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그릇을 비워라] 무명 지음
누구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업을 지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지은 업들은 어떤 인연을 만나면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사실이다. 행복의 수레는 누가 대신 끌어주지 않듯이,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자신이 지워야만 하고, 그 인연을 잘 갈무리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다. ....
이 책 광고를 보면서 문득 어렷을 때 우리집 앞마당처럼 삐대고 놀았던 창원 볼곡사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쓴다.
창원 성산구에 불곡사는 고려 태조 18년 (935년) 창건한 사찰인데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불을 질러 타버렷다.
아마 그 때 귀중한 불상이나 보물들은 다 도둑질해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근처에 있는 성주사도 임란 때 불탓는데
이조 시대 중건을 할 때 곰들이 불모산에서 아름드리 목재를 날라다 주엇다고 해서 "곰절"이라고 한다.
대방동에 있는 불곡사는 내 어릴 때 놀이터였다. 집안 장손도 아닌 (차남) 내가 태어났을 때 마을에서 꼼쟁이로 소문난
할머니가 손자 잘 돼라고 그 귀한 쌀을 한 말이나 불곡사에 시주햇다고 한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을 코앞에 있는 절에
놀러가면 늘 해꼬지만 햇다. 봄이면 일주문 앞에 잇는 벚꽃 가지를 걲어가고 절 뒤에 잇는 대밭의 대를 베어 낙싯대를 만들고,
대밭에 있는 밤나무에 밤이 익으면 돌을 던져 대웅전 지붕의 기와를 깨고, 밤나무에 사는 장수하늘소를 잡는다고
송곳으로 밤나무를 찔럿다. 그래도 주지 스님은 아이들을 내쫓거나 나무라는 법이 없엇다. 그때 주지 스님은
유명한 우담 (雨潭 ) 재희 (在希 1882~1968) 대종사였다. 가끔 우담 스님 모습을 보곤 했는데 장삼에 검은 우단으로 만든
둥근 모자를 쓰고 다녓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단 스님이다, 아니다, 천 년에 한 번 꽃피는 '우담바라'의 우담스님이다'
하고 다투기도 햇다.
우담 스님은 밀량 삼랑진 출생으로 1887년부터 부산 범어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절밥을 먹기 시작햇다.
11세 때 창원 성주사로 옮겨 정진 시작 1914년 범어사에서 계를 받앗다고 한다.
불곡사 터는 원래 부처골이라고 했는데 왜놈들이 보불을 훔쳐가고 불을 질러 기왓장과 팔다리가 부러진
부처님의 시체가 나뒹굴고 잇어 그렇게 불럿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담 스님이 부서진 부처님의 손발을 수습하면서 '석조비로자나불'을 발견하여 비로전을 짓고
부처님을 봉안하엿다. 그게 1940년이엇다. 이 불상은 몸체와 대좌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 통일신라 시대
(850~ 900년) 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66년, 국보 436호로 지정됏다. 또 불곡사의 일주문도 유명하다.
일주문은 원래 창원부 객사의 정문이었는데 진해 향교로 옮겻다가 우담 스님이 불곡사를 중건하면서 1943년
불곡사 일주문으로 세웟다. 이 일주문은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33호로 지정됏다.
1960년~1970년 무렵 불곡사 뒷마당은 봄철이 돼면 인근 마을 부녀자들의 놀이터엿다. 늘 시집살이, 농삿일에
억매여 있다가 사월 초파일이나 단오가 돼면 그날 하루는 해방되어 ('해치'라고 햇는데, 단오는 중국 초나라
굴원이 멱라수에 빠져 죽은 것을 기념하여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회추(懷追)라고도 햇다.)
술도 빚고 떡도 빚어 둥글게 둥글게 여원무(女圓舞)도 추며 신나게 놀았다.
이런 날은 어떻게 알았는지 엿장수도 모이고 '달고 시원한 아이스케키' 장사도 모여들엇다.
그날 하루는 어린 우리들도 떡도 얻어먹고 해 지는 줄 몰랏다. 날이 저물어 놀이가 끝나고도 신명이 덜 풀린 아낙네들은
돌아가면서 신작로에서도 둥실둥실 춤을 추엇다. 흐트러진 치맛자락이 발에 밟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그럴 때면 마을 청년들이 '치마 주우러 가자!' 하고 농담을 햇다.
그 후 어찌된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담 스님 다음으로 아주 뚱뚱한 비구니가 절 주인 행세를 했다.
그런데 이 뚱보 비구니가 '팥찌 엄마'보다도 더 인심이 고약했다.
해꼬지만 하는 동네 이아들이 나타나면 바가지로 떠먹는 식수대 우물물도 못 마시게 하고 아에 절 마당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러자 동네에서 제일 별난 '약국집 아들 쌈지' 형님이 그 인심 고약한 비구니를 보고
"비지통! 비지통!'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보굴을 체웠다.
그 바람에 성질 고약한 비지통은 별나기로 소문난 쌈지 형님을 잡아 죽이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그만 홧병이 나서 제 명대로 못 살고 죽엇다고 한다.
그것도 다 업이 아니고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