴급전화를 철야하며 받아야 했다.
하지만 비상상황을 대비하는 것일 뿐,
심야에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드물었으니
홀로 누워 대전시내의 불빛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마침내 경아를 알게 되었다.
경아, 이름도 참 예쁘지 아니한가.
목소리는 더 아름다웠다.
깊은 밤 간간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 잦은 대화로 이어지며
내 일기장은 그네와의 대화록으로 점점 두터워져만 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불온통신감청반에서 당장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살살 빌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으니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어쩌랴.
그러나 일단 낮에 감청반사무실로 나오라는 거였으니,
말이야 거슬렸지만 목소리가 얼마나 남성스럽고 매력적이었던지,
그 장본인의 얼굴이나 보고 싶기도 했다.
담배 한 보루 사들고 나가봤다.
나를 맞은 사내는 말라빠진 몰골에 가무퇴퇴한 얼굴로,
하지만 반갑게 맞아줬다.
나와 경아의 대화를 참 재미있게 엿들었다면서 웃음까지 지어줬다.
하지만 상급 감청반에 걸리면 영창에 갈 수도 있으니
이젠 조심하라는 거였다.
그래서 오빠는 이제 제대한다면서
나는 경아를 떠나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날들이 지나 준 고참병사가 되니
주말에 외출을 자주 나가게 되었다.
부대 소재지인 갈마동에서 목척교 넘어 까지 걸어가고 걸어오면서
막걸리집도 빠짐없이 하나하나 찾아들게 되었다.
달빛 밝은 밤이면 막걸리집을 뛰쳐나와 마냥 걷고 싶었는데도
강웅은 술에 취해 주모를 껴안고 뒹굴며
장래까지 약속한다고 했다.
아마도 지금은 그 객기가 사라진지 오래리라.
술에 못 이기던 차철은, 자기가 청와대 차모의 동생이라면서
사회에 나가면 한 몫 할 거라며 으스대다가도 엉엉 울어댔다.
한 몫을 잡긴 잡았는지도 궁금하다.
그땐 월남전이 한참이었다.
우리 부대도 몇 명이 참전해야 한다고 지령이 내려왔다고 했다.
희망자가 없어서 부대장은 전전긍긍했지만
나는 주말에 병사들과 함께 목척교를 넘어
대전역 근방까지 가서 술판을 벌였다.
자연 화제가 월남전으로 이어졌는데
술이 몇 순배 돌더니 김주가 자원한다는 긴급선언을 했다.
부대에 돌아와 월요일에 출근하니 당사자인 김주는 가만히 있는데
옆에 있는 병사가 고자질을 하고 말았다.
“중대장님, 김주가 월남에 자원한답니다.”
이 말을 들은 중대장은 얼마나 반가웠으랴.
그래서 김주에게 1주일의 휴가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하루하루 날이 가고, 일주일이 넘어가도
김주는 휴가지에서 귀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탈영보고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지만
나는 과감하게 나서서 그를 데려올 테니
탈영보고를 미뤄달라고 제의했다.
그는 집이 수원이었다.
집에 당도하니 과년해 출가를 기다리는 누이가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맞았으며,
늙으신 아버지는 마루에 서서 그저 영문을 몰라
먼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들에게 자세한 전말을 전하고 나서,
나는 그 누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수첩을 찾아내어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고
전 하숙집에도 들려봤으나 오리무중이었다.
수소문 끝에 마포 아파트를 찾아가 그 애인이라는 여인을 만났으나
어제 여길 다녀갔는데, 휴가 중이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는 거였다.
미로를 풀듯 시차에 따라 흔적을 하나하나 찾아가다보니
김주는 그의 친구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빛이었지만
그 친구는 어리둥절해 하며 휴가 중이 아니냐는 거였다.
나는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탕수육과 배갈을 시켜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며 달래기 시작했다.
이제 부대에 들어가면 신변이 보장되니
당장 귀대하자고 했다.
설득이 되었던지, 웃는 얼굴로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면서
홀을 나갔는데 2분...3분...5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기에
직감에 계산대로 뛰어갔더니 방금 음식값을 치루고 나갔다는 것이었다.
배은망덕한 친구!
그는 대학에 재학 중 입대했는데 2대독자였다.
후임병으로서 술 한 잔 걸친 김에
객기를 부렸던 것임에 틀림없는데 말이다.
남의 누이를 내 누이라 부르다가 허탈한 이별을 하고
부대에 돌아오니 모두 그럴 줄 알았다고 빈정대는 것이었다.
이튿날 젊은 사내가 강화도 어느 산중에
수면제 복용으로 정신을 읽고 누워있어
신원 조사 중이라는 신문기사가 올랐다.
하지만 김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마침 그때는 제대를 며칠 앞두고 있을 때였으니
모든 걸 잊고 군복 벗을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의 대전 블루스는 여기서 끝을 맺나싶었다.
다시 신문기사가 나왔다.
그 사내는 대전 모 부대에 근무하는 사병이라는 것이며,
음독사유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그는 회복하여 부대에 원대복귀하고
내무반장이 되어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나는 사복 차림으로 부대를 방문해
내무반 침상에서 그와 함께 하루를 묵었다.
부대를 떠난 후에 나는 대학에 복학하게 되었고,
그도 제대해 수원의 어느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한다기에
그 집을 찾아가봤다.
그새 결혼한 그는 아기를 안은 아내와 함께 나를 반기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줬으니
나의 대전 블루스는 여기서 끝이 났던 것이다.
이러구러 오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원의 김주, 광주의 강웅, 서울의 차철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윤이는 해마다 한 번씩 동창회에서 만나지만
경아도 시집은 갔는지 궁금하고,
무엇보다 모두 코로나에 안전하길 빌어야겠다.
(2020. 2. 24.)
술이 그렇게 만들었다.
나의 대전블루스도 마찬가지였다.
김주와 함께 술을 마셨으니 나에게도 원죄가 있지 않았던가.
당시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윤 모 장군이 그의 집안이었다.
수원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권 모도 그의 집안이었다.
그러니 당시로선 미 귀대, 탈영은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만
사나이에겐 체면이라는 게 있고 의리라는 게 있으며
객기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추억으로만 품고
다독 다독,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살아갈 일이다.
2022. 7. 8.
첫댓글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
그러게말이에요.
그런데 대장동인가 뭔가를 보면
산천은 가버리고 사람만 남았데요.
남의 밭에 물 주고
의리로 찾아가 주시고
음독하다 살아 나서
멀쩡한 길을 간 그 분은
지금 시절이면
큰일 낸 사람일건데
그때는 빽이 좋기는 했어요
술도 좋구요
ㅎ
체면에는 빽도 소용없어요.
그거 눈 딱 한번 감아도 되련만.
석촌 왕 선배님의 글
같이 술을 마셨던게 원죄 라고 표현해 주신 선배님의 의리는 대단 하십니다.
눈시울이 뜨거우리 많큼 감동으로 잘 읽고 갑니다..
7월의 두번째 불금 입니다.
더위 잘 이겨 내시기를요...^
네에 고마워요.
석촌님
대전에 향수가 남아계시군요.
전 아우가 있어
매년 현충일 즈음해서
다녀온답니다.
네에
아우가 거기 영면중인 모양이군요.
대전 부루스 제게 18번
은 아니지만 아주 좋아
하는 노래 이지요.
대전가면 노래비 있을텐데
나중에 혼자서 가게되면
한번 들러보려고 합니다.
그 작사 노래의 현장에서
듣는 노래가 감흥이 더
새롭더군요~
노래비가 있겠네요.
군 시절 등, 어디라도 석촌 선배님을 반기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특히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신다 생각됩니다.
수필방에서
한 분 한 분 구체적인 소개에 놀라기도 하였지요
저도 대전에서 해병대 지원해
0시 50분 호남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배님의 군 시절 이야기를 상상해봅니다.
감사드립니다.
당시에도 해병대 기개가 ~대단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