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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엘 재상은 스물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재상직을 맡은 무명의 젊은 남자였지만, 겨우 삼 년 사이에 상당한 유명인이 되었다. 그의 유명세를 톡톡히 떠밀어준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재상 특유의 멋진 외모와 올바른 성품이었다. 젊고 예의 바른 모습은 아무리 그를 질투하던 이들도 마음을 열 수밖에 없을 만큼 호감적이었고, 그의 부드러운 눈매와 미소를 본 여성은 그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태양을 등지고선 그의 주홍빛 머리칼은 마치 불타오르는 불꽃이나 태양처럼 보이기에 그런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누구라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그의 외모보다 더욱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제국의 천재 재상'과 비견될 정도의 명석한 두뇌와 재능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를 믿어온 이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실수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기록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다.
"보이는 건 나무랑 나무, 그리고 나무, 나무, 나무... 심심해..."
붉은 머리의 소녀이자 여왕인 카린은 마차 창틀에 턱을 괸 채 기운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 큰 남자인 재상과 동승 중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엉덩이를 마차 안쪽으로 삐죽 내밀고 창 밖을 멍히 풀린 눈으로 구경 중인 그녀에게서는 여왕으로서... 아니 숙녀로서의 조신함을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베르제바브 대공이 곁에 있었다면 보나 마나 그녀의 엉덩이를 걷어찼겠지만, 그녀는 평소에 뼈에 새기도록 익혀온 예의도, 남자 앞에서의 조신함도 잊을 만큼 눈이 편안치를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보이는 것은 오직 산이랑 나무들 뿐... 녹색은 눈을 보호한다고는 하지만 이베이드의 수도 주변에도 끔찍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있었기에 이미 지겹게 보아와 질릴 지경이었다. 마차 밖으로 지나치는 나무의 수나 헤아리던 그녀는 수도에 멀어지면서 더는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뻐했지만, 그것도 잠시, 삼 일도 못 가고 다시 시꺼먼... 아니 시퍼런 나무들이 그녀를 반겨줄 뿐이었다. 식탁 위에 가득 쌓인 양배추를 보는 듯한 거북스러움을 억지로 참으려 해도 보이는 것은 그것들뿐이었기에 이미 물릴대로 물린지 한 오래전 일이었다.
카린은 고개를 돌려 무언가 시간을 보낼만한 것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기사, 병사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가며 그녀의 마차를 앞뒤로 호위하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그들의 표정 역시 무덤덤하거나 혹은 간혹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더위에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일 뿐, 별로 특이한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야? 이 길로 가자고 한 사람이...?"
카린은 생각 없이 투덜거렸고, 뒤늦게 아차 했다. 이베이드로의 왕복일정을 담당한 이가 재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카린은 미안한 눈으로 재상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재상이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와 삼 년을 함께해온 그녀가 그의 미소 속에 담긴 억지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도 뭐... 공기는 좋네..."
카린은 어떻게든 말을 수습하고자 창가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속으로는 '이놈의 주둥아리가 웬수지.' 라고 애꿎은 혀만 탓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혀를 잘라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녀는 재상 쪽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시선을 창밖으로만 고정하였다.
"어라?"
카린은 수풀 사이로 누군가가 언뜻 보인 것 같았다. 노란 무언가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람처럼... 작은 몸집의 어린 아이로 보였다.
"잠깐, 마차 좀 세워봐!"
지엄하신 여왕의 다급한 명령에 느긋하게 달리던 마차는 급히 멈추었다. 멈춰진 마차 문을 열고 여왕이 황급히 뛰쳐 내려오자 주위의 기사들은 무슨 일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풀 사이의 목격했던 부근만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보였던 작은 몸집의 아이는 어디로 꼭꼭 숨었는지... 아니면 그녀가 잘못 본 것인지 도통 보이지를 않았다. 허리를 엉거주춤 숙이고선 한 곳만을 응시하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리프 공작이 다가와서는 물어왔다.
"뭐에요? 큰 거에요?"
"...그게 아니라."
"이 근처에 화장실은 없다고요. 저기 수풀 안쪽에 들어가서 해결하고 오세요."
"...공작 그게 아니라 나 분명히 뭔가 봤..."
"알았다고요, 혼자 가기 무서우면 제가 동행해 드릴게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여왕을 가지고 노는 건지 모를 공작의 말에, 주위의 여기사들은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내려 얼굴을 가리고는 '깔깔'거리며 웃어댔고, 남기사들은 '저희는 아무것도 못들었습니다.' 라는듯한 굳은 얼굴로 못 들은 척할 뿐이었다. 카린은 그녀의 약 올리는 말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올라서는 크게 소리질렀다.
"글쎄, 저기에 누가 있었다니깐!"
그 말에 리프 공작은 순간 얼굴이 굳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공작의 얼굴은 능글맞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카린의 두 어깨를 잡아 돌려 마차에 억지로 태우며 말했다.
"네, 네. 그건 저희에게 맡기시고, 자 어서 마차에 타세요."
"..."
여왕이 뾰루퉁한 얼굴로 마차에 타자마자, 공작은 굳은 얼굴로 돌아서서는 주위 기사들에게 짤막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거기, 너희는 저쪽부터 수색해, 거기 넷은 저쪽에서 도는 방향으로 시작해. 뭘 그런 멍청한 눈으로 쳐다봐? 후딱 안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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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내리깔고 입술은 삐쭉 삐어나온 '왕삐짐' 얼굴을 좀처럼 벗을 기미가 없는 여왕의 모습에 디자엘 재상은 실소를 얼굴 안쪽에 숨기느라 그녀를 달랠 여력이 없었다. 물론, 재상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카린이 눈치채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분명히 뭔가 봤다니깐..."
"아마도, 피곤하셔서 잘못 보신 걸 겁니다."
재상이 다독거리듯 해온 말에도 카린은 그의 얼굴에 조금씩 새어나오는 웃음이 보이자, 더욱 약이 올라 항의조로 말했다.
"분명히 봤어, 이 근처에 민가라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쯤은 있을 것 아냐?"
"글쎄요..."
그녀는 분명히 보았거늘... 수색을 마친 이들의 말로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뿐이었다. 재상의 눈에는 당연히 두 번이나 바보취급 당해 맘이 푹푹 상한 그녀가 오기로라도 봤다고 버티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일리 있는 말에 디자엘 재상은 깨끗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는 척 해보였다. 그의 유려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만치 깨끗한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는 그의 모습에 정신없이 눈을 빼앗기던 카린은 늦게나마 정신을 가다듬고는 그가 말을 질질 끄는 이유를 지적했다.
"뭔가 있어, 재상?"
"그렇군요... 이 부근에 군사요새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숲은 민간인은 출입금지일 텐데요."
"그렇지만, 그 말은 민간인이 있기는 있다는 거잖아? 솔직히 출입금지라고 해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내가 잘못 봤다는 근거로도 부족하지 않아, 재상?"
"확실히 그렇긴 하군요."
자존심이 걸린 일처럼... 아니 걸린 일인지라 이런 일에만 총명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재상은 의문을 접고 져주는 쪽을 택하였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거봐, 내가 이겼지?"
카린은 머리로 재상을 이겼다는 기쁨에 의기양양해져서는 전의 삐친 모습은 어디로 가고, 흥이 돋은 얼굴로 말해왔다. 그렇지만, 그 기쁨도 잠시, 카린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뭔가 빼먹은 것 같은데...?'
카린은 중얼거리며 마차의 창 밖으로 몸을 돌렸다. 뭔가를 빼먹었다... 뭔가를 빼먹었다... 뭔가를 빼먹었다... 아 맞다!
"재상, 이베이드에서 그 '거래'는 어떻게 됐어?
이베이드를 떠나고 삼 일이나 지나서야 자신들이 이베이드에 간 목적을 떠올린 카린은 개학 직전에 숙제를 떠올린 학생처럼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이에 재상은 그녀의 다양한 표정변화에 피식 웃으면서도 대답은 잊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가 아니잖아."
재상의 말투를 따라하는 카린의 말에 재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에비시안 왕자는... 비유하자면 굶주린 늑대입니다."
"...에?"
"항상 무언가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게 야망인지 아니면 복수인지... 아니면 둘 다 일지 모릅니다만..."
짧은 기간에 에비시안 왕자의 속을 샅샅이 읽어낸 재상이 대단했지만, 그에 비해 카린이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멀어 보였다. 디자엘 재상이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아온 카린은 그의 이해 불가능한 설명에 고개를 과장스럽게 갸우뚱했지만,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재상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다른 귀족들과는 크고 작은 '거래'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습니다만, 에비시안 왕자의 제안만큼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제안을 했는데?"
카린의 말에 재상은 사실을 말하기가 곤란함을 느꼈다. 그에게서 혼약 제안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면 그녀는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후에 일어날 파장을 재상으로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비밀입니다."
"뭐야아! 재상, 치사하게 혼자만 알기야!"
그녀가 두 다리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항의해오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운지라 재상은 참다 참다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카린은 재상이 이렇게 솔직하게 웃어주는 것이 왠지 기쁘기도 하고,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 기분 나쁘기도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재상은 당분간 그 제안이 뭐였는지 알려주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카린은 뚱해져서는 재상이 에비시안 왕자를 '굶주린 늑대'로 비유한 이유를 가지고 고심했다. 왕자의 '제안'이 뭔지 알아낼 실마리는 그것뿐인지라, 그녀는 창밖으로 반복적으로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놓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굶주린 늑대라...'
늑대에 관련된 피해 건은 여왕인 그녀의 위치상 간간이 들려왔다. 먹을 게 있기만 한다면야 어디든 꼬이는 게 산짐승인지라... 무리지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늑대들 역시 전 지역에 등장해 인적, 물적인 피해를 입혀왔다. 각 마을마다 전문적인 사냥꾼이 있어, 늑대사냥은 쉴새 없이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늑대들이 있어서 얻는 두드러진 장점은 논밭을 망치는 산짐승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늑대들도 항상 배불리 먹는 것은 아닌지라 굶주린 늑대들이 드문드문 마을로 내려와 사람을 습격하는 일도 흔치 않게 있기는 하였다.
'가만? 굶주린 늑대들?'
카린은 머릿속으로 무언가 번뜩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래서 재상이 제안을 거절했구나...'
에비시안 왕자는 굶주린 늑대다. 먹이를 준다 해도 항상 배부를 리는 없으니 다시 굶주리게 되면 송곳니를 드러낼 것이다. 그런 그에게 먹이를 줘바야 임시방편. 적을 키워주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에비시안 왕자는 혼자이다. 늑대는 무리생활을 하지만, 에비시안 왕자는 혼자 왕... 아니 왕세자 행세를 하는 늑대이다. 왕자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도 사냥한 먹이를 나누어주어야 무리가 왕자를 따르거늘, 왕자는 항상 굶주린 늑대이기에 항상 먹이를 탐하고 독차지하기를 원한다.
'그런거구나...'
카린은 재상이 왕자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에비시안 왕자는...
'위험하다.'
언제 어느 행동을 할지 없을 자이기에 재상은 그와 직접적으로 손을 잡는 것을 거부했다. 상대가 아무리 영리한 자라 해도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있다면 대처할 수 있다. 허나 에비시안 왕자는 항상 굶주려 있기에 언제 무슨 행동을 벌여올지 짐작할 수도 없다. 무슨 짓을 벌일지 예상할 수 없는 자를 등 뒤에 놓을 수는 없기에 재상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재상의 수를 읽어낸 그녀의 재능을 그녀의 얼굴에 띄어지는 단편적인 면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상은 충분히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바깥쪽에 너무 시선을 오래 둔 탓일까? 바깥쪽에 그림이 그려진 원통이 뱅글뱅글 돌려지며 그림을 반복해 보여주기만 하는 것을 막연히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초록색의 나무들만이 반복적으로 보이기만 하자 카린은 멀미라도 난 것처럼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으... 토할 것 같아."
참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재상은 곧 품에서 분홍빛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힘드시면 마차를 잠시 세우라고 하겠습니다."
재상은 카린의 찌푸려진 얼굴에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실수가 떠올렸다. 이베이드로 갈 때 지나쳐온 길로 돌아가기에는 그녀가 지루해할까 봐, 일부러 다른 길로 감으로써 그녀에게 새로운 구경거리라도 제공하고자 했지만, 이런 나무만 울창한 길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이러한 그녀의 작은 반응에도 그는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재상이 내밀고 있는 손수건은 전의 호수에서 그가 젖었을 때 카린이 그에게 준 손수건이었다. 재상은 그녀가 준 손수건을 소중히 여겨 항상 가지고 다녀왔었고, 바로 지금이 그 평소의 행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선수친 이가 있었다.
"아니 괜찮아, 나도 다른 남자에게 받아둔 게 있어."
카린은 재상이 내미는 손수건에 손을 막아 세우며 거절하고는, 전의 라미엘이라는 흰 옷의 남자에게서 받은 하얀 손수건을 꺼내서는 입을 막았다. 손수건이 군데군데 누런 것이 전의 자신이 덕지덕지 묻히고 발라둔 눈물, 콧물을 닦느라 쓴 것으로, 입을 막는 데는 불결할지도 모르겠지만, 뭐 어떠리오 내 몸에서 나온 것이거늘...
카린은 입을 막으며 바람이라도 쐬어 속을 가라앉히고자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마차가 천천히 달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장난기 많은 바람의 요정들이 뛰노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그녀의 붉은 머리칼에 관심이 있었는지 그 머리를 잡고서 이리저리 잡아당기었다. 그러다가 금세 질려 버렸는지, 그녀의 손에 있는 손수건을 잽싸게 잡아채서는 키득거리며 하늘 저 멀리 도망쳐버렸다.
"아..."
카린은 자신의 손을 떠나 혼자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손수건을 곤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비싼 물건도 아니고 그녀라면 손수건 따위는 몇백 개도 더 구할 수 있지만 가격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에게 받은 물건을 금방 잃어버렸다는 것만으로도 그 손수건의 주인에게 미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남자가 그 위험천만한 일을 겪으면서까지 자신을 도와줬거늘, 그가 준 사소한 물건조차 잃어버리다니... 그녀는 자신을 떠나 날아간 손수건처럼 그가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우울해져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풀이 죽어서는 자신의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그녀를 따라하듯, 재상도 보기 드물게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평소의 입을 가리는 습관을 보이지 않는 점은 칭찬할만한 점이었지만, 그런 게 어찌 됐든 그녀가 자신 외의 다른 남자를 만나고는 물건까지 받았다는 점이 그에게는 왠지 모르게 속이 쓰려오게 만들었다. 떠나버리고 남은 빈 새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몸에서 기운이 빠지는 게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닮은 것은 머리카락색이나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까지도 판박이 같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저 조용히 달리는 마차 위로 흰 손수건 만이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며 날아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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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른 지가 오래되고도 오랜 새벽에 흑기사의 차림을 한 라미엘은 성의 탑 꼭대기에서 한 손으로 깃대를 잡고서는 몸을 기울인 채 성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푸른 머리칼은 달빛에 반사되어 달빛 아래의 호수처럼 아름답게 출렁거렸지만, 머리 위로 펄럭이는 이베이드의 깃발의 모습은 그저 바람이 거세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를 못하였다.
이런 위험천만한 꼭대기에서 언제 부러질지 모를 깃대 하나만 쥐고 있는 그이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은지, 발밑에 펼쳐진 거대한 성과 그 주변을 둘러싼 마을들을 매처럼 샅샅이 살피는 것이 전력으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높은 곳에서 뭐라도 제대로 보일 리가 만무하겠지만, 그에게는 가능했다. 독수리처럼 눈이 좋은 것도, 귀가 밝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았다. 그의 적이, 그 검은 후드를 쓰고서 두더지처럼 성 주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그자가 아주 잠시라도 라미엘이 내려다보는 시야 아래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냥' 알 수가 있었다. 물론, 그의 적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지만... 라미엘은 그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반드시... 구해달라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반대쪽도 없는 것 같군, 젠장..."
언제부터 그의 곁에 있었는지 모를, 검은 제복차림의 노인 [속죄]는 흑기사의 등 뒤편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성 밑을 살피던 중,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속죄]는 그들과의 싸움은 이미 질리도록 겪었지만, 총으로 겨누어 방아쇠를 당길 기회조차 잡지 못할 만큼 검은 후드를 쓴 그자는 상당히 용의주도했다.
"의도는 짐작이 가지만..."
라미엘의 중얼거림에 [속죄]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람을 전면에 내세우기를 즐기는 자들이야. 보나 마나 이건 시간끌기겠지."
"...우리의 시선을 잡는 사이, 위치린 공주가 드레마의 여왕에게 손을 댄다, 일 것이다..."
라미엘의 말에 [속죄]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자의 의도를 알면서도 여기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라미엘의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속죄]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드레마의 여왕을 따라가지 않을 건가?"
"그녀 주변에는 이미 그녀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내가 가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렇겠지..."
[속죄]는 라미엘의 저 자신만만한 믿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런거나 태평하게 물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기에 그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술래잡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숨바꼭질이냐?"
라미엘은 그자가 어디선가 훔쳐보고 있을 것을 알기에 허공에 대고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성 아래 마을들까지는커녕, 거센 바람 탓에 코앞에서도 제대로 들릴 리 없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들에게서 눈을 피해 숨어서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을 그자에게는 충분히 들렸을 것이다.
"아아... 주인님들께서 절대 너희와 맞붙지 말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셔서 말이지..."
당연히, 대답을 해올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그 검은 후드를 쓴 자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추억]을 놔주면 더는 쫓지 않겠다!"
그자의 태평스러운 목소리에 [속죄]는 조급해지는 속마음이 드러날 정도로 크게 [추억]을 놓아줄 것을 제안했다. 그가 그 말을 하는 사이에도 라미엘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곳저곳을 훑어보았지만,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걸면서 위치를 찾고자 노력함에도 그 검은 후드를 쓴 자는 자신을 못 찾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는지, 들킬 위험을 감수하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당당한 답신이 들려왔다.
"거절하겠어, 너 같으면 천 길 낭떠러지에서 간신히 잡고 있는 생명줄을 놓을 거로 생각한 거냐?"
"..."
상대의 전혀 겁먹지도, 위축되지도 않은 채 당연히 거절하는 답에 두 사람은 침묵했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은 말이었기에 그런 거지만, 그런 그들에게 그자의 말은 계속됐다.
"아, 그럼 이건 어때?"
그자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분위기를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 제안 같은 것을 꺼내자, 두 사람은 그자의 속셈을 의심하면서도, 어떻게든 그가 숨어 있을 장소를 추리해내기 위해 침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재미있는 쇼를 열 생각이야, 너희들이야 참가할지 말지는 자유야. 뭐, 참가할 수밖에 없겠지만... 큭큭. "
"..."
라미엘은 그저 침묵한 채, 그의 말을 듣기만 할 뿐이었고, [속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성질을 죽이며 그자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런 그들이 대답하거나 말거나 그는 '쇼'를 여는 행사인처럼 떠들어 낼 뿐이었다.
"지금부터 벌일 쇼에는 세 명의 꼬마 손님들이 참가한 상태지... 그럼 한 명 한 명 소개해 볼까?"
"세 명...?"
[속죄]는 세 명을 언급하는 그자의 말에 짜증스러운 얼굴을 확 구겼다. 표정에 감정이 드러난 그에 비해 라미엘은 묵묵히 그자의 말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우선 한 명은... '현실'의 꼬마아이... 이미 통에 넣어서 물속에 가라앉혀 놓았지. 그 아이가 질식하기 전에 호수 밑바닥을 잘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잔인한..."
[속죄]는 마지막까지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속죄] 본인 역시 수많은 죄를 지었고 그 대부분은 그때 당시에는 전혀 거리끼지 않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죄를 짓는 것을, 타인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고 목숨을 가지고 노는데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저자를 보자,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괴로웠다.
그렇지만, 이미 저질렀던 죄이고... 더 이상 돌이킬 수도, 그들을 다시 살려내서 용서를 구하는 것 같은 건 불가능하기에 그는 '속죄' 할 수 없는 자신을 속죄하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오듯 끝없이 자신을 몰아붙여 왔다. 그래서 [속죄]는 저자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과거의 자신과 겹치는 모습이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그 후드 쓴 자는 여전히 숨어 있는 채로 혼자 흥이 올라 떠들어댈 뿐이었다.
"두 번째는 그래... [속죄], 너와 같은 천사... [추억]이지. 내 수중에 있으니 날 잡는다면 구할 수도 있을 거야."
최초부터 그가 데리고 있던 아이, 두 사람이 처음부터 그자를 쫓던 이유이자, 반드시 구해야 할 불쌍한 아이. [속죄]와 [행복]처럼 날개가 달린 아이. '천사'
저자는... 아니 저자가 속한 모든 자들 중, 몇몇은 그 '천사'를 손에 쥐고서 세계를 마음대로 휘젓고자 하였다. 그들의 목적 같은 것이야 어찌되더라도 라미엘에게는 그다지 관심 없었었다. 그저 '사람만도 못한' 저들을 처단하고 '천사’를 구출할 뿐, 귀찮은 계획이나 과정 따위는 역시 관심 없었었다.
저들이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않았다면 라미엘은 아마 끝까지 누구에게도 손을 빌리지 않았으리라. 저들이 사람들을 방패로, 무기로 내세우지만 않았다면은 라미엘은 그 붉은 머리의 소녀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그 소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그는 망설였다. 그 아이는 비록 '특별'했지만, 눈앞에서 만났음에도 그는 오히려 약한 아이 같은 여리디여린 모습을 보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아이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렇지 라미엘... 자네도 잘 아는 아이야."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머리의 소녀의 우는 얼굴을 지우려 했으나, 이어진 그자의 말에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드레마 왕국의 여왕이지... 아마 내일 달이 뜰 즈음에는 아마 불 속에서 뛰놀고 있을 거야."
ps. - 위의 내용은 픽션이며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 것은 현실의 정치,종교,지역,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뜻 같은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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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요!!!!!!!!!! 이렇게 빨리 오실줄이야... ㅇㅇ