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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기독교의 중국 선교 역사
백호랑이 추천 0 조회 118 16.01.18 07: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기독교의 중국 선교 역사
A. 중국선교의 역사

중국선교의 역사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구약의 이사야 시대에 중국과 유대인의 교류가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자는 기원 후 50년경 도마시대에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가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다.
선교학자 전호진 교수는 중국의 선교를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 몽고 때의 서구선교, 16세기 예수회 선교, 그리고 19세기 개신교 선교이다. 본 장에서는 위와 같은 구분에 의하여 중국선교의 역사를 개관한다.

1.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

중국의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1629년에 발견된 대진경교중국유행비석(大秦景敎中國流行碑石)이다. 이 기록에는 중국에 처음 기독교를 전한 사람은 아라본(阿羅本, Alopen)으로서 대진(大秦) 당나라 장안에 처음 도착하여 당시 태종 황제로부터 환영을 받고 궁중 도서관에서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그후 당태종은 자신이 직접 이 종교에 대하여 배운 뒤, 다음과 같이 포교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고 심오한 신비성을 풍부히 가지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임으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 태종에 이어 고종 황제의 통치기간에도 경교는 더욱 견고한 지위를 얻어 당시에 국내 13도 358주에 경교 사원을 하나씩 건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죽은 후 불교의 숭배자인 즉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경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예종, 현종(712-756)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기존의 종교인 유교와 도교가 경교의 급속한 포교에 대한 견제로서 비롯되었다. 열열한 도교신자인 무종 때에 이르러 경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이 박해는 불교에 대한 박해로 시작하여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경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때 많은 경교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는 등 점차로 경교는 쇠퇴하여 갔다.


당시의 경교 신앙은 전통 기독교의 교리와는 다른 교리체계로서 이단의 색채가 농후하다. 경교비의 내용을 보면 창조, 타락, 메시야의 출생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하여는 언급이 애매하며, 신앙은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산 자를 번성하게 하며 죽은 자를 기쁘게 한다고 하며, 신자의 덕으로서는 사랑, 자비, 친절, 평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매 7일마다 성찬식을 행하며, 동쪽을 향하여 절하고 예배 시에는 목탁을 쳤다고 한다.


라토렛 교수는 경교 선교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경교는 토착화에 실패하여 계속 외국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원주민 지도자의 양성에 실패하였다.
둘째, 당시의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갈 당시에는 로마의 국가종교나 철학이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경교의 경우에는 불교가 이미 사람들의 영적인 공백을 메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교는 오히려 불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었으므로 경교의 포교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셋째, 경교의 선교사들이 본국의 교회와 선교 본부로부터 너무 멀리 있었으므로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경교는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2. 몽고 때의 서구선교

두 번째 단계인 몽고 때의 서구 선교는 1246년 교황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파송된 선교사 아곤(Agohn)은 기독교 신자에 대한 몽고의 공격을 항의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였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그 후 계속된 몽고 시대의 선교는 정치성을 띤 무성의한 선교였으므로 큰 결실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몽고의 쿠빌라이가 로마 교황에게 종교와 예술에 있어서 탁월한 선교사 100명의 파송을 요청하면서 그렇게 해주면 많은 백성들이 개종할 것이라고 했으나, 교황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선교보다는 정치에 목적을 두었으며 몽고군의 사정을 파악하는데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결국 몽고시대의 선교는 약간의 교회를 설립하고 6,000여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성공하였을 뿐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 교회는 몽고족의 패배와 명 왕조의 설립으로 경교와 함께 단명하였으며 결국은 경교도 로마 카도릭도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3. 16세기 예수회 선교

종교개혁 이후 30년 간의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천주교는 많은 내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가톨릭 내에서 많은 경건 파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예수회이다. 예수회는 1540년 교황의 인정을 받고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서구 여러 나라에서 천주교인들의 영적, 도덕적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교황의 명령이면 세계 어디든지 생명의 아끼지 않고 선교사로 헌신하였는데 그 중에 교황 니콜라스(Nicholas) 4세의 파송을 받은 존 코르비노(Jonn Corvino)신부가 1293년 인도를 경유하여 중국 연경에 도착하므로 예수회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 후 많은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그들 중 중국선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마태오리치이다. 그는 중국선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중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중국의 풍습과 환경, 그리고 중국인의 기질을 연구하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의 환경에 적응하는 일과, 또 사대부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서도 항상 조심하여 조정의 인정을 받았으며 결국 대명제국의 신종황제(神宗皇帝)로부터 북경을 위시하여 전 중국에 자유로이 선교할 수 있는 허락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태오리치는 복음전도의 과정에서 생기는 문화 충돌을 지나치게 회피하여 중국을 기독교화하기 보다는 복음을 중국 화하는데 전력하였으므로 중국인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혼합주의에 대한 프랜시스코 수도회의 고발로 인하여 교황청의 불법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천주교는 신자의 제사참여를 금지시킴으로 중국 임금의 노를 불러 선교사가 추방되거나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에서도 19세기의 활발한 선교는 천주교회가 중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토착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4. 19세기 개신교 선교

중국선교의 제4단계는 19세기 초에 시작된 개신교 선교이다. 이 때의 선교는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므로 대포를 따라 들어온 강압적인 선교였으므로 이 일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선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대한 선교의 세기'인 19세기 서구 기독교는 경쟁적으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중국은 서구선교의 경쟁 장이 되어버렸다. 이때 중국 선교사의 수는 무려 1,300명이나 되었으며 1900년에는 약 2만 명에 달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복음전도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문화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1899년까지 선교사들은 중국에 60여 곳의 병원을 세우고, 1천여 곳의 초등학교와 70여 곳의 중등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당시 기독교와 함께 계몽주의, 무신론 사상, 진화론 등도 들어와 중국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므로 기독교 선교에 많은 도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은 지금까지의 교파선교를 연합선교로 바꾸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유사 기독교운동 혹은 반 기독교운동 등이 일어나 교회에 큰 타격을 가했는데 이 때 190명의 선교사가 순교하게 되고 수천 명의 신자가 죽거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유사 기독교 운동이란 19세기 중엽 홍수전이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처하면서 농민반란을 전개한 운동이며 반 기독교 운동이란 1900년에 일어난 반 외세 운동인 의화단 사건을 말한다.


또 공산당이 조종하는 반 기독교 운동도 교회에 큰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결국 중국의 기독교는 계속하여 민족주의, 과학주의, 계몽주의,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시달리다가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고난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B. 개신교의 중국선교

개신교 중국선교를 인물을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개관하여 본다.

1. 초기의 선교사들

1) 로버트 모리슨
개신교의 중국선교의 시효는 웨슬레의 부흥운동이다. 감리교의 탄생과 부흥은 다른 교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각 교단들은 복음의 열기를 해외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1799년 4월에 "아프리카 및 동양 선교협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for Africa and East)를 탄생시키고 선교사들을 각국에 파송하였다. 1807년 런던선교협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
)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이것이 개신교 중국선교의 시작이었다.


1807년 6월에 약관 25세의 모리슨은 광동(廣東)에 상륙하였으나 당시 중국사회에는 영국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어 선교활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는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 자리를 얻어 미국인으로 행세하면서 극히 제한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모리슨은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27년 만인 1834년 8월 1일, 52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약 10명의 중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뿐이다.


그러나 모리슨의 위대한 업적은 주로 문서선교에 있다. 모리슨은 1811년 신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였고, 1823년에는 윌리암 밀룬(William Milne)과 더불어 신구약 전부를 번역하여 이를 신천성서(神天聖書)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 후 화영사전(華英辭典)을 편찬하는 등 10여종의 한문 서적을 간행하므로 중국선교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 외에 그는 의료사업에도 초석을 마련하였다.

2) 헨리 메드할스트
모리슨을 잃은 런던 선교협회는 그를 계승하기 위하여 헨리 메드할스트(Walter Henry Medharst 1796-1857)를 중국에 파송하였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헨리는 1835년에 광동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8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중국어도 속히 배워 한역성경을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정정하였으며 전도지를 만들어 배를 타고 중국연안을 돌며 전도하였다. 이 때는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 험악한 분위기였으며 특히 외국인에 의한 중국 내륙선교가 금지된 상황이었는데 헨리의 20년 간의 선교활동은 중국 전역에 복음이 전해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데이빗 아빌(David Abeel 1804-1846)과 브릿지멘(Elijar Coleman Bridgman 1801-1861)
미국의 중국선교는 영국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후에 교회가 부흥되자 선교의 열기가 고조되어 1829년 미국외지선교협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가 조직되었고 이 협회에서 데이빗 아빌과 브릿지멘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두 사람은 1829년 10월 14일에 미국을 떠나 다음 해 2월 25일에 광동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으며 그 중에서 특히 브릿지멘의 활동은 의욕적이었다.


그는 중국지식 보급회(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ge in China)의 서기로, 모리슨 교육회(The Morrison Education Society)의 총무로, 또 의료선교협회(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중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글(The Chinese Repository)을 20년 간이나 씀으로써 중국선교현황과 현지사정 뿐만 아니라, 중국의 법률, 습관, 생활양식, 역사와 문학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공헌하였다.
이와 같은 초기의 중국선교는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되었으며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전의 가톨릭 선교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선교에 임하였다.

 

그들의 선교는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첫째는 선교의 기초를 마련하고 문서선교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번역하는 일, 사전을 편찬하는 일, 중국의 문화를 알리는 일, 그리고 전도문서를 작성하여 전파하는 일이 그것인데 이러한 일은 중국선교에 대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둘째는 의료 사업과 교육사업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열악한 중국의 의료상황에서 많은 무료 의료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 학교도 세워서 교회지도자의 양성과 일반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셋째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과거 중국정부에 밀착했던 로마 가톨릭이 정부의 정책변화에 따라서 동요하였던 전철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는데 서구 제국주의와 중국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가 서구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2. 네비우스의 선교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네델란드계 미국인으로, 1861년 장로교 해외 선교부(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 의 파송을 받아 중국 산동성에서 사역하였다. 네비우스는 일찍이 중국 선교에 있어서의 자양, 자치, 자전을 강조하였으며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자신이 속한 교단을 확장하기 위하여 채택한 라이스 크리스찬 제도, 신앙 고백 자 월급제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네비우스는 또한 단순히 선교 자체에만 치중하지 않고 선교방법론의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때까지의 선교사들은 교회개척이나 의료봉사, 또는 교육사업에 몰두하여 선교자체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였으나 네비우스는 선교이론을 구체화하였다.


네비우스의 선교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상류계급보다는 근로계급을 전도하는 것이 좋다.
② 부녀자들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찬 소녀들을 교육하는데 힘쓴다.
③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크게 효력을 낼 수 있다.
④ 장차 교역자는 기독교 학교에서 배출한다.
⑤ 의미가 명확한 성서를 주도록 한다.
⑥ 모든 종교서적은 외국어로 쓰지 말고 자국어로 쓴다.
⑦ 자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⑧ 토착인을 이용하여 전도하게 한다.
⑨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와 친숙하게 함으로 전도해야 한다.
이러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평신도의 활용, 성경중심의 교회, 교회의 자립과 토착화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는데 신학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는 것과 학문적인 훈련을 경시한다는 것, 자립을 너무 강조한 결과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경제적인 자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물질주의적인 풍조에 젖기 쉽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토착교회를 위하여 좋은 선교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선교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으며 따라서 채택되어 실행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3.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에서 출생하여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이며 약사였던 그의 아버지 아래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나 17세에 회심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목표를 중국 선교에 맞추고 그 일을 위하여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8세에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런던 병원의 수련의가 되어 선교사로서의 혹독한 훈련에 돌입하였다.


테일러가 중국으로 가기 위한 문은 갑자기 열려졌는데 중국에서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 절정에 이르자 그 동안 테일러를 후원하던 중국 복음화 선교회는 테일러가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즉시 중국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1853년 9월, 테일러는 21세의 나이로 중국을 향해 떠나게 되어 1854년 이른봄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중국에서 다른 선교사들의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된 테일러는 그 후 런던 선교회 지역을 떠나서 판자촌으로 이사하였으며 올바른 선교 방법은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인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테일러는 자기의 머리 색깔을 검게 물들이기 위하여 암모니아수를 사용하다가 실명할 뻔하기도 했다.


한편 테일러를 지원하던 중국복음화 선교회의 지원금은 최소 생활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 적은 데다가 송금도 일정치 않았으며 또한 선교회 측은 테일러의 이와 같은 선교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테일러는 선교회와 3년 동안 서로 불편한 관계를 가져오다가 1857년, 정식으로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탈퇴하게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영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한 달에 100만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라는 테일러의 호소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어 많은 후원자를 모으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국 내지 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 독특하게 조직되고 운영되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어떤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노동자 계급에 의존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 목회자들로서는 중국 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지원자를 선택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의 다른 선교 단체와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데도 유익하였다.


② 선교 본부를 중국에 두도록 하였다. 테일러가 중국 복음화 선교회에서 일해 본 경험을 통하여 볼 때, 선교회 본부는 중국 현지에 두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야만 선교사들의 모든 필요를 제때에 채워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③ 자신이 선교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선교회의 책임자가 되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이 요청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직분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④ 중국 내지 선교회는 모든 필요를 인간적인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또한 인간적인 도움을 호소하는 것도 금하였다. 내지 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사들에 비하여 비록 세상적인 학식은 적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탁월하였다. 그들은 약탈과 위험을 개의치 않고 중국 내지에 들어가 헌신적으로 선교하였으며 이 일은 중국인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선교에 임하였다.
수억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 채 죽어 가고 있다. 매 시간마다 1천명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만약 1천명의 복음 전파자를 확보한다면, 그리고 이들이 매일 50명 내지 200명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3년 이내에 모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테일러는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데 주력하기보다는 빠른 시간 안에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는데 목적을 두었는데 이러한 전략은 그대로 실천되지는 못했지만 중국 내지 선교회가 중국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882년까지 내지 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회가 설립 된지 30년이 경과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소속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헌신하기에 이르렀으며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최대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C. 중국선교의 결과

첫선교사 모리슨이 1807년에 도착한 후 7년 만에 첫 세례교인을 얻었고, 25년 만에 10명의 신자를 얻었으며 100년 후에는 13,000명이었던 것이 1949년 공산화되기 전에는 7,80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아더 글라서는 그 당시의 중국교회의 현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산정권이 선교회들을 중국에서 물러갈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1949년까지, 중국의 어느 방향으로든지 줄을 쭈욱 그어 놓고 볼 때, 평균 20 내지 30마일마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서를 믿는 복음적 교회가 하나씩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세례 받은 개신교도들이 약 100만 명쯤 있었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 수효의 거의 3배에 달하였다.

정확한 수효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공산당 혁명 직전의 중국의 개신교도의 숫자는 대략 100만 명 이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후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모든 선교사들은 남김없이 추방되었으며, 특히 문화혁명은 교회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시기에 중국선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공산당 혁명 후 50년이 지난 현재, 중국 내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형태는 대체로 다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삼자교회인데 이 교회는 종무국이라 불리는 정부기관의 책임과 지도 하에 있는 공인된 교회이다. 문화혁명 이후 다시 문을 열게 된 삼자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현재 약 2,000여 개의 삼자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삼자교회의 문제점은 그것이 순수한 기독교라기 보다는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등의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둘째 형태는 가정교회이다. 이 가정교회는 중국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하는 불법기관으로서 언제라도 정부의 탄압을 받을 수 있는 비공인 교회이다. 가정교회는 1950년대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10배 20배의 급격한 증가를 보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이며 성령의 역사였다. 그리고 가정교회의 대부분은 삼자 교회가 거의 없는 농촌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도시의 경우에는 삼자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소수의 학생들과 전문 직업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정교회의 숫자는 대략 20만여 개로 추정하고 있는데 가정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의 80%가 농민이요, 90%가 비 지식층이라는 점이다. 농민들은 대부분 문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정교회 안에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90%에 달한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들은 미신적인 방식을 버리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성경을 구입해서는 붉은 보자기로 싸서 보관하였다가 병자가 생기면 병자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또 밖에 나갈 때에도 몸에 지니고 나가는데 이렇게 하면 성경이 마귀를 쫓아 사람들이 평안하도록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국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개인적인 신앙형태인데 이들은 삼자교회에도 가정교회에도 가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신앙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의 내용이 어떠한 모습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랜 신앙지도의 단절로 아직까지 건전한 신앙을 가졌을 것이라는 데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중국에 있는 기독교 신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자교회 발표로는 330만 여명이며 비공식 집계로는 약 3천만 명에서 5천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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