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군상의 중심은 왕비이지만, 뒷면 그림의 여백은 왕에게 있어 어긋나보인다. ⓒMuseo Nacional del Prado.
왼쪽 그림자 속 캔버스 앞의 고야' ©Museo Nacional del Prado.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카를로스 4세 가족(La familia de Carlos IV)’,
1800∼1801년, 336x280cm, 캔버스에 유화, 프라도 미술관 소장.
혁명의 그림자가 유럽에 드리운 가운데 그린 그림. 가운데 왕비가 있고, 오른쪽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카를로스 4세(Carlos IV), 왼쪽 푸른 옷의 남자가 그의 아들이다. 왼쪽 뒤로 캔버스를 앞에 둔 고야가 보인다. 프라도 미술관 제공.
프랑스 왕국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Antoinette, 1755-1793)/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프랑스의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Antoinette)가 목이 잘린 채 등장해 세계
를 충격에 빠뜨렸다.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와 루이 16세(Louis XVI)를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단두대(斷頭臺/Guillotine)에서 처형한 프랑스 혁명. 200여 년 전인 1789년 일어난 일임에도 그 반응엔 여전히 온도 차가 남아 있는 급진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왕과 왕비가 멀쩡히 살아 있었던 18세기 다른 국가에선 어땠을까? 화가 난 시민들이 왕을 죽였다는 흉흉한 소식이 유럽으로 퍼지며 불안과 혼란을 조성했던 1800년, 스페인의 궁정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왕과 왕비 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에 대해 프라도 미술관 큐레이터 구드룬 마우레르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풍자로 오해받은 그림
“로또 당첨된 졸부의 초상 같다.”
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4세 가족’에 관해 가장 유명한 한 줄 평이다.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티에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 평을 인용했는데, 대부분이 고티에처럼 19세기 프랑스의 문화 예술인이다. 마우레르는 이런 평가가 “지극히 프랑스 관점의 단편적 감상”이라고 반박했다.
궁정 화가가 될 무렵 그린 고야의 자화상. 프랑스 고야 미술관 소장품.
이유는 이렇다. 이때 고야는 그가 젊은 시절부터 꿈꿨던 직책인 최고 궁정 화가가 된다. 이 직책을 받은 것은 벨라스케스 이후로 고야가 처음이다. 그만큼 최고의 실력을 갖췄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고야가 궁정 화가가 된 뒤 ‘고용주’인 왕과 그의 가족을 그린 첫 그림이다. 그들을 풍자할 이유가 희박하다.
또 연구에 따르면 초상화 속 가운데 서 있는 왕비는 실제로는 자녀 20여 명을 출산하며 건강이 나빠져 치아가 없었다고 한다. 그림에서는 건강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죠. 그림을 직접 보면 첫인상에 ‘풍자는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인물들이 실제 크기로 그려진 데다 기울어진 태양 빛에 반사되는 각종 장신구가 반짝이도록 묘사된, 크고 아름다운 그림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조화와 그렇지 않은 배경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시녀들(Las Meninas)’,
1656년, 캔버스에 유화, 316x276cm, 프라도 미술관.
그러나 단순히 왕족을 아름답게 그렸다고 이 작품이 프라도 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우레르는 “가족의 중심에 선 왕비가 구심점으로서 왕족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면서도 “배경의 그림들은 왕비가 이루는 중심점과 한 박자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짚었다.
배경이 어긋나며 묘하게 불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이 그림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비교하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림의 왼쪽 캔버스 뒤에 서 있는 인물이 고야인데, 이는 ‘시녀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시녀들’에서는 마르가리타 공주를 가운데에 두고 다른 인물부터 뒷배경까지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안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안정적인 ‘시녀들’의 구도를 고야는 과감히 버렸다. ‘카를로스 4세’에서는 인물 그룹의 구도는 안정적이지만 엇박자를 내는 배경의 그림, 햇빛이 만들어낸 그림자와 캔버스의 기울어진 선이 무언가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은, 황혼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우레르는 더 나아가 ‘가족들이 서 있는 공간의 옆 벽이 없다’는 점도 짚었다. 그러니까 그림 속 왕족들은 커다란 그림 두 점이 있는 벽 앞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러한 모든 표현이 “왕족은 완벽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그렇지 않음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영원한 군주 아닌 ‘지금’을 그리다
안정적이었던 왕족을 둘러싼 불안한 환경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 마우레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 왕을 시민들이 죽였다는 소식은 허리케인과도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대처럼 왕을 그릴 수는 없었다. 왕과 왕비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폐위될 수 있는 존재임을 세계가 깨달았으니까. 고야 역시 이 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고야의 예술 세계를 보면 궁정 화가로서 공식적인 시각은 지키되 언제나 그 이면에 있는 다른 의미도 마음속 깊은 곳에 지켜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식 초상화는 의뢰인의 마음에 쏙 들도록 그리면서,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스페인의 지식인, 계몽주의자들과도 가까이 지냈고 함께 책을 읽기도 했다.
그 결과 왕족이 바라보는 세상과 도도한 시대의 흐름,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 마우레르는 이것을 “영원한 군주가 아닌 ‘지금’을 그린 것, 그림 속에 근대적 개념인 ‘시간’을 도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 속 얼굴을 돌린 여자는 왕의 아들과 결혼하기로 예정된 마리아 안토니아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릴 시점엔 아직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린 모습으로 표현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그림 속 배경은 왕의 가족이 몇 시간 뒤면 어디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증폭시킨다. 즉, 고야는 이 그림이 지금에만 유효하다는 일시적인 감정을 시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완곡하지만 더 복잡하고 단단하게 남긴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 유럽의 분위기. 아름다운 환상 같은 왕족의 초상화에서 한번 감상해 보면 좋겠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스페인 왕실의 궁정화가로 평생 4명의 군주를 모셨다. 마흔에 카를로스 3세의 궁정화가가 됐고, 3년 후인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집권하자 이듬해에 수석 궁정화가 자리를 꿰찼다. 비록 정치적 격변기이기는 했으나 궁정인의 특권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카를로스 4세 가족(La familia de Carlos IV)(1800∼1801·사진)’은 국왕의 명으로 그려진 왕실 가족의 초상화다. 큰 그림이 걸린 방 안에 카를로스 4세 부부를 중심으로 왕실 가족들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들 화려한 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훈장이 여럿 달린 어깨띠를 맸다. 옷도 훈장도 보석도 번쩍번쩍 빛난다. 1800년 여름에 시작된 초상화는 무려 1년에 걸쳐 완성됐다.
권력자의 초상화는 최대한 미화해서 그리기 마련. 그런데 인물들이 그다지 미화됐다고 보기 힘들다. 모델의 실제 모습과 너무 닮아서일까? 오히려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백발의 왕은 배가 불룩 나와 있는 데다 흐리멍덩한 표정을 짓고 있어 군주의 위엄이 전혀 없다. 부와 권력에 취해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탐욕스럽고 바보 같은 왕으로 보인다.
왕비와 왼쪽의 나이 든 여성의 표정도 우아하기는커녕 우매해 보인다. 특이한 건 그림 한가운데에 왕비 마리아 루이사를 파격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당시 국왕은 국정에 관심이 없었고, 왕비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게다가 마누엘 고도이 백작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 화가는 문란과 사치를 일삼는 왕비지만 양쪽에 자녀를 세워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고야는 왕가의 무능과 부도덕함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누구든 왕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터. 영리했던 고야는 유려한 붓질로 화려하고 빛나는 의복과 훈장, 보석을 강조함으로써 왕족들을 만족시켰고 끝내 속내를 들키지는 않았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자화상 : 광상곡 1‘, 판화, 1797~1798년, 크기 및 소장처 불명.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표 작품으로 벨라스케스풍의 종교화와 초상화 및 민중 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적 풍속화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초상화 <옷 입은 마하 Maja vestida/The Clothed Maja> <벌거벗은 마하 Maja desnuda/The Naked Maja>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harles Ⅳ>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 <자화상 : 광상곡 1> <이성이 잠들자 악마가 태어나다> 등과 역사화 <5월 3일 처형>, 그리고 동판화 <투우> 등은 특히 유명하다. 대다수의 작품이 마드리드 왕립 회화관에 보관되어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귀 먹은 화가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815년, 46×35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옷을 입은 마하(Maja vestida)',
1800-1807년, 캔버스에 유채, 95x1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옷을 벗은 마하(La maja desnuda)’,
1795-1800년, 캔버스에 유채, 98x191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프란시스코 고야, ‘이성이 잠들자 악마가 태어나다’, 판화, 1799년, 크기 및 소장처 불명.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8×347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프란시스코 고야, ‘투우 The Bullfight’, 재작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자화상/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앞 고야 동상.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동아일보 2024년 08월 08일(목)2024년 07월 04일(목) [영감 한 스푼(김민 문화부 기자)], 「이은화의 미술시간(이은화 미술평론가)」/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